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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6화

우연의 미학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빗방울이 그리는 궤적

 

충북 제천 산자락의 초가을 밤은 유독 공기가 날카로웠다.

 

숲속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서늘한 기압의 뒤틀림은 자정을 넘기며 차츰 능선 너머로 흩어졌다.

 

백도현과 유진아.

 

15년 전의 차가운 챔버에서 깨어난 그들은 섣부른 습격 대신, 자신들의 존재를 우진의 뇌리에 깊게 각인시키며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그들이 남기고 간 서늘한 잔향을 뒤로하고, 우진은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제천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아버지는 낡은 목조 책상에 앉아 흑연 연필을 쥐고 있었다.

 

더 이상 쫓기지 않는 학자의 단단한 눈빛을 확인했기에, 우진 역시 서울 상도동의 작업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우진이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서울의 하늘은 잿빛 먹구름으로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타고 상도역 2번 출구로 빠져나왔을 때,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미러 큐브의 날씨 예측 알고리즘이 12시 14분에 8.2밀리미터의 강수가 시작될 것이라는 알림을 스마트폰 화면에 띄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정확한 초단위 예보에 맞춰 일제히 똑같은 규격의 우산을 펴 들고, 오차 없는 사각의 동선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늘에는 붉은빛 경보도, 푸른색 궤적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실어 나르는 흙냄새와 함께, 예고되지 않은 소나기가 도로 위로 후드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순식간에 굵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이 짙은 먹색으로 물들고, 사방에서 우산이 없는 행인들의 작은 비명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

 

우진은 입고 있던 얇은 재킷 깃을 세웠다.

 

빗물이 순식간에 어깨를 적셔왔다.

 

처음에는 처마 밑으로 몸을 숨기려 했으나, 빗줄기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져 옷자락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골목 모퉁이 너머로 은은한 주황색 불빛을 내뿜는 낡은 목재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모퉁이 서재]

 

빛바랜 차양 아래로 김이 서린 통유리창이 보였고, 유리창 너머로는 책들이 빽빽하게 꽂힌 작은 북카페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계획된 행선지가 아니었다.

 

상도동 작업실로 직행하려던 당초의 경로에는 존재하지 않던, 오직 갑작스러운 비 때문에 마주한 공간이었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카페의 목재 문을 밀었다.

 

딸랑.

 

맑은 황동 종소리가 울리며, 비 냄새와 섞인 짙은 원두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온몸을 감쌌다.

 

2. 계획되지 않은 공간

 

카페 안은 바깥의 소란스러운 빗소리와 대비되어 놀라울 정도로 아늑하고 고요했다.

 

테이블이 고작 대여섯 개 남짓한 아담한 공간이었다.

 

벽면 전체를 채운 원목 책장에는 손때 묻은 중고 서적들이 장르의 구분 없이 자유롭게 꽂혀 있었다.

 

출입문 옆 카운터 안쪽에서 단정한 앞치마를 두른 60대 중년의 여성 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흠뻑 젖은 채 들어선 우진을 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마른 수건 한 장을 건넸다.

 

"어머나, 비가 갑자기 쏟아붓네요. 감기 들겠어요, 총각. 우선 머리부터 닦아요."

 

"감사합니다."

 

우진은 수건을 받아 조심스럽게 머리와 어깨의 물기를 닦아냈다.

 

수건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섬유유연제의 포근한 향이 났다.

 

"따뜻한 핸드드립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오늘 같은 날씨엔 예가체프가 제격인데."

 

"네,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주문을 마친 우진은 구석 창가 자리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의자는 참나무로 짜인 묵직한 구조였는데, 얼마 전 자신이 작업실에서 깎아내던 원목 의자의 촉감과 매우 닮아 있었다.

 

창밖으로는 굵은 빗줄기가 사선으로 내리꽂히며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진은 창가에 맺혀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때 그의 망막 위에는 모든 것이 수식으로 계산되어 맺혔었다.

 

타인의 머리 위에 떠오르던 네모와 세모, 꼭두각시 줄선, 그리고 0.3초 뒤의 미래를 예측하던 푸른빛의 궤적.

 

모든 것이 오차 없이 정밀하게 짜여 있던 시절, 세상은 거대한 유리 감옥과 같았다.

 

우연은 존재하지 않았고, 돌발적인 사건은 즉각 시스템의 보정 알고리즘에 의해 강제로 덮어쓰기 당했다.

 

하지만 지금 창밖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서류 가방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처마 밑으로 뛰어드는 샐러리맨, 비를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웅덩이를 뛰어넘는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

 

누구의 머리 위에도 기하학적 도형은 없었다.

 

관자놀이를 찌르듯 옥죄던 편두통도, 시신경을 압박하던 백색 암전의 공포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그저 쏟아지는 소나기와, 그 소나기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순수한 생명력만이 약동하고 있었다.

 

탁.

 

도자기 잔이 나무 테이블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를 깨웠다.

 

"천천히 들어요. 갓 볶아서 내린 거라 향이 깊을 거예요."

 

사장이 건넨 커피잔에서 새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우진은 두 손으로 따뜻한 잔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을 통해 온기가 퍼져나가며 차갑게 식어 있던 체온을 서서히 덥혀주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자, 과일 향이 감도는 산미와 묵직한 고소함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돌았다.

 

계산된 최적화 영양 음료나 시간에 쫓겨 마시던 사내 자판기 믹스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불완전하고도 깊은 맛이었다.

 

3. 젖은 자들의 식탁

 

그때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이고, 비가 아주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쏟아지네!"

 

등산복 차림의 칠순 노인 한 명이 배낭을 털며 들어섰다.

 

그의 뒤를 이어 기타 케이스를 멘 20대 초반의 앳된 청년과, 무거운 전공 서적을 가슴에 품은 여대생이 연달아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소나기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작은 카페는 순식간에 비를 피해 들어온 피난민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사장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쟁반 위에 마른 수건들을 듬뿍 담아 손님들에게 건넸다.

 

"다들 이리 앉으세요. 보일러 온도를 조금 올릴 테니까 젖은 옷부터 좀 말려요."

 

노인은 우진의 맞은편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도봉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버스 정류장까지 백 미터도 안 남겨두고 이 사달이 났지 뭡니까."

 

기타를 멘 청년이 머리를 털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도 홍대 연습실 가려다가 악기가 젖을까 봐 무작정 뛰어 들어왔어요. 오늘 합주 연습은 완전히 글렀네요."

 

여대생 역시 책 모서리가 물에 젖은 것을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요. 도서관 가던 길이었는데, 일기예보에는 비 올 확률이 10%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들의 말속에는 투정이 섞여 있었지만, 얼굴에는 묘한 활기와 안도가 번져 있었다.

 

미러 큐브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풍경이었다.

 

시스템의 최적화 스케줄이 1초라도 어긋나면 사람들은 신경질을 부리거나 인과율 결손의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를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예상치 못한 소나기라는 우연 앞에서 그들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낯선 이들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싹트고 있었다.

 

노인이 배낭에서 주섬주섬 은박지에 싼 물건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노릇노릇하게 쪄낸 찰옥수수 네 자루였다.

 

"이거 산 밑에서 딴 건데, 아직 따뜻해요. 다들 비도 맞았는데 배라도 채웁시다."

 

노인은 옥수수를 툭툭 부러뜨려 청년과 여대생, 그리고 창가에 홀로 앉아 있던 우진에게까지 내밀었다.

 

"젊은이도 이리 와서 하나 들어요. 빗속을 뚫고 같은 처마 밑에 모였으면 그게 인연이지."

 

우진은 잠시 옥수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옥수수는 소박하지만 따스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는 무슨. 비 오는 날엔 나눠 먹는 게 제맛이지."

 

청년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기타 케이스를 열었다.

 

"그럼 저도 보답으로 노래 한 곡 불러드려도 될까요? 연습실은 못 갔지만, 손가락이라도 풀고 싶어서요."

 

사장이 카운터 너머에서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어머, 너무 좋지! 우리 가게 오늘 호강하네."

 

청년은 조율을 마친 통기타를 무릎 위에 올렸다.

 

투박하지만 경쾌한 아르페지오 선율이 잔잔하게 카페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통유리창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가 자연스러운 타악기 리듬이 되어 기타 선율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여대생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리듬에 맞춰 발끝을 까딱였고, 노인은 옥수수를 베어 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진은 그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속에 담았다.

 

이 모든 것은 사전에 기획된 공연도, 통제된 알고리즘의 매칭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제멋대로 쏟아진 빗방울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걷던 낯선 인간들이 우연히 한 공간에 발을 들이며 만들어낸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4. 수식 없는 대화

 

청년의 노래가 끝나자 카페 안에는 작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노인은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노래 참 좋네! 젊은 친구 손끝이 아주 야무져."

 

청년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기타를 품에 안았다.

 

"감사합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취업 준비를 하느라 기타를 거의 놓았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스마트폰에 있던 그 이상한 플래너 앱이 싹 먹통이 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인생의 다음 장을 남이 써줄 필요가 없는데, 왜 내가 좋아하는 걸 포기하고 있었을까 하고요."

 

여대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했다.

 

"맞아요. 저도 그 앱이 추천해 준 스펙 쌓기에만 매달렸었거든요. 토익 점수 몇 점, 인턴 몇 개월…… 그렇게 안 살면 세상에서 낙오되는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그게 다 사라지고 나니까, 처음 며칠은 정말 죽을 것처럼 불안했는데요. 오늘 이렇게 도서관 가다가 비를 맞고 옥수수를 얻어먹는 순간에 깨달았어요. 인생은 꼭 시험지 정답 맞추듯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요."

 

그녀의 말에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암, 그렇고말고. 우리네 인생이란 게 원래 지도를 보고 걷는 게 아니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 기가 막힌 약수터를 발견하기도 하는 법이지. 젊은이들이 벌써부터 정해진 길로만 가려고 하면 늙은 나보다 재미없게 사는 꼴이지 않겠나?"

 

노인의 시선이 문득 우진에게로 향했다.

 

"거기 창가에 앉은 젊은이는 무슨 일을 하나? 손을 보니 굳은살이 단단히 박였는데."

 

우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기업 기획팀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던 시절의 매끄러웠던 손에는, 지난 며칠간 상도동 작업실에서 대패와 끌을 잡으며 생긴 굳은살과 잔상처들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진은 옥수수 알을 하나 떼어 입에 넣으며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나무를 깎고 있습니다. 작은 목공소를 차렸거든요."

 

"목수인가? 아주 멋진 직업이네! 요즘 같은 세상에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깎아 만드는 일만큼 정직한 게 어디 있겠어."

 

사장이 커피 리필 주전자를 들고 다가오며 맞장구를 쳤다.

 

"어쩐지 아까 들어오실 때부터 풍기는 분위기가 차분하더라고요. 나무를 만지는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의 나이테 같은 결이 느껴지거든요."

 

우진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Node-1: K-07'이라는 차가운 식별 기호로 불렸고, 사각 격자의 통제선에 묶인 채 타인의 죽음과 파멸을 감시하는 기계적인 단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낯선 사람들은 그를 시스템의 번호가 아닌 '나무를 깎는 정직한 청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떤 편견도, 조작된 궤도의 색상도 없었다.

 

그저 눈앞에 마주 앉은 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호기심과 온기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창밖의 빗소리는 어느덧 차분한 템포로 잦아들고 있었다.

 

지붕을 두드리던 거센 굉음은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바뀌었고, 먹구름 틈새로 아주 희미한 가을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했다.

 

5. 계산되지 않은 경이

 

따뜻한 커피와 옥수수를 비워낼 무렵, 비는 완전히 그쳤다.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맑은 햇살이 카페 바닥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손님들은 하나둘 젖은 옷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옥수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덕분에 힘내서 연습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청년이 배낭을 메며 노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젊은 친구.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되면 사인 한 장 꼭 해줘야 해!"

 

여대생 역시 젖은 책을 가방에 넣으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커피 너무 맛있었어요. 도서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또 들를게요."

 

"언제든 와요. 비 오는 날엔 옥수수 대신 내가 구운 쿠키라도 줄 테니까."

 

우진은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간 사람들은, 비에 젖어 반짝이는 아스팔트 길을 각자의 보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은 더 이상 시스템이 지정한 일직선의 레일 위에 묶여 있지 않았다.

 

웅덩이를 피해 발걸음을 옮기고, 맑아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심호흡을 하는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경이로운 궤적이었다.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갔다.

 

커피값을 치르려 지갑을 꺼내자, 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오늘 커피값은 안 받을게요. 그 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우진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사장이 카페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삐걱거리는 낡은 원목 책꽂이 하나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저 책꽂이가 얼마 전부터 이음새가 헐거워져서 책을 꽂을 때마다 흔들리거든요. 혹시 시간 되시면 저 나사 하나만 제대로 잡아주실 수 있을까요? 아까 목수라고 하셔서요."

 

우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계획에 없던 비, 계획에 없던 카페, 그리고 계획에 없던 작은 부탁.

 

"공구가 없어서 완벽하진 않겠지만, 임시로는 단단하게 고정해 드릴 수 있습니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항상 지니고 다니던 작은 접이식 멀티툴을 꺼냈다.

 

작업실을 정리하며 습관처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물건이었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책꽂이 하부의 이음새를 살폈다.

 

짜맞춤 결합 부위가 습기를 먹어 살짝 벌어져 있었고, 오래된 나사가 헛돌고 있었다.

 

우진은 멀티툴의 일자 드라이버를 꺼내어 나사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얇은 나무 파편 하나를 주워 쐐기처럼 틈새에 박아 넣은 뒤, 나사를 다시 단단하게 조여 넣었다.

 

끼이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사산이 나무를 꽉 물었다.

 

우진이 손으로 흔들어보자, 책꽂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바위에 뿌리를 내린 듯 견고하게 고정되었다.

 

"다 됐습니다."

 

사장이 다가와 책꽂이를 흔들어보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나! 세상에, 손길 한 번에 이렇게 튼튼해지다니. 정말 대단해요!"

 

"나무가 원래 살아있는 거라, 비가 오면 부풀고 마르면 줄어듭니다. 틈을 완전히 막기보다는 이렇게 숨 쉴 틈을 살짝 주면서 고정하는 게 오래갑니다."

 

말을 내뱉던 우진은 문득 자신의 가슴속에 깊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숨 쉴 틈을 주면서 고정한다.'

 

그것은 목공의 기본 원리이자, 그동안 자신이 지켜내고자 했던 인간의 삶 그 자체였다.

 

완벽한 사각의 규격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간을 가두려 했던 네모 프로젝트는 결국 그 팽팽한 장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파열되었다.

 

반면, 실패와 우연, 그리고 예상치 못한 비바람을 받아들이며 틈새를 내어주는 삶은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가 지닌 유연함이자 회복력이었다.

 

6. 문 앞에 남겨진 그림자

 

사장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카페를 나선 우진은 상도동 언덕길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비가 갠 후의 가을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맑았다.

 

골목길에는 빗물에 씻겨 내려간 흙과 풀의 비릿하면서도 싱그러운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복덕방 앞 평상에는 동네 노인들이 다시 모여앉아 젖은 고추를 말리기 위해 신문지를 펴고 있었고, 철물점 앞에서는 주인이 물걸레로 젖은 바닥을 훔치고 있었다.

 

그 평화롭고 나른한 풍경을 지나 우진은 상도동 147번지, 자신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단단한 방범 유리로 새로 갈아 끼운 창문 너머로, 자신이 대패질해 두었던 원목 가구들의 실루엣이 평온하게 비쳐 보였다.

 

하지만 우진은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을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업실 문 앞 시멘트 계단 바닥.

 

비에 젖어 짙게 젖어 있던 바닥 한가운데, 유독 한 부위만 비정상적으로 물기가 말라붙어 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것은 불이나 열기에 의해 마른 것이 아니었다.

 

국소적인 공간의 압력이 극단적으로 응축되었다가 튕겨 나가며, 수분 입자 자체를 분자 단위로 밀어내어 증발시킨 흔적이었다.

 

어젯밤 제천의 숲속에서, 그리고 그제 밤 상도동 창가에서 감지되었던 바로 그 파동.

 

1세대 피실험체 백도현의 '국소 인과율 압축 충격파'의 잔류 흔적이었다.

 

우진의 시선이 메마른 바닥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곳에는 빗물에 젖지 않은 낡은 종이쪽지 하나가 쇳조각에 눌린 채 놓여 있었다.

 

종이쪽지를 누르고 있는 쇳조각은 평범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15년 전, 옛 연구소 지하 7층 동면 챔버의 배관을 밀봉하던 특수 티타늄 합금 밸브의 파편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티타늄 파편을 집어 들었다.

 

손끝을 통해 15년간 얼어붙어 있던 깊은 지하의 한기와 지독한 증오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우진은 파편 밑에 깔려 있던 종이를 펼쳤다.

 

거칠고 날카로운 필체로 적힌 글귀가 우진의 눈동자에 박혀 들었다.

 

[K-07 강우진.

 

네가 누리고 있는 그 한가로운 햇살과 자유가, 우리 일곱 명이 15년 동안 차가운 얼음탕 속에서 피를 토하며 갈아 넣은 대가라는 것을 잊었는가.

 

네 아비 강정호가 우리에게 주입했던 그 지옥을 똑같이 돌려주마.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곧 보게 될 것이다.

 

도망칠 생각은 마라.

 

너의 궤도는 이미 우리의 과녁 안에 들어와 있다.]

 

글귀의 마지막에는 삐뚤빼뚤하게 일그러진 기괴한 삼각형 문양이 피처럼 붉은 잉크로 짓이겨져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검은 세모도, 자유의지의 백색 세모도 아니었다.

 

15년간 억압당한 자들이 토해내는 순수한 복수와 파괴의 낙인이었다.

 

우진은 종이를 구겨 쥐지 않고, 조심스럽게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바람이 불어와 젖은 작업실 처마 끝에서 맑은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렸다.

 

툭.

 

우진의 구둣등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피할 수 없는 과거의 유령이 마침내 현실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러나 우진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공기는 서늘하고 단단했다.

 

계획되지 않은 비를 피하며 배웠던 우연의 미학, 그리고 낯선 이들이 나누어주었던 소박한 온기가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단단한 심지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아."

 

우진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딸깍.

 

열린 문 너머로 그윽한 편백나무와 참나무 향이 마중을 나왔다.

 

그것은 그가 지켜내야 할,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진짜 인간의 세계였다.

 

우진은 주저 없이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닫히는 문틈 사이로, 맑게 갠 가을 햇살이 계단 위의 서늘한 흔적을 천천히 지워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