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과의 저녁
1. 작업실의 어스름
대팻날이 참나무 표면을 얇게 밀어내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곱게 말려 올라간 나뭇밥이 바닥으로 소복이 떨어졌다.
강우진은 대패를 내려놓고 거친 손바닥으로 결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지는 나무의 질감은 서늘하면서도 은은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기계처럼 일정한 규격으로 찍혀 나온 공산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불규칙한 결과 옹이였다.
어디로 뻗을지 스스로 결정하며 수십 년을 자라온 생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손끝에 닿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평온이었다.
망막을 찌르듯 번쩍이던 백색의 네모도, 삶의 궤적이 꺾여 나감을 경고하던 붉은 세모도 없었다.
머리칼을 스치는 저녁 바람 속에는 그 어떤 꼭두각시 줄선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저 해가 서쪽 인왕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주황빛 노을을 골목길에 길게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작업실 구석 서랍장 안쪽에 밀어 넣어둔 알루미늄 케이스가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15년 전 특수 시설 1세대 피실험체 폐기 및 격리 보고서].
오르비스 코어가 무너지며 15년 동안 갇혀 있던 일곱 명의 결손체가 풀려났다는 그 서늘한 진실.
하지만 우진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잡념을 털어냈다.
지레 겁먹고 도망치거나 다가오지도 않은 내일의 불안에 현재를 저당 잡히는 것은, 과거 사각 격자망에 갇혀 살던 시절의 방식이었다.
드르륵.
작업실 미닫이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문가에 선 여자가 한 손에 갈색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깃을 살짝 세운 한서연이었다.
"아직도 일하고 계셨어요?"
서연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우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 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 특유의 날 선 긴장감 대신, 홀가분한 피로와 맑은 생기가 그녀의 얼굴에 번져 있었다.
"손이 심심해서요. 의자 다리 수평 맞추던 중이었습니다."
우진이 면장갑을 벗어 작업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서연은 작업실 한가운데 놓인 완성된 원목 의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 말했던 그 의자네요? 생각보다 훨씬 근사한데요."
"한번 앉아봐요. 첫 손님이니까 평가가 중요합니다."
서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엉덩이를 걸쳤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탄탄한 참나무가 몸의 굴곡을 안정적으로 받쳐주었다.
"어때요? 흔들리진 않습니까?"
"전혀요. 되게 단단하고 편해요. 뭐랄까, 억지로 자세를 고치라고 강요하지 않는데 몸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서연이 감탄사를 뱉으며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보답으로 제가 저녁 사려고 왔어요. 오늘 저 축하받을 일 있거든요."
"축하받을 일이요?"
"네. 회사 데스크에서 방금 공식 통보받았어요. 이번 넥스트 큐브 게이트 단독 특종이랑 국가 전산망 비리 폭로 건으로, 올해의 한국기자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대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자부심과 함께 그동안 겪었던 험난한 사투의 무게가 잔잔하게 녹아 있었다.
우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한 기자님. 마땅히 받아야 할 상이죠. 당신이 아니었으면 그 진실은 영원히 매몰됐을 테니까요."
"저 혼자 한 거 아니잖아요. 우진 씨랑 채린이, 그리고 강 박사님이 목숨 걸고 지하에서 버텨주지 않았으면 전 그냥 계엄군 총에 맞아 죽은 이름 없는 기자가 됐을 거예요."
서연이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제대로 쏩니다. 이 근처에 아주 오래된 삼겹살집이 하나 있더라고요. 솥뚜껑에 구워주는 곳이던데, 기름 냄새 좀 맡으러 가시죠."
우진은 작업복 겉옷을 벗고 벽에 걸린 재킷을 걸쳤다.
"좋습니다. 사양 안 하고 많이 먹겠습니다."
작업실 조명을 끄고 문을 잠그자, 골목길의 서늘한 가을 공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2. 오래된 식당의 온기
상도동 고갯길을 따라 5분쯤 걸어 내려가자, 붉은 벽돌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낡은 식당이 나타났다.
뿌연 연기 사이로 노릇노릇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환풍기 돌아가는 둔탁한 소리와 손님들의 두서없는 대화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메웠다.
"어디 앉을까요? 저기 구석 자리 괜찮네요."
서연이 먼저 안쪽 드럼통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 뚜껑을 열고 코트를 집어넣었다.
우진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인아주머니가 기름때 묻은 차림표를 보지도 않고 다가왔다.
"삼겹살 둘에 소주 한 병 드릴까?"
"네, 이모님. 버섯도 좀 많이 주세요."
서연이 익숙하게 주문을 넣더니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쇠 솥뚜껑 위에 두툼한 생삼겹살 세 덩이와 묵은지가 얹어졌다.
돼지기름이 경사진 솥뚜껑을 타고 흘러내리며 김치를 바삭하게 익히기 시작했다.
치익거리는 경쾌한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녹색 소주병을 든 서연이 우진의 잔을 채웠다.
맑은 액체가 투명한 유리잔에 차오르며 찰랑거렸다.
"자, 잔 들어요. 우진 씨 목공소 개업이랑 제 기자상 수상을 동시에 축하하면서."
"축하합니다."
탁.
맑은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켜자 식도를 타고 알싸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우진은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쌈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고소한 육즙과 구운 김치의 칼칼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네요. 고기도 좋고."
"그렇죠? 제가 취재 다니면서 이런 노포 찾는 데는 도가 텄거든요."
서연이 마늘을 솥뚜껑 위에 쏟아부으며 웃었다.
식당 안을 둘러보던 서연의 시선이 문가 쪽 테이블에 머물렀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중년 직장인 셋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야, 김 차장. 너 이번에 주식 빠진 거 어떡할 거냐? 미러 큐브 추천만 믿고 몰빵했다가 반토막 났다며."
"말도 마라. 그 망할 놈의 어플이 내 인생을 망쳤어. 근데 이상하게 속은 편하다. 내가 병신 같아서 꼴아박은 거니까 누굴 원망하겠냐. 다시 벌어야지."
"그래, 인마. 마셔라. 인생 원래 한 치 앞도 모르는 거야!"
호탕하게 웃으며 소주를 들이켜는 직장인들의 모습에는 허탈함과 함께 묘한 홀가분함이 섞여 있었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알고리즘이 지정해 준 최적의 동선에 따라 기계처럼 걷고, 실패를 두려워해 벌벌 떨던 사람들이었다.
서연이 턱을 괴고 그들을 바라보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참 신기해요. 며칠 전만 해도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내 안전한 네모를 돌려달라'면서 울부짖었잖아요. 계엄군 장갑차를 향해 환호하던 그 공포에 질린 얼굴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한 일이 옳았던 걸까 정말 무서웠거든요."
우진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참상은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선택권을 빼앗긴 채 가축처럼 사육되던 안락함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분노하던 군중들.
자유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퇴행하던 인간 군상의 비명.
"사람은 생각보다 적응이 빨라요."
우진이 조용히 말했다.
"불확실성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본능이지만, 그 빈칸을 자신의 발걸음으로 채워나가는 것도 결국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맞아요. 처음엔 혼란스러워하더니, 이제는 스스로 길을 찾기 시작했어요. 오늘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안내 방송이 고장 났는데,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면서 질서정연하게 내리더라고요. 알고리즘의 보정이 사라져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서연의 눈동자가 불판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소주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우진 씨는 어때요? 진짜로 머리 아픈 건 완전히 사라진 거예요?"
3. 흉터가 남긴 침묵
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관자놀이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4센티미터가량의 거칠고 단단한 수술 흉터가 만져졌다.
15년 전 아버지가 메스를 대어 신경 궤도를 끊어냈던 자리.
그 흉터는 여전히 피부 위에 선명하게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늘 머릿속을 쪼개듯 쑤셔오던 살인적인 편두통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도형을 깊게 들여다보려 할 때마다 눈앞을 찌르던 안압의 폭증도, 미래의 동선이 푸른 잔상으로 겹쳐 보이던 기괴한 시각 왜곡도 없었다.
"깨끗합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우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릿속이 맑아요. 역삼역 사거리에서 수천 명의 직장인이 쏟아져 나와도, 이제는 그냥 각자의 표정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로 보입니다. 머리 위에 사각형도, 삼각형도 없어요. 하늘을 올려다봐도 구름 사이로 뻗어 내려오던 칠흑 같은 꼭두각시 줄선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이에요. 정말로."
서연이 진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로 뻗어 나와 우진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였다.
"그동안 얼마나 무거웠을지, 저는 짐작조차 못 해요. 남들의 죽음과 파멸이 눈앞에 미리 보이고, 그걸 막으려고 몸을 던질 때마다 그 인과가 다른 사람에게 튀는 걸 지켜봐야 했잖아요. 그 끔찍한 연쇄를 혼자 짊어지고 섰던 거잖아요."
"혼자가 아니었죠. 서연 씨가 있었고, 채린이가 있었고, 태호와 아버지가 있었으니까요."
우진이 잔을 들어 가볍게 입술을 적셨다.
알코올의 쓴맛 뒤로 달큰한 곡물의 향이 혀끝에 감돌았다.
"가끔은 기괴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보아왔던 그 도형들이 초능력도, 대단한 권능도 아니었다는 사실이요. 그저 망가진 신경계가 세상의 통제 압력을 해석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던 뇌내 노이즈였다는 게."
"하지만 그 결함 덕분에 우리가 시스템을 부술 수 있었잖아요. 완벽하게 길들여진 정상인들은 결코 볼 수 없었던 균열을, 우진 씨의 그 상처가 포착해 낸 거니까요."
서연이 노릇하게 익은 고기 두 점을 우진의 앞접시에 얹어주었다.
"식기 전에 드세요. 상추에 싸서."
우진은 깻잎 위에 고기와 구운 마늘, 쌈장을 얹어 큼직하게 쌈을 쌌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음식의 맛을 꼭꼭 씹어 삼켰다.
미각과 후각, 촉각이 지극히 정상적인 신호로 뇌에 도달하고 있었다.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서연이 가방에서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았다.
우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봉투로 향했다.
"그건 뭡니까?"
"오늘 검찰 특수본에서 브리핑 끝난 뒤에 취재원한테 비공식적으로 건네받은 자료예요. 민경택 전 차장이 차명 계좌로 빼돌리려던 비자금 흐름도랑, 넥스트 큐브 전신 기업들의 초기 연구 일지 복사본 일부요."
서연의 표정이 살짝 진지해졌다.
기자 특유의 예리한 눈빛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우진 씨가 아까 낮에 작업실에서 물어봤잖아요. 15년 전 화재 당시 '격리 결손체'로 분류됐던 피실험자들에 대해서요."
우진의 심장이 미세하게 박동을 높였다.
낮에 자신이 던졌던 조심스러운 질문을 서연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한서연다운 기민함이었다.
4. 지워진 아이들
서연이 서류 봉투의 끈을 풀고 낡은 복사본 몇 장을 꺼냈다.
누렇게 바랜 A4 용지 상단에는 붉은색 활자로 [대외비 / 영구 폐기]라는 직인이 찍혀 있었다.
"이거, 15년 전 테헤란로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화재 사건 직전에 작성된 최종 감사 보고서 부록이에요. 당시 화재 현장에서 거의 전소됐는데, 넥스트 큐브 비밀 문서고를 압수수색하면서 일부 복원된 파일 속에 들어 있었대요."
서연이 문서를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식당 안의 시끌벅적한 소음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주변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우진 씨 아버님인 강정호 박사님이 주도했던 1세대 프로젝트는 사실 실패작이었어요. 우진 씨나 민도현 씨처럼 뇌간에 직접 칩을 심었던 아이들 대부분이 극심한 거부 반응을 보였으니까요. 그중에서도 뇌세포 괴사나 영구 뇌사 판정을 받지 않고, 뇌파가 시스템의 사각 격자를 아예 튕겨내 버린 특이 체질들이 있었대요."
우진은 서랍 속에 넣어둔 알루미늄 케이스 속 문건을 떠올렸다.
'규격 부적합 결손체(Error Reject)'.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은 지난밤 자신이 확인했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그 일곱 명의 아이들은 시스템의 통제 수식을 거부하고 뇌압이 폭증하면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어요. 서지훈과 당시 연구진은 이들을 치료하는 대신, 시스템의 결함이 외부에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지하 7층 독립 차폐벽에 강제 동면 상태로 봉인해 버렸죠. 코어의 양자 연산력으로 뇌파를 인위적으로 정지시켜서 식물인간처럼 묶어둔 거예요."
서연이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데 우진 씨, 며칠 전 우리가 오르비스 코어를 소각하고 비상 레버를 내렸잖아요. 그때 지하 7층의 모든 전력과 생명 유지 장치, 그리고 코어가 걸어두었던 생체 방화벽이 일제히 해제됐어요."
"그들이 깨어났다는 뜻입니까?"
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서연의 입을 통해 다시 확인받자 등줄기로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네. 특수본 현장 감식반이 어제 지하 7층 차폐벽을 절단하고 진입했는데요. 동면 챔버 일곱 개가 전부 안쪽에서 강제로 파괴된 채 비어 있었대요. 그곳에 잠들어 있던 피실험체들이 이미 자력으로 탈출해서 지상으로 사라진 뒤였던 거죠."
서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불판 위의 고기를 뒤집으며 말을 이었다.
"15년 동안 시간 감각조차 없이 얼어붙어 있던 아이들이에요. 육체는 서른 살 가까이 자랐겠지만, 정신은 15년 전 그 끔찍한 생체 실험과 고통의 기억 속에 그대로 멈춰 있을 거라고요.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식당의 훈훈한 열기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우진은 소주잔을 천천히 돌렸다.
그 일곱 명 중 한 명, 혹은 그들을 이끄는 누군가가 어젯밤 자신에게 전직 요원을 통해 그 명단을 보냈을 것이다.
왜 하필 나인가.
K-07이라는 식별 코드를 지닌 채 유일하게 살아남아 일상을 누리고 있는 배신자로 보였을까.
아니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뇌가 난도질당했던 동류로서 마지막 경고를 보내온 것일까.
우진은 서연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자로서 수많은 비리와 악을 파헤쳐 왔지만, 이 비극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서연 씨."
우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선 제가 알아볼게요. 서연 씨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해냈습니다. 기소도 끝났고, 기자상도 받았잖아요.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됩니다."
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진 씨야말로요. 이제 막 사표 내고 목공소 차려놓고서, 또 혼자 짊어지려고요?"
"혼자 짊어지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나와 같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상처들이니까요. 내가 마주해야 할 몫이 있다면 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서연은 잠시 우진을 응시하더니,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어림없는 소리 마세요. 나 한서연이에요. 진실을 파헤치다 말고 중간에 도망치는 기자는 자격 박탈이에요. 게다가… 우진 씨 혼자 위험하게 내버려 둘 생각 전혀 없거든요."
단호하지만 깊은 애정이 깃든 눈빛이었다.
우진은 더 이상 그녀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것이 한서연이라는 인간의 본질이자 자유의지였기 때문이다.
5. 텅 빈 잔과 새로운 계절
두 사람은 남은 고기를 마저 비우고 솥뚜껑 위에 밥을 볶았다.
김 가루와 참기름이 어우러져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소주 두 병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식당 안의 손님들도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밤 10시가 넘어가자 골목길의 인적도 드문드문해졌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의 밤공기가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뺨을 서늘하게 식혀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상도동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가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바스락거리며 굴러갔다.
"배부르네요. 오랜만에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서연이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저도요. 밥다운 밥을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진 씨, 아버님은 어떠세요? 다음 주에 진짜 퇴원하시는 거예요?"
"네. 화요일에 실밥 뽑고 퇴원 수속 밟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아주 신이 나셨어요. 퇴원하시면 상도동 집 2층에서 당분간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15년 만에 세 식구가 한 지붕 아래 모이는 거잖아요."
"그렇죠. 평생 안 올 줄 알았던 날인데, 오긴 오네요."
우진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담담한 안도감을 서연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언덕길 중턱의 작은 쉼터 벤치 앞에 멈춰 섰다.
상도동 고지대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한강 너머로 반짝이는 도심의 불빛들.
과거에는 저 빌딩 숲 위로 수만 가닥의 사각 격자망이 레이저처럼 얽혀 있었고,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의 머리 위마다 붉고 검은 도형들이 위태롭게 명멸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밤은 그저 아름다운 무질서 그 자체였다.
불규칙하게 켜지고 꺼지는 창문들, 제각각의 속도로 흘러가는 자동차의 붉은 미등들.
그 어떤 거대한 슈퍼컴퓨터도 통제하지 않는, 5천만 개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내는 거대하고 따뜻한 혼돈이었다.
서연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도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불빛들 속에 사는 사람들, 이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누군가는 내일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한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죠. 우진 씨가 만든 의자가 내일 어떤 손님에게 팔릴지도 모르고, 제가 쓴 다음 기사가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도 알 수 없어요."
서연이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맑게 호를 그렸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지극히 부드럽고도 찬연했다.
"이제 우리 둘 다 내일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사는 거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결에 실려 나직하게 귓가에 닿았다.
불안을 고백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진짜 내일'을 맞이하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미소였다.
우진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채로."
"무섭지 않아요?"
"조금은요. 하지만 기분 좋은 두려움입니다. 적어도 그 내일은 남이 써준 대본이 아니라, 내가 직접 걸어가서 부딪혀야 하는 길이니까요."
서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빠져나갔다.
아무런 저항도, 아무런 척력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허공이었다.
"그 1세대 아이들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꾸미고 있든… 우리는 지켜낼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되찾은 이 불확실하고 서투른 세상을요."
"네. 지켜낼 겁니다."
우진이 힘주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한동안 말없이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각본이 지워진 텅 빈 도화지 위에, 각자의 색깔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6. 어둠 속에서 날아든 균열
서연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우진은 홀로 골목길을 걸어 작업실로 돌아왔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주택가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 은은한 나무 향이 다시금 코끝을 감쌌다.
우진은 외투를 벗어 걸어두고, 구석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철컥.
자물쇠를 열고 알루미늄 케이스를 꺼냈다.
서연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맴돌았다.
'동면 챔버 일곱 개가 전부 안쪽에서 강제로 파괴된 채 비어 있었대요.'
케이스 뚜껑을 열자 차가운 금속 내벽 사이로 [1세대 피실험체 폐기 및 격리 보고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은 첫 장에 적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손끝으로 짚어 내려갔다.
[Subject-01 : 백도현 / 변이 특성: 인과율 압축 및 국소 충격파]
[Subject-03 : 유진아 / 변이 특성: 생체 신경망 전자기 유도 및 감각 교란]
[Subject-09 : 송태석 / 변이 특성: 물리적 궤도 강제 왜곡]
그들은 오르비스 코어의 소각과 함께 15년 만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 서류를 보냈다.
대체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
탁.
그 순간, 작업실 창문 유리창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작은 돌멩이나 금속 조각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우진의 전신 신경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이능은 사라졌지만,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단련된 육체적 감각과 직관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우진은 숨을 죽인 채 불을 끄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낮췄다.
달빛만이 작업실 바닥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창가로 은밀하게 다가가 블라인드 틈새로 골목길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건너편 낡은 담벼락 그늘 속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검은색 후드 티셔츠를 깊게 눌러쓴 마른 체형의 인물.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가늠하기 힘든 기괴한 실루엣이었다.
그 인물은 고개를 들어 우진의 작업실 2층과 1층 창문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드 그늘에 가려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선만은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형형했다.
우진이 문을 박차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그림자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는 작고 붉은 레이저 포인터 같은 불빛이 맺혀 있었다.
치익.
창문 유리에 붉은 광선이 닿는 순간, 두꺼운 강화유리 표면에 순식간에 하얀 균열이 방사형으로 쩍쩍 갈라졌다.
열기도, 소음도 없는 기괴한 압축 충격파였다.
유리창 중앙에 선명하게 새겨진 기하학적 형태.
그것은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아니었다.
세 도형이 기괴하게 뒤틀려 겹쳐진 채 갈가리 찢겨 나간 듯한, 일그러진 파열의 문양이었다.
우진이 반사적으로 몸을 피함과 동시에, 그림자는 골목길 모퉁이 너머로 신기루처럼 스며들듯 사라졌다.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우진은 천천히 일어나 금이 간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산산조각 나기 직전의 유리창 표면에, 검게 그을린 글씨가 날카롭게 새겨져 있었다.
[K-07.
혼자만 자유를 누리는 대가는 잔혹할 것이다.]
금속성 타는 냄새가 깨진 틈새로 흘러들어왔다.
우진의 턱관절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
그 자유의 한편에서,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과거의 망령들이 마침내 칼날을 겨누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진은 깨진 유리 파편을 손에 쥐며 어둠에 잠긴 골목길 끝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