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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2화

골목길의 작은 작업실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낯선 밤의 잔열

 

가로등 불빛이 주황빛 포말처럼 바닥에 부서져 내렸다.

 

골목 어귀를 가로지르던 차가운 밤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강우진의 감각은 그 서늘함보다 훨씬 더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손바닥에 닿은 알루미늄 케이스의 표면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방금 전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검은 세단의 붉은 후미등 잔상이 망막에 희미하게 번졌다 흩어졌다.

 

'1세대 피실험자 제외 명단.'

 

그 여섯 글자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 뒤에도, 우진은 한참 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시야의 위쪽을 짓누르듯 맴돌던 기하학적 도형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며 일상의 안식을 가장하던 백색 네모도, 파멸의 징조를 알리며 붉게 번뜩이던 세모도, 시스템의 격자를 밀어내던 은빛 동그라미도 없었다.

 

하늘은 그저 깊고 검푸른 어둠에 젖어 있을 뿐이었다.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묵직한 살갗의 감촉만을 전해올 뿐, 그 지독하던 편두통도, 시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인과율의 공감각적 왜곡도 느껴지지 않았다.

 

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시스템이 무너져 내린 자리, 그 거대한 폐허 아래 묻혀 있던 과거의 망령들은 사라지지 않고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우진은 알루미늄 케이스를 코트 안쪽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단단한 금속 모서리가 갈비뼈를 둔탁하게 찔렀다.

 

지금 당장 이것을 열어젖히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채우며 요동치던 심장을 서서히 억눌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전장이 아니었다.

 

오랜 싸움 끝에 겨우 딛고 선 이 불확실한 삶의 지반, 그곳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발걸음을 옮겼다.

 

적막한 상도동 언덕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는 자신의 발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혀 잔잔하게 울렸다.

 

규격화된 알고리즘의 보폭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근육과 무게로 딛는 걸음이었다.

 

2. 상도동 147번지

 

비탈길을 돌아 오르자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붉은 벽돌이 엉성하게 얽힌 2층 단독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당 한편에 자리 잡은 감나무 가지가 늦가을 밤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1층 정면에 달린 철제 셔터에는 오랫동안 기름을 칠하지 않아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상도동 참기름·들기름.'

 

빛바랜 아크릴 간판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씨를 바라보며 우진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오래된 황동 열쇠가 자물쇠 안쪽의 핀을 튕겨내며 둔탁한 금속음을 냈다.

 

끼이익.

 

셔터를 반쯤 들어 올리자 묵은 먼지와 밴 기름내, 그리고 눅눅한 시멘트 냄새가 훅 끼쳐왔다.

 

손을 더듬어 벽면의 낡은 스위치를 올렸다.

 

치익거리는 백열전구의 미세한 방전음과 함께 주황빛 전등이 깜빡이다가 실내를 흐릿하게 비추었다.

 

바닥에는 기름틀을 뜯어낸 자리에 깊게 파인 사각 홈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벽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먼지가 얼룩져 있었고, 천장 배관 주변으로는 거미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였고,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었다.

 

대기업 사옥 14층의 정갈한 파티션,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직각으로 배열되어 있던 모니터와 책상들과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우진은 코트를 벗어 구석의 낡은 의자에 걸쳐 두었다.

 

품 안에서 꺼낸 알루미늄 케이스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목재 선반 위에 얹혔다.

 

시선이 잠시 케이스의 잠금장치에 머물렀지만, 우진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작업용 면장갑을 끼고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빗자루 끝이 거친 시멘트 바닥을 쓸어내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바닥에 엉겨 붙은 검붉은 찌꺼기와 흙먼지를 긁어모으는 동안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단순한 육체노동이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개의 변수를 시뮬레이션하거나 타인의 궤적을 억지로 예측할 필요가 없는, 팔을 움직인 만큼만 깨끗해지는 정직한 물리적 반응이었다.

 

먼지를 쓸어 담아 마당 구석의 쓰레기봉투에 담고, 낡은 호스를 연결해 바닥에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솔을 쥐고 엎드려 바닥의 기름때를 박박 문질렀다.

 

어깨 근육이 뻐근하게 조여오고 허리에 둔탁한 피로가 쌓여갔지만, 가슴속을 짓누르던 불쾌한 긴장감은 물줄기에 씻겨 나가는 오물처럼 서서히 옅어졌다.

 

동이 터 올 무렵, 바닥은 젖은 채로 매끄러운 회색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진은 젖은 걸레를 빨아 널고 마당으로 나왔다.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한 잿빛에서 엷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우유 배달부의 덜컹거리는 자전거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집 대문이 열리고, 골목길을 쓰는 빗자루 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쳤다.

 

통제 격자가 사라진 세상의 아침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란스러웠다.

 

우진은 찬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물기가 닿은 피부가 서늘하게 당겨왔다.

 

'여기가 내 자리다.'

 

상처를 덮고 숨어드는 도피처가 아니라, 맨몸으로 현실과 부딪혀 나갈 시작점이었다.

 

3. 결을 만지다

 

오전 열 시가 넘어가자 주문해 두었던 목재들이 실린 1톤 트럭이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

 

거친 밧줄로 단단히 묶인 참나무와 물푸레나무 원목들이 짐칸에 가득 실려 있었다.

 

기사와 함께 원목을 날라 작업실 안쪽으로 옮겨 놓자, 눅눅하던 실내에 은은하고 쌉싸름한 생나무 냄새가 번져 나갔다.

 

우진은 트럭 기사에게 음료수 캔을 건네고 작업대 앞에 섰다.

 

벽면 공구 걸이에 대패와 끌, 쇠톱과 줄자가 가지런히 정렬되었다.

 

아버지의 유품이자, 지난 세월 시스템의 궤도를 연구했던 강정호의 수첩은 작업대 한구석의 서랍 안에 조용히 모셔져 있었다.

 

우진은 길이 2미터 남짓의 참나무 판재 하나를 작업대 위에 올렸다.

 

표면은 거칠었고, 제재소 톱날이 지나간 자리에 깊은 요철이 패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자연스럽게 굽은 곡선과 나무의 옹이가 둥글게 박혀 있었다.

 

기계로 찍어낸 완벽한 직사각형 규격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덩어리였다.

 

우진은 손바닥을 펴 판재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나무의 결은 제각각이었다.

 

곧게 뻗어나가다 옹이 주변에서 둥글게 휘어지고, 어떤 부분은 햇볕을 덜 받아 결이 촘촘하고 단단했다.

 

'모든 나무는 저마다 자란 방향대로 굽는다.'

 

과거 서지훈이 추구했던 유토피아는 모든 인간을 완벽하게 재단된 사각 블록으로 깎아내는 것이었다.

 

튀어나온 옹이는 잘라내고, 휘어진 결은 유압 프레스로 짓눌러 똑바른 직선으로 교정하는 세계.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우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서지지 않으려 버티다 결국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파열과 자멸뿐이었다.

 

우진은 대패의 날을 미세하게 조정했다.

 

날끝이 참나무 표면에 닿는 각도를 맞추고, 어깨에 무게를 실어 천천히 대패를 밀었다.

 

스사삭.

 

맑고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대팻밥이 얇은 종이처럼 도르르 말려 올라왔다.

 

코끝으로 신선한 나무 진액 냄새가 훅 끼쳐왔다.

 

한 번, 두 번.

 

대패가 지나간 자리는 거친 각질을 벗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속살을 드러냈다.

 

하지만 우진은 옹이를 억지로 깎아내려 하지 않았다.

 

나무의 성질을 거스르지 않고, 결이 꺾이는 자리는 대패의 각도를 비틀어 완만하게 감싸 쥐듯 다듬었다.

 

규격에 맞추지 않고, 나무 본연의 뒤틀림을 그대로 살려 하나의 탁자로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탁탁, 뚝.

 

끌을 쥐고 장부 맞춤을 위한 홈을 파냈다.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와 나무가 서로의 결을 파고들어 지탱하도록 만드는 결구 구조였다.

 

망치질을 할 때마다 손목으로 전해지는 둔탁한 반동이 살아있음을 일깨웠다.

 

과거에는 허공을 스치는 미세한 잔상과 인과율의 데이터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0.3초의 틈새를 노려 몸을 비틀고, 타인의 머리 위에 뜬 도형의 꼭짓점을 계산하며 뇌세포를 갉아먹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오직 눈앞의 단단한 물질, 손끝에 닿는 나무의 저항과 온기만이 전부였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줄도 모르고 우진은 묵묵히 대패질을 이어갔다.

 

바닥에는 노란 대팻밥이 수북하게 쌓여 폭신한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4. 골목의 온기

 

덜컹.

 

작업실 입구의 반쯤 열린 셔터 틈으로 작은 인기척이 스며들었다.

 

우진이 대패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문간에 털모자를 푹 눌러쓴 칠순의 노파가 양손에 은박지로 싼 쟁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골목길 건너편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복덕방 노인의 사촌이자, 인근에 사는 토박이 할머니였다.

 

"저기…… 총각이 여기 새로 들어온 사람인가?"

 

노파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따뜻했다.

 

우진은 급히 면장갑을 벗고 작업대에서 내려왔다.

 

"네, 어르신. 어제 계약하고 오늘 들어왔습니다."

 

"아침부터 하도 사각사각 소리가 나길래 구경 왔지. 오래 비어 있어서 흉물스러웠는데, 젊은 사람이 들어와서 나무를 만지니까 사람 사는 집 같네."

 

할머니는 들고 온 쟁반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루떡 두 덩이와 작은 보온병이 놓여 있었다.

 

"이삿날 떡도 못 돌렸을 거 아냐. 옆집 할멈이 쪄 준 건데, 혼자 먹기 많아서 좀 가져왔어. 보온병엔 따뜻한 둥굴레차야."

 

우진은 순간 멍하니 노파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습관처럼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였다면 이 노인의 머리 위에도 낡고 바랜 일상의 백색 네모가 위태롭게 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개입이나 음모로 뒤틀린 검은 세모의 징조를 찾으려 눈을 가늘게 뜨고 편두통을 참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것은 희끗희끗한 흰머리와 바람에 흩날리는 털모자의 털실오라기뿐이었다.

 

계산된 호의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매칭 알고리즘이 도파민을 유도해 맺어준 가짜 친절도 아니었다.

 

이웃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우발적인 연결고리가 만들어낸 온기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잘 먹겠습니다."

 

우진은 두 손으로 쟁반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시루떡의 뜨끈한 온기가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부드럽게 녹여내는 것 같았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건너와. 저기 삼거리 슈퍼 알지? 내가 거기 있어."

 

"네, 어르신. 작업 끝나면 그릇 갖다 드리겠습니다."

 

노파가 허리를 두드리며 총총걸음으로 골목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우진은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구원하겠다는 오만함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진짜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우진은 작업대 한쪽에 걸터앉아 김이 나는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지 않고 고소한 팥고물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따뜻한 둥굴레차를 한 모금 마시자, 온몸의 굳어 있던 근육이 나른하게 풀려나갔다.

 

5. 첫 번째 의자

 

오후가 깊어가면서 맑았던 하늘에 옅은 회색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기온이 내려가자 우진은 작업실 구석의 연통 난로에 번개탄을 넣고 장작 조각들을 집어넣었다.

 

타닥, 타다닥.

 

대팻밥이 마른 장작에 옮겨붙으며 경쾌한 소리를 냈고, 붉은 불길이 철판을 덥히며 훈훈한 열기를 뿜어냈다.

 

우진은 깎아낸 각재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오늘 그가 만들기로 한 것은 작업실을 찾아올 사람들을 위한 첫 번째 원목 의자였다.

 

등받이는 완만한 곡선으로 깎아내어 사람의 척추가 편안히 닿도록 했고, 네 개의 다리는 바닥의 수평에 맞춰 대패로 조금씩 깎아내며 균형을 잡았다.

 

수평계를 대지 않아도, 바닥에 의자를 놓고 살짝 흔들어보면 미세한 흔들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삐걱거리는 모서리를 찾아 다시 끌로 0.5밀리미터를 긁어냈다.

 

수없이 반복되는 미세한 보정.

 

그것은 알고리즘의 오차를 수정하는 강제 패치가 아니었다.

 

불완전한 나무와 불완전한 손이 만나 서로의 틈을 맞추어가는 정직한 조율의 과정이었다.

 

마침내 네 다리가 바닥에 틈새 없이 딱 들어맞았다.

 

우진은 사포를 손에 쥐고 의자의 모서리들을 둥글게 문질렀다.

 

거친 80방 사포에서 시작해 고운 400방 사포로 갈아타며 나무의 표면을 매만졌다.

 

손끝에 걸리는 거친 가시가 모두 사라지고, 마치 오래된 도자기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감쌌다.

 

우진은 완성된 의자에 가만히 앉아보았다.

 

단단한 참나무의 질감이 등을 묵직하게 받쳐주었다.

 

화려하지도, 인체공학적 센서가 부착되어 있지도 않은 순수한 나무 의자였다.

 

그때, 작업대 아래 서랍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짧은 진동을 울렸다.

 

우진은 톱밥이 묻은 손을 털고 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한서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

 

- 우진 씨, 저 서연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검찰청 로비의 소란스러운 배경음과 섞여 있었다.

 

- 방금 민경택 차장과 넥스트 큐브 잔여 이사진에 대한 1차 기소 브리핑이 끝났어요.

 

해외 도피 계좌도 거의 다 동결됐대요.

 

"고생 많았어요, 서연 씨."

 

우진은 난로 곁으로 다가가며 잔잔하게 대답했다.

 

- 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아, 그리고 아까 병원에 들렀는데 강정호 박사님 어깨 실밥 풀었대요.

 

회복이 빨라서 다음 주 화요일이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님이 우진 씨 작업실에 가져다줄 밑반찬을 한 짐 싸두셨더라고요.

 

전화기 너머 서연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웃음기가 선명했다.

 

"다행이네요. 어머니한테는 제가 내일 병원으로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 참, 작업실 정리는 잘 돼가요?

 

거기가 상도동 골목 안쪽이라고 했죠?

 

오늘 퇴근길에 잠깐 들러도 돼요?

 

우진은 자신이 방금 완성한 원목 의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의자 하나를 다 만들었어요. 앉아서 차 한잔 마실 자리는 됩니다."

 

- 진짜요?

 

기대하고 갈게요.

 

한 시간 뒤쯤 도착할 것 같아요.

 

통화가 끊어지고 우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가족의 회복, 동료들의 평온, 그리고 스스로 일궈가는 일상.

 

그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6. 서랍 속의 진실

 

우진은 난로 위에 양은 주전자를 올리고 물을 채웠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선반 위에 놓인 알루미늄 케이스로 향했다.

 

주황빛 난롯불이 은색 금속 표면에 길게 일렁였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 작은 작업실에서 평범한 가구를 깎고 이웃과 차를 나누는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어둠 속에 도사린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었다.

 

우진은 성큼 다가가 케이스를 들고 작업대로 가져왔다.

 

탁.

 

양쪽의 걸쇠를 젖히자 차가운 기압이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내부는 검은색 고밀도 충격 흡수재로 채워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두툼한 방수 파일 하나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표지 상단에는 붉은색 스탬프로 찍힌 보안 등급이 선명했다.

 

[CLASS-O : DISCARDED NODES ARCHIVE]

 

그 아래로 타이핑된 문서 제목이 시야에 박혔다.

 

[15년 전 테헤란로 특수 시설 1세대 피실험체 최종 폐기 및 격리 보고서]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첫 장을 넘겼다.

 

누렇게 바랜 서류 위에는 수많은 인체 해부도와 신경 전달 모식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강정호 박사의 친필 필적과 당시 넥스트 큐브 전신 연구진의 결재 서명이 날짜별로 빼곡했다.

 

문서의 내용은 서늘했다.

 

15년 전, 네모 프로젝트가 태동하던 시기.

 

연구진은 인간의 뇌간에 직접 생체 제어 칩을 박아 시스템 격자망과 동기화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강우진(K-07)을 비롯한 극소수의 아이들은 백신 코드가 각성하거나 도주했고, 민도현 같은 아이들은 살상 알고리즘이 주입된 검은 집행관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그들 외에 또 다른 부류가 존재했다.

 

[분류 : 규격 부적합 결손체 (Error Reject)]

 

[사유 : 뇌간 칩 이식 후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수용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인과율 거부 반응 발현.

 

기하학적 도형의 동기화율 0%.

 

뇌세포 괴사율 85% 이상.

 

통제 불가 판정.]

 

그들은 시스템의 부품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우진처럼 시스템을 튕겨내는 백신을 완성한 것도 아니었다.

 

격자망과의 충돌로 인해 신경계가 찢겨 나갔고, 통제 불능의 인과율 이상 파동을 뿜어내어 연구원들을 다치게 하거나 시설을 파괴했던 돌연변이들이었다.

 

[조치 사항 : 오르비스 코어 연산의 항상성을 저해하는 극단적 위험 개체로 판단.

 

강제 화학적 동면 및 지하 7층 차폐 격벽 내 영구 매몰 처분.]

 

우진의 손끝이 떨려왔다.

 

명단에는 일곱 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그들이 보였던 신경 변이 특성이 기록되어 있었다.

 

'Subject-01 : 백도현 (생체 발열 및 전자기 파열)'

'Subject-03 : 유진아 (공간 인과율 굴절 및 감각 교란)'

'Subject-09 : 송태석 (물리적 질량 왜곡)'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오르비스의 연산력을 빌려 강제로 신경망을 얼려둔 채 지하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밤,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에서 오르비스 코어가 완전히 소각되고 양자 서버가 파괴되었다.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그들을 묶어두고 있던 생체 방화벽과 냉각 동면 락(Lock)이 일제히 풀려버린 것이다.

 

문서 말미에 의문의 전직 요원이 휘갈겨 쓴 붉은 볼펜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15년 전의 고통과 분노 속에 멈춰 있다. 오르비스가 꺼진 순간, 봉인 구역의 비상 격벽이 내부에서 찢겨 나갔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쿵.

 

우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거운 충격파가 울렸다.

 

자신이 쟁취해 낸 자유, 시스템을 무너뜨려 사람들에게 돌려준 불확실성의 세상.

 

하지만 그 대가로 15년간 암흑 속에 봉인되어 있던 가장 위험하고 상처 입은 영혼들마저 봉인에서 풀려나고 만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을 부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신들을 가두었던 세상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의 폭주인가.

 

우진은 문서를 덮고 케이스를 닫았다.

 

탁하는 쇳소리가 적막한 작업실 안을 날카롭게 갈랐다.

 

7. 깎여나간 틈새로

 

치이익.

 

난로 위의 양은 주전자가 하얀 김을 뿜어내며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우진은 장갑을 끼고 주전자를 들어 올려 머그잔 두 개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말린 둥굴레 티백이 물속에서 천천히 갈색빛을 풀어내며 구수한 향을 퍼뜨렸다.

 

골목길 밖에서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다.

 

우진은 케이스를 작업대 깊숙한 수납장 안으로 밀어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그리고 작업대 위의 대팻밥을 가볍게 털어냈다.

 

"계세요?"

 

반쯤 열린 셔터 문을 두드리는 맑은 목소리와 함께 한서연이 고개를 숙이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깃을 바짝 세운 그녀의 볼이 늦가을 바람에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목에는 따뜻한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고,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우와…… 나무 냄새 진짜 좋네요."

 

서연은 작업실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닥에 흩어진 노란 대팻밥과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훈훈한 열기, 그리고 벽면에 걸린 투박한 공구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춥죠. 이리 와서 불 좀 쬐어요."

 

우진이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건넸다.

 

서연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따뜻하다. 살 것 같아요. 오늘 검찰청 로비에서 기자들이 어찌나 몰려들었는지,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그녀의 시선이 난로 옆에 놓인 완성된 원목 의자에 닿았다.

 

"어? 이거예요? 아까 통화할 때 다 만들었다던 의자가?"

 

"네. 앉아봐요. 편한지 봐야 하니까."

 

서연은 조심스럽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등을 기댔다.

 

살짝 몸을 뒤채며 균형을 확인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진짜 편해요.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에요. 못을 하나도 안 쓴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흔들리지도 않죠?"

 

"나무의 결대로 홈을 파서 끼워 맞췄으니까요. 서로 다른 결이 맞물리면 쉽게 뒤틀리지 않아요."

 

우진은 난로 앞 작은 통나무 토막에 걸터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서연은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넘기며 우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며칠 전까지 테헤란로 지하를 질주하던 살벌한 긴장감 대신, 흙먼지와 땀방울이 만들어낸 잔잔한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우진 씨, 표정이 정말 좋아졌어요."

 

"그래 보여요?"

 

"네. 예전엔 늘 어딘가를 쫓기듯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눈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그 사람 너머의 무언가를 계산하느라 시선이 날카로웠는데…… 지금은 절 똑바로 봐주고 계시네요."

 

서연의 말에 우진은 씁쓸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까요. 보이지 않아서 두려운 게 아니라, 보이지 않아서 비로소 눈앞의 사람이 온전히 보입니다."

 

"그 말이 맞아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검찰 수사 발표를 들으면서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해해요. 내일 주가가 어떻게 될지, 취업이 될지, 버스가 제시간에 올지 확신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그 불안함 속에서 서로 양보하고, 사과하고, 대화하기 시작했어요.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자리에 진짜 인간의 삶이 채워지고 있는 거죠."

 

서연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우진은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지켜내고 싶어 하는 이 소박한 일상.

 

세상이 겨우 되찾은 이 서투른 자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지하에서 풀려난 과거의 망령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서연 씨."

 

"네?"

 

"혹시 15년 전 연구소 화재 당시, 공식 사망자나 실종자로 처리되지 않고 '기타 결손'으로 분류되었던 아이들에 대한 취재 기록이 있습니까?"

 

우진의 나지막한 질문에 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찻잔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 끝이 굳어졌다.

 

"기타 결손……이요?"

 

서연은 서류 가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우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직업적 육감이 날카롭게 작동하고 있었다.

 

"15년 전 화재 보고서 뒷장에 비공개 부록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서대문 사무실에서 빼돌렸던 자료 중에요. 강정호 박사님이 직접 '격리 결손체'라고 메모해 둔 일곱 명의 아이들…… 설마 그들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실 안을 채우던 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창밖의 어스름이 짙어지며 골목길 가로등이 하나둘 주황빛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일상의 시작점 바로 아래에서, 또 다른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소리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