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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0화

사표를 던지다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낯선 출근길

 

지하철 2호선 역삼역의 개찰구를 통과할 때마다 귓전을 때리던 기계음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강우진이 마주한 풍경은 이전의 6년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 수만 명의 직장인이 쏟아져 나오던 승강장 계단은 더 이상 짓눌린 침묵의 도살장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를 부유하던 창백한 백색 네모(□)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허공 높은 곳으로 잡아끌던 질척한 꼭두각시 줄선도, 위태롭게 붉은빛을 뿜어내던 파멸의 세모(△)도 영구히 증발해 있었다.

 

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갗 아래 4센티미터 길이로 자리 잡은 오랜 수술 흉터는 이제 아무런 열소도 뿜어내지 않았다.

 

타인의 머리 위를 스칠 때마다 뇌수를 파고들던 바늘 같은 편두통도, 안구를 터뜨릴 듯 짓누르던 안압의 고통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저 약간 굳은 흉터 자국만이 거친 손끝에 스칠 뿐이었다.

 

"출근길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우진은 작게 중얼거리며 역삼역 8번 출구 계단을 밟아 올랐다.

 

불과 며칠 전 지하 100미터 오르비스 양자 코어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던 도로변은 여전히 노란색 통제선과 가림막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장비들이 아스팔트 잔해를 걷어내고 복구 작업을 진행하는 소리가 쿵쾅거리며 울려 퍼졌다.

 

하지만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 이상 누군가가 초단위로 짜놓은 보폭에 얽매여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공사 소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갔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멈춰 섰다가 뒤따라오던 행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앞을 잘 못 봤네요."

 

사소한 부딪힘,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사과와 멋쩍은 웃음.

 

예전 같았으면 시스템의 결손 엔트로피니, 충돌 궤적의 오류니 하며 파멸의 파편이 튀었을 우발적인 충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붉은 노이즈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인간과 인간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불완전하고 서투른 생명력이 맥동하고 있었다.

 

우진은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테헤란로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겨울 바람이 비정상적으로 맑고 시원했다.

 

2. 박제된 사각의 세계

 

태성C&I 본사 30층 사옥의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익숙한 히터 냄새와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1층 로비의 대형 안내 데스크 위로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속보를 전하는 대형 LCD 화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속보: 검찰 특수본, 넥스트 큐브 및 국가안전기획처 결탁 정관계 인사 47명 전원 구속영장 청구]

 

[5,100만 건의 불법 라이프 스타일 조작 데이터베이스, 법원 입회하에 전량 소자 폐기 착수]

 

로비에 서 있던 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화면을 보며 웅성거렸다.

 

"정말 저런 게 존재했다고? 우리 인사 평가나 부서 배치까지 전부 저기서 조작했던 거 아냐?"

 

"그러니까 말이야. 최원석 부회장 구속된 것도 결국 그것 때문이라잖아. 회사가 통째로 뒤집히게 생겼어."

 

그들의 머리 위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시스템의 조작에 길들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던 불안한 눈빛들 사이로, 진짜 자신의 인생을 되찾은 자들의 혼란과 생기가 뒤엉켜 있었다.

 

우진은 묵묵히 사원증을 찍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삑' 하는 기계적인 비프음이 오늘따라 유독 둔탁하게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에 도착하자, 익숙한 기획2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낮게 웅웅거리는 컴퓨터 본체 팬 소리, 쉼 없이 짤깍거리는 마우스 클릭음, 그리고 파티션 너머로 복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6년 동안 우진의 청춘을 옭아매었던 공간이었다.

 

매일 오전 8시 40분까지 도착해 모니터를 켜고, 엑셀 칸을 채우고, 윗선의 비위를 맞추며 규격에 맞게 잘라낸 보고서를 올리던 곳.

 

그때는 이 네모난 책상과 파티션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것을 벗어나면 사회적 파멸의 세모(△)가 떨어져 벼랑 끝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조차 시스템이 시민들을 가축처럼 길들이기 위해 심어둔 가짜 환상에 불과했다.

 

우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복사기 앞에 서 있던 김 주임이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강 대리님! 출근하신 겁니까? 몸은 좀 어떠세요?"

 

김 주임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걱정과 함께 묘한 경외감이 어려 있었다.

 

과거 박민재 팀장의 음모에 휘말려 횡령 누명을 쓸 뻔했던 그녀를 우진이 구해준 이후, 김 주임은 우진을 단순한 선배 이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더욱이 최근 사내를 뒤흔든 부회장실 압수수색과 넥스트 큐브 게이트의 중심에 강우진 대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 김 주임. 몸은 다 나았어. 별일 없었지?"

 

"별일이 없다뇨! 지금 사내 게시판이고 임원실이고 난리도 아닙니다. 대리님 병가 중이실 때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특별 승진 발령 났다는 소문, 진짜예요? 입사 6년 차에 팀장이라니, 태성 창사 이래 전무후무한 특진이잖아요!"

 

주변에 앉아 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진에게 쏠렸다.

 

부러움, 질투, 경계, 그리고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들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의 시선 위에 걸린 도형의 각도와 떨림을 보며 그 속내를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한 시대를 함께 버텨낸 평범한 직장인들의 피로에 찌든 얼굴뿐이었다.

 

그 평범함이 우진에게는 그 어떤 초능력보다도 안온하게 느껴졌다.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문이 좀 와전됐나 보네. 그냥 윗선에서 정리할 게 있어서 부른 거야."

 

"에이, 겸손해하지 마세요. 솔직히 박민재 팀장 날아갔을 때부터 대리님이 팀장 맡으셨어야 했어요. 오늘 저녁에 팀원들이랑 축하 회식이라도 해요, 제가 쏠게요!"

 

"마음만 받을게, 김 주임. 오늘은 내가 좀 밀린 정리를 해야 해서."

 

우진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랫동안 주인을 잃고 비어 있던 파티션 안쪽 책상 위에는 얇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먼지 쌓인 텀블러, 서랍 속에 가지런히 정돈된 업무 일지와 명함철.

 

이 완벽하게 구획된 사각의 영역 안에서 우진은 6년을 버텼다.

 

우진은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고, 서랍을 열어 낡은 서류철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3. 백색의 결재판

 

책상을 정리하는 우진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지난 6년간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매달렸던 차세대 물류 데이터 프로젝트 기획안, 비용 정산 영수증, 결재가 반려되어 너덜너덜해진 품의서들이 차례로 폐기용 박스 속으로 던져졌다.

 

그 종이 뭉치들 하나하나에 묻어 있던 젊은 날의 초조함과 불안이 떠올랐지만, 신기하게도 미련은 추호도 남지 않았다.

 

그것들은 우진이 원해서 쓴 것이 아니었다.

 

오르비스라는 거대한 괴물이 지정해 준 궤도에 맞춰, 낙오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채워 넣었던 가짜 기록들에 불과했다.

 

서랍 맨 밑바닥에서 유독 손때가 많이 묻은 파란색 결재판 하나가 나왔다.

 

우진이 태성C&I에 최종 합격했을 때, 신입사원 연수원에서 첫 번째 과제를 제출하며 받았던 결재판이었다.

 

그 안에는 갓 입사했던 스물여덟 살의 강우진이 적어 넣었던 포부서가 빛바랜 종이 위에 꽂혀 있었다.

 

[회사의 시스템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톱니바퀴가 되어, 완벽한 질서와 성과를 증명해 내겠습니다.]

 

우진은 그 문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스스로를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규정하며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정해진 사각의 틀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노예의 맹세였음을, 15년 만에 아버지를 되찾고 세상을 덮고 있던 꼭두각시 줄을 끊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우진은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 포부서를 반으로 접어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가슴 안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온 새하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는 단정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 직 서]

 

그 어떤 수식어도, 구차한 변명도 붙이지 않은 백색의 종이였다.

 

"강 대리, 본부장님이 부르셔."

 

옆자리 최 과장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 지금 들어가려고 했어. 고마워, 최 과장님."

 

우진은 사직서 봉투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진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복도 끝 본부장실로 향했다.

 

4. 거절된 특진

 

기획본부장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유리창 너머로 테헤란로의 마천루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현석 본부장이 몸을 돌렸다.

 

박민재 팀장이 구속되고 최원석 부회장 라인이 숙청된 후, 본사 감사실에서 기획본부 전체를 총괄하게 된 실세였다.

 

정 본부장의 머리 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며칠간 이어진 사내 특별 감사로 인한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지만, 우진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극도로 진중했다.

 

"앉게, 강 대리. 몸은 좀 어떤가? 큰일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많이 회복했습니다, 본부장님."

 

우진은 소파 맞은편에 꼿꼿한 자세로 앉았다.

 

정 본부장은 책상 위에서 고급 가죽 바인더 하나를 가져와 우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바인더 표지에는 붉은색 결재 도장과 함께 [인사발령 통보서: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강우진]이라는 굵은 활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미 소문은 들었겠지만, 그룹 인사위원회와 사장단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안이야."

 

정 본부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최원석 전 부회장과 그 일당들이 회사 물류망과 자금을 빼돌려 정체불명의 외곽 조직과 결탁했던 게 만천하에 드러났네. 회사가 존폐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배후를 밝혀내고 회사의 핵심 보안 데이터가 완전히 넘어가는 걸 막아낸 게 바로 강 대리 자네야. 언론에는 검찰 특수본의 수사로만 나갔지만, 우리 윗선에서는 자네가 한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네."

 

정 본부장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자리는 단순한 승진이 아니야. 그룹 차기 전략을 직접 수립하고, 이번 사태로 공석이 된 임원 자리로 직행하는 엘리트 코스지. 연봉은 기존의 세 배로 책정됐고, 법인 카드와 단독 관용차도 배정될 걸세. 서른넷에 이 자리에 앉는 건 태성 그룹 역사상 자네가 최초야."

 

달콤하고도 압도적인 제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30대 직장인이라면 평생을 바쳐도 닿지 못할 보장된 탄탄대로였다.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남은 평생은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인정이라는 견고한 방패막이 안에서 안락하게 보장받을 터였다.

 

하지만 우진은 그 화려한 인사발령장을 내려다보며 그 어떤 심장의 요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 제안서의 테두리가 여전히 차가운 '검은 네모'의 규격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크기와 높이만 커졌을 뿐, 결국 또 다른 울타리 안에 갇혀 정해진 각본대로 조직의 부품이 되어 살아가라는 제안.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하 100미터의 지옥을 기어 나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우진은 품 안에서 준비해 온 하얀 사직서 봉투를 꺼내 인사발령장 바로 위에 올려놓았다.

 

정 본부장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뜻인가?"

 

"사직서입니다, 본부장님."

 

우진의 목소리는 파도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호수처럼 담담했다.

 

"사직서라니? 강 대리, 내가 지금 자네에게 무슨 자리를 제안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건가? 총괄 팀장이야. 그룹 수뇌부가 자네를 차기 리더로 점찍었다고! 징계나 좌천도 아니고,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차버리고 나가겠다는 건가?"

 

"이해했습니다. 분에 넘치는 제안을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진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본부장님, 저는 지난 6년 동안 이 빌딩 안에서 남들이 정해준 규격에 저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살았습니다. 엑셀 칸을 채우고, 숫자를 맞추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안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안전이라는 게, 결국 누군가가 파놓은 거대한 사육장에 불과하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정 본부장은 우진의 말 속에 담긴 무게를 짐작하려는 듯 침묵했다.

 

우진은 창밖으로 펼쳐진 테헤란로의 풍경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이제 제 삶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삶이라 해도, 제가 직접 선택하고, 제가 직접 넘어지고, 제가 직접 일어서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남이 만들어준 네모난 상자 안에서 편안하게 늙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강 대리... 바깥세상은 자네 생각보다 훨씬 냉혹해. 조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자네를 지켜주던 이름표와 지위는 전부 사라지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도, 남들이 우러러보던 대기업 명함도 없어져. 실패하면 온전히 자네 혼자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다고."

 

정 본부장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함께 일말의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조직에 평생을 바쳐온 기성세대가 건넬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진심 어린 충고였다.

 

우진은 그 충고를 밀어내지 않고 담담히 미소로 받아들였다.

 

"알고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겠죠. 굶주릴 수도 있고, 길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진의 시선이 정 본부장의 눈과 부딪쳤다.

 

"하지만 본부장님. 실패할 수 있는 권리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 한마디에 정 본부장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부하 직원을 다루어왔고 사내 권력 다툼 속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본부장이었지만, 눈앞의 청년이 뿜어내는 깊고 투명한 기세 앞에서는 그 어떤 논리도 무력해졌다.

 

그것은 세속의 잣대나 욕망 따위로는 결코 흔들 수 없는, 사선을 넘어 영혼의 자유를 쟁취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평온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정 본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우진이 내민 사직서 봉투를 천천히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자네 눈빛을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군."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아니야. 사과는 내가 해야지. 박민재 사건 때도,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혼란 속에서도 자네를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정 본부장은 사직서 위에 묵묵히 서명을 갈겼다.

 

그의 손끝등에 맺힌 미세한 떨림이 멈추었다.

 

"어디로 갈 건가? 정해둔 곳은 있나?"

 

"아직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병원에 계신 부모님 곁을 지키며, 천천히 길을 찾아보려 합니다."

 

"그래...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이, 자네 입에서 나오니 묘하게 든든하게 들리는군."

 

정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진은 그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건승하게, 강우진 대리. 아니, 강우진 씨."

 

"본부장님도 건강하십시오."

 

5. 파티션을 넘어서

 

본부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사무실의 공기가 한층 가볍게 느껴졌다.

 

우진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폐기 박스를 들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와 빈 의자만이 단정하게 남아 있었다.

 

짐은 종이 박스 하나가 전부였다.

 

6년의 회사 생활이 이 작은 상자 하나에 온전히 담긴다는 사실이 허무하기보다는 오히려 날아갈 듯 홀가분했다.

 

"강 대리님... 정말 가시는 거예요?"

 

김 주임이 눈시울을 붉힌 채 다가왔다.

 

다른 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웅성거리며 우진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강 대리, 특진을 마다하고 사표를 냈다면서? 자네 제정신인가?"

 

"요즘 같은 불경기에 대기업 팀장 자리를 차고 나가다니, 무슨 다른 대책이라도 세워둔 거야?"

 

동료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걱정,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에게 있어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자 탈선이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음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오랜 관성의 벽은 여전히 높고 두터웠다.

 

하지만 우진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그 벽 역시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부수고 나와야 할 몫이었으니까.

 

우진은 박스를 고쳐 안으며 팀원들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부족한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과장님, 김 주임, 그리고 팀원 여러분. 다들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대리님... 진짜 연락 끊으시면 안 돼요. 밥 사달라고 연락할 거예요!"

 

김 주임이 결국 훌쩍이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우진은 김 주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언제든 연락해.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우진은 목에 걸려 있던 플라스틱 사원증을 벗었다.

 

6년 동안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목줄 같았던 물건이었다.

 

우진은 사원증을 책상 모퉁이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태성C&I 기획2팀 대리 강우진이라는 껍데기를 온전히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우진은 가벼운 목례를 남기고 뒤를 돌았다.

 

등 뒤로 쏟아지는 동료들의 웅성거림과 아쉬운 배웅을 뒤로한 채, 우진은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복도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길게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피로는 남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열일곱 살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투명했다.

 

관자놀이의 흉터는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었다.

 

6. 텅 빈 하늘과 무한한 도화지

 

1층 로비를 빠져나와 사옥 정문을 나서는 순간, 쏟아져 내리는 겨울 햇살이 우진의 온몸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우진은 테헤란로의 보도블록 위에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딩 숲 사이로 드러난 서울의 겨울 하늘은 티 없이 파랗고 높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하늘은 칠흑 같은 꼭두각시 줄선과 붉은 전파 격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천만 명의 운명을 옥죄고, 누구는 부유하게, 누구는 파멸하도록 조작하던 거대한 디지털 감옥.

 

하지만 지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얽히고설킨 인과율의 사슬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백색의 정적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징-.

 

코트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한서연 기자였다.

 

우진은 통화 버튼을 눌러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서연 씨."

 

- 우진 씨, 지금 어디예요?

 

설마 벌써 사표 내고 나온 건 아니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활기차고 명료했다.

 

우진은 짐 박스를 한 손으로 받쳐 들며 픽 웃었다.

 

"방금 사옥 로비 나왔습니다. 책상까지 다 비웠어요."

 

- 세상에...

 

진짜로 그 좋은 자리를 걷어차고 나왔네.

 

본부장이 붙잡지도 않던가요?

 

"붙잡았죠. 근데 제 고집을 꺾진 못하더라고요."

 

- 하긴, 오리진 코어까지 때려 부순 사람을 누가 무슨 수로 말리겠어요.

 

잘했어요, 우진 씨.

 

정말로 축하해요.

 

진짜 자유인이 된 걸.

 

서연의 진심 어린 축하에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고마워요. 서연 씨 쪽은 취재 잘 돼가요?"

 

- 말도 마요.

 

검찰 특수본 브리핑실에 기자들이 수백 명씩 몰려서 발 디딜 틈도 없어요.

 

민경택 그 인간, 조사받으면서 묵비권 행사하다가 우리가 넘긴 마스터 백업 데이터 들이미니까 거품 물고 쓰러졌다지 뭐예요.

 

정관계 결탁 리스트도 오늘 오후에 2차로 추가 공개될 예정이에요.

 

아주 나라가 뒤집어지는 중이죠.

 

"다행이네요. 서연 씨가 목숨 걸고 지켜낸 진실이니까, 끝까지 제대로 밝혀져야죠."

 

- 당연하죠.

 

저 한서연이에요.

 

아, 참!

 

방금 병원에 들렀다 왔는데 강정호 박사님 안색이 훨씬 좋아지셨더라고요.

 

어깨 실밥도 풀었고, 다음 주면 퇴원하셔도 된대요.

 

어머님도 우진 씨 사표 냈다는 얘기 들으시고는...

 

오히려 잘했다고, 고생 많았다고 웃으시던데요?

 

우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우진이 대기업 명함 뒤에 숨어 견뎌내던 고통을 누구보다 안쓰러워하셨다.

 

비록 앞길이 막막할지라도, 아들이 온전한 제 숨을 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부모님 뵈러 지금 바로 아산병원으로 갈 생각입니다."

 

- 그래요.

 

저도 오늘 마감 치고 저녁에 병원으로 갈게요.

 

태호 씨랑 동생들도 퇴원 축하 파티 한다고 케이크 사 온다고 난리예요.

 

아, 그리고 채린이한테 문자 왔던데 보셨어요?

 

"아뇨, 아직 확인 못 했는데."

 

- 학원 등록 잘 마쳤대요.

 

노량진 고시촌 골목에서 길을 잃어서 한참 헤맸다는데, 목소리는 엄청 신나 보이더라고요.

 

'길 좀 잃으면 어때요, 물어물어 찾아가면 되지!' 하면서요.

 

그 말에 우진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길을 잃는다는 것.

 

예전의 세상에서는 시스템의 치명적인 오류이자 실패였던 그 일이, 이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길을 배워가는 인간다운 여정이 되어 있었다.

 

"그 녀석답네요."

 

- 저녁에 봐요, 우진 씨.

 

진짜 고생 많았어요.

 

"네, 저녁에 봬요."

 

통화가 끊어지고, 우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사람도 있었고,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도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닐 것이다.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만큼, 사람들은 사소한 선택 하나에도 더 많이 불안해하고, 더 자주 실패하며,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의 조작된 괴물이 던져준 파멸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부딪치며 겪어나갈 삶의 흉터이자 성장의 발자국일 터였다.

 

우진은 품에 안은 박스를 단단히 쥐었다.

 

발걸음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네모난 상자에서 걸어 나온 그의 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무한하고 광활한 백색의 도화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도화지 위에 어떤 색을 칠하고 어떤 궤적을 그려나갈지는, 오직 강우진 자신의 두 손에 달려 있었다.

 

우진은 따스한 겨울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역삼역 8번 출구를 뒤로한 채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