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의 소녀
1. 격자망 너머의 이형
사옥 옥상에서 내려와 퇴근길 인파가 쏟아지는 테헤란로로 향하는 우진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아스팔트는 종일 뿜어낸 열기를 식히지 못한 채 눅눅한 매연을 토해내고 있었다.
전날 밤 병원으로 실려 간 편의점 김 씨의 비참한 몰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우진은 무거운 발걸음을 다잡으며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로 향했다.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어깨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군중의 무표정한 얼굴들 위로는 저마다의 도형이 은은한 빛을 발산하며 떠돌았다.
백색 네모(□).
질서정연하게 정렬된 수백 개의 사각형들이 군중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에서 미세한 고동에 맞춰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반복되는 출퇴근, 정해진 할당량, 시스템이 허락한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영위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규격화된 증표였다.
강우진(姜宇鎭)은 얇은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숨을 들이켜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오른쪽 이마 경계선부터 관자놀이를 타고 귀 뒤쪽까지 길게 이어진 4센티미터가량의 수술 흉터가 피부 안쪽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듯한 열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신경을 가볍게 열어 군중의 외형만을 훑어보는 1단계 상태(Surface Scan)였음에도, 낮 동안 수첩에 기록했던 가설들과 아버지 강정호의 옛 연구 노트 내용이 뇌수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외압 없는 자연적 위기는 스스로 복원된다.'
낮에 옥상에서 목격했던, 보행자가 턱에 걸려 넘어지려다 균형을 잡는 순간 붉은 세모가 백색 네모로 매끄럽게 되돌아가던 광경은 분명 커다란 수확이었다.
인위적인 외압이나 타인의 억지스러운 개입이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서는 인과율의 균열도, 파멸 에너지의 전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후 깨달았던 자신의 17세 이전 유년기 기억 삭제 현상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논리적 가설의 기반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내 기억은 왜 지워진 거지? 그리고 이 흉터는 대체 누가 남긴 것인가.'
부모에 대한 몇 줄의 건조한 사실 외에는 중학교 시절 친구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완벽한 공백.
그것은 자연스러운 망각이 아니라, 정교한 삭제 프로그램으로 특정 섹터를 깔끔하게 밀어버린 것 같은 인위적인 공백이었다.
띵- 하는 신호음과 함께 보행자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멈춰 서 있던 군중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제히 횡단보도를 향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사각형들의 물결이 무채색 도시의 허공을 메우며 앞으로 밀려가는 순간이었다.
그 획일화된 사각형의 격자망 한구석, 반대편 인도에서 걸어 나오는 인파의 정중앙에서 기이한 빛 한 점이 우진의 망막을 꿰뚫었다.
은빛.
차갑고 날카로운 백색도, 파멸을 예고하는 붉은색도, 배후 세력의 꼭두각시 줄이 뿜어내는 칠흑 같은 어둠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달빛을 녹여 얇은 실처럼 벼려낸 듯한 순수한 은색 광배였다.
그리고 그 형상은 네모의 각진 모서리도, 세모의 위협적인 꼭짓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곡선.
시작점과 끝점이 매끄럽게 이어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닫혀 있는 하나의 궤도.
동그라미(○)였다.
우진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턱 끝까지 멎어 들었다.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주먹에 하얗게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동그라미…… 정말로 존재했던 건가.'
지난번 태성C&I 사옥 옥상에서 지상 군중을 내려다보았을 때 스치듯 사라졌던 그 잔상이 착시나 환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눈앞에서 명백히 증명되고 있었다.
수백 개의 네모들이 빈틈없이 짜 맞추어진 거대한 직물 사이에서, 그 은빛 동그라미는 홀로 규칙을 거스른 채 유유히 떠돌고 있었다.
2. 은빛 궤도의 궤적
우진은 자신을 밀치며 지나가는 퇴근길 직장인들의 어깨를 피하지도 못한 채, 그 동그라미의 주인을 응시했다.
횡단보도 중간 지점을 지나 우진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인물은 교복 치마 위에 헐렁한 감색 후드 집업을 걸쳐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한쪽 어깨에 멘 낡은 캔버스 백에는 닳아빠진 천 인형 열쇠고리가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귀에는 하얀 유선 이어폰을 꽂은 채, 시선은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되어 있어 겉보기에는 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에 떠 있는 도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지름 약 15센티미터 크기의 은빛 원환(Circle).
그 동그라미는 주변 공기를 미세하게 일렁이게 만들며 스스로 천천히 자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네모가 사람의 걸음걸이에 맞춰 위아래로 덜컹거리며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과 달리, 소녀의 동그라미는 마치 지면의 중력이나 보폭과는 전혀 무관한 독자적인 관성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유영했다.
더 기괴한 것은 그 원환의 주변 공간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소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보행자들의 머리 위 백색 네모들이, 그 동그라미와 일정 반경 이내로 가까워질 때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척력에 밀려나듯 바깥쪽으로 슬그머니 궤도를 비틀고 있었다.
충돌하지도 않고, 실금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그저 격자망 시스템 자체가 그 은빛 원형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애초에 연산 영역 밖으로 밀어내며 자연스럽게 회피하고 있는 형태였다.
'시스템의 사각지대…… 이레귤러(Irregular).'
아버지의 수첩에 적혀 있던 그 단어가 뇌리에 선명하게 번뜩였다.
'세상이 부여한 사각형의 틀을 벗어난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중심을 가진 완전한 구체일 것이다.'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그 도형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시선의 초점을 조였다.
표면만을 훑는 1단계를 넘어, 도형의 내부 밀도와 구조적 법칙을 들여다보는 2단계(Deep Analysis)로 시신경의 해상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콰득, 관자놀이 흉터 깊은 곳에서 두개골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터져 나왔다.
눈동자 뒤편의 망막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팽창하며 시야 주변부가 붉게 물들었다.
귓가에서 높은 주파수의 이명이 삐- 하고 울리기 시작했지만, 우진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소녀의 정수리를 응시했다.
2단계의 시야가 열리자, 은빛 원환의 내부 구조가 서서히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 동그라미는 단순히 얇은 선으로 그려진 평면 도형이 아니었다.
수만 개의 미세한 은색 입자들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완벽한 유체 역학적 고리 형태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
박민재 팀장이나 편의점 김 씨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도시 상공을 향해 시커멓게 뻗어 나가던 그 끔찍한 꼭두각시 줄(Puppet Line)이 단 한 가닥도 존재하지 않았다.
통제하는 배후도, 연결된 중앙 코어도 없다.
시스템의 실에 묶여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온전히 독립된 하나의 우주로서 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3. 횡단보도의 교차점
보행자 신호등의 녹색 숫자가 15초를 가리키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좁혀지는 거리 속에서 여학생과 우진 사이의 간격은 이제 불과 5미터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통증 때문에 우진의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려 눈썹을 적셨다.
관자놀이 흉터 부근의 살갗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욱신거렸지만, 그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이 거대한 테헤란로의 콘크리트 미로 속에서 이 기괴하고 아름다운 이레귤러를 다시 찾아낼 방법은 없었다.
'조금만 더. 저 내부 회전 주기가 의미하는 게 뭐지?'
우진은 숨을 참으며 2단계의 초점을 더욱 예리하게 갈아붙였다.
은빛 입자들의 궤적을 쫓던 순간, 여학생이 불현듯 멈춰 섰다.
신호가 깜빡이며 주변 사람들이 서둘러 그녀를 피해 뛰어가고 있는 아스팔트 한가운데였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여학생의 하얀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동작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헝클어진 단발머리 사이로 드러난 여학생의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허공을 갈라 우진의 두 눈과 정확히 일직선으로 맞닿았다.
쿵.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거세게 들이받는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 소녀는 우진의 옷차림이나 얼굴 전체를 막연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녀의 시선은 정확하게 우진의 동공, 2단계 심층 분석을 켜둔 채 붉게 충혈되어 타오르는 그의 망막을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서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와 바쁘게 발을 놀리는 행인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먼 수중의 소음처럼 먹먹하게 멀어졌다.
소녀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맑았던 눈동자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경계심과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은 발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최고조에 달해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려는 찰나였다.
지잉-.
머릿속의 뇌간을 직접 긁어내는 듯한 기괴한 공명음이 두개골을 울렸다.
그것은 이명을 넘어선, 물리적인 진동에 가까운 파동이었다.
소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빛 동그라미(○)의 회전 속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매끄럽게 흐르던 은빛 유체 고리가 팽팽하게 긴장하며 원환의 궤도를 따라 눈부신 스파크를 튀겼다.
그리고 그 순간.
텅 비어 있던 완벽한 원형의 정중앙,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의 한 점에 칠흑보다 깊은 은빛 핵이 맺히기 시작했다.
팟.
마치 허공에 먹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동그라미의 한가운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선명한 중심점이 찍혀 들어갔다.
원과 점.
동그라미 안에 점이 찍힌 완벽한 과녁의 형상(⊙).
우진의 숨이 멎었다.
4. 중심점(⊙)의 조준
그것은 관찰의 결과가 아니었다.
우진이 그녀의 궤도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녀의 도형 역시 우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에 반응하여 형태를 바꾼 것이었다.
상호 작용.
지금까지 우진이 마주쳤던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무엇이 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장기말들에 불과했다.
최 모 본부장도, 박민재 팀장도, 지하철의 아이도, 편의점 김 씨도 자신의 궤도를 보지 못했다.
오직 우진만이 일방적으로 그들의 머리 위 도형을 읽고, 분석하고, 비극을 피하려 개입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 소녀는 달랐다.
동그라미 한가운데에 찍힌 그 중심점(⊙)은, 우진의 시선을 향해 똑바로 총구를 겨누듯 명확한 방향성을 띠고 박혀 있었다.
'식별 코드…….'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시스템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레귤러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서로를 알아보는 상호 식별의 기호.
소녀가 꽂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툭 하고 빼내어 주머니에 떨구었다.
깜빡이던 보행자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며 테헤란로의 차선들이 일제히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진과 소녀는 횡단보도의 끄트머리, 인도와 차도의 경계선에 단 3미터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매서운 초가을 바람이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를 훑고 지나가며 소녀의 헐렁한 후드 옷자락과 우진의 코트 깃을 거세게 흔들었다.
주변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신호가 바뀐 것을 보고 서둘러 인도로 뛰어올라왔지만, 두 사람 사이의 공간만큼은 짙은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것처럼 기묘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소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 메마르고 경계 어린 눈동자 너머로, 우진은 자신의 망막에 맺힌 그녀의 이름표를 발견했다.
교복 옷깃 아래 작게 박음질 되어 있는 단정한 은색 명찰.
윤채린.
열여덟, 혹은 열아홉 남짓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수많은 참사와 궤도의 파멸을 목격해 온 자 특유의 깊고 서늘한 피로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윤채린의 시선이 우진의 얼굴을 거쳐,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흉측하게 자리 잡은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로 이동했다.
흉터를 확인하는 순간, 소녀의 맑은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중심점을 품은 채 회전하던 과녁 모양의 동그라미(⊙)가 파르르 떨리며 흩어지는 은빛 잔상을 뿜어냈다.
윤채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방어적인 태세였다.
캔버스 백의 끈을 거머쥔 그녀의 작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입을 열려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다.
너도 이 선들이 보이는 것인지.
그 동그라미는 대체 무엇이며, 왜 너는 시스템의 꼭두각시 줄에 묶여 있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지금 어떤 도형이 떠 있는 것인지.
거울을 보아도 결코 비치지 않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이 확인할 수 없었던 자신의 궤도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우진의 목구멍에서 말이 터져 나오기도 전, 윤채린이 먼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침묵을 찢었다.
목소리는 바람에 흩날릴 듯 가냘팠지만, 우진의 귓전에는 그 어떤 천둥보다도 거대하게 박혀 들었다.
"……당신, 누구야?"
5. 닫힌 궤도의 틈새
윤채린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의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우진을 평범한 행인이나 이상한 치한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진의 두개골 상공,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보고 있다.'
우진의 척추를 타고 차가운 전율이 전깃줄처럼 내달렸다.
그녀는 우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진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 무언가를, 바로 그 궤도를 읽고 있었다.
"잠깐만, 진정해."
우진은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양손을 천천히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며 상체를 낮췄다.
관자놀이 흉터의 박동은 이제 편두통을 넘어 귓속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2단계를 강제로 유지하느라 콧속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역류해 올라왔지만, 시선을 풀 수 없었다.
"해치려는 게 아니야. 난…… 강우진이라고 해."
"다가오지 마."
윤채린의 음성이 날카롭게 굳어졌다.
그녀는 인도 안쪽으로 반 걸음 더 물러서며 캔버스 백을 가슴 앞쪽으로 바짝 당겨 안았다.
"어떻게 내 궤도를 간섭하는 거지? 감시관…… 아니야. 당신 머리 위의 그건 시스템의 코드가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야?"
감시관.
시스템의 코드.
소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단어들은 우진이 지난 사흘간 홀로 수첩에 적어 내려갔던 가설들의 파편과 정확히 맞물려 떨어졌다.
그녀는 시스템의 구조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단순히 도형을 보는 능력을 넘어, 이 세상이 거대한 궤도 통제망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의 존재까지 인지하고 있는 자였다.
"나도 모른다. 나 역시…… 불과 사흘 전부터 이 도형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야."
우진은 숨을 몰아쉬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짓이나 포장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사흘 전 심야 지하철에서 붉은 세모를 보았고, 사람이 죽는 걸 목격했어. 그리고 어제는…… 검은 세모에 개입했다가 인과율이 전이되는 걸 봤지. 시스템이 파멸을 강제로 덮어쓰는 것도."
우진의 입에서 '인과율의 전이'와 '강제 덮어쓰기'라는 단어가 흘러나오자, 윤채린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그 반응은 분명했다.
그녀 역시 그 잔혹한 법칙들을 뼈저리게 겪어본 자의 얼굴이었다.
"너도…… 겪어본 적이 있는 거지?"
우진이 한 걸음 더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네 머리 위의 그 동그라미(○),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찍힌 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 너는 누구고, 이 빌어먹을 시스템의 실체는 대체 뭐지?"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테헤란로의 퇴근길 인파는 여전히 무심하게 두 사람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각자의 백색 네모를 흔들고 있었다.
그 거대한 무지의 군중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의 망막을 통해 연결된 보이지 않는 이형의 세계에 묶여 있었다.
윤채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눈빛 속에서, 아주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외로움과 절망의 파편이 언뜻 비쳤다.
이 미친 도시에서, 자신과 같은 지옥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끼는 필연적인 동요였다.
윤채린의 머리 위 은빛 동그라미 한가운데에 박힌 점(⊙)이 더욱 강렬한 은색 빛무리를 토해냈다.
그 빛은 마치 우진의 뇌간과 관자놀이 흉터를 향해 보이지 않는 신호를 쏘아 보내는 유도 비콘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소녀의 시선이 불현듯 우진의 어깨 너머, 테헤란로 건너편 고층 빌딩 옥상 어딘가로 튕겨 나가듯 옮겨붙었다.
흠칫.
윤채린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질려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우진을 경계하던 눈빛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포식자를 마주한 초식동물의 근원적인 공포가 그녀의 온몸을 옭아맸다.
"……안 돼."
여학생의 목에서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신호가 잡혔어. 동기화되면 끝장이야."
"무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우진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윤채린은 맹렬한 기세로 몸을 돌렸다.
펄럭이는 후드 자락과 함께 은빛 동그라미의 잔상이 허공을 길게 가르며 찢어졌다.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삼역 방면의 어두운 골목길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다시 녹색으로 바뀌며 쏟아져 나온 군중의 거대한 사각 격자망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순식간에 가로막았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불타오를 듯 욱신거리는 가운데, 우진은 인파를 헤치며 도주하는 은빛 궤적의 뒤를 쫓기 위해 구두 밑창을 아스팔트에 박아 넣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