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의 새로운 봄
1. 병원의 아침 햇살
병원 7층 복도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투명하리만치 맑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울 상공을 짓누르던 그 잿빛 차폐 스모그와 기괴한 전자기적 압박감은 흔적도 없이 씻겨 내려간 뒤였다.
강우진(姜宇鎭)은 유리창에 한 손을 얹은 채 저 멀리 아스팔트 위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출근길을 재촉하는 직장인들,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학생들, 유모차를 끌고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젊은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정수리 위 약 10센티미터 허공을 아무리 집요하게 응시해 보아도,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계적인 반복을 강요하던 새하얀 네모도, 급격한 비극과 파멸을 예고하며 핏빛으로 회전하던 검은 세모도, 심지어 족쇄처럼 하늘로 길게 뻗어 올라가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사람들의 머리칼과, 그 위를 공평하게 비추는 초가을의 투명한 햇살만이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우진은 오른쪽 관자놀이에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살갗 아래 선명하게 박혀 있던 4센티미터가량의 단단한 수술 흉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신경을 바늘로 후벼 파듯 뒤흔들던 그 끔찍한 편두통과 안압의 상승, 뇌수를 쥐어짜던 이명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상처는 그저 15년 전의 비극적인 수술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 더는 기괴한 인과율의 회로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능(異能)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사실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담담하게 스며들었다.
"우진아, 밖에서 찬 바람 쐬지 말고 들어와서 과일이라도 좀 먹어라."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어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복도의 적막을 부드럽게 갈랐다.
우진은 창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지난 보름간의 풍파가 남긴 깊은 피로가 묻어나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15년 만에 되찾은 온전한 평온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어머니."
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704호 병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안쪽 침상에는 어깨 관통상 수술을 무사히 마친 아버지 강정호가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킨 채 기대어 앉아 있었다.
환자복 차림의 아버지는 여전히 쇠약해 보였지만, 15년 동안 지하 챔버에서 시스템의 연산 프로세서로 착취당하며 굳어 있던 창백한 낯빛은 점차 핏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침상 곁 협탁 위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브리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 최현석 차장검사는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단호한 어조로 마이크를 쥐고 있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넥스트 큐브 및 국가안전기획처 결탁 카르텔의 핵심 주모자인 민경택 전 차장의 신병을 확보한 데 이어, 오늘 새벽 불법 해외 비자금 세탁 및 궤도 조작 데이터베이스 관리에 연루된 정관계 인사 47명 전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일괄 청구했습니다.'
차장검사의 뒤편으로 인천공항 활주로에서 수갑을 찬 채 호송차로 끌려가던 민경택의 일그러진 얼굴이 자료 화면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울러 국가안전기획처와 넥스트 큐브가 불법적으로 구축했던 5,100만 전 국민의 생체 데이터 및 인생 궤도 시뮬레이션 데이터베이스는 법원의 압수물 검증 절차를 거쳐 오늘 정오를 기해 전량 영구 포맷 및 영구 소자(消磁) 폐기 절차에 돌입합니다.'
뉴스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깊은 숨을 내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손으로 잘못 시작했던 괴물 같은 시스템이 마침내 법과 사회의 손에 의해 완전히 갈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다 끝났구나. 정말로…… 다 끝났어."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어머니는 말없이 남편의 마른 손등 위에 자신의 거친 손을 겹쳐 올렸다.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로를 잃어버린 채 생사의 지옥을 건너왔던 부부는, 이제야 비로소 아무런 각본도 없는 온전한 둘만의 시간을 되찾고 있었다.
그 평온한 풍경을 바라보던 우진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2. 사표와 가벼운 발걸음
"어머, 채린이 왔니?"
어머니가 먼저 고개를 돌리며 반색했다.
문가에 들어선 것은 헐렁한 베이지색 후드 티에 편안한 청바지 차림을 한 윤채린이었다.
불과 며칠 전 파주 벙커에서 시스템의 인과율 역류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각혈하던 그 처절한 사투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었다.
창백하던 뺨에는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고, 언제나 경계심과 긴장감으로 곤두서 있던 눈매는 몰라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정수리 위를 맴돌던 그 불안정한 은빛 동그라미(○) 역시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기형적인 척력도, 공간의 격자망을 찢어내던 이레귤러의 숙명도 모두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 것이다.
채린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테이크아웃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박사님, 오늘 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세요."
채린은 특유의 싹싹한 어조로 인사를 건네며 병실 안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의사 선생님이 오늘 아침 회진 때 그러시더군요. 어깨 상처도 잘 아물고 있고, 몸속에 남아 있던 미세 잔류 신경 독소 수치도 정상치로 완전히 떨어졌다고요. 이게 다 채린 양과 여러분이 목숨 걸고 버텨준 덕분입니다."
아버지가 따뜻한 눈빛으로 채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에이,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세요. 다 아저씨랑 태호 오빠, 서연 언니가 고생한 거죠. 아, 아저씨. 이거 1층 카페에서 사 온 핫초코예요. 날씨 쌀쌀한데 한잔 드세요."
채린은 종이컵 하나를 우진에게 쑥 내밀었다.
달콤하고 따뜻한 초콜릿 향이 코끝을 스쳤다.
우진은 컵을 받아 들며 채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얼굴 좋아졌네. 파주에서 올라온 뒤로 잠은 좀 푹 잤어?"
"그럼요. 태어나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열두 시간 내리 자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조용한 게,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요."
채린은 핫초코를 한 모금 홀짝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15년 동안 부친의 유품을 끌어안고 쫓기듯 숨어 살아야 했던 도망자의 그림자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저 영락없는 열아홉 살 평범한 소녀의 얼굴이었다.
"참, 서연 언니는요? 아침에 통화했을 땐 병원에 같이 있다고 들었는데."
채린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서연 씨는 방금 검찰청으로 들어갔어. 민경택 차장 구속영장 실질심사 취재 때문에 오전에 급하게 갈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태호는 다른 병동에 입원한 지혜랑 영훈이 면회 갔고."
"태호 오빠는 여전히 동생들 챙기느라 바쁘네요. 하긴, 이제 진짜 가족처럼 같이 살 집도 알아봐야 하니까요."
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창가에 서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채린이 문득 생각난 듯 우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 아까 서연 언니한테 들었는데요. 태성에서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자리 제안했다면서요? 특진에 연봉도 엄청 올려준다고 했다던데, 진짜 거절하신 거예요?"
채린의 질문에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우진에게 쏠렸다.
우진은 들고 있던 핫초코를 조용히 음미한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거절했어. 조금 전 인사팀에 연락해서 정식으로 사직서 제출하겠다고 전달했고."
어머니가 조금 놀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지만, 결코 나무라거나 만류하는 기색은 없었다.
지난 보름 동안 아들이 어떤 사선을 넘나들었는지 누구보다 뼈저리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저 깊고 은은한 눈빛으로 아들의 결정을 묵묵히 긍정해 줄 뿐이었다.
"아깝지 않으세요? 대기업 팀장이면 완전 탄탄대로잖아요. 다들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인 자리인데."
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우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또다시 정해진 규격에 맞춰 살아가게 될 테니까. 아침 몇 시에 출근해서, 어떤 보고서를 결재하고, 누구의 비위를 맞추며 어떤 성과를 내야 하는지 뻔히 정해져 있는 삶이잖아. 마치 머리 위에 네모가 다시 씌워지는 것처럼 말이야."
우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이능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어. 남이 짜놓은 안전한 시간표 속에서 편안하게 숨 쉬는 것보다, 비록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막막하더라도 내 두 발로 직접 길을 고르는 게 진짜 살아있는 거라는 걸."
채린은 우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피식 웃었다.
"멋있네요, 강우진 대리님. 아니, 이제 강우진 씨인가? 백수 되신 걸 축하드려요."
"놀리지 마라. 당장 다음 달부터 퇴직금으로 통장 잔고 계산해야 하는 처지니까."
우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자 병실 안에는 오랜만에 가벼운 웃음소리가 번져나갔다.
3. 옥상의 바람과 스케치북
병실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이내 7층 테라스를 지나 본관 옥상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을 밀고 나가자, 시원하고 상쾌한 가을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기분 좋게 흩날렸다.
테헤란로와 잠실 일대의 빌딩 숲이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넥스트 큐브의 지하 코어가 무너져 내리며 생겼던 역삼역 인근의 거대한 함몰지는 이미 두꺼운 복공판과 안전 펜스로 둘러싸인 채 대대적인 지반 복구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커먼 연기와 비명은 사라지고, 오직 도시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분주한 중장비 소리만이 아득한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옥상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린은 들고 온 낡은 캔버스 숄더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진은 채린의 숄더백 옆구리로 삐져나와 있는 두툼한 종이 뭉치를 눈여겨보았다.
스프링으로 엮인 커다란 스케치북과 함께, 손때가 묻은 4B 연필 몇 자루와 떡지우개가 필통 틈새로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가방에 든 건 뭐야? 문제집은 아닌 것 같은데."
우진이 턱짓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묻자, 채린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가방 지퍼를 완전히 열더니, 그 안에서 두툼한 8절 스케치북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표지에는 아무런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갱지 스케치북이었다.
"저…… 사실 병원에 오기 전에 파주 은신처 짐을 정리하면서 가져온 거예요."
"짐을 정리했다고?"
"네. 송민규 아저씨랑 거점 7번에 남아 있던 장비들 다 폐기 처분했거든요. 국가 전산망을 감청하던 단파 무전기도, 벽면을 둘러싸고 있던 구리 차폐판도 전부 뜯어냈어요. 더는 도청당할 일도, 숨어서 숨죽일 이유도 없으니까요."
채린의 손가락이 스케치북의 거친 질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제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상자를 발견했어요. 아빠가 살아계실 때…… 그러니까 제가 아주 어릴 때 사주셨던 미술 도구들이 들어 있더라고요. 연필이랑 지우개, 그리고 쓰다 만 크레파스 같은 것들요."
우진은 말없이 채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15년 전, 첨단 연구소 화재로 부친 윤상혁 연구원을 잃고 홀로 세상에 내던져졌던 소녀.
시스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숨기고, 학교를 그만두고, 척력이라는 기형적인 힘에 휘둘리며 하루하루를 생존만을 위해 버텨내야 했던 아이였다.
소녀가 누렸어야 할 평범한 유년의 기억은 차가운 패러데이 케이지 벙커 속에서 먼지처럼 바래져 있었을 터였다.
"어릴 때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진짜 좋아했대요. 아빠 연구실 화이트보드에 온갖 낙서를 해놔서 연구원 삼촌들한테 혼나기도 많이 혼났고요. 그런데 연구소가 불타고 아빠가 돌아가신 뒤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어요."
채린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하며 아스라한 과거를 더듬었다.
"머리 위에 은빛 동그라미가 뜬 뒤로는, 무언가를 그리려고 연필을 쥐기만 해도 손끝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거든요. 종이에 선을 그으면 종이가 찢어지거나 연필심이 부러져 나갔어요. 세상 모든 게 저를 밀어내는 것 같았고, 제 손에 닿는 모든 게 부서질 것만 같아서 무서웠어요."
채린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의 첫 장을 넘겼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분명한 선으로 정성스럽게 그려진 연필 드로잉 한 점이 담겨 있었다.
테헤란로의 높은 빌딩 숲 위로 떠오르는 둥근 아침 해, 그리고 그 아래로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를 딛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서너 명의 사람들의 실루엣이었다.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는 남자의 관자놀이에는 선명한 흉터가 그려져 있었고, 그 곁에는 마이크를 든 단발머리 여성과 깁스를 한 건장한 청년, 그리고 작게 미소 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비록 전문적인 기교는 부족했지만, 선 하나하나에 깃든 온기와 생명력만큼은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거…… 우리들이네."
우진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어제 밤에 잠이 안 와서 병실 간이침대에 엎드려 그려봤어요."
채린은 쑥스러운 듯 코끝을 찡긋하며 웃었다.
"연필심이 하나도 안 부러지더라고요. 종이도 안 찢어지고요. 내가 힘을 주는 대로, 내가 생각한 선대로 종이 위에 정직하게 자국이 남는 게…… 너무 신기하고 벅차서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봤어요."
소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자유를 되찾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순수한 경이로움이 가득 차 있었다.
4. 내 마음대로 그리는 세상
채린은 스케치북을 덮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은 뒤, 옥상 난간 너머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높고 드넓었으며, 그 어떤 격자나 경계선도 없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저씨, 저 결정했어요."
채린이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뭘 결정했는데?"
"우선 다음 달부터 시작하는 고졸 검정고시 학원 등록할 거예요. 송민규 아저씨가 그동안 숨겨뒀던 비상금 통장 중에서 제 몫으로 남겨둔 장학금이라고 주신 게 있거든요. 그거면 학원비랑 당분간 방세는 충분히 낼 수 있대요."
"검정고시라…… 좋은 생각이네. 네 머리면 금방 합격하겠지. 시스템 암호도 척척 풀어내던 실력인데."
우진이 칭찬 섞인 농담을 던지자 채린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랑 국어, 국사 시험공부하는 건 완전 다르거든요? 저 조선 시대 왕 순서도 다 까먹었단 말이에요."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활기찼다.
채린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두 손으로 스케치북의 양 모서리를 꽉 쥐었다.
그리고 이내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자신의 진짜 꿈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검정고시 붙고 나면…… 저 미대 갈 거예요."
우진은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지만, 조금 전 스케치북 속 따뜻한 그림을 떠올리자 이내 너무나도 채린에게 잘 어울리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대?"
"네. 미술대학이요."
채린의 얼굴에 활짝 핀 꽃처럼 눈부신 미소가 번졌다.
"아저씨, 저 이제 미대 갈 거예요. 내 맘대로 그릴 수 있잖아요."
그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우진의 심장을 묵직하게 울렸다.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
그것은 지난 15년 동안 넥스트 큐브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전 인류에게서 가장 잔인하게 박탈해 갔던 권리였다.
네모라는 정해진 틀 속에 인간을 가두고, 세모라는 파멸의 공포로 협박하며, 그 어떤 이레귤러의 동그라미도 용납하지 않던 세상.
모든 이의 인생 도화지에 회색빛 규격만을 강제로 인쇄해 넣던 그 끔찍한 기계 감옥에서 벗어난 지금, 소녀는 비로소 자신의 손으로 하얀 도화지를 채워나갈 자유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사각형을 정해주지도 않고, 빨간색을 칠하든 파란색을 칠하든 아무도 상관 안 하잖아요. 삐뚤빼뚤하게 선을 그어도 괜찮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개로 빡빡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면 되니까요."
채린은 가슴을 활짝 펴며 옥상의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게, 틀려도 내 책임이라는 게…… 이렇게 가슴 뛰는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우진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채린의 머리를 툭 건드렸다.
"그래.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그려봐. 풍경을 그리든, 사람을 그리든, 아니면 세상에 없는 엉뚱한 괴물을 그리든 전부 네 자유니까."
"괴물이라니요! 저 첫 작품으로는 아저씨 얼굴 그릴 건데요? 완전 근엄하고 답답한 표정으로요!"
"그게 괴물이랑 뭐가 다르냐."
우진의 핀잔에 채린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청명한 가을바람을 타고 옥상 정원 구석구석으로 맑게 퍼져나갔다.
5. 흩어지는 씨앗들
채린은 가방 안쪽에서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봉투 겉면에는 단정한 글씨로 '강우진 아저씨께'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파주 벙커 떠나기 전에, 아빠 유품 상자 밑바닥에서 찾은 거예요. 넥스트 큐브 데이터나 연구 자료는 아니고요…… 아빠가 강정호 박사님하고 저, 그리고 아저씨 유년 시절에 관해 적어두셨던 짧은 일기 조각이에요."
우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아저씨한테 드리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박사님이랑 같이 읽어보세요."
우진은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받아 양복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15년 전의 상처와 진실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지만, 그 시절 아버지들이 품었던 인간적인 고뇌와 사랑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을 터였다.
"고맙다, 채린아."
"제가 더 고맙죠. 저를 살려주신 거잖아요. 지하철 역삼역에서부터, 파주 벙커까지……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평생 도망치다가 어디 하수구 구석에서 차갑게 식어버렸을 거예요."
채린은 벤치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우진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깊숙이 인사를 건넸다.
장난기를 완전히 거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인사였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저씨. 덕분에 저…… 다시 살 수 있게 됐어요."
우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채린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여주었다.
소녀의 어깨는 가냘팠지만, 그 안에 깃든 영혼은 그 어떤 거대한 시스템보다도 단단하고 유연했다.
"학원 열심히 다니고. 힘들거나 막히는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서연 씨나 태호도 널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치, 제가 애도 아니고 혼자서 잘할 수 있거든요? 그래도 맛있는 거 사주신다고 하면 언제든 달려올게요."
채린은 다시 특유의 발랄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가방을 고쳐 멨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오후에 노량진 쪽 학원 상담 예약해 뒀거든요. 늦으면 원장 선생님한테 혼나요!"
"조심해서 가라."
채린은 활기찬 발걸음으로 옥상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철문을 열기 직전, 채린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햇살을 등진 채 서 있는 우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채린은 손을 활짝 흔들었다.
"아저씨도 사표 멋지게 던지고 오세요! 이제 진짜 자유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옥상 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혼자 남은 옥상 정원에는 부드러운 바람만이 홀로 맴돌았다.
우진은 난간에 기대어 서서, 병원 정문을 빠져나와 횡단보도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는 채린의 작은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춰 선 채린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발을 굴렀다.
초록불이 켜지자, 채린은 다른 무수한 시민들과 함께 횡단보도 위를 성큼성큼 건너갔다.
그 누구의 머리 위에도 더는 도형이 없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고민과 희망을 품은 채 걸어가는 수많은 발걸음들.
정해진 궤도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막막한 공백이 아니라, 온갖 색깔로 채워질 수 있는 무한한 백지였다.
채린은 그 도화지 위에 자신만의 봄을 그려나갈 것이다.
6. 낯선 바람과 새로운 결의
우진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세 통과 함께 회사 인사팀에서 보낸 장문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강우진 대리님, 상임이사회 특별 승진 발령 건에 대해 재고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사직서 처리는 일단 보류해 두었으니 부디 사옥으로 방문하셔서…….'
우진은 문자 메시지를 끝까지 읽지도 않고 화면을 꺼버렸다.
그 미련 없는 손짓에 6년 동안 매여 있던 대기업 회사원이라는 껍데기가 비로소 완전히 벗겨져 나가는 듯했다.
내일 아침이면 테헤란로 사옥으로 가 책상을 정리하고, 사원증을 반납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퇴직금으로 무엇을 할지, 어떤 일을 시작할지, 어디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할지 정해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미온의 설렘이 기분 좋게 차오르고 있었다.
우진은 주머니 속에 든 종이봉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15년 전의 비극을 끝내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되찾았으며, 동료들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제 각자의 삶을 향해 흩어지는 씨앗들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더는 인과율의 압력을 머금지 않은, 지극히 평범하고 쌀쌀한 초가을의 바람이었다.
우진은 코트를 여미며 옥상 계단을 향해 돌아섰다.
정해진 각본 없는 내일을 향해, 그 역시 자신의 첫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