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수습
1. 어둠을 걷어내는 활자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 앞은 이른 아침부터 쏟아져 나온 취재진과 경찰 병력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새벽안개 사이로 푸른빛의 방송 중계차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었다.
카메라 렌즈 수십 대가 일제히 정문을 향해 번뜩였고, 마이크를 쥔 기자들의 숨결은 하얗게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선 취재 구역 한구석, 한서연은 메고 있던 낡은 숄더백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운 탓에 눈가에는 푸르스름한 피로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갈색 눈동자만은 테헤란로의 아스팔트 바닥에 쏟아졌던 여명보다 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태블릿 피시 화면에는 방금 전 데스크를 통과해 전국의 주요 포털과 뉴스망에 일제히 송고된 자신의 단독 특종 기사가 떠 있었다.
[단독] '네모 프로젝트'와 넥스트 큐브의 15년 조작 전모… 국가안전기획처 핵심 수뇌부 및 정관계 인사 47명 연루 확인.
그것은 단순한 고발 기사가 아니었다.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화재 사건의 진실부터,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가 시민들의 일상과 삶을 사각형의 틀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 했던 궤도 조작의 물리적 물증들이 낱낱이 담긴 거대한 단죄의 기록이었다.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와 통신 중계국 지하에서 목숨을 걸고 빼내 온 마스터 백업 데이터가 한 자 한 자 활자가 되어 세상을 강타하고 있었다.
서연은 화면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거기에는 태성그룹을 비롯한 굴지의 대기업들이 넥스트 큐브의 알고리즘에 자금을 대고 인사권을 넘겨준 내부 계약서 사본과, 검찰과 법원, 경찰의 상층부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수뇌부 명단이 빼곡했다.
"한 선배! 기사 메인 톱으로 걸리자마자 서버가 세 번이나 터졌습니다! 댓글이 벌써 10만 개가 넘었어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사회부 후배 기자가 서연의 곁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전국 언론사들이 전부 우리 기사를 인용 보도하느라 난리도 아닙니다. 외신들까지 서울 특파원 전원 동원해서 검찰청으로 몰려오고 있어요."
서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제 시작이야. 기사가 나간 건 신호탄일 뿐이고, 진짜 싸움은 저 안에서 벌어질 테니까."
그녀의 시선이 대검찰청 중앙 현관 계단을 향했다.
그곳에는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서늘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2. 특별수사본부의 칼날
대검찰청 7층,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 대회의실은 전시 상황을 방불케 했다.
벽면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화이트보드에는 넥스트 큐브를 정점으로 뻗어 나간 자금 흐름도와 국가안전기획처, 금융감독원, 주요 언론사 간부들의 이름이 붉은 마커로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책상마다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으로 들이닥쳐 쓸어 담아 온 수백 개의 파란색 플라스틱 압수물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파쇄되다 만 서류 조각을 맞추는 소리, 복사기와 스캐너가 쉴 새 없이 토해내는 기계음,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전화벨 소리가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금융분석팀! 넥스트 큐브의 페이퍼 컴퍼니인 골든 큐브 에셋 파트너스와 큐브 네트웍스 명의의 차명 계좌 140개 전부 동결 조치 끝났습니까?"
특수수사본부장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차장검사 최현석이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고함을 질렀다.
"예, 본부장님! 스위스와 케이맨 제도로 빼돌려진 2조 4천억 원 규모의 은닉 자산에 대해서도 인터폴 및 현지 금융당국에 긴급 동결 협조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외환관리법 위반은 물론이고 범죄수익은닉규제법까지 전부 적용해. 단 1원도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최현석 차장검사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지만,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수사 기록 철을 거칠게 넘겼다.
그 표지에는 [사건번호 2026-특수-0917: 넥스트 큐브 국가 전복 및 대규모 인권 유린 공작 사건]이라는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그 기록의 9할은 한서연 기자가 검찰 특별수사팀에 직접 건넨 암호 해독 하드디스크와 내부 고발 문건에서 나온 것이었다.
회의실 유리문이 거칠게 열리며 특수2부 부장검사가 굳은 표정으로 들어섰다.
"본부장님, 국가안전기획처 청사에 파견된 압수수색 수사팀에서 긴급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민경택 차장의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위조 여권 4개와 무기명 채권, 그리고 '코드 테라 인코그니타' 발동 당시 현장 지휘 녹취록 원본이 담긴 이동식 저장장치를 확보했습니다."
"민경택의 신병은?"
"도주로를 차단하고 인천공항 활주로 진입 직전에 긴급체포했습니다. 현재 호송 차량에 태워 서초동으로 압송 중입니다. 도착 예정 시간은 20분 뒤입니다."
최현석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드디어 그 괴물의 꼬리가 잡혔군. 체포영장 집행 즉시 구속영장 청구서 작성해. 도주의 우려, 증거 인멸의 우려, 사안의 중대성까지 모조리 적시해서 한 글자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옭아매."
그는 회의실 창밖으로 서초동 정문을 내려다보았다.
몰려든 인파 사이로 번쩍이는 경광등이 서서히 대검찰청 청사 진입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3. 무너진 권력의 민낯
대검찰청 앞 도로를 가르며 세 대의 검은색 승합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미끄러져 들어왔다.
앞뒤로 호송 경찰차가 호위하는 가운데, 가운데 차량의 문이 열렸다.
"민경택 차장이다!"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수백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하얗게 번쩍이는 빛의 장벽 속에서, 양팔을 수사관들에게 결박당한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가안전기획처 차장 민경택이었다.
단정하게 넘겼던 백발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고급 맞춤 양복은 흙먼지와 구김으로 볼품없이 구겨져 있었다.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암반을 폭파하고 수백만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시스템 계엄을 지휘하던 절대 권력자의 위세는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자들이 일제히 포토라인을 넘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민경택 차장님! 넥스트 큐브와 결탁해 테헤란로 지하 매몰을 지시한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국가 비상사태를 조작해 전 국민의 개인정보와 인생 궤도를 통제하려 했던 것이 사실입니까?"
"15년 전 연구소 화재 은폐 공작에도 관여하셨습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질문 세례가 비수처럼 쏟아졌지만, 민경택은 굳게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수갑이 채워진 그의 두 손은 하얗게 질린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취재진의 맨 앞줄에서 한서연이 차분하면서도 서슬 퍼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민경택 차장님. 지하 6층에 매몰시키려 했던 아이들과 연구원들이, 그리고 당신들이 'Class-D 희생 노드'로 분류해 파멸로 몰아넣었던 무고한 시민들이 지금 이 법정에 서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시스템이 정말로 국가를 위한 질서였다고 아직도 믿으십니까?"
그 목소리에 민경택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서연을 향했다.
그 눈 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자의 원초적인 공포가 뒤엉켜 있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민경택의 마른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제가 사라진 세상이… 어떤 지옥이 될지… 너희는 감당하지 못해… 곧 후회하게 될 거다…."
패배자의 마지막 저주 같은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서연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가 감당할 것은 지옥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입니다. 당신들의 가축 사육장은 이제 끝났습니다."
수사관들이 민경택의 팔을 낚아채 청사 현관 안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육중한 유리문이 닫히며 취재진의 함성이 뒤로 밀려났다.
철컥거리는 수갑 소리가 청사 복도의 대리석 바닥을 타고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서연은 그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뒤, 깊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옇던 구름 사이로 청명하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서초동 법조 타운의 빌딩 숲을 고르게 비추고 있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람들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검은 실선도, 억압적인 사각 격자의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4. 거미줄의 해체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수사는 거침없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서연이 제공한 데이터와 민경택의 비밀 금고에서 나온 압수물은 거대한 카르텔의 가장 깊숙한 환부를 정확히 도려내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검찰청 1층 브리핑룸에는 긴급 기자회견을 알리는 팻말이 내걸렸다.
푸른색 정장 차림의 최현석 차장검사가 단상에 올랐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일제히 타자기를 두드리거나 녹음기를 켜며 숨을 죽였다.
"특별수사본부의 1차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최 차장검사의 단호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울렸다.
"검찰은 금일 오전, 전 국가안전기획처 차장 민경택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살인미수, 특가법상 뇌물수수, 내란선동 및 국가보안시설 파괴 혐의로 전격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또한 넥스트 큐브와 결탁하여 불법적으로 민간인 사찰 및 궤도 통제 프로그램을 비호해 온 여야 국회의원 6명, 전직 보건복지부 차관, 금융감독원 부원장에 대해 전원 출국금지 조치를 완료하고 소환 통보를 내렸습니다."
기자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기관총 연사처럼 쏟아졌다.
"아울러 넥스트 큐브의 지주회사 역할을 해온 태성C&I 및 큐브 네트웍스 본사에 대한 3차 압수수색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은밀히 보급하려 했던 3세대 생체 제어 칩 및 스마트 헬스케어 기기 관련 생산 설비 전량을 압류했습니다. 이들이 불법적으로 수집하고 조작해 온 5,100만 국민의 인생 궤도 데이터베이스는 법원의 지휘 아래 전량 영구 폐기 절차에 돌입할 예정입니다."
브리핑룸 한가운데 앉아 있던 서연은 펜을 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15년 전,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가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을 불태우고 강정호 박사를 지하실의 괴물로 만들었을 때 덮여버렸던 진실이 마침내 공권력의 입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고 있었다.
어떤 타협도, 어떤 외압도 이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이미 전국의 스마트폰과 광장의 전광판을 통해 원본 데이터가 생중계되었고, 깨어난 대중의 눈과 귀가 검찰청을 서슬 퍼렇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했던 사각의 바벨탑이, 그 바닥을 지탱하던 썩은 기둥부터 차례대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5. 병실로 찾아온 평온
같은 시각, 서울 아산병원 본관 7층 704호 병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이 병실 안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어깨의 관통상 부위를 두껍게 붕대로 감은 강정호 박사가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수술 경과는 매우 좋았다.
부서진 쇄골과 신경 다발은 무사히 봉합되었고, 15년간 그를 옭아맸던 차가운 생체 전극의 독소도 링거를 통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침대 곁에 놓인 간이의자에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거칠고 야윈 손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행여 이 모든 것이 꿈일까 두려운 듯 조용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15년간 눈물로 지새웠던 그녀의 눈가에는 여전히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그 표정만은 전에 없이 맑고 평온했다.
병실 구석,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강우진은 벽걸이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음량을 가장 낮게 줄여놓은 화면 속에서는 대검찰청 브리핑룸에서 단호하게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최현석 차장검사의 모습과, 그 아래를 지나가는 자막들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속보] 넥스트 큐브 잔존 이사진 전원 긴급체포… 정관계 로비 장부 확보.
[속보] 검찰, '인생 궤도 조작' 피해자 구제 특별위원회 설치 검토.
우진은 조용히 주머니 속을 매만졌다.
그곳에는 더 이상 차가운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도, 권총 탄창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평범한 지갑과 핸드폰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짚어보았다.
4센티미터의 희미한 수술 흉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바늘로 찌르는 듯 쑤셔오던 편두통도, 시야를 어지럽히던 푸른색 궤적선도, 타인의 머리 위에 떠오르던 네모와 세모의 기하학체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창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물결과, 강변북로를 따라 제각각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평범한 일상뿐이었다.
"우진아."
조용한 목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눈을 뜬 강정호 박사가 힘겹게 입을 떼고 있었다.
우진은 서둘러 침상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다른 한쪽 손을 잡았다.
"아버지, 깨어나셨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다. 통증은… 별로 없다."
강정호는 미약하게 웃음을 지으며 벽걸이 텔레비전의 뉴스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넥스트 큐브의 로고와 체포되는 간부들의 모습이 비쳤다.
강정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결국… 끝이 났구나."
"네, 아버지. 서연 씨가 특종 기사를 전부 내보냈고, 검찰에서도 전원 구속 수사에 들어갔어요. 이제 그 누구도 아버지를 가둘 수 없고, 사람들의 인생을 조작할 수도 없어요."
강정호는 아들의 손을 꽉 쥐었다.
메마르고 주름진 손이었지만, 그 온기만은 우진의 심장 깊숙한 곳까지 전해져 왔다.
"고맙다, 우진아…. 내가 시작했던 끔찍한 괴물을… 네가 끝내주었구나. 평생 너에게 짊어지게 했던 그 무거운 짐을… 드디어 내려놓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씀 하지 마세요."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단단했다.
"아버지가 버텨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제 다 끝났으니까… 아무 생각 마시고 치료에만 전념하세요."
어머니 역시 눈물을 훔치며 남편의 이마를 가만히 쓸어 넘겼다.
"그래요, 여보. 우리 이제… 진짜로 같이 살아요. 남들처럼 밥 먹고, 남들처럼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살아요."
세 사람의 손이 병상 위에서 하나로 포개졌다.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얼어붙어 있던 시간의 틈새가, 비로소 따뜻한 체온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6. 문 너머의 발걸음
똑똑.
조용한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단정한 셔츠에 외투를 걸친 한서연이 피로 속에서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섰고, 그 뒤로 붕대를 감은 팔을 목에 건 박태호와, 한층 성숙해진 눈빛의 윤채린이 따라 들어왔다.
"박사님, 의식이 돌아오셨군요."
서연이 조용히 다가와 강정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연 기자…."
강정호가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큰일을 해냈더군. 텔레비전으로 다 보았네. 정말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우진 씨와 태호 씨, 채린이가 목숨을 걸고 지켜준 데이터를 세상에 전했을 뿐이에요."
서연은 우진을 바라보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 눈빛 속에는 사선을 함께 넘어온 동료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채린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강정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더 이상 불안하게 회전하던 은빛 동그라미도, 인과율의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보통의 여고생으로 돌아온 채린의 얼굴에는 맑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박사님, 저 파주 벙커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어요. 우진 오빠가 끝까지 약속 지켜줬어요."
"그래… 채린아. 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너를 정말 자랑스러워하셨을 게다. 그 무서운 시스템의 족쇄 속에서도… 너는 끝까지 자유를 잃지 않았어."
강정호의 따뜻한 말에 채린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태호 역시 벽에 기대어 서서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넥스트 큐브 지하에서 동생들… 지혜랑 영훈이도 무사히 구출돼서 다른 병동에서 안정 취하고 있습니다. 검찰에서 피실험자 아이들 전원에 대해 국가 차원의 신변 보호와 의료 지원을 약속했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강정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한때 차가운 실험실과 살상 병기의 굴레에 묶여 있던 아이들이,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이름을 되찾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연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더니 우진을 보며 말했다.
"우진 씨, 잠시 밖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따뜻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녀오렴. 친구분들이랑 이야기 나누고 오렴."
7. 각본 없는 내일을 향해
병원 7층 복도 끝, 한적한 휴게실 테라스로 나온 우진과 서연은 난간에 기대어 섰다.
시원한 늦가을의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멀리 올림픽대로를 따라 붉고 노란 불빛을 켠 차들이 길게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검찰 발표, 방금 다 확인했어요."
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어요, 서연 씨. 혼자서 그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보도하느라 정말 힘들었을 텐데."
"제가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서연은 커피 캔을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기사가 나가고 나서, 방송국 데스크로 협박 전화도 수백 통이 걸려왔어요. 네모 프로젝트에 줄을 대고 있던 언론사 간부들이 기사를 내리라고 길길이 날뛰었죠. 하지만 이번엔 통하지 않았어요. 이미 시민들이 진실을 다 알아버렸거든요. 광장과 인터넷에서 수백만 명이 동시에 우리 기사를 공유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 누구도 감히 덮을 엄두를 내지 못하더라고요."
"이제… 정말로 사각 격자는 끝난 거군요."
우진의 말에 서연이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우진 씨? 머리는… 더 이상 안 아파요?"
"네. 거짓말처럼 아무런 통증도 없어요."
우진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15년 동안… 제 눈앞에는 항상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떠다녔어요. 저 사람은 내일 안전한 네모일까, 아니면 파멸로 꺾이는 세모일까. 그걸 보면서 늘 두려웠고, 때로는 내가 그 궤도를 바꿀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저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내일 웃을지, 울을지, 성공할지, 실패할지… 저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서연이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겠죠."
"네."
우진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해진 각본이 없다는 건, 때로는 불안하고 무서운 일이지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때, 서연이 가방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태성C&I에서 온 거예요."
서연의 말에 우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회사에요?"
"네. 넥스트 큐브와 결탁했던 최원석 부회장 라인이 전부 구속되면서,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인 비상경영위원회가 꾸려졌대요. 우진 씨가 과거에 박민재 팀장의 모함을 벗고 소스코드를 지켜냈던 일, 그리고 이번에 시스템의 비리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 참작돼서… 복직 및 특별 승진 발령을 내리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자리예요."
우진은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안정된 대기업의 직함.
남들이 평생을 바쳐 도달하고자 하는 보장된 궤도.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역삼역으로 향하며 백색 네모의 일상을 지키려 아등바등하던 자신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지금의 우진에게 그 자리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잘 짜인 사각형일 뿐이었다.
우진은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부드럽게 서연에게 다시 밀어 넣었다.
"우진 씨?"
서연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우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이제 회사 안에서도 우진 씨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탄탄대로가 열린 거나 다름없는데…."
"그 탄탄대로라는 게… 결국 시스템이 파놓은 또 다른 규격이잖아요."
우진은 테라스 난간을 짚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들이 정해준 레일 위를 달리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요.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때로는 길을 잃더라도… 이제는 제 발로 온전히 걸어가 보고 싶어요.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그 불확실성 속으로요."
서연은 한동안 우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납득했다는 듯 깊은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하긴… 강우진 씨다운 대답이네요."
"사표는 내일 정식으로 제출할 생각입니다. 남은 짐도 좀 정리하고요."
"그럼 그 이후엔 뭘 할 건데요?"
"글쎄요."
우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웃었다.
"우선은 아버지 퇴원하실 때까지 어머니 곁에서 간호해 드려야죠. 그리곤… 채린이 검정고시 공부하는 것도 좀 도와주고, 태호 씨랑 같이 동생들 돌볼 거처도 알아봐야 하고요.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거기에는 거대한 음모를 부수고 살아남은 자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깊은 유대와, 새로운 내일을 향한 설렘이 번져 있었다.
"서연 씨는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저요?"
서연이 커피 캔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전 여전히 기자로 남을 거예요. 넥스트 큐브는 무너졌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인의 삶을 조작하고 억압하려는 자들이 차고 넘치니까요. 그들을 끝까지 쫓아서 기록해야죠. 진짜 인간의 이야기를 쓰면서요."
"서연 씨답네요."
우진의 진심 어린 말에 서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맑은 밤공기를 타고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한강 너머로 도시의 불빛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울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의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기쁨에 가슴 벅차하고 있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표도, 사전에 배정된 비극도 없는 세상.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부딪히고 깨지며 만들어가는 불완전하고도 아름다운 혼돈.
우진은 가슴 깊은 곳까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 채우는 공기는 살아있다는 감각 그 자체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더 이상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맺히지 않았다.
오직 끝없이 펼쳐진 칠흑 같은 밤하늘과, 그 어둠을 묵묵히 밝히며 빛나는 무수한 별빛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각자의 궤도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의 찬란한 빛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