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화해
1. 백색의 병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아릿하게 찔렀다.
지하 100미터 깊이에서 들이마시던 유독가스와 타는 듯한 전자기 냄새, 흙먼지와 콘크리트 가루 대신 밀려든 것은 지극히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알코올 향이었다.
강우진은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 집중치료실 앞 복도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마와 뺨에 묻은 검댕은 대충 물티슈로 닦아냈지만, 찢겨 나간 옷자락 틈새로 보이는 살갗에는 여전히 시퍼런 멍과 찰과상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낯설었던 것은 머릿속의 고요였다.
관자놀이를 마치 불에 달군 꼬챙이로 후벼 파는 듯하던 만성적인 편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아도 더 이상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떠오르는 기하학적 도형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규격화된 백색 네모도, 파멸을 예고하며 붉게 회전하던 세모도, 보이지 않는 하늘 높은 곳으로 뻗어 올라가던 섬뜩한 꼭두각시 줄선도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들,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서성이는 보호자들의 머리 위에는 오직 텅 빈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평범함.
그토록 원했으나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지극히 온전한 인간의 시야였다.
"우진 씨."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이 고개를 돌리자, 한 손에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든 한서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 역시 흙탕물과 먼지로 엉망이었고, 소매 끝자락은 불에 그을려 너덜거렸지만, 두 눈만큼은 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연은 따뜻한 온기가 남은 캔커피 하나를 우진의 손에 쥐여주며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강정호 박사님 수술, 끝났대요. 총탄이 쇄골 아래를 스치며 관통해서 다행히 폐나 주요 동맥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요. 신경 접합도 무사히 끝났고, 지금은 일반 회복 병실로 옮겨졌어요."
캔에서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도를 느끼며 우진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거대한 바위 하나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살아계신 거군요."
"네. 워낙 장기간 저체온 상태로 챔버에 갇혀 계셨던 터라 근육 위축과 신경 피로가 심하지만,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대요. 지금 막 마취에서 깨어나셨다고 해서…… 면회가 가능하다고 해요."
서연의 말에 우진은 손에 쥔 커피 캔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수많은 총알이 빗발치고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손이었다.
하지만 막상 1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의 간극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자,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그 얼굴을 마주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연이 그런 우진의 어깨를 조용히 도닥였다.
"올라가 봐요. 박사님, 눈 뜨시자마자 우진 씨부터 찾으셨어요."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무거웠지만, 피할 수 없는 걸음이었다.
2. 침묵의 무게
본관 7층 704호 1인실 병실.
문가에 다가서자 옅은 소독약 냄새와 함께 심전도 측정기가 규칙적으로 내는 전자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삐-익, 삐-익.
그 기계음은 지하 벙커에서 들었던 서늘한 양자 코어의 맥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약하고 불규칙하지만, 분명하게 한 인간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는 생명의 소리였다.
우진은 문손잡이를 잡고 한참 동안 망설였다.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15년이었다.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관자놀이가 찢겨 나가고, 머릿속에 지옥 같은 두통과 함께 기괴한 도형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그날 이후로 흘러간 세월이었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지하의 차가운 바닥에서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건넸던 그 한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 잔혹했던 배후 시스템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스스로 모든 죄업을 짊어지고 자신의 머리에 칼을 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가슴에 남은 생채기는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봉합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남겨진 지옥 같은 가난, 미쳐버릴 것 같은 편두통을 견디며 홀로 밤마다 벽을 긁어야 했던 유년의 공포,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사각의 틀에 맞춰 살아가야 했던 잿빛 청춘의 시간들.
우진은 조용히 숨을 삼키며 손잡이를 돌렸다.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하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창밖에서는 테헤란로의 소용돌이와 무관하게 맑게 개인 늦은 아침 햇살이 창틀을 넘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환자복을 입은 마른 체구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는 두꺼운 압박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앙상하게 마른 코와 입에는 산소 공급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15년간 햇빛 한 줌 보지 못하고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혹사당했던 육체는 지나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감겨 있던 강정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초점을 잃고 흐릿하던 눈동자가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우진의 모습을 포착하는 순간, 남자의 눈빛에 거대한 파도가 일렁였다.
"……우진이니?"
산소마스크 너머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바짝 메말라 갈라져 있었다.
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
침대 옆 철제 협탁 위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삐걱 소리를 내며 앉았다.
가까이서 마주한 아버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작고 늙어 있었다.
기억 속 30대의 당당하고 강인했던 연구원의 모습은 간데없고, 백발이 성성한 주름투성이의 노인이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직 심전도 모니터의 규칙적인 신호음만이 적막을 메웠다.
강정호의 떨리는 시선이 우진의 얼굴로 향했다.
우진의 찢겨진 옷깃, 뺨의 찰과상, 그리고 무엇보다 우진의 정수리 위 허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칠흑빛 꼭두각시 줄도, 붉게 회전하는 파멸의 세모도, 차가운 사각의 족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강정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라졌구나……."
거칠게 떨리는 노인의 손이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와 허공을 더듬었다.
"정말로…… 네 머리 위에서…… 그 저주가…… 사라졌어."
3. 15년의 응어리
우진은 아버지가 내민 떨리는 손을 쳐다보았다.
핏줄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링거 바늘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든 손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곧바로 그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고 시커먼 무언가가 불쑥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렇게 기쁘세요?"
우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서늘한 날이 서 있었다.
강정호가 흠칫하며 젖은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우진아……."
"사라졌죠. 다 끝났으니까요. 당신이 만든 그 끔찍한 기계도, 도시를 통제하던 격자망도, 날마다 내 뇌를 깨부술 것처럼 파고들던 그 빌어먹을 편두통도 다 사라졌어요. 이제 만족하십니까?"
말이 튀어나갈 때마다 15년간 가슴속에 응어리져 있던 독기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억누르려 했지만 제어할 수 없었다.
지하 bunker에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것과, 지난 세월 동안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에 대해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어릴 때요.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에…… 난 내가 무슨 괴물이 된 줄 알았어요."
우진의 턱 근육이 굳어졌다.
"관자놀이가 찢어지듯 아파서 밤새 울어도 달래줄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머리 위에 네모니 세모니 하는 것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친구들한테 말했더니 날 정신병자 취급하더군요. 어머니는 매일 밤 방구석에서 숨죽여 울고 계셨고, 난 내가 왜 이런 눈을 갖게 됐는지, 왜 아버지가 사라졌는지 단 한 순간도 이해하지 못한 채 15년을 살았어요."
우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신이 뭔데 내 머리를 가르고 내 기억을 지웠습니까? 당신이 뭔데 날 평생 그 끔찍한 환각과 두통 속에 방치해 둔 거냐고요!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시스템의 족쇄를 끊기 위해서였다고? 그게 일곱 살짜리 어린애한테 할 짓이었습니까?"
참아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왔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낮게 짓이겨 토해내는 한마디 한마디가 병실의 공기를 무겁게 찢어발겼다.
강정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아들의 칼날 같은 원망을 온몸으로 받아내듯, 마른 입술을 바르르 떨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미안하다…… 우진아……."
강정호의 목에서 꺾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죽일 놈이야. 네 말이 다 맞아…… 난 아비 자격도 없는 버러지 같은 놈이다."
노인의 메마른 가슴이 불규칙하게 들썩였다.
심전도 모니터의 그래프가 요동치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15년 전 그날…… 넥스트 큐브 놈들이 연구소를 덮치고, 아이들을 끌고 가려 했을 때…… 난 내 손으로 괴물을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을 완벽한 통제 아래 두겠다는 내 오만이, 내 아들과 무고한 아이들의 뇌간에 칩을 박아 넣는 괴물을 낳았다는 걸……."
강정호는 떨리는 왼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네 관자놀이에 메스를 댈 때…… 내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아니. 차라리 내 손목을 자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칩을 그냥 두면 넌 넥스트 큐브의 완벽한 꼭두각시 노드로 영원히 묶여버릴 운명이었어. 자아를 잃고, 기계처럼 살다가 버려질 운명이었단 말이다."
눈물이 강정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기억이라도 지워야 했다. 칩을 떼어내며 망가진 신경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그들이 널 추적하지 못하게 하려면…… 백신을 심고 궤도를 끊어낼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 대가가 네게 그토록 끔찍한 형벌이 될 줄은…… 이렇게 오랜 세월 널 지옥 속에서 살게 할 줄은 몰랐다."
강정호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눈동자에는 아들을 향한 뼈아픈 참회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날 원망해라. 평생을 저주해도 좋다. 용서하지 마라, 우진아…… 하지만 제발…… 네 몸을 상해가며 날 구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난 그냥 그 지하 챔버에서 시스템과 함께 타 죽었어야 마땅한 놈이었는데……."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아버지의 모습에, 우진의 가슴속에서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분노의 칼날이 힘없이 꺾여 내려갔다.
저 초라한 노인은 거대한 음모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세상을 구하려다 실패하고, 자신의 오만에 짓밟혀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던 한 명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었다.
4. 흉터 위의 손길
"타 죽었어야 했다고요?"
우진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탈력감과 서글픔이 차올라 있었다.
"그럼 난요? 난 평생을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이 고통의 이유를 물으며 살아야 합니까? 당신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내 잃어버린 15년은 대체 어디서 보상받아야 하는데요."
우진은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쥔 손등 위로 투두둑,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참으려 애썼지만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며 방바닥을 구를 때마다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이름.
왜 나를 버렸느냐고, 왜 나에게 이런 짐을 지워주었느냐고 멱살을 잡고 따져 묻고 싶었던 유일한 사람.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자신보다 더 비참하게 울고 있었다.
"살아계셔서……."
우진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죽지 않고 내 눈앞에 있어 줘서…… 이렇게 원망이라도 쏟아낼 수 있게 해줘서……."
강정호는 멍하니 우진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우진도 피하지 않았다.
거칠고 메마른 아버지의 손바닥이 우진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자리 잡은 4센티미터의 흉터 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15년 전 자신이 직접 남겼던 그 끔찍한 상처를 지워내기라도 하려는 듯, 노인의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 아들아……."
손바닥을 통해 아버지의 체온이 전해져 왔다.
차가운 기계의 온도가 아닌,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인간의 체온이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그 흉터가, 비로소 아물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우진의 전신을 감쌌다.
우진은 아버지의 메마른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상처투성이의 손과 손이 맞닿았다.
그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15년간의 고통과 단절을 건너뛰어, 마침내 서로에게 닿은 최초의 온기였다.
"이제 다 끝났어요, 아버지."
우진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은 채 말했다.
"네모도, 세모도…… 당신을 가두었던 그 망할 큐브도 이제 없어요. 전부 부서졌습니다."
강정호는 소리 없이 오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지배하던 오만과 죄책감의 사슬이 풀려나간 노인의 얼굴에는, 마침내 평온한 안식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5. 15년 만의 문
그때였다.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우진과 강정호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문간에 한 여인이 멈춰 서 있었다.
빛바랜 카디건에 단정한 옷차림,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맞은 주름진 얼굴.
파주 거점 7번 벙커에서 우진이 지상으로 떠나기 전,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짓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손에는 작은 보온병과 갈아입을 옷가지가 든 가방이 들려 있었다.
파주 은신처의 통신이 복구되고 계엄군의 포위가 풀리자마자, 서연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발걸음이 문턱에서 굳어버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백발의 남자를 응시했다.
15년 전, 비 오는 새벽에 '곧 돌아오겠다'는 쪽지 한 장만을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던 남편.
죽은 줄로만 알고, 가슴에 묻은 채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 산소마스크를 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툭.
어머니의 손에서 가방과 보온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온병 뚜껑이 굴러가며 맑은 쇠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 당신……?"
어머니의 입술에서 떨려 나온 음성은 바람 빠진 소리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어머니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침대 위의 강정호는 산소마스크를 벗으려 허둥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옥…… 옥순 씨……."
수술 부위가 당기는지 강정호가 헛숨을 들이켰지만, 그의 시선은 아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내가…… 내가 돌아왔소…… 옥순 씨……."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그녀의 메마른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쏟아져 내렸다.
침대 곁에 다다른 어머니는 떨리는 두 손으로 강정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생기를 잃고 거칠어진 살결, 깊게 파인 주름, 차가운 붕대.
어머니는 손끝으로 남편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살아있었어…… 정말로 살아있었어……."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15년 동안 홀로 가정을 지키며, 미쳐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삼켜야 했던 그 모든 한과 설움이 일거에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다.
강정호는 부상당하지 않은 왼팔을 뻗어 아내의 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해…… 내가 죽을죄를 졌소……."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었다.
그곳에는 어떤 과학도, 기하학적 궤도도, 시스템의 통제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직 오랜 세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찢겨 나갔던 평범한 부부의 아프고도 절절한 재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우진의 눈에서도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하 100미터의 지옥을 뚫고,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구해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순간에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울음을 삼키며 한 손을 뻗어 우진의 소매를 잡았다.
"우진아…… 이리 와보렴……."
어머니의 부름에 우진은 다가가 두 사람의 곁에 섰다.
어머니는 우진의 손을 끌어당겨 강정호의 손 위에 겹쳐 놓았다.
강정호의 거친 손, 어머니의 주름진 손, 그리고 우진의 상처투성이 손이 하나로 겹쳐졌다.
15년 만이었다.
산산조각 났던 가족의 시간이, 마침내 하나의 온전한 고리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강정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과 아내의 손을 꽉 쥐었다.
"우리가…… 다시 모였구나. 우리가……."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세상 그 어떤 법칙보다도 견고하고 따뜻했다.
정해진 궤도 따위는 없었다.
누군가 미리 계산해 둔 운명도, 사건의 시간표도 없었다.
하지만 서로를 붙들고 있는 이 온기만 있다면, 그 어떤 불확실한 내일이 닥쳐오더라도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6. 창밖의 새로운 바람
한참 동안 이어진 눈물의 시간이 지나고, 병실 안에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침묵이 찾아왔다.
기력을 다한 강정호는 아내의 손을 꼭 쥔 채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수술 후의 피로와 15년간 쌓였던 긴장이 마침내 풀려난 듯, 그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어머니는 침대 곁에 앉아 잠든 남편의 헝클어진 백발을 조심스레 쓸어 넘겨주고 있었다.
우진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병실 창가로 다가섰다.
창문을 조금 열자, 시원하고 상쾌한 초가을의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지하의 텁텁한 흙냄새를 완전히 씻어내는, 살아 숨 쉬는 세상의 냄새였다.
저 멀리 테헤란로의 빌딩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넥스트 큐브 사옥이 있던 자리는 지하 구조물의 대함몰로 인해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경찰차와 소방차들의 경광등이 붉고 푸르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 위를 오가는 수많은 자동차들과 인도 위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사람, 멈춰 서서 무너진 빌딩 쪽을 가리키며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시스템이 정해준 사각의 안전지대도, 파멸의 궤도도 없는 텅 빈 머리 위.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혼란스러울 것이고, 때로는 비틀거리며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의 특권이었다.
스마트폰 진동음이 낮게 울렸다.
주머니에서 꺼내어 확인하자, 한서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국가안전기획처 청사 압수수색 들어갔어요.
민경택 차장 긴급 체포 영장 발부됐고요.
이제 진짜 수습이 시작되려나 봐요.]
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아, 그리고 방금 채린이 도착했어요!
태호 씨랑 같이 로비에서 커피 마시고 있대요.
얼굴 보러 올라오겠대요.]
화면을 바라보던 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모두가 살아남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사투를 벌였던 동료들이, 이제 각자의 온전한 삶을 되찾고 있었다.
우진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었다.
더 이상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단절된, 순수하고 광활한 공간.
관자놀이에 손을 얹어보았다.
4센티미터의 흉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저주나 낙인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지옥을 뚫고 살아남아, 마침내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쟁취해 낸 훈장이었다.
"우진아."
등 뒤에서 어머니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우진이 뒤를 돌아보자, 어머니가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바람이 참 좋구나."
"네, 어머니."
우진은 창가에서 돌아서서 어머니를 향해 걸어갔다.
"정말 좋은 날이에요."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세상에서, 강우진의 진짜 인생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