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바벨탑
1. 꺼져가는 회로와 마지막 총성
기계식 비상 정지 레버가 육중한 굉음과 함께 끝까지 내려앉았다.
지하 4구역 전체를 메우고 있던 고압 전류의 웅웅거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수만 개의 광섬유 케이블을 타고 흐르던 푸른빛 데이터의 물결이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수십 년 동안 도시의 밤낮을 계산하고 인간의 수명을 초 단위로 갈라치던 거대한 연산 회로가 숨을 멈추었다.
정적은 찰나에 불과했다.
전원이 끊긴 메인 랙 곳곳에서 축적되었던 과전압이 갈 곳을 잃고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파직, 파지지직!
튀어 오르는 불꽃 사이로 서지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어깨 너머로 투사되던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홀로그램은 이미 수만 조각의 노이즈로 바스러져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권총을 쥔 서지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자신이 쏜 총탄에 어깨를 꿰뚫린 채 바닥에 쓰러진 강정호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허탈감과 부정(否定)의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왜…… 왜 멈추지 않는 거지?"
서지훈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금 총구를 강정호의 이마로 돌렸다.
"심장을 쏘면…… 뇌간을 부수면 다시 연산이 돌아갈 텐데. 네놈의 심장이 뛰어야 오르비스가 숨을 쉴 텐데……!"
"서지훈!"
강우진이 번개처럼 몸을 던졌다.
총성이 다시 울리기 전, 우진의 군화가 서지훈의 손목을 걷어찼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권총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붉게 달아오른 냉각 파이프 너머로 떨어졌다.
연이어 꽂힌 우진의 주먹이 서지훈의 안면을 정확히 강타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서지훈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선 서지훈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소용없다, 강우진."
서지훈이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아비가 레버를 내린 순간, 냉각 펌프도 멈췄어. 액체 헬륨 순환이 끊겼다고. 지하 100미터에 갇힌 노심 슬러지가 식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네놈들이 더 잘 알 텐데?"
우진의 귓가로 지하 암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기괴한 진동이 전해졌다.
쿠구구구구……!
그것은 지진이 아니었다.
절대영도에 가깝게 냉각되어 있던 초전도 자석 코일들이 전력 차단과 함께 순식간에 임계 온도를 넘어서며 내부에서부터 팽창하는 굉음이었다.
섭씨 2,000도를 웃도는 플라스마 슬러지가 냉각관 외벽을 녹여내며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남은 시간은 2분도 안 돼. 이 구역 전체가 통째로 녹아내려 증발할 거다."
서지훈은 벽면에 매달린 채 헐떡이면서도 시선을 천장으로 던졌다.
그의 머리 위에 삐걱거리며 떠 있던 텅 빈 암흑의 사각 프레임마저 빛을 잃고 녹슬어 부스러기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완벽한 통제와 규격을 신봉하던 설계자의 왕국이 물리적 화염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2. 아버지의 무게
"우진아……."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강정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관통당한 왼쪽 어깨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낡은 방한복을 검붉게 적시고 있었다.
"박사님!"
달려온 한서연이 품에서 지혈대를 꺼내 상처 부위를 짓눌렀다.
거즈가 닿자마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린 강정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아들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틀렸다. 15년 동안 코어에 묶여 있던 내 신경망이…… 이미 한계야. 전력이 끊기면서 역류한 쇼크만으로도…… 얼마 못 버텨."
"헛소리하지 마세요."
우진이 이를 악물며 아버지의 상체를 끌어올렸다.
"이제야 만났는데, 겨우 여기서 끝내자고 그 먼 길을 돌아온 줄 아십니까?"
우진은 지체 없이 아버지를 등 뒤로 둘러업었다.
어깨에 닿는 아버지의 육체는 15년 전 기억 속의 모습보다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성인 남성의 무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바짝 마른 뼈마디가 우진의 쇄골을 짓눌렀다.
영양실조와 오랜 세월 냉각 챔버 속에서 근육이 퇴화해 버린 탓이었다.
이 가벼운 몸뚱이로, 이 부서질 듯한 숨결로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를 홀로 짊어지고 버텨왔다는 사실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었다.
"우진아, 통로가 무너진다!"
박태호가 수직 샤프트 입구의 잔해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부수며 소리쳤다.
쿵!
콰르릉!
천장을 지탱하던 H빔 하나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콘크리트 파편과 석면 가루가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시야는 이미 자욱한 회색 먼지와 매캐한 케이블 타는 연기로 뒤덮였다.
우진은 소총 멜빵을 조여 아버지를 등에 단단히 결속시켰다.
아버지를 지탱하는 두 다리에 터질 듯한 힘을 주었다.
초인적인 근력도, 앞길을 미리 보여주던 푸른빛의 궤적선도 이제는 없었다.
오직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 본연의 육체뿐이었다.
허벅지 근육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지만 우진은 한 발을 내디뎠다.
"서연 씨, 태호야! 앞만 보고 달려! 뒤돌아보지 마!"
"네!"
태호가 앞장서서 낙하하는 파편을 쳐내며 수직 샤프트의 사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서연 역시 권총을 고쳐 쥐고 우진의 등 뒤를 엄호하며 뒤를 따랐다.
3. 맹신의 종말
"가지 마라……."
뒤편의 화염 속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지훈은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바닥에 뒹구는 부서진 모니터 조각과 타버린 메인보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섭씨 수천 도의 액체 헬륨 증기와 고온 플라스마가 뿜어져 나오며 콘크리트 바닥을 유리질로 녹여내고 있었다.
벽면 전체를 채우고 있던 수만 대의 서버 랙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불기둥을 뿜어 올렸다.
쾅!
콰광!
"나가지 마라…… 지상에는 아무것도 없어."
서지훈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초점을 잃은 그의 두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들거렸다.
"통제가 사라진 세상은 지옥이야. 서로를 물어뜯고, 끝없는 우연과 불행에 치여 울부짖게 될 거다! 정해진 시간표도…… 안전한 사각의 울타리도 없는 곳에서…… 인간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해!"
천장의 거대한 환기 덕트가 굉음과 함께 통째로 뜯겨져 내렸다.
그 거대한 철제 구조물이 서지훈이 서 있는 메인 서버 랙의 중심부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서지훈의 시선통로 끝에 우진의 눈이 닿았다.
우진의 망막에 비친 서지훈의 얼굴에는 더 이상 오만함이나 분노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를 평생 옥죄고 있던 '암흑의 프레임'이 완전히 소멸한 자리.
서지훈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불타오르는 전산실도, 그를 짓누르러 떨어지는 쇳덩이도 아니었다.
아무런 기하학적 선도, 꼭두각시 줄도, 다음 행동을 지정하는 어떤 지시문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정해진 것 하나 없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차갑고도 거대한 '텅 빈 허공'이었다.
서지훈은 그 허공을 바라보며 생전 처음 보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공포였다.
자신의 삶을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해 보지 못한 자가 마주한, 무한한 자유에 대한 원초적인 전율이었다.
"아…… 아아……."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쿠콰콰콰쾅!
거대한 철골과 수십 톤의 콘크리트 암반이 메인 서버 랙을 완전히 덮쳐 눌렀다.
서지훈의 형체는 솟구치는 화염과 붉은 슬러지의 파도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신이 신이라 믿었던 시스템의 거대한 무덤 속으로, 스스로 만든 바벨탑의 잔해와 함께 영원히 매몰되는 순간이었다.
4. 수직의 사투
"우진이 형! 빨리!"
수직 사다리 중턱에 매달린 박태호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우진은 등 뒤의 아버지를 고쳐 메고 강철 사다리의 첫 단을 움켜쥐었다.
사다리의 차가운 금속 표면마저 하부에서 치솟는 열기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치익!
손바닥의 가죽 장갑이 녹아붙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등 뒤에 업힌 강정호의 몸에서 맥없이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진아…… 나를 내려놓아라……."
강정호의 쉰 목소리가 우진의 귓가를 긁었다.
"너 혼자라면…… 서연이와 태호와 함께라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내 무게 때문에…… 다 같이 죽는다……."
"입 다무세요."
우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 단을 기어올랐다.
"15년을 버티셨잖습니까. 고작 2분을 못 버텨서 포기하겠다고요?"
"나는…… 죗값을 치러야 해. 그 아이들을…… 네 인생을 망가뜨린 건 나다……."
"그 죗값, 살아서 갚으세요."
우진이 피 묻은 손으로 다음 사다리 단을 악착같이 쥐었다.
"죽어서 도망칠 생각 하지 마세요. 지상으로 나가서, 내 손으로 평범하게 지어드리는 밥 드시면서…… 매일매일 사죄하면서 사세요! 그러니까 꽉 잡으세요!"
우진의 고함에 강정호의 바들거리던 두 팔이 떨리는 힘으로 아들의 목을 감싸 안았다.
어깨의 관통상에서 흐른 피가 우진의 목덜미를 타고 가슴팍으로 흘러내렸다.
뜨겁고도 진득한 피의 감촉이 우진의 감각을 날카롭게 깨웠다.
아래쪽에서 거대한 폭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메인 냉각탑의 1차 격벽이 터져 나가는 굉음이었다.
샤프트 하부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의 열풍이 수직 통로를 타고 화염 방사기처럼 치솟았다.
"서연 씨, 머리 숙여요!"
우진이 외치며 사다리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바로 아래 칸을 오르던 한서연의 등 뒤로 불길의 혓바닥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칼 끝이 타들어 가며 탄내가 진동했다.
서연은 고통에 비명을 삼키면서도 위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올라가요! 멈추면 끝장이에요!"
사다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하 4구역에서 지상까지는 최소 40미터 이상의 수직 고도였다.
평소라면 몇 분 만에 주파할 거리였지만, 60킬로그램이 넘는 성인을 등에 업고 유독가스와 산소 부족에 시달리는 지금은 에베레스트의 절벽보다 아득했다.
우진의 시야 가장자리가 점차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산소가 부족한 뇌가 경고 신호를 보냈다.
'조금만 더…… 한 걸음만 더…….'
능력이 사라진 눈앞에는 아무런 지표도 나타나지 않았다.
과거를 보여주던 자수정빛 선도, 미래를 가르쳐주던 푸른빛 궤적도 없었다.
오직 시커먼 검댕으로 뒤덮인 녹슨 강철 디딤판만이 눈앞에 어른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발로, 자신의 근육으로, 자신의 의지로 딛는 한 걸음.
그것이야말로 시스템의 각본을 찢어발긴 인간의 진짜 궤도였다.
5. 맨홀 너머의 빛
"맨홀이다!"
앞서 올라가던 태호의 떨리는 외침이 통로를 울렸다.
머리 위 5미터 지점, 완고하게 닫혀 있던 원형 주철 맨홀 뚜껑 틈새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지상의 공기였다.
비릿한 냉각수 냄새와 유독가스로 가득 찬 지하 벙커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차갑고 쌉싸름한 서울의 밤공기.
"잠겨 있습니다! 비상 빗장이 걸려 있어요!"
태호가 사다리에 다리를 걸고 온몸으로 맨홀을 밀어 올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는 2차 연쇄 폭발의 진동이 샤프트 벽면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쩌저적, 콰앙!
수직 통로를 지탱하던 콘크리트 내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며 하부 사다리부터 차례로 뜯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탈출로 자체가 붕괴하며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찰나였다.
"비켜 봐!"
우진이 사다리를 박차고 올라가 태호의 옆에 붙었다.
등 뒤의 아버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쪽 팔로 단단히 감싸 쥔 채, 피투성이가 된 다른 쪽 어깨를 맨홀 하부에 밀어 넣었다.
"태호야,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민다!"
"네!"
"하나…… 둘…… 셋!"
우드득!
두 사람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우진의 쇄골에서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동료들을 살려야 한다는 원초적인 생존의 투지가 온몸의 신경계를 태우며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쿵!
콰득!
오랜 세월 녹슬어 굳어 있던 강철 빗장이 비틀리는 쇳소리가 났다.
"서연 씨도!"
사다리 바로 밑에서 서연이 두 손을 뻗어 맨홀 테두리를 함께 밀어붙였다.
세 사람의 힘이 모인 순간, 묵직한 주철 뚜껑이 허공으로 덜컹거리며 젖혀졌다.
투광등 같은 눈부신 백색의 빛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신선한 공기가 세 사람의 폐부 깊숙이 박혀 들었다.
"올라가! 태호야, 먼저 나가서 박사님 받아!"
태호가 먼저 맨홀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어 우진이 등 뒤의 아버지를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고, 지상으로 나간 태호가 강정호의 겨드랑이를 잡아 끌어당겼다.
서연이 빠져나간 직후, 우진이 맨홀 가장자리를 짚고 몸을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앙!
그들이 빠져나온 맨홀 구멍 속에서 맹렬한 불기둥과 파편의 폭풍이 솟구쳐 올랐다.
뒤이어 지하 100미터 전체가 통째로 내려앉는 거대한 함몰의 진동이 지표면을 강타했다.
쿠구구구구……!
테헤란로 아스팔트 바닥이 마치 파도처럼 출렁이며 가라앉았다.
6. 허공을 올려다보는 사람들
우진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로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이 타버릴 것 같던 뺨을 식혀주었다.
"하아…… 하아…… 하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오르내렸다.
옆에서는 서연이 강정호의 상처를 지혈하며 울먹이고 있었고, 태호는 소총을 내려놓은 채 거친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아 있었다.
강정호는 희미하게 눈을 뜬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살았…… 구나. 우리가…… 해냈어……."
우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기어 나온 곳은 테헤란로 역삼역 8번 출구 앞 광장이었다.
도로는 아수라장이었다.
지하에서 발생한 폭발로 인해 넥스트 큐브 사옥 앞 도로가 거대한 싱크홀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부서진 보도블록과 튀어 오른 콘크리트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숨을 멎게 만든 것은 파괴된 도시의 풍경이 아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었다.
계엄군의 장갑차는 시동이 꺼진 채 멈춰 서 있었다.
소총을 쥐고 대열을 유지해야 할 계엄군 병사들도, 통제를 요구하며 절규하던 시위대도, 거리를 지나던 평범한 시민들도 모두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치거나, 서로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두가 넋을 잃은 얼굴로 허공을,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자신의 시야를 의심했다.
언제나 사람들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에 떠 있던 그것.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무기력하게 반복되던 백색의 네모(□).
누군가의 파멸과 사고를 예고하며 불길하게 붉은빛을 뿜어내던 세모(△).
시스템의 손길을 거부하던 은빛의 동그라미(○).
그리고 하늘 높은 곳에서 그 모든 것을 옭아매고 있던 거미줄 같은 칠흑빛 꼭두각시 줄선들.
그 모든 기하학적 형태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 있는 광장 위에는 오직 뿌연 새벽안개와 흩뿌리는 가을비만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도형도 떠 있지 않은 사람들의 머리 위.
그것은 시스템의 족쇄가 완전히 부서졌음을 의미하는 침묵의 증거였다.
한 젊은 병사가 헬멧을 벗어 던졌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 허공을 손으로 휘저어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라졌어…… 머릿속을 짓누르던 그 소리가…… 없어졌다고."
광장 한편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이라며 자신을 인도하던 '미러 큐브' 앱이 검은 먹통으로 변해버린 화면을 보며, 마침내 자신이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은 자의 흐느낌이었다.
7. 백색의 침묵 속에서
우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15년 동안 찌르는 듯한 편두통을 유발하던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
타인의 도형을 들여다볼 때마다 시신경을 불태우며 피눈물을 쏟게 만들던 그 지독한 반작용의 통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빈 방처럼 고요했다.
세상이 이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모든 인간이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던 거대한 태엽 시계가 멈추었다.
이제 이 도시에 예정된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일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누가 파산하고 누가 성공할지,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는 세상.
그것은 서지훈이 그토록 저주하던 '불확실성의 지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의 유일한 전제 조건이었다.
치지지직…….
서연의 품에 있던 소형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과 서연의 시선이 동시에 무전기로 쏠렸다.
"……치익…… 들립니까……? 우진 씨…… 서연 언니……!"
끊길 듯 이어지는 그 목소리.
윤채린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벙커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녀의 숨결이, 살아남은 자의 떨림을 싣고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채린 씨!"
서연이 무전기를 움켜쥐며 울음을 터뜨렸다.
"채린아! 살아 있었구나……!"
"……벙커의…… 전파가 열렸어요…… 격벽 밖으로…… 계엄군들이 총을 버리고…… 물러나고 있어요……."
채린의 젖은 목소리 뒤로, 파주의 차가운 새벽바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하늘이…… 맑아요. 아무것도…… 아무 선도 안 보여요…… 우진 씨…… 우리가…… 이긴 건가요?"
우진은 무전기를 받아 들었다.
목이 메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비를 맞고 있는 테헤란로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지평선 너머에서 짙은 밤안개를 밀어내며 희미한 새벽빛이 번져오고 있었다.
더 이상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순수한 백색의 여명이었다.
"끝났습니다, 채린 씨."
우진이 낮게, 그러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무너져 내린 넥스트 큐브 사옥의 잔해 위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바벨탑은 무너졌다.
그리고 폐허가 된 아스팔트 위에서, 인간들은 정해진 길 없이 펼쳐진 자신만의 아득한 하루를 비로소 살아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