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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82화

마지막 발악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지옥의 아가리

 

지하 4구역의 비상 케이블 샤프트로 이어지는 철골 계단은 이미 녹아내린 납땜과 핏빛 불길로 뒤덮여 있었다.

 

우진은 서연의 가녀린 어깨에 온몸의 무게를 기댄 채,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갈비뼈와 폐부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작열감에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컥, 커헉……!"

 

입술 틈새로 검붉은 피거품이 울컥거리며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통해 5,100만 명분의 인과율 모순과 'Error: ?' 데이터를 온몸으로 받아낸 대가는 참혹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깊게 새겨진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갓 달군 인두로 지진 것처럼 시커멓게 부풀어 올라 끔찍한 진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신경이 통째로 소각된 것만 같은 극심한 안압과 박동치는 편두통이 뇌간의 가장 깊은 신경 시냅스를 무자비하게 후벼 팠다.

 

타인의 정수리 위를 유령처럼 부유하던 일상의 백색 네모도, 파멸의 붉은 세모도, 세상을 옭아매던 검은 꼭두각시 줄도 이제는 우진의 망막에 비치지 않았다.

 

오직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피와 턱을 틀어막는 유독가스, 그리고 살갗을 바싹 태울 듯이 치솟는 화염의 열기만이 현실의 전부였다.

 

능력을 상실한 평범한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하기엔 한 걸음 한 걸음이 뼈를 깎는 사투였다.

 

"우진 씨, 제발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요! 저기 바로 앞에 샤프트 비상 해치가 있어요! 포기하면 안 돼요!"

 

서연이 비틀거리는 우진의 허리를 양팔로 부둥켜안으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의 하얀 이마와 뺨에도 시커먼 그을음과 땀방울이 뒤섞여 비 오듯 흘러내렸고, 입술은 탈진과 질식의 공포로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우진의 육중한 체중에 뼈마디가 삐걱거렸지만, 악착같이 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아갔다.

 

무너져 내리는 시스템의 심연 속에서 우진을 반드시 살려 지상으로 데리고 나가겠다는 언론인이자 동지로서의 일념 하나가 그녀의 전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쿵― 콰아아앙!

 

바로 등 뒤,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메인 전산실의 텅스텐 차폐벽이 내부에서 팽창하는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바깥쪽으로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며 굉음을 토해냈다.

 

초전도 양자 컴퓨터 랙 수천 개가 일제히 오버히트하며 내뿜는 푸르스름한 플라스마 섬광이 철판 이음매 틈새로 독사처럼 날름거렸다.

 

중앙 코어가 소각되면서 발생한 천문학적인 결손 엔트로피가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6층과 통신 중계국 지하를 잇는 거대한 메인 냉각탑으로 쏟아져 들어가, 시스템 전체의 하드웨어를 안쪽에서부터 산산조각 내며 녹여버리고 있었다.

 

2. 어둠 속의 망령

 

샤프트 입구로 통하는 두꺼운 방화 격벽 문턱을 넘어서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철컥.

 

뿌연 화약 연기와 천장에서 쏟아지는 불꽃 너머, 환기 덕트 뒤편의 칠흑 같은 암벽 그늘 속에서 서늘하고도 이질적인 금속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우진의 온몸에 남아 있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등골을 따라 오소소 소름을 돋워 냈다.

 

"누구냐!"

 

서연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이미 빈 탄창뿐인 권총은 방금 전 전산실 바닥에 버려둔 뒤였다.

 

연무가 서서히 걷히며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 형체는 인간이라 부르기 힘들 만큼 처참하게 망가진 몰골을 하고 있었다.

 

얼굴 반쪽의 피부가 고열에 짓물러 벌겋게 진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단정하던 최고급 맞춤 양복은 반쯤 타버려 숯검정이 되어 너덜거렸다.

 

그러나 피범벅이 된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9밀리 구경 반자동 권총만은 흔들림 없이 우진의 미간을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

 

"……서지훈."

 

우진이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내며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가상 데이터 영역에서 우진의 'Error: ?' 불확정성 뇌파에 직격당해 산산이 찢겨 소멸했던 것은 슈퍼컴퓨터 양자 아카이브에 백업되어 있던 그의 디지털 잔류 인격이었다.

 

하지만 이곳 지하 4구역, 통신 중계국의 중앙 배전실 제어 콘솔 앞에 은밀히 숨어 있던 서지훈의 물리적 육신은 아직 질기게 숨을 쉬고 있었다.

 

비록 전신의 모세혈관이 터져 눈 흰자가 온통 핏빛으로 충혈되고, 머리 위의 텅 빈 사각 프레임이 깨져 나가 백치가 된 것처럼 입가로 멀건 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의 뒤틀린 영혼에 각인된 광기 어린 집착만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강…… 우진…… 크흐, 크하하……."

 

서지훈의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 섞인 쇳소리가 기괴한 웃음과 함께 새어 나왔다.

 

피눈물이 줄기를 그리며 흘러내리는 그의 두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이성이나 논리, 설계자로서의 지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20년 인생을 바쳐 세워 올린 신의 왕국, 그 절대적인 사각 격자망을 부숴버린 파괴자를 향한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살의만이 시커멓게 번뜩이고 있었다.

 

"네놈이…… 내 세계를…… 내 완벽한 낙원을 기어이 부쉈어……!"

 

서지훈이 절뚝거리며 피 묻은 구둣발을 끌고 다가왔다.

 

우진의 가슴팍을 향해 바짝 다가온 총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그의 검지 손가락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모두가 안전하게 살 수 있었어! 언제 죽을지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 실패할지 전전긍긍하지 않는…… 신조차 이루지 못한 완벽한 질서였단 말이다! 사각의 규격 속에서 모두가 배정된 분량만큼 울고 웃으며 살아가면 되었어! 그런데 네놈이…… 네까짓 버그 덩어리가 기어이 세상을 통제 불능의 생지옥으로 밀어 넣었어!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기나 해?!"

 

"서지훈, 헛소리 집어치워! 추악하게 굴지 마!"

 

서연이 우진의 앞을 자신의 온몸으로 가로막아서며 표효하듯 소리쳤다.

 

"네가 만든 건 낙원이 아니야! 힘없는 소시민들을 골라가며 제물로 바치고, 기득권자들의 영원한 안락을 위해 남의 인생을 계산기 두드리듯 도살하던 거대한 도축장이었을 뿐이야!"

 

"입 닥쳐, 계집년아!"

 

서지훈이 발작하듯 고함을 지르며 총구를 서연의 관자놀이 쪽으로 거칠게 비틀었다.

 

"낙원이 아니라고? 그럼 저 지상을 봐라! 궤도가 깨지고 미러 큐브가 꺼지자마자 그 우매한 군중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네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잖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노예의 목줄을 채워달라며 계엄군 장갑차에 매달려 울부짖던 그 버러지들을 보란 말이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해! 통제받고 사육당해야만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미개한 가축이야! 그 가축들에게 감당하지도 못할 자유를 던져준 네놈들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자 진정한 악마다!"

 

3. 부성(父性)의 궤적

 

"그렇지 않다, 지훈아."

 

유독가스와 화염으로 가득 찬 복도 저편, 부서진 3번 비상 도크의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 틈새에서 낮고 메마른 음성이 갈라진 틈을 타고 울려 퍼졌다.

 

서지훈의 어깨가 흠칫 떨리며 총구가 찰나 허공으로 빗겨 났다.

 

우진의 멎어버릴 듯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버지?"

 

무너져 내린 잔해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15년 전의 고문과 신경 절제로 인해 두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강정호 박사였다.

 

그는 박태호의 등에 업힌 상태가 아니었다.

 

박태호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무너진 천장 슬래브 밑에 깔려 신음하는 사이, 강정호 박사는 으스러진 무릎과 마비된 하반신을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질질 끌며 오직 피투성이가 된 양팔의 힘만으로 포복하여 기어오고 있었다.

 

손톱이 전부 뒤집혀 피가 배어 나오는 열 손가락이 바닥에 굵고 붉은 혈흔의 궤적을 처절하게 긋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15년간 액체 챔버 속에서 생체 배터리로 혹사당했던 노화와 극심한 고통으로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짓이겨진 육신 속에서 타오르는 그의 깊은 눈동자만큼은, 15년 전 그 어떤 권력과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진정한 과학자의 숭고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강…… 정호……? 네놈이…… 네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 나온 거냐……!"

 

서지훈의 총구가 걷잡을 수 없이 파르르 떨렸다.

 

15년 전, 코어의 마스터 알고리즘을 넘기지 않는다며 자신이 직접 고전압 전류봉으로 요추를 지지고 유압 프레스로 무릎 관절을 짓이겨 영구 폐인으로 만들었던 스승이자 시스템의 최초 설계자.

 

그 노인이 죽지도 않고 살아서 자신의 눈앞을 기어오고 있었다.

 

"지훈아…… 1998년 그 겨울밤, 네가 겪었던 그 참혹한 비극을 나는 잘 안다."

 

강정호 박사가 피 섞인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라진 바닥을 손톱으로 파고들듯 짚으며 한 걸음 더 기어 나왔다.

 

그의 젖은 눈동자에는 서지훈을 향한 원망이나 증오 대신, 한때 누구보다 총명했던 제자를 이 지옥 같은 파멸로 밀어 넣었다는 뼈아픈 속죄와 깊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이 부모와 일곱 살 어린 여동생을 난도질당했던 그 끔찍한 비극…… 그 잔혹한 상처에서 도망치기 위해 네가 완전한 계산과 사각의 통제라는 껍데기에 매달렸다는 것을 안다. 내가 연구했던 인간 궤도 모델링 이론이 너에게 그 뒤틀린 도피처를 제공했지. 우발적 불행을 막아보겠다는 내 오만이 너라는 괴물을 낳았으니, 세상에서 내 죄가 가장 무겁다."

 

"닥쳐! 입 닥쳐, 강정호! 위선 떨지 마라!"

 

서지훈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내가 틀리지 않았어! 우발적인 불행이 완벽히 거세된 세상, 모든 고통과 죽음이 오차 없이 통제되어 예측 가능한 세상이야말로 문명이 도달해야 할 유일한 유토피아였어! 그런데 왜 날 방해해! 왜 내 에덴을 망치려 드는 거냐고! 내 가족이 흘린 피는…… 내 여동생의 죽음은 도대체 뭐가 된단 말이냐!"

 

"그건 에덴이 아니라 거대한 납골당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훈아."

 

강정호 박사의 목소리가 낮지만 쇠를 울리듯 단호하게 공간을 갈랐다.

 

"상처 입을 자유가 없다면 치유의 기쁨도 없고, 넘어질 위험이 없다면 제 발로 다시 일어서는 인간의 숭고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처를 지우기 위해 사각 틀에 갇히는 존재가 아니라, 아물지 않는 흉터를 보듬고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불확실한 내일로 걸어 나가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지훈아…… 이제 그 가짜 완벽함의 망령에서 깨어나라."

 

"시끄러워! 네놈 따위가 날 가르치려 들지 마!"

 

서지훈의 부서진 이성이 마침내 임계점을 완전히 돌파했다.

 

더 이상 자신의 궤변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그의 눈에 살인적인 광채가 번뜩였다.

 

"시스템이 죽었다면…… 네놈들도 결코 살아서 이 문을 나가지 못해! 이 결함품 놈부터 시작해서 네놈들 모두를 내 낙원의 제물로 삼겠다!"

 

서지훈이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권총의 해머를 거칠게 젖혔다.

 

우진을 향해 정렬된 총구의 시커먼 구멍이 차가운 살의를 뿜어냈다.

 

우진은 서연을 뒤로 밀쳐내며 제 몸으로 탄환을 막아서려 했다.

 

이능은 사라졌지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의지만은 육신에 오롯이 남아 있었다.

 

4. 붉은 레버

 

그러나 우진의 발이 앞으로 튀어 나가기도 전이었다.

 

바닥을 기어가던 강정호 박사의 시선이 벽면 최하단, 15년 전 자신이 유사시를 대비해 설계해 두었던 두꺼운 합금 함체로 향했다.

 

그곳에는 붉은색 페인트가 벗겨진 수동 기계식 밸브와 함께 거대한 황동 레버가 육중하게 매설되어 있었다.

 

[EMERGENCY SYSTEM HARDWARE SHUTDOWN : LEVEL-0]

 

전자기 펄스도, 소프트웨어 해킹도, 그 어떤 알고리즘도 간섭할 수 없는 순수 유압 기계식 비상 동력 차단 장치.

 

중계국과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의 원자로 격벽을 물리적으로 영구 폐쇄하고, 전력선 자체를 강제 단락시켜 시스템의 심장을 완전히 멎게 만드는 최후의 아날로그 차단기였다.

 

강정호 박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뻗어 차가운 황동 레버를 움켜쥐었다.

 

"지훈아. 우리가 시작한 이 끔찍한 오만을…… 이제 내 손으로 끝내마."

 

"안 돼! 멈춰! 그 손 당장 떼지 못해―!"

 

서지훈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총구를 강정호 박사를 향해 거칠게 돌렸다.

 

탕!

 

탕―!

 

밀폐된 지하 4구역을 찢어발기는 맹렬한 총성이 두 차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오는 찰나, 강정호 박사의 오른쪽 쇄골과 어깨 사이로 9밀리 철갑탄이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뼛조각이 부서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검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분수처럼 흩뿌려졌다.

 

"아버지―!"

 

우진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짐승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피를 흘리던 우진의 몸이 바닥을 박차며 서지훈을 향해 벼락처럼 쇄도했다.

 

하지만 총탄의 충격에 상체가 뒤로 꺾이던 강정호 박사는 황동 레버를 결코 놓지 않았다.

 

어깨를 관통당해 뼈가 으스러지고 신경 다발이 끊어지는 생지옥 같은 극통 속에서도, 그의 피 묻은 손가락은 레버를 으스러져라 틀어쥐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 위로 피와 땀이 뒤섞여 비 오듯 쏟아졌지만, 입가에는 기이할 정도로 맑고 평온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드드드득― 쿵쾅!

 

강정호 박사는 꺾여 나가는 자신의 상체와 남은 체중 전체를 실어 붉은 레버를 바닥 끝까지 짓눌러 내렸다.

 

5. 멈추지 않는 종말

 

치이이익― 쿠구구구궁!

 

황동 레버가 최하단 래치에 걸리는 순간, 중계국 지하 벽면 전체에서 수십 개의 육중한 유압 실린더가 작동하는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수십 톤에 달하는 3중 텅스텐 방호벽이 천장에서 벼락처럼 떨어져 내리며 메인 전산실과 양자 블레이드 서버 랙들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밀봉해 버렸다.

 

동시에 바닥 아래 매설되어 있던 고압 간선 전력선들이 강제로 끊어지며 눈이 멀 것 같은 칠흑 같은 암흑이 찾아왔다.

 

비상 발전기의 잔류 전원조차 접지를 통해 모조리 땅속으로 강제 방전되어 버린 절대적인 암전이었다.

 

"경고. 하드웨어 레벨-0 비상 정지 수동 기동 완료. 전 시스템 전력 공급 영구 차단. 메인 코어 긴급 소각 시퀀스 돌입. 카운트다운 중단 불가."

 

천장의 비상 방재 스피커가 마지막 기계적 경고음을 뱉어낸 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영원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서지훈의 마지막 발악이었던 비열한 총격도, 그가 그토록 부여잡으려 했던 통제의 숨통도 완전히 끊어진 순간이었다.

 

"아…… 아아…… 아……."

 

서지훈의 힘 빠진 손에서 권총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완전한 암전 속에서, 오직 벽면 틈새로 붉게 일렁이며 비쳐 드는 냉각탑의 화염만이 그의 넋이 나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스승의 어깨를 쏘았지만 셧다운 시퀀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강정호 박사가 당긴 레버로 인해 시스템의 마지막 잔류 방어 기제마저 완전히 소멸하고, 피할 수 없는 물리적 파멸이 되돌릴 수 없는 종착역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끝났다, 지훈아……."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강정호 박사가 나직하게 숨을 토해냈다.

 

"이제…… 아무도 사각의 감옥에 갇혀 죽지 않아…… 너도, 우진이도……."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틀렸을 리 없어…… 내 에덴이……!"

 

서지훈은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렸던 거대한 바벨탑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광경 앞에서, 그의 부서진 정신은 마침내 완전한 광기와 공허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6. 혈육의 무게

 

"아버지! 아버지, 제발 눈 좀 떠보세요!"

 

우진이 피투성이가 된 무릎으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달려가 쓰러진 아버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어깨의 관통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피가 우진의 옷자락과 가슴팍을 흠뻑 적셨다.

 

우진의 떨리는 손이 아버지의 상처를 필사적으로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붉은 생명의 온기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왜 또 당신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신 겁니까! 15년 만에 만났는데…… 이제야 겨우 제대로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우진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쏟아져 내려 아버지의 피 묻은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한때 세상의 모든 인생 궤도를 꿰뚫어 보던 눈이었지만, 정작 제 아비의 피조차 멈추게 할 수 없는 처절한 무력감에 우진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강정호 박사는 떨리는 피 묻은 손을 힘겹게 들어 올려 아들의 눈물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거칠고 메마른 노인의 손길에서 15년 동안 전해주지 못했던 아비의 온도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우진아…… 울지 마라. 이 상처는…… 내가 세상에 진 빚을 갚기 위한 아주 작은 대가일 뿐이란다."

 

강정호 박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15년 전…… 어린 네 관자놀이를 째고 그 몹쓸 흉터를 남겼을 때부터…… 내 영혼은 이미 죽어 있었단다. 하지만 오늘…… 네가 그 흉터를 딛고 우뚝 서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돌려주는 것을 보았다. 고맙다, 우진아…… 내 아들로 태어나 주어서, 그리고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어서……."

 

"말씀하지 마세요! 숨 쉬세요, 아버지! 살 수 있어요, 내가 업고 나갈 겁니다! 서연 씨, 빨리 지혈대 좀!"

 

우진이 목이 터져라 절규했다.

 

서연이 달려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셔츠를 찢어 강정호 박사의 어깨 관통상을 단단히 동여매며 지혈을 시도했다.

 

그때, 무너진 잔해 속에서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일으킨 박태호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형님…… 박사님……! 제, 제가 잔해에 깔려서…… 죄송합니다!"

 

"태호야, 자책하지 마라! 정신 똑바로 차려!"

 

우진이 태호의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아직 안 끝났다! 여기서 개죽음당할 순 없어! 아버지 모시고 지상으로 나간다!"

 

7. 무너져 내리는 심연

 

쿠구구구궁― 콰아아앙!

 

지하 4구역 전체를 뒤흔드는 폭음이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하게 터져 나왔다.

 

강정호 박사가 당긴 비상 레버로 인해 시스템의 전력은 차단되었지만, 이미 임계치를 넘어선 메인 코어 냉각탑의 오버히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전력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면서 냉각수를 순환시키던 비상 펌프마저 멎어버리자, 섭씨 2,000도를 넘나드는 액체 헬륨과 과열된 양자 반응로의 노심 슬러지가 배관을 통째로 녹이며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치이이익―!

 

샤프트 벽면 틈새로 푸르스름한 고열의 수증기와 유독가스가 화산 분출물처럼 뿜어져 나왔다.

 

천장의 H빔 철골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수 톤 무게의 콘크리트 슬래브가 폭포수처럼 무너져 내렸다.

 

"남은 시간이 없어요! 서둘러야 해요!"

 

서연이 우진의 팔을 잡아끌며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3분…… 아니, 2분도 안 남았어요! 냉각탑이 무너지면 이 지하 벙커 전체가 통째로 암반 속으로 가라앉아요!"

 

저편 어둠 속에서, 넋을 잃고 서 있던 서지훈은 무너져 내리는 메인 전산실의 텅스텐 격벽을 향해 홀린 듯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과 쏟아지는 불기둥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콘크리트 상판이 굉음을 내며 낙하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폭음에 묻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한 시대를 공포와 규격으로 옭아맸던 최고 설계자의 비참하고도 허망한 최후였다.

 

"태호야, 앞장서서 사다리 쪽 잔해를 치워라! 서연 씨는 내 뒤를 받쳐줘요!"

 

우진은 이를 악물고 총상을 입은 아버지의 상체를 자신의 등에 업었다.

 

부러질 듯한 무릎 관절이 비명을 질렀고,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하며 혼절할 것 같은 고통이 전신을 덮쳐왔다.

 

그러나 우진은 아버지를 결코 놓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미약하지만 따뜻한 심장 박동.

 

그 박동이 우진의 심장과 공명하며 마지막 남은 인간의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었다.

 

"가자…… 살아서 지상으로 나간다!"

 

우진의 처절한 포효와 함께, 세 사람은 불길과 낙석이 쏟아지는 비상 케이블 샤프트의 수직 사다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거대한 바벨탑의 심장이 마침내 굉음을 토하며 암흑의 심연 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