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의 붕괴
1. 거부된 특이점
지하 4구역의 얼어붙을 듯 차가운 공기 속에서, 관자놀이에 맞닿은 마스터 암호 키의 사파이어 표면이 살갗을 파고들며 빙점 이하의 냉기로 박동했다.
단결정 보석의 결을 타고 흐르는 시퍼런 인광은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4센티미터 수술 흉터, 즉 유년기 신경 궤도 절제술의 상흔과 정확히 1대 1로 맞물려 있었다.
접촉면을 타고 살점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역설적인 작열감이 뼛속까지 시리게 번져 나갔다.
지이잉―!
찌르르르르!
귓전을 후벼 파는 파열음은 단순한 기계적 마찰음이 아니었다.
뇌간의 가장 깊은 시냅스를 초고주파 전류로 직접 난도질하는 듯한 잔혹하고도 원초적인 신경 파동이었다.
우진의 망막 위로 현실의 어둑한 중계국 지하 전산실 풍경이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0과 1의 이진수로 환원된 무한한 사각 격자의 입체적 심연이었다.
그것은 서지훈이 15년간 구축하고 국가안전기획처의 메인 서버와 결합하여 완성하려 했던 거대한 감옥이었다.
전 인류 5,100만 명의 태어남과 숨 쉼,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마침내 맞이할 죽음의 순번까지 사각 규격 안에 오차 없이 가두어 둔 절대 통제의 알고리즘 내벽이었다.
"경고. 규격 외 비인가 데이터 유입. 식별 코드: Node-1, K-07. 즉시 세션 분리 시도…… 치명적 오류. 파라미터 해석 불가. 변수 충돌 발생. 격자 동기화율 급락."
서버 랙 전면에 촘촘히 부착된 비상 스피커에서 합성된 기계음이 기괴한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찢어졌다.
벽면에 매달린 수십 대의 산업용 모니터 위로 서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진 노이즈와 함께 거칠게 투사되었다.
디지털 망령으로 화한 그의 눈동자는 칠흑 같은 암흑의 사각 프레임에 갇힌 채, 이 유례없는 침투를 이해하지 못해 핏발을 세우며 경련하고 있었다.
"멈춰라, 강우진! 네놈의 뇌간은 이미 한계 수치를 넘었다! 일개 인간의 신경계 따위로 5,100만 명분의 거대한 인생 궤도 방정식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장 손을 떼지 못해!"
서지훈의 고함이 스피커의 리미터를 깨부수며 지하 공동구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가상 공간 속에서 그의 뒤틀린 사각 프레임이 수만 가닥의 검은 데이터 촉수를 뿜어내며 우진의 의식을 향해 쇄도했다.
"방화벽을 강제 폐쇄하라! 저놈의 접속 경로를 물리적으로 단락시켜! 이 시스템은 무결해야 한다! 우발적 사고도, 탐욕도, 이기심도 통제된 오차율 0퍼센트의 낙원이 바로 눈앞인데…… 감히 네깟 결함품 따위가 온 인류의 미래를 망치려 드는 것이냐!"
하지만 우진의 관자놀이를 통해 메인 프레임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은 서지훈이 그토록 숭배하던 정돈된 계산식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15년간 '오차'라는 이름으로 배제하고, '노이즈'라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도려내었던 인간 본연의 불확정성이었다.
우진의 뇌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파는 일상의 백색 네모도, 파멸의 붉은 세모도, 심지어 완벽한 자유의지를 상징하던 은빛 동그라미조차 아니었다.
어떠한 기하학적 도형으로도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균열.
시스템의 최심부 커널 모니터 한가운데, 핏빛보다 붉게 떠오른 단 하나의 문자였다.
[ERROR: ?]
물음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불안.
계산되지 않는 우발적 선택.
상처 입고 쓰러질 것을 알면서도 진흙탕 속으로 발을 내딛는 인간의 무모한 투지.
그 불완전하고도 뜨거운 파동이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매개로 중앙 양자 메인 프레임의 가장 깊숙한 연산 코어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2. 사각의 침식
"큭…… 커하아악!"
우진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왈칵 터져 나왔다.
시신경을 갈고리로 낚아채어 억지로 잡아당긴 뒤 불로 지지는 것만 같은 살인적인 고통에 전신 근육이 비틀렸다.
안압이 폭발할 듯 팽창하며 양쪽 귓구멍과 콧구멍에서도 끈적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목덜미의 힘줄이 끊어질 듯 굵게 솟구쳤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 경련을 일으켰다.
"우진 씨!"
외장 백업 콘솔 옆에서 전국 기간망 송출 키를 붙들고 있던 한서연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된 우진의 굳은 어깨를 붙잡으려 뻗어 나왔다.
하지만 우진은 이를 바득 갈며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손…… 대지 마요, 서연 씨. 쿨럭! 지금 건드리면…… 전위차가 생겨서 링크가 끊어져요."
우진의 목구멍에서 끓어 넘치는 피 섞인 목소리는 쇳가루를 갈아 넣은 것처럼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망막 위가 새하얀 백색 노이즈로 뒤덮였다가 다시 칠흑 같은 암전으로 곤두박질치기를 쉼 없이 반복했다.
어디로 피해야 할지 미리 알려주던 푸른빛의 궤적선도,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내던 절대 척력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리진 코어가 타버리며 모든 초인적 이능을 상실한 평범한 인간의 나약한 육체였다.
그렇기에 이 방대한 전 국가 단위의 연산 부하는 우진의 뇌세포를 실시간으로 태우며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진은 피 묻은 관자놀이를 콘솔 단자에 더 무섭게 밀어붙였다.
물러설 자리는 단 한 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고통에 굴복해 손을 떼는 순간, 강제 개방된 방화벽은 다시 굳게 닫힐 것이었다.
그리고 자유의 공포에 질린 수천만 명의 시민은 국가안전기획처와 서지훈이 마련해 둔 합법적 가축 사육장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목줄을 채우게 될 터였다.
"서지훈…… 네 눈으로 똑똑히 봐라."
우진이 피로 물든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허공의 깨진 모니터를 형형하게 노려보았다.
"네가 평생을 바쳐 숭배해 온 그 완벽한 네모가…… 실은 얼마나 우습고 조잡한 껍데기였는지."
쿠구구구궁―!
중계국 바닥 밑바닥, 암반층 깊숙한 곳에서부터 둔탁한 진동이 심장 박동처럼 울려 퍼졌다.
수천 개의 양자 블레이드 서버 랙들이 일제히 한계치를 넘어선 과출력 상태에 돌입했다.
냉각 팬 모터들이 찢어질 듯한 비명 같은 굉음을 토해내며 지하 공간의 공기를 희박하게 만들었다.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던 거대한 가상 스크린.
그곳에 질서정연하게 메워져 있던 5,100만 개의 검은 격자망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일제히 뒤틀리기 시작했다.
파지직!
콰아앙!
가장 먼저 처참한 파열을 일으킨 것은 여의도 금융망과 연동되어 있던 자산 통제 알고리즘 섹터였다.
미러 큐브를 통해 서민들의 피눈물을 갈취하고, 특정 기업의 부도와 주가 폭락을 인위적으로 예정해 두었던 사각의 프레임들이 붉은 스파크를 튀기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우진의 신경계에서 방출된 'Error: ?' 데이터가 침투하는 족족, 시스템의 엄밀하던 인과율 수식들은 0으로 나누기를 무한 반복하는 치명적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수학적 모순이 거대한 불길처럼 알고리즘의 뼈대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다! 이 수식은 내가 20년에 걸쳐 인간의 모든 충동과 변수를 계산해 완성한 절대 방정식이란 말이다! 우발적 오차 따위는 즉각 상쇄되도록 설계되었어!"
서지훈의 잔류 인격이 경악에 차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검은 4차원 정육면체 홀로그램의 모서리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무수한 오류 코드를 뿜어냈다.
"일개 인간이…… 결함투성이인 인간 따위의 뇌파가 어떻게 시스템의 전체 엔트로피 총량을 역전시킨단 말이냐! 어떻게 내 완벽한 수학을 모욕할 수 있느냐고!"
"인간이니까 가능한 거다."
우진이 잇새로 피를 뿜어내며 단호하게 말을 짓씹었다.
"우리는 네놈의 기계식 시간표 따위에 맞춰 도살당하려고 태어난 부품이 아니니까."
3. 붕괴하는 바벨탑
쩍, 쩍― 콰지지직!
가상 영역의 균열은 더 이상 소프트웨어의 충돌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즉각 현실 세계의 물리적 파괴라는 거대한 재앙으로 치환되었다.
중계국 지하 4구역의 두꺼운 콘크리트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대형 메인보드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푸른 플라스마 불꽃이 튀어 올랐다.
손가락 굵기만 한 콘덴서들이 수류탄처럼 잇달아 터져 나갔고, 과열된 납땜과 구리선이 녹아내리며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유독가스가 순식간에 공간을 채웠다.
팟!
팟!
파지지직―!
천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고압 형광등 십여 개가 연쇄적으로 파열하며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우진과 서연의 머리 위로 비처럼 쏟아졌다.
비상 전력 분배반이 우진의 뇌파에서 역류한 수만 볼트의 과전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우진 씨, 백본망 링크 98퍼센트 돌파했어요! 백도어가 열렸어요! 국가안전기획처의 메인 방화벽이 완전히 무너졌어요!"
서연이 피 묻은 자판을 부서져라 두드리며 목청껏 외쳤다.
그녀의 앞 모니터 위로 국가안전기획처와 넥스트 큐브가 철통같이 유지해 오던 레벨-4 언론 검열 락이 붉은 경고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시스템 로그가 쏟아져 내렸다.
[LEVEL-4 MEDIA GRID LOCK : DESTROYED]
[ROOT AUTHORIZATION : SYSTEM COLLAPSE]
[BROADCASTING DATA : 100% UNLOCKED]
[OVERRIDE TO NATIONAL EMERGENCY BROADCAST : ACTIVE]
그 순간, 테헤란로 한복판에 우뚝 솟은 수십 개의 대형 전광판이 일제히 지직거리며 백색으로 번쩍였다.
광화문 네거리의 뉴스 스크린, 여의도 증권가의 거대한 시세 전광판, 전국의 지하철 역사 내 행선 안내기, 그리고 대한민국 5,000만 국민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 화면이 일시에 점멸했다.
계엄군의 위압적인 장갑차 행렬을 향해 꽃을 흔들며 '우리의 안전을 돌려달라', '미러 큐브를 복구해 달라'고 울부짖던 수십만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거리의 소음이 마치 칼로 자른 듯 멎었다.
화면 위로 투사된 것은 정부가 내보내려던 비상 안보 담화가 아니었다.
국가안전기획처의 붉은 극비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내부 감사 문건.
넥스트 큐브가 수립한 50년 장기 상류층 규격화 로드맵.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의 주민등록번호 옆에 초단위로 기록되어 있던 살인적인 인생 시간표였다.
누가 언제 급성 백혈병에 걸려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야 하는지.
어느 성실한 자영업자가 언제 사채의 덫에 걸려 한강으로 내몰려야 하는지.
공채 면접장에 들어선 청년 중 누구를 'Class-D 희생 노드'로 지정해 탈락시켜야 하는지가 빼곡한 알고리즘 수식으로 적혀 있었다.
"저, 저게 뭐야……? 저거 내 이름이잖아? 내 주민등록번호야!"
"내 남편이 재작년에 과로사로 쓰러진 게…… 저 시스템의 결손 엔트로피를 메우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사고 다발 구역? 뱅뱅사거리 참사도…… 전부 저들이 조작한 거였어?!"
숨 막히는 침묵 끝에 터져 나온 것은 짐승 같은 절규였다.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불확실성을 피하고자 그토록 매달려 애원했던 '안전한 일상'의 실체.
그것이 실은 자신들을 정해진 날짜에 차례대로 도살장에 밀어 넣기 위해 국가 권력과 결탁해 만든 잔혹한 가축 사육장이었다는 진실.
그 명백하고도 서늘한 물증들이 대중의 뇌수를 망치처럼 후려갈겼다.
계엄군의 진입을 구원의 손길로 착각하고 환호하던 군중의 손에서 꽃과 깃발이 힘없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공포, 그리고 이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거대한 분노였다.
"거짓말쟁이들! 살인마 놈들!"
"우리를 가축 취급한 거냐!"
군중의 거대한 파도가 일순간 방향을 바꾸었다.
장갑차를 환영하던 손길들이 쇠파이프와 보도블록을 쥐어 들었고, 총구를 겨누고 있던 계엄군 병사들의 눈빛에도 걷잡을 수 없는 동요와 공포가 번져 나갔다.
자신들의 부모, 형제, 자식의 이름이 저 잔혹한 도살 시간표에 똑같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병사들의 총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4. 수천만 개의 파편
"크아아아악―! 아아악!"
디지털 가상 영역 속에서 서지훈의 잔류 의식체가 찢어지는 단말마를 내질렀다.
현실의 대중이 진실을 자각하고 시스템의 정당성을 뿌리부터 거부하는 순간, 중앙 코어로 수렴되던 인과율의 거대한 항상성 네트워크가 맥없이 끊겨 나갔다.
시스템을 지탱하던 가장 큰 기둥은 총칼이나 슈퍼컴퓨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통제에 기꺼이 순응하며 자신의 선택권을 넘겨주었던 대중의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자, 5,100만 명의 자유의지가 내뿜는 거대한 결손 엔트로피가 해일이 되어 시스템의 코어 알고리즘을 집어삼켰다.
쩌저저적!
콰아앙!
가상 공간을 칠흑같이 메우고 있던 수천만 개의 검은 네모들이 일제히 유리알처럼 바스러졌다.
모서리마다 뻗어 나가 인간들의 영혼을 옭아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들이 불타며 끊어졌다.
허공으로 비산하는 수천억 개의 파편들이 은빛과 백색의 눈부신 먼지가 되어 장엄한 은하수처럼 흩날렸다.
그것은 정해진 궤도의 종말이었다.
내일의 운명을 규정하던 차가운 사각의 감옥이 소멸하자, 남은 것은 오직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심연뿐이었다.
"안 돼…… 안 돼! 내가 세운 질서다! 내가…… 신이 되려 했던 완벽한 유토피아란 말이다!"
서지훈의 잔류 홀로그램이 얼굴 반쪽부터 픽셀 단위로 깨져 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정육면체 갑주가 시뻘건 에러 문구로 뒤덮이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강우진…… 네놈이 정녕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아느냐!"
무너져 내리는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피 섞인 저주가 비명처럼 쏟아졌다.
"이 시스템이 사라지면…… 코어가 억누르고 있던 그 막대한 엔트로피의 파동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도시의 모든 전력망이, 지하 암반의 냉각탑이 통제를 잃고 모조리 폭주할 것이다! 네놈들도 이 지하에서 뼈도 추리지 못하고 불타 죽을 게다! 결코 살아서 나가지 못해!"
"상관없다."
우진은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내며 메마른 입술을 차갑게 비틀어 올렸다.
"적어도…… 네놈이 짜놓은 그 더러운 각본대로 살다 죽지는 않을 테니까."
쩌저저적― 콰아아앙!
중계국 지하 벽면에 매달려 있던 마지막 초대형 메인 프레임 모니터가 우진의 관자놀이에서 뿜어져 나온 순백의 섬광에 직격당해 산산조각 났다.
화면이 폭발하며 터져 나온 불꽃 속에서, 서지훈의 뒤틀린 얼굴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영원한 암흑 속으로 소멸했다.
5. 폭주의 전조
팟, 파지직…… 툭.
마침내 마스터 암호 키의 사파이어 결을 타고 흐르던 푸른빛이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동시에 우진의 시신경을 갈기갈기 찢어놓던 끔찍한 안압과 두통도 거짓말처럼 멎었다.
철커덕.
단결정 사파이어 키가 콘솔 슬롯에서 스스로 튕겨 나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로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15년간 응축되었던 모든 인과율의 수식과 백신 코드를 불태워 버린 보석의 표면은, 찬란하던 푸른빛을 완전히 잃은 채 잿빛 먼지처럼 탁하게 식어 있었다.
"하아…… 쿨럭! 쿨럭, 커헉!"
우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꺾으며 무너져 내렸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를 잇달아 쏟아내며 메마른 숨을 몰아쉬었다.
시야가 온통 붉은 핏빛 잔상으로 일렁였지만, 15년 동안 관자놀이를 쑤셔대던 지독한 편두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을 옥죄어 오던 기괴한 고주파 이명도, 세상을 억지로 해석하려 들며 나타나던 공감각의 왜곡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타인의 머리 위를 떠돌던 사각의 족쇄도, 파멸을 예고하던 세모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도 이제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타버린 회로의 매캐한 연기와 깨진 유리 파편, 그리고 바닥을 적시는 자신의 뜨겁고 차가운 핏방울뿐이었다.
"우진 씨! 제발 정신 차려요, 우진 씨!"
서연이 비틀거리며 달려와 바닥에 쓰러진 우진의 상체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가쁜 숨결과 함께 떨리는 손등 위로 우진의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끝…… 났어요, 서연 씨."
우진이 핏물이 밴 입술을 간신히 달싹이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터는…… 전부 넘어간 겁니까?"
"네, 전부 송출됐어요. 단 1바이트도 남김없이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언체인드 지부들이 미러 서버 수백 개로 실시간 백업까지 마쳤고요. 이제 그 누구도…… 저들이 만든 가짜 운명에 속지 않아요. 우리가 해냈어요, 우진 씨."
서연의 큰 눈망울에서 뜨거운 눈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 우진의 피투성이가 된 뺨을 씻어 내렸다.
그러나 가슴 벅찬 해방감과 안도의 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위이이이잉―!
쿠구구구궁!
쿵!
쿵!
지하 4구역 깊은 곳, 통신 중계국의 두꺼운 방호벽 너머 암반층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전력 과부하 수준이 아니었다.
벽면을 따라 매설된 거대한 냉각 배관들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연결 이음매마다 섭씨 수백 도에 달하는 과열 수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콰르르르!
"위험 경고.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및 중계국 연동 메인 코어 냉각탑, 내부 압력 허용 임계치 초과."
벽면에 매달린 산업용 비상 방재 스피커가 시뻘건 비상 경광등의 회전과 함께 찢어질 듯한 기계음을 토해냈다.
"전력 계통 통제 불능. 독립 소형 원자로 및 초전도 양자 발전 설비 오버히트 4단계 진입. 1차 냉각재 대량 누출 발생. 노심 용융 위험 감지. 7분 후 전 구역 격벽 자동 봉쇄 및 자폭성 안전 방출 시퀀스 개시. 즉시 전원 대피하십시오. 반복합니다. 즉시 대피하십시오."
소멸 직전 서지훈이 남겼던 저주가 무서운 현실이 되어 턱밑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도시 전체 5,100만 명의 인생 궤도를 억지로 묶어두고 있던 거대한 시스템의 댐이 무너지자, 갈 곳을 잃은 수만 메가와트의 잉여 전력과 엔트로피 결손이 지하 암반의 냉각 설비로 쏟아져 들어가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6. 사선의 무전
치직…… 치지직!
삑―!
서연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구형 아날로그 무전기 스피커에서 거친 잡음과 고주파 노이즈를 뚫고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 서연아!
우진아!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응답해라!
역삼역 변전실 하부 폐쇄 통로에 머물고 있던 강정호 박사의 목소리였다.
주변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상판이 내려앉는 굉음과 쇠붙이가 뒤틀리는 비명이 무전기를 타고 생생하게 전해졌다.
"박사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우진 씨가 해냈어요! 시스템 수식을 근원부터 전부 불태웠어요!"
서연이 피 묻은 손으로 무전기를 움켜쥐고 울부짖듯 소리쳤다.
- 봤다…… 역삼역 승강장 비상 모니터로 진실이 송출되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지금 감격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6층과 이 일대 지하 전력망 전체가 연쇄 폭주하고 있어!
강정호 박사의 호흡은 거칠고 다급했다.
- 중앙 코어가 소각되면서 발생한 천문학적인 결손 엔트로피가 사옥 지하와 통신 중계국 지하를 연결하는 메인 냉각탑으로 집중 역류했다!
초전도 냉각 밸브들이 과전압에 녹아내리면서 압력 밥솥처럼 팽창하고 있어!
앞으로 7분…… 아니,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거다!
냉각탑이 터지면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암반 일대가 모조리 함몰된다!
쿵― 콰아아앙!
무전기 너머에서 고막을 찢는 폭음과 함께 박태호의 거친 비명이 겹쳐 들려왔다.
- 젠장!
박사님, 조심하십시오!
3번 비상 도크 쪽 천장 슬래브가 무너져 내립니다!
서연 누나!
우진이 형!
빨리 거길 빠져나와요!
변전실 환기구 방면 통로는 이미 화염과 가스로 가득 차서 진입이 불가능합니다!
"태호야! 내 말 잘 들어라!"
우진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뻗어 서연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채듯 쥐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고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아버지 모시고 뒤돌아보지 말고 먼저 지상으로 나가! 환기구 쪽이 막혔다면 2호선 선로를 따라 역삼역 사거리 8번 출구 비상 탈출구로 뛰어! 거긴 아날로그 철문이라 잠기지 않았을 거다! 알겠냐!"
- 하지만 형님은요!
두 분은 어떻게 나오시려고요!
"우리는 중계국 동쪽 벽면에 매설된 비상 통신 케이블 샤프트를 타고 지상 환풍구로 직행한다! 8번 출구 앞 광장에서 합류해! 절대 멈추지 마라!"
- 우진아…… 내 아들아!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살아남아야 한다!
너는 이미 네 모든 몫을 다 해냈다!
강정호 박사의 피 끓는 절규를 끝으로, 무전기는 날카로운 잡음과 함께 완전히 침묵했다.
지하 암반을 가로지르던 마지막 통신 케이블마저 낙하하는 잔해에 끊겨 나간 탓이었다.
7. 잿더미 속의 탈출
쿠구구구궁―!
머리 위 천장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무게 수 톤에 달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암반 덩어리가 우진과 서연의 불과 2미터 앞에 굉음을 내며 처박혔다.
충격으로 바닥 타일이 솟구쳐 올랐고, 수십 대의 양자 서버 랙들이 도미노처럼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지하 4구역 최심부, 냉각탑과 연결된 기계실 철문 틈새로 살갗을 바싹 태워버릴 듯한 붉은 화염과 고열의 수증기가 무섭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우진 씨, 내 어깨 꽉 잡아요! 놓치면 안 돼요!"
서연이 탄창이 빈 소총을 집어 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우진의 겨드랑이에 제 어깨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체구가 작은 그녀였지만, 턱이 빠질 정도로 이를 악물며 우진의 육중한 체중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우진의 피와 땀이 서연의 목덜미를 뜨겁게 적셨다.
"가요…… 서연 씨. 우리 둘 다…… 살아서 나갑니다."
우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콘크리트 바닥을 힘차게 딛고 일어섰다.
더 이상 미래를 훔쳐보는 초인의 권능 따위는 없었다.
어느 방향에서 파편이 쏟아질지, 어느 발판이 무너져 내릴지 미리 짚어주던 기적의 감각은 사라졌다.
오직 인간의 눈으로 불길을 보고, 인간의 귀로 붕괴의 소리를 들으며, 살이 찢어지고 뼈가 삐걱거리는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숭고한 사투였다.
콰아아앙―!
등 뒤에서 기어이 1차 냉각 슬러지 고압 배관이 폭발하며 섭씨 수백 도의 끓는 오염수와 검은 연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복도를 집어삼켰다.
벽면을 따라 푸른빛을 맥동하던 배후 조직의 사각 통제 격자망 잔해들이 불꽃을 튀기며 잿더미 속으로 흔적도 없이 타들어 갔다.
무너져 내리는 시스템의 잔해를 밟으며, 두 사람은 붉은 화염의 혓바닥이 일렁이는 비상 케이블 샤프트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상에서는 조작된 운명의 사슬을 끊어낸 수십만 군중의 함성이 번개처럼 메아리치고 있었고, 지하에서는 15년간 세상을 지배해 온 거대한 기만 체계가 단말마의 굉음을 토해내며 잿더미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