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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80화

동기화 개시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빗속의 사선

 

서울 테헤란로의 하늘은 잿빛 구름에 짓눌려 있었다.

 

폭로 방송의 여파로 전광판마다 붉은 경고문이 번쩍였고, 매캐한 타이어 타는 냄새와 최루탄 연기가 빗물과 뒤섞여 폐부를 찔렀다.

 

쿵, 쿵, 쿵.

 

육중한 장갑차의 디젤 엔진 진동이 아스팔트를 타고 뼈마디까지 울렸다.

 

강우진(姜宇鎭)은 맨홀 뚜껑 틈새로 지상의 동태를 살폈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네모나 세모, 검은 실선 따위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관자놀이 흉터를 짓누르던 끔찍한 두통도, 시신경을 갉아먹던 이명도 깨끗이 씻겨 나가 있었다.

 

완벽한 보통 인간의 시야였다.

 

그러나 감각은 이전보다 훨씬 서늘하게 곤두서 있었다.

 

도형이라는 비틀린 필터를 걷어내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벌거벗은 현실 그 자체였다.

 

통신 중계국 건물 외벽에는 계엄사령부 산하 특수임무대의 차벽이 빈틈없이 둘러쳐져 있었다.

 

검은 전투복을 입은 진압 병력 여남은 명이 지하 환기구 쪽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들의 총구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치이익.

 

빗물을 머금은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한서연의 다급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진 씨……! 셔터 하단이 완전히 녹아내렸어요. 계엄군이 섬광탄을 준비하고 있어요. 백업 외장 하드는 제 품에 넣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아요."

 

서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깃든 결기는 서늘했다.

 

"서연 씨, 고개 숙이고 바닥에 엎드려요."

 

우진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금 들어갑니다."

 

탁.

 

무전을 끊은 우진은 빗물이 고인 맨홀 철판을 힘껏 밀어젖혔다.

 

어깨에 멘 K2C1 소총의 멜빵을 바짝 당겨 쥐며, 그는 단숨에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젖은 아스팔트에 군화 밑창이 미끄러지듯 마찰음을 냈다.

 

순수한 인간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수축했다.

 

초인적인 척력도, 탄도를 미리 내다보는 변화 감지의 잔상도 없었다.

 

오직 망막에 맺히는 적들의 총구 각도, 발소리, 빗줄기를 가르는 공기의 흐름을 육안으로 판단해야 했다.

 

"배후에 침입자다! 사살하라!"

 

후방을 경계하던 계엄군 2명이 반사적으로 총구를 돌렸다.

 

타앙!

 

총탄 한 발이 우진의 뺨을 스치며 귀밑바닥을 찢었다.

 

뜨거운 피가 빗물과 함께 턱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우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0.3초의 인과율 지연을 계산할 필요조차 없었다.

 

군화를 굴려 젖은 보도블록을 차오르며, 우진은 총구를 겨누는 적의 가슴패기를 향해 그대로 몸을 던졌다.

 

쿠웅!

 

육중한 방탄복끼리 부딪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적 한 명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우진은 쓰러진 적의 총열을 낚아채 바닥으로 꺾어 내린 뒤, 개머리판으로 다른 병사의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뻐억!

 

헬멧 턱끈이 터져 나가며 병사가 허공으로 피를 뿜고 쓰러졌다.

 

"비켜."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지하 환기구 계단으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서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산소절단기의 푸른 불꽃이 시야를 메웠다.

 

2. 마지막 보루

 

통신 중계국 지하 4구역 외장 백업 서버실 앞.

 

두꺼운 강철 차폐 셔터의 중앙부가 시뻘겋게 녹아내리며 쇳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산소 탱크 차단 완료! 개머리판으로 걷어차! 틈을 벌려라!"

 

특수임무대 조장이 소리치며 방탄 방패를 앞세웠다.

 

그들의 목표는 서버실 내부의 인원 사살과 마스터 백업 드라이브의 영구 파기였다.

 

쾅!

 

육중한 발길질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셔터 하단이 우그러지며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 들어갈 틈새가 벌어졌다.

 

안쪽에서 기침 소리와 함께 한서연의 마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권총을 양손으로 쥔 채, 떨리는 총구를 뚫린 틈새로 겨누고 있었다.

 

가슴 안주머니에는 전국 5,100만 명의 조작 데이터와 정관계 결탁 명단이 든 테라바이트 외장 하드가 묵직하게 박혀 있었다.

 

'절대로 빼앗길 수 없어.'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팽돌았다.

 

이 데이터가 불타버린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가축처럼 조작당해 온 지난 15년의 세월은 영원히 암흑 속에 묻히게 된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져 지켜온 진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투척 준비, 섬광……."

 

특수임무대원이 수류탄 파우치에서 섬광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타당, 탕!

 

계단참 상부의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점사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크아악!"

 

섬광탄을 쥐고 있던 병사의 손목과 어깨에 탄환이 정확히 박혔다.

 

손에서 미끄러진 섬광탄이 바닥을 굴렀다.

 

쾅-!

 

백색의 맹렬한 섬광과 굉음이 지하 복도를 하얗게 집어삼켰다.

 

"적습이다! 후방 경계!"

 

시야가 일시적으로 마비된 계엄군들이 허공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퍼부었다.

 

도비탄이 콘크리트 벽을 때리며 주황색 불꽃을 튀겼다.

 

우진은 벽면에 등을 바짝 밀착한 채, 반동으로 튀어 오르는 총열의 진동을 어깨로 억누르고 있었다.

 

시야가 하얗게 타버린 것은 적들만이 아니었다.

 

이능이 사라진 우진 역시 망막에 맺힌 잔상 때문에 눈앞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는 공기의 흐름과 총구 화염의 위치를 귀로 낚아챘다.

 

철컥.

 

빈 탄창을 떨어뜨리고 새 탄창을 쑤셔 박는 손놀림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우진은 연막을 뚫고 앞으로 쇄도했다.

 

휘둘러지는 방탄 방패의 하단을 군화로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린 뒤, 특공무술의 전형적인 꺾기 동작으로 조장의 목덜미를 휘감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바닥에 머리를 찧은 조장이 의식을 잃고 늘어졌다.

 

남은 병사 하나가 당황하여 소총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우진의 총구가 이미 그의 헬멧 이마 정중앙을 겨누고 있었다.

 

차가운 총구의 감촉에 병사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총 버려."

 

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병사는 떨리는 손으로 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서연 씨, 나와요. 상황 끝났습니다."

 

우진이 우그러진 셔터를 발로 걷어차 공간을 넓히며 손을 뻗었다.

 

그을음투성이가 된 서연이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우진의 피투성이가 된 뺨과 찢어진 옷자락을 본 서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우진 씨…… 다쳤잖아요. 대체 어떻게……."

 

"괜찮습니다. 찰과상일 뿐이에요."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연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마스터 백업본은요?"

 

"여기, 여기 온전히 있어요."

 

서연이 재킷 안쪽에서 묵직한 티타늄 외장 하드를 꺼내 보였다.

 

그 단단한 금속 케이스 표면에 새겨진 푸른 표시등이 희미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우진의 눈빛이 비로소 안도감으로 젖어 들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채 3초를 가지 못했다.

 

치직, 치지직.

 

복도 벽면에 매설된 비상 통신 단말기와 중계국 내부의 구형 모니터 수십 대가 일제히 켜지며 날카로운 고주파 소음을 뿜어냈다.

 

지하 100미터에서 부수었던 그 기괴한 얼굴.

 

서지훈의 잔류 인격 홀로그램이 푸른 노이즈 속에서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일제히 화면을 가득 채웠다.

 

3. 망령의 조롱

 

치이익-.

 

화면 속 서지훈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반쯤 벗어나 있었다.

 

국가안전기획처의 메인 서버와 강제로 결합한 탓인지, 그의 이목구비는 이진 데이터와 붉은 격자선으로 잘게 쪼개져 흉물스럽게 일렁였다.

 

'크크…… 하하하! 어리석구나, 강우진.'

 

기계음이 뒤섞인 서지훈의 목소리가 지하 공동구 전체에 메아리쳤다.

 

'그깟 플래시 메모리 하나를 지켜냈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 같으냐? 밖을 보아라. 네가 그토록 찬양하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치직거리는 화면 한편으로 지상 테헤란로의 실시간 감시 카메라 영상이 분할 투사되었다.

 

지옥도였다.

 

계엄군의 장갑차 앞을 가로막은 것은 저항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과 주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깨진 유리창과 불타는 차벽 사이에서 무릎을 꿇고 계엄군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

 

"제발 미러 큐브를 켜주세요!"

 

"내일 출근해야 합니다! 주가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제발 예전처럼 정해진 대로만 살게 해달란 말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해방의 환희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미쳐버린 대중의 처절한 퇴행만이 가득했다.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떻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요? 우리는 진실을 알려줬을 뿐인데……."

 

'보아라! 인간은 본래 나약한 가축이다!'

 

서지훈의 잔류 음성이 광기 어린 조소를 쏟아냈다.

 

'자유란 독이다. 선택이란 저주야! 매 순간 실패할까 두려워 떨고, 스스로의 무능에 절망하느니, 차라리 완벽한 시스템의 궤도 안에서 정해진 행복을 배급받는 것이 훨씬 인간다운 삶이다. 너희가 부순 것은 감옥이 아니라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단 말이다!'

 

우진은 서지훈의 외침을 묵묵히 들으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주머니 안쪽에는 차갑게 굳어 있는 단결정 사파이어, 부친 강정호가 남긴 '마스터 암호 키'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3분 뒤면 국가안전기획처의 중앙 양자 메인 프레임이 소월도와 역삼의 잔류 백업을 모두 흡수하여 [프로젝트 에덴]을 완성한다.'

 

서지훈의 눈동자가 모니터 너머에서 번뜩였다.

 

'그 누구도, 심지어 너조차도 이제는 시스템의 완성을 막을 수 없다. 이능을 잃은 일개 보통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얌전히 무릎 꿇고, 내가 베풀어줄 가장 완벽한 궤도를 받아들여라, 강우진!'

 

탁.

 

우진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통신 중계국 콘솔 데스크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테헤란로 지하 통신망의 가장 깊은 간선 케이블과 직결되는 광역 인터페이스 포트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서지훈."

 

우진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분노도, 두려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오직 깊고 단단한 확신만이 서려 있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인간은 나약하고, 불확실성은 두렵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으니까."

 

모니터 속 서지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하지만 말이야."

 

우진은 주머니에서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꺼내 들었다.

 

투명한 보석 내부에서 푸른빛의 미세한 회로가 영롱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 두려움을 견뎌내고 내딛는 한 걸음이, 너 같은 기계가 짜놓은 완벽한 백 걸음보다 훨씬 가치 있어. 상처 입고 넘어지더라도 내 의지로 걷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이다."

 

우진은 콘솔 상단의 메인 광학 단말기를 거칠게 뜯어냈다.

 

수십 가닥의 광섬유 케이블이 푸른 불꽃을 튀기며 허공으로 쏟아져 나왔다.

 

4. 바이패스의 진실

 

"우진 씨!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

 

서연이 기겁하며 달려와 우진의 팔을 잡았다.

 

우진의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 흉터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15년 전, 아버지 강정호가 어린 아들의 뇌간에서 제어 칩을 적출하며 심어둔 유일무이한 생체 인터페이스, 즉 '역위상 바이패스 단말'이었다.

 

"오리진 코어가 파괴되었어도, 놈의 본체는 지금 국가안전기획처 기간망으로 옮겨갔어요."

 

우진이 서연을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상에서 외장 하드를 아무리 백업해 봤자, 저 중앙 연산망이 살아있는 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다시 사각 격자가 드리워질 겁니다. 저걸 끊어내야 해요."

 

"하지만 우진 씨는 이미 능력을 잃었잖아요! 지금 저 전산망에 맨몸으로 접속하면…… 뇌세포가 전부 타버릴 수도 있어요!"

 

서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역삼역 지하에서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바이패스를 연결했을 때도 우진은 뇌출혈과 극심한 발열로 사경을 헤맸다.

 

그런데 지금은 시스템의 억압을 튕겨내던 척력도, 공감각적 왜곡 방패도 없다.

 

순수한 인간의 뇌파로 국가 단위의 슈퍼컴퓨터에 접속한다는 것은, 스스로 타오르는 용광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치익.

 

그때, 우진의 무전기에서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강정호였다.

 

"우진아…… 내 말 들리느냐."

 

"아버지."

 

우진은 무전기를 쥐었다.

 

"서지훈 놈의 말이 맞다. 놈은 국가 전산망의 기간 코어를 틀어쥐었어. 외부에서의 물리적 타격이나 소프트웨어 패치로는 저 거대한 데이터의 결속을 끊을 수 없다. 오직…… 단 하나의 방법뿐이야."

 

강정호의 목소리는 쇠잔했으나, 그 안에는 학자로서의 냉철함과 아버지로서의 처절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15년 전 내가 네 관자놀이에 남겨둔 신경 궤도 절제술의 흔적…… 그것은 단순한 백신이 아니다. 시스템이 정의한 모든 수식(□, △, ○)을 거부하는 절대적 공백…… 즉 '연산 불능의 노드'다."

 

우진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만히 짚었다.

 

흉터 부근이 심장 박동에 맞춰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네 뇌파가 마스터 암호 키를 매개로 시스템의 코어에 직결되는 순간, 슈퍼컴퓨터는 너라는 존재를 해석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미 궤도 바깥으로 튕겨 나간 아웃라이어이자, 규정할 수 없는 오류 그 자체다. 시스템이 너를 읽으려 하면 할수록…… 놈들의 완벽한 방정식은 내부에서부터 모순을 일으키며 붕괴할 게다."

 

강정호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반작용은 고스란히 네 뇌간으로 쏟아질 게다. 수천만 명의 결손 엔트로피가 네 의식을 찢어발기려 들 거야. 버텨낼 수 있겠느냐?"

 

우진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15년 동안 자신을 얽매어 왔던 기괴한 환각과 두통의 종착역에 드디어 도달했다는 해방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아버지."

 

우진이 나지막하게 답했다.

 

"저는 평생 네모와 세모에 갇혀 살았습니다. 남들이 정해준 선로 위를 달리며, 그것이 제 삶인 줄 알았죠.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 삶은 제가 선택하는 거라는 걸요."

 

우진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외장 하드의 USB 케이블을 집어 들었다.

 

"서연 씨, 이 백업 데이터를 제 단말 콘솔에 브리지로 묶어주세요."

 

"우진 씨……!"

 

"진실은 빛 아래로 나가야 합니다. 제가 시스템의 문을 안쪽에서 열어젖힐 테니, 서연 씨는 이 데이터를 전국 모든 통신망으로 쏘아 올리세요. 그게 우리가 함께 이 싸움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우진의 눈동자를 보았다.

 

그곳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오직 맑고 투명한 인간의 결의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의 만류는 모욕이었다.

 

"알았어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해요. 약속해요."

 

"네. 약속합니다."

 

우진은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의 하단 접점을 콘솔의 주 인터페이스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키리릭!

 

사파이어 결정체가 슬롯에 맞물리며 눈이 멀 것 같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드러난 광섬유 접속 단자에 가져다 댔다.

 

찌르르륵-!

 

푸른 전자기 불꽃이 살갗을 태우며 우진의 흉터 속 생체 리셉터와 광케이블이 신경학적으로 맞물렸다.

 

5. 심연 속으로

 

쿠구구구궁-!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우진의 뇌간을 관통했다.

 

"크아아아악-!"

 

우진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현실 풍경이 유리창처럼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통신 중계국의 시멘트 벽도, 울부짖는 서연의 얼굴도 순식간에 암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진의 의식이 도달한 곳은 끝을 알 수 없는 디지털의 심연이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공간.

 

그 허공에는 수천만, 수억 가닥의 붉고 푸른 광선들이 거대한 격자망(Grid)을 형성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5,100만 명의 호흡, 맥박, 생각, 그리고 예정된 사건들의 거대한 집합체였다.

 

격자망의 중심부, 하늘 높은 곳에 거대한 바벨탑처럼 솟아 있는 칠흑의 정육면체.

 

국가안전기획처와 넥스트 큐브가 결합하여 탄생한 최종 중앙 연산체, [오르비스-네오]였다.

 

'크하하하! 기어이 제 발로 무덤에 기어들어 왔구나, K-07!'

 

허공 전체를 뒤흔들며 거대한 서지훈의 얼굴이 격자선들을 타고 떠올랐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그 거대한 얼굴은 우진의 작은 의식체를 내려다보며 사납게 포효했다.

 

'여기는 나의 영역이다! 5,100만 명의 궤도가 하나로 묶인 절대적인 법칙의 세계! 일개 오류 덩어리 따위가 감히 이 완전한 질서에 도전하려 하느냐!'

 

우지지직!

 

서지훈의 호령과 함께, 허공의 사각 격자들이 수만 개의 창검으로 변하여 우진의 의식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공격이 아니었다.

 

'너는 실패할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실패자다.'

 

'너는 평생 고통 속에 살다 잊힐 것이다.'

 

수천만 개의 부정적 인과율과 정해진 파멸의 데이터가 우진의 신경망을 짓누르며 들어왔다.

 

극심한 두통이 뇌를 헤집었다.

 

우진의 가상 신체 곳곳이 찢겨 나가며 데이터의 파편이 피처럼 흩뿌려졌다.

 

그러나 우진은 무릎 꿇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가슴을 폈다.

 

머리 위에 도형이 없다는 것.

 

그것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스템의 그 어떤 수식과 명령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서지훈."

 

우진의 의식이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너는 이 거대한 격자가 질서라고 믿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거대한 묘비명으로밖에 안 보여."

 

우진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우진의 가슴 한가운데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아니었다.

 

기하학의 규격을 비웃듯 일렁이는 거대한 문자.

 

붉게 타오르며 맥동하는 기호.

 

[ Error: ?

 

]

그것은 시스템이 15년 동안 단 한 번도 풀어내지 못한 절대적인 불확정성의 표식이었다.

 

6. 오류의 파동

 

삐이이이이-!

 

심연 전체에 살을 에는 듯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중앙 슈퍼컴퓨터의 메인 프로세서가 우진의 존재를 감지하고 연산을 시작하는 순간, 치명적인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경고: 규격 외 비인가 노드 접속 감지]

 

[식별 코드: Node-1 / K-07 / 강우진]

 

[궤도 방정식 산출 시도……]

 

[변수 대입 실패.

 

X값 정의 불가]

[Y값 무한대 발산]

 

[오류율 14%…… 28%…… 59% 폭증!]

 

서지훈의 거대한 얼굴이 경악으로 뒤틀리기 시작했다.

 

'무…… 무엇이냐? 네놈의 데이터는 대체 왜 계산되지 않는 것이냐! 왜 궤도가 도출되지 않아!'

 

서지훈은 필사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듯 격자망을 쥐어짜며 우진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나 우진의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물음표(?)'의 파동은 쇄도하는 검은 사각 격자들을 닿는 족족 하얗게 탈색시키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우진이 피를 흘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의 검은 격자들이 유리알처럼 깨져나갔다.

 

"인간의 삶은 네깟 놈의 컴퓨터 화면 따위로 계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우진은 양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거대한 시스템의 신경 다발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그 신경 다발의 가장 깊은 코어 핵에 박아 넣었다.

 

콰아아아앙-!

 

순백의 섬광이 디지털 심연 전체를 집어삼켰다.

 

마스터 암호 키에 각인되어 있던 강정호의 '루트 삭제(ROOT DELETION)' 알고리즘이 우진의 물음표 데이터와 결합하며 폭발적인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치지직!

 

파바박!

 

중앙의 거대한 칠흑빛 정육면체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나갔다.

 

그 틈새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빛줄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안 돼! 멈춰라! 이 코어가 무너지면 전국의 데이터망이…… 모든 예측 시스템이 영원히 파괴된단 말이다!'

 

서지훈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의 얼굴을 이루고 있던 격자선들이 뚝뚝 끊어져 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래. 부서져라."

 

우진은 찢어지는 뇌세포의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릅떴다.

 

"부서지고, 다시 시작하는 거다. 우리들의 손으로!"

 

우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순백의 백신 펄스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슈퍼컴퓨터의 메인 프레임을 집어삼켰다.

 

수천만 개의 붉은 에러 로그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FATAL ERROR: CAUSALITY CORRUPTED]

 

[SYSTEM INTEGRITY: 0.00%]

 

[ALL GRID ARCHITECTURE COLLAPSING……]

 

7. 균열의 시작

 

현실의 통신 중계국 지하 4구역.

 

"우진 씨!"

 

서연의 처절한 외침과 함께 콘솔 전체에서 눈부신 백색 스파크가 폭발했다.

 

퍼버벅!

 

수십 대의 모니터가 차례로 파열음을 내며 꺼져갔고,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관자놀이에 광섬유를 연결한 채 서 있던 우진의 몸이 덜컥 떨렸다.

 

우진의 양 코와 입, 그리고 오른쪽 귀에서 검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쥐고 콘솔 깊숙이 밀어 넣고 있었다.

 

위잉- 철컥!

 

마침내 콘솔 중앙의 녹색 승인 등이 점등되었다.

 

[마스터 백도어 개방 완료]

 

[전국 기간 통신망 우회 경로 동기화 성공]

 

"지금이에요, 서연 씨!"

 

피를 토하듯 쥐어짜 낸 우진의 쉰 목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서연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품에 안고 있던 외장 하드의 마스터 전송 레버를 힘껏 내리꽂았다.

 

탁-!

 

치이이이잉-!

 

통신 중계국의 거대한 지하 발전기가 비명을 지르며 모든 전력을 상부 안테나로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국가안전기획처가 걸어두었던 최고위 방화벽이, 우진이 시스템 내부에서 터뜨린 '물음표(?)'의 연쇄 오류에 의해 완전히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거대한 보안의 공백을 뚫고, 5,100만 명의 인생을 조작해 온 넥스트 큐브의 추악한 진실과 정관계 결탁 명단이 전국 수천만 대의 스마트폰, TV 방송망, 옥외 전광판으로 빛의 속도로 쏘아 올려지기 시작했다.

 

지상 테헤란로.

 

계엄군 장갑차를 향해 무릎 꿇고 빌던 시민들의 스마트폰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

 

국가 비상 재난 문자와 함께, 화면 가득 재생되는 것은 조작된 인생 궤도의 알고리즘 설계도와 고위 관료들의 육성이 담긴 녹취 파일이었다.

 

거리를 메우던 비명과 아우성이 일순간 기괴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자신들의 불행이, 실패가, 가족의 죽음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안락한 질서를 위해 계산된 '희생양의 각본'이었다는 사실을 목도한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맹목적인 공포가 서서히 걷혀 나가고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린 충격, 그리고 거대한 분노였다.

 

"이게…… 이게 진짜였단 말인가?"

 

"우리가…… 가축이었다고?"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웅성거림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테헤란로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신 중계국 지하 콘솔 앞.

 

서지훈의 잔류 인격이 깃들어 있던 마지막 메인 모니터에 기괴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화면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며, 시스템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부터 치명적인 파멸의 연산이 역류해 올라오고 있었다.

 

우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완벽하다 자부하던 시스템의 바벨탑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파멸의 전조가 똑똑히 비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