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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79화

최후의 논쟁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지하 100미터의 망령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상판 사이로 붉은 비상등이 불안하게 명멸했다.

 

매캐한 석면 가루와 고열에 타버린 실리콘 배선의 역한 냄새가 차디찬 지하 암반의 눅눅한 습기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역삼역 변전실 하부 폐쇄 집수정에서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로 이어지는 낡은 철제 점검 통로.

 

머리 위 철골 트러스는 육중한 상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기괴한 각도로 활처럼 휘어져 있었고, 갈라진 벽면 틈새로는 흙탕물이 가느다란 실폭포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치지직, 파직.

 

천장에 매달린 채 피복이 벗겨진 고압 전선관에서는 간헐적으로 푸른 불꽃이 튀며 주변 암벽을 시퍼렇게 물들였다.

 

강우진(姜宇鎭)은 녹슨 사다리의 발판을 디딘 채, 머리 위에 굳게 닫힌 둥근 주철 맨홀 뚜껑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거친 쇳덩이의 냉기는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고 현실적이었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관자놀이를 째고 신경을 잘라냈던 그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더 이상 바늘로 찌르는 듯 욱신거리지 않았다.

 

시야를 핏빛과 푸른빛으로 어지럽히던 궤적의 잔상도,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불길하게 회전하던 기하학적 도형들도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정수리 위에 그 어떤 형상도 떠 있지 않은 순수한 육체.

 

0.3초 뒤의 미래를 엿보며 적의 사격을 피하던 기괴한 예지력도, 공간의 탄도를 강제로 굴절시키던 특이점의 절대 척력도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살갗을 에이는 서늘한 지하의 외풍과, 부러진 갈비뼈가 숨을 쉴 때마다 폐를 찌르는 둔중한 격통만이 그가 살아 숨 쉬는 나약한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후우, 하고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6층 양자 슈퍼컴퓨터 코어룸에서 쏟아져 내리던 콘크리트 암반 파편을 온몸으로 받아냈고, 서지훈과의 육탄전에서 입은 타박상과 자상이 신경을 갉아먹듯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찌르는 듯한 통증이야말로 자신이 시스템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유로운 생명이라는 유일한 증거였다.

 

치지직.

 

그때 찌그러진 벽면 분전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구형 산업용 CRT 모니터 하나가 기괴한 정전기 소리를 내며 푸른빛을 토해냈다.

 

사옥 지하 6층 메인 프레임이 마스터 암호 키에 의해 소각되었음에도, 지하 배전선로의 비상 축전지 잔류 전력을 빨아들인 브라운관 화면이 파르르 떨리며 한 사람의 얼굴을 빚어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메마르고 창백한 이목구비, 그리고 일체의 감정이 거세된 무기질의 눈빛.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최심부에서 콘크리트 암반에 깔려 육신이 완전히 으스러졌던 사내, 서지훈(徐智勳)이었다.

 

"질기더군, 강우진."

 

스피커의 찢어지는 파열음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생전의 육성보다 훨씬 건조하고 기계적인 노이즈를 머금고 있었다.

 

독립 양자 아카이브 사유 루틴.

 

육신의 물리적 소멸에 대비하여 자신의 뇌파와 사고 패턴, 신경망 알고리즘 전체를 국가안전기획처 기간 전산망에 비상 백업해 둔 디지털 망령이었다.

 

"아직도 그 헛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뭐지? 지상은 이미 우리의 통제 아래 완벽하게 재편되고 있다."

 

모니터 속 서지훈의 눈동자가 차갑게 깜빡이며 우진의 만신창이가 된 온몸을 훑어내렸다.

 

화면 너머의 시선임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시스템적 살의와 지독한 결벽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폭로 방송의 결과가 고작 이것이다. 네가 목숨을 걸고 인류에게 선물했다는 그 찬란한 자유라는 것의 밑바닥을 똑똑히 보아라."

 

2. 통제된 유토피아의 허상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좌우로 분할되며 지상 테헤란로 일대의 실시간 폐쇄회로 영상들이 어지럽게 투사되었다.

 

그것은 목도하기조차 버거운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도시의 창공을 덮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이 찢겨 나가고 미러 큐브 앱의 서버가 일제히 정지하자, 거리는 해방을 만끽하는 축제의 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닥쳐올 내일을 알지 못한다는 극단적인 공포에 질린 군중의 집단 광기와 폭동으로 얼룩져 있었다.

 

테헤란로 왕복 10차선 대로는 멈춰 선 차들과 뒤엉킨 잔해로 가득 차 있었다.

 

신호등이 깜빡임을 멈추고 교통 관제 알고리즘이 마비되자, 사거리 한가운데서는 충돌한 버스와 승용차들이 시커먼 유독가스를 뿜어내며 불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상점 쇼윈도를 깨부수고 식료품을 약탈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절규는 하나같이 같은 의문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 나는 몇 시에 출근해야 하는 거지?'

 

'내가 투자한 주식은 어떻게 되는 건가?'

 

'누가 내 삶의 정답을 알려줄 거냐고!'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던 안락한 각본이 증발해 버리자, 사람들은 1초 뒤에 닥쳐올 미래조차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다.

 

취업 면접 결과도,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도, 심지어 오늘 점심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조차 시스템의 추천에 의존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깨어진 자유를 저주하며 스스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차라리 과거처럼 일거수일투족을 사각형 규격에 가두어 주던 시절이 안전했다며, '내 안전한 네모를 돌려달라'고 넥스트 큐브 사옥 로비를 향해 보도블록과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혼란의 틈을 타고, 테헤란로 대로변으로 국가안전기획처의 차륜형 장갑차들과 방탄모를 쓴 계엄군 병력이 육중한 궤도를 굴리며 진입했다.

 

철컥거리며 장전되는 K2 돌격소총들, 최루탄의 매캐한 백색 연기, 아스팔트를 울리는 육중한 군화 발소리.

 

그러나 놀랍게도 군중은 그 무자비한 공권력을 향해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장갑차를 향해 두 손을 흔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군인이다! 드디어 정부가 우릴 구하러 왔다!"

 

"제발 질서를 잡아주십시오! 저 폭도들을 쓸어버리고 시스템을 복구해 주세요!"

 

자유의 공포에 질린 대중이 스스로 다시 목줄을 채워줄 주인을 맞이하고 있는 기괴한 역설이었다.

 

서지훈의 잔류 인격이 화면 너머에서 서늘한 냉소를 머금었다.

 

"보아라. 저것이 네가 그토록 숭배해 마지않던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다."

 

"……."

 

"스스로 사고할 능력도 없고, 선택의 무게를 감당할 용기조차 결여된 나약한 가축들. 그들에게 자유란 축복이 아니라 살점을 도려내는 잔인한 폭력이자 독선일 뿐이다."

 

서지훈의 메마른 음성에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차올랐다.

 

모니터 속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눈동자가 형형하게 번뜩였다.

 

"199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내 가족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몰살당했던 그 서울 외곽 연립주택 단칸방을 기억하나? 사채 빚 독촉에 시달리다 눈이 뒤집혀 칼을 휘두르던 미치광이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신은 어디에 있었지? 네가 말하는 그 고귀한 자유의지라는 이름 아래 방치된 우발성이 내 어머니의 숨통을 끊고, 내 일곱 살배기 여동생의 목덜미를 난도질했다."

 

모니터 주변으로 지지직거리는 전자 노이즈가 폭풍처럼 일렁였다.

 

"그 어린것이 피를 토하며 내 옷자락을 쥐고 살려달라 애원할 때, 세상의 법과 도덕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어. 우발적 충돌, 탐욕, 증오, 실패.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변수야말로 문명을 안쪽에서부터 갉아먹는 유독한 암세포다. 내가 완성하려 했던 프로젝트 에덴에서는 단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지 않아. 알고리즘이 지정한 완벽한 궤도 안에서, 모두가 분수에 맞는 행복을 누리고, 범죄율 0퍼센트, 자살률 0퍼센트의 영원한 평화 속에 안식할 수 있었다!"

 

서지훈이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화면 너머로 우진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압이 좁은 갱도 벽을 흔들었다.

 

"그런데 네놈이 그 완벽한 평화를 부쉈어. 저 가엾은 벌레들을 차디찬 불확실성의 심연으로 내던져버린 거다. 말해봐라, 강우진! 저 참담한 혼돈이 네가 갈망하던 인간의 존엄인가?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저 파멸이 정녕 네가 원하던 자유의 대가란 말이냐!"

 

3. 실패할 권리와 상처의 증명

 

지하 갱도를 찢어발기듯 울려 퍼지던 서지훈의 포효가 잦아들자, 찌그러진 배전반의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강우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뒤덮인 K2C1 소총의 멜빵을 단단히 고쳐 잡으며, 모니터 속 망령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과거의 그였다면 타인의 정수리 위에 얽혀 있던 검은 꼭두각시 줄과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세모를 보며 본능적인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시스템의 거대한 연산력 앞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무력감에 짓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는 깊고 투명했다.

 

그 어떤 초인적인 왜곡도 끼어들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눈동자 속에 서슬 퍼런 투지와 숭고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너는 근본부터 틀렸어, 서지훈."

 

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지하 100미터 암반 바닥을 묵직하게 울렸다.

 

단말마처럼 헐떡이던 숨결조차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그 프로젝트 에덴이라는 건 평화가 아니다. 그저 도살의 순번을 오차 없이 정리해 둔 거대한 가축 사육장일 뿐이지."

 

"가축이라고?"

 

서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화면 속 영상에 미세한 가로줄 노이즈가 생겨났다.

 

"그래. 실패가 두려워서 넘어질 기회조차 빼앗아버리는 세상, 상처가 무서워서 칼날을 피하는 대가로 영혼을 우리에 가두는 삶이 어떻게 살아 있는 인간인가?"

 

우진은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군화에 짓밟힌 콘크리트 파편이 바스러지며 으드득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자유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평생 두 다리에 무거운 쇠깁스를 차고 기어가던 환자가, 처음으로 깁스를 부수고 제 발로 땅을 딛는 순간 닥쳐오는 뼈마디의 끔찍한 비명일 뿐이야."

 

"궤변이다!"

 

서지훈이 스피커를 찢을 듯 소리쳤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저들은 다시 주인을 부르짖고 있다! 내게 무릎을 꿇고 다시 목줄을 채워달라고 애원하고 있단 말이다! 저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보이지 않나? 통제 없이는 저들은 단 하루도 스스로 살아가지 못해!"

 

"애원하겠지.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피를 철철 흘릴 테니까."

 

우진의 입꼬리에 서늘하면서도 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에는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과 신뢰가 함께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넘어져 가면서 걷는 법을 배우는 존재다. 네가 멋대로 계산해 놓은 실패 없는 시간표 따위가 없어도, 우리는 서로 부딪히고, 절망하고,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도 끝내 다시 일어나 내일을 만들어왔어. 역사가 증명하고, 내 아버지가 증명했고, 지금 저 거리의 사람들도 결국 스스로 증명해 낼 거다."

 

우진은 자신의 상처투성이 손바닥을 들어 모니터 앞에 내보였다.

 

화약 연기에 그을리고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마디.

 

손톱 밑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무너진 잔해에 긁힌 깊은 흉터가 길게 패어 있었다.

 

"실패할 권리. 길을 잃고 끝없이 방황할 자유. 누군가를 증오했다가도 끝내 용서하고 다시 서투르게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그 불완전한 선택이야말로 인간을 기계와 구분 짓는 유일한 본질이다."

 

우진의 목소리가 단단한 쐐기처럼 갱도를 갈랐다.

 

한마디 한마디가 허공을 울리며 서지훈의 알고리즘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타인의 고통을 지워주겠다는 오만으로 모든 가능성을 사각형 감옥에 처넣어버린 넌, 세상을 구원한 신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스템의 가장 추악하고 가련한 부품으로 전락했을 뿐이야."

 

4. 무너져 내리는 신념의 틈새

 

모니터 속 서지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완벽한 논리와 무오류의 수학적 방정식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재단하던 인공지능의 연산 체계에,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치명적인 에러가 발생한 것처럼 픽셀들이 잘게 부서졌다.

 

화면 전체가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교차 점멸하며 프레임이 뚝뚝 끊겼다.

 

"부품……? 내가 시스템의 부품이라고? 내가 15년 동안 이 도시의 혼돈을 지탱해 온 유일한 설계자인데!"

 

"그래. 넌 네 유년의 상처 하나 극복하지 못해서 도시 전체를 네 트라우마의 방패막이로 삼았을 뿐이다."

 

우진의 서슬 퍼런 일갈이 서지훈의 심장을 정조준했다.

 

그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모니터 속 망령을 꿰뚫고 있었다.

 

"여동생을 잃은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통제라는 거창한 철학 뒤로 비겁하게 숨어버린 겁쟁이. 넌 질서를 원한 게 아니다. 두 번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온 세상을 숨 쉬지 않는 시체들의 무덤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만든 건 낙원이 아니라, 너 자신의 거대한 납골당이다."

 

"입 닥쳐라……! 닥쳐!"

 

서지훈의 표정에서 인공지능 특유의 기계적인 냉정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화면 속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미간이 흉측하게 뒤틀렸다.

 

수십 년 동안 억눌러왔던 맹목적인 증오와 함께, 지독하게 메마른 광기가 스피커 너머로 쏟아져 나왔다.

 

연산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분노의 파동.

 

그것은 서지훈 자신이 가장 혐오해 마지않았던 인간 본연의 불완전한 찌꺼기이자 우발성의 폭주였다.

 

스스로가 증오하던 그 나약하고 비열한 인간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채, 서지훈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균열이 번져갔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틀렸을 리가 없어……! 내 방정식은 완벽했다! 세상은 오직 사각 격자 안에서만 보존될 수 있어! 내 질서만이 유일한 정답이다! 나를 부정하지 마라!"

 

모니터 주변의 스피커가 고주파의 비명을 지르며 찢어질 듯한 하울링을 일으켰다.

 

디지털 망령의 신념이 뿌리부터 붕괴하며 뿜어내는 시스템적 과부하.

 

내부 회로에서 타는 냄새가 진동하며 브라운관 뒤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진은 더 이상 그의 절규를 듣지 않았다.

 

그는 소총의 개머리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치켜올렸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이 다시금 폐를 찔렀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서지훈. 이제 네가 만들어낸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콰아앙!

 

묵직한 둔음과 함께 철제 개머리판이 브라운관의 정중앙을 강타했다.

 

두꺼운 방폭 유리가 거미줄처럼 깨져 나가며 푸른색 플라스마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내부의 진공관이 파열되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파지직거리던 전자총이 마침내 숨을 거두며 화면이 완전히 암전되었다.

 

지하 100미터의 버려진 통로에 차갑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서지훈의 메마른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뚝뚝 떨어지는 우진의 땀방울 소리만이 어둠을 적셨다.

 

하지만 우진은 알고 있었다.

 

이 망령의 근원인 메인 데이터 스트림은 이미 국가안전기획처의 심장부로 흘러 들어갔으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싸움은 이제 막 지상에서 시작되려 한다는 사실을.

 

5. 맨홀 너머의 총성

 

치익.

 

치지직.

 

가슴팍 전술 조끼에 꽂혀 있던 아날로그 비상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서연(韓瑞演) 기자였다.

 

- 우진 씨!

 

들려요?

 

제발 대답해 줘요, 강우진 씨!

 

우진은 지체 없이 무전기를 낚아채 송신 버튼을 눌렀다.

 

"서연 씨, 나요. 정신 차려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다친 데는 없어요?"

 

-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난 지금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 4구역, 외장 백업 서버실 안이에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타타탕!

 

탕!

 

탕!

 

무전기 스피커 너머로 고막을 찢는 군용 돌격소총의 거친 격발음이 사납게 메아리쳤다.

 

뒤이어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고열의 전기 토치가 방폭 셔터를 지져대는 소음이 생생하게 긁혀 들어왔다.

 

치이익 하는 쇳물 끓는 소리와 함께 셔터 너머에서 계엄군 지휘관의 서늘한 육성이 희미하게 섞여 들었다.

 

'3분 내로 차폐벽을 절단해라! 안의 계집은 사살해도 좋으니 하드디스크 원본을 확보해!'

 

서연의 가쁜 숨결 사이로 절체절명의 공포와 절박함이 묻어났다.

 

- 계엄군 특수임무대가…… 산소절단기로 차폐 셔터 잠금장치를 녹이고 있어요.

 

2분…… 길어야 3분이면 문이 뜯겨 나가요!

 

"외장 서버의 마스터 백업본은 온전합니까?"

 

- 확보했어요!

 

전국 5,100만 명의 조작 궤도 원본 데이터와 상임이사회-내각 결탁 문건…… 전부 이 테라바이트 하드에 담았어요.

 

하지만 이걸 빼앗기면 모든 게 끝장이에요.

 

저들은 날 살려서 내보낼 생각이 없어요!

 

서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어렵게 되찾은 진실이 다시금 국가 권력의 어둠 속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언론인으로서의 절박한 공포였다.

 

- 우진 씨, 만약 문이 열리면…… 셔터 하단 환기 덕트로 하드를 던질게요.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당신이라도 도망쳐서 이걸 세상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우진이 얼어붙은 갱도를 가르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서연의 절망을 단숨에 찢어버릴 듯한 서슬 퍼런 결의가 담겨 있었다.

 

"당신도, 그 백업본도 내가 반드시 지켜냅니다. 1분만 버텨요. 내가 지금 갑니다."

 

- 우진 씨?

 

안 돼요!

 

거긴 지상 특수부대 병력이 겹겹이 포위망을 치고……!

 

치지지직.

 

강한 전자기 방해 전파와 함께 무전이 뚝 끊겼다.

 

우진은 무전기를 조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깨에 걸린 K2C1 소총의 장전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철컥.

 

약실에 5.56밀리 철갑탄이 물리는 묵직한 기계음이 차가운 정적을 갈랐다.

 

도형을 꿰뚫어 보던 눈은 사라졌다.

 

0.3초 뒤의 미래를 예측하던 감각도,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내던 초인적인 척력도 없다.

 

오직 날카로운 총탄 한 발에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나약한 인간의 육체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이능의 안개에 가려져 있던 오감이, 사선을 넘나들던 전사의 직감으로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맨홀 틈새로 흘러드는 화약 냄새, 아스팔트를 타고 내려오는 장갑차의 육중한 진동, 그리고 지상에서 울부짖는 군중의 비명.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두 손으로 차가운 주철 맨홀 뚜껑을 힘껏 밀어 올렸다.

 

끼이익.

 

거친 쇳소리와 함께 테헤란로의 시린 밤공기와 빗발치는 총성이 사납게 쏟아져 들어왔다.

 

인간 강우진의,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