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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78화

불행 없는 지옥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지하수의 메아리와 유령의 신호

 

녹슨 철제 사다리 표면으로 차가운 지하수가 굵은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변전실 하부 폐쇄 집수정 바닥은 발목까지 잠기는 진흙과 냉각 슬러지로 온통 질척였다.

 

강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가 살을 에는 듯 쓰라렸으나, 지난 수년간 뇌간을 파고들던 살인적인 편두통과 이명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타인의 머리 위를 짓누르듯 맴돌던 백색의 네모도, 파멸의 검은 세모도 시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망막을 짓누르던 기하학적 형상과 꼭두각시 줄의 환영이 걷힌 세상은 기괴할 만큼 텅 비어 있었고, 그 공백은 서늘한 현실의 감각으로 우진의 온몸을 파고들었다.

 

"우진아, 괜찮으냐."

 

벽면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강정호 박사가 거친 기침을 토해 내며 아들의 젖은 옷자락을 붙잡았다.

 

15년간 챔버의 액체 냉각수 속에 잠겨 있던 탓에 그의 양어깨와 목덜미는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감각을 잃은 하반신은 흙탕물 속에 무력하게 잠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숨 돌릴 시간은 지상으로 올라가서 가져도 늦지 않아요."

 

우진은 젖은 방탄 조끼의 탄창 파우치를 단단히 조이며 옆을 돌아보았다.

 

박태호가 으스러진 왼쪽 어깨를 움켜쥔 채 벽에 머리를 찧으며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꽂혀 있던 인과율 자폭 테르밋 소켓은 방화벽 백신 코드로 강제 분리되어 있었지만, 뜯겨 나간 상처 부위에서 검붉은 피가 배수구의 오수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태호야, 버틸 수 있겠어?"

 

"끄떡없습니다, 우진이 형. 서지훈 그 개자식이 쥐고 흔들던 목줄이 끊어졌는데, 이 정도 통증 따위가 대수겠습니까."

 

태호는 입가에 번진 핏물을 퉤 뱉어 내며 오른손으로 K2C1 소총의 노리쇠를 후퇴 고정했다가 놓았다.

 

찰칵거리는 쇳소리가 습기 찬 콘크리트 집수정 내부를 날카롭게 갈랐다.

 

그때, 우진의 가슴팍 무전기에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찢어지는 듯한 여성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 우진 씨!

 

들려요?

 

제 목소리 들려요?!

 

한서연의 목소리였다.

 

간헐적인 총성과 함께 무거운 강철 셔터가 둔탁한 굉음을 내며 찌그러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묻어났다.

 

"서연 씨! 내 목소리 들립니까? 지금 어디예요!"

 

우진이 무전기 송화기를 입술에 바짝 대며 소리쳤다.

 

— 넥스트 큐브 사옥 맞은편……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 4구역이에요!

 

계엄군 특수임무대가…… 유압 절단기로 차폐 셔터를 부수고 있어요!

 

앞으로 5분도 못 버텨요……!

 

— 탕!

 

타다당!

 

소총 연사음이 중계기 회선을 타고 귀청을 찢었다.

 

— 전국 폭로 방송 데이터의 마스터 백업본을…… 외장 서버로 암호화해서 묶어뒀어요.

 

이걸 빼앗기면 정부와 국가안전기획처가 모든 걸 테러 집단의 조작극으로 덮어버릴 거예요!

 

우진 씨, 절대로……!

 

치직, 치지직.

 

노이즈가 비명처럼 솟구치더니 통신이 강제로 끊겼다.

 

우진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중계국 지하 공동구다. 역삼역 변전실 환기구와 맞닿아 있어."

 

우진이 휠체어 대신 벽면의 비상 들것을 펼치며 태호에게 눈짓했다.

 

"태호야, 아버지를 모셔라.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우진이 녹슨 사다리의 첫 단을 밟으려 발을 뻗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집수정 구석, 15년 전 화재 당시 매몰되었던 구형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비상 점검 콘솔이 덜컥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렇게 바랜 녹색 CRT 모니터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푸른빛을 토해 냈다.

 

우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소각되었을 터인 전산망의 찌꺼기 속에서, 꺼져 있던 진공관 스피커가 섬뜩한 하울링을 일으키며 켜졌다.

 

[……오랜만이군, K-07 강우진.]

 

서늘하고 메마른 음성이 집수정 내부의 수면을 파동치게 만들었다.

 

지하 6층 양자 코어룸에서 콘크리트 암반에 깔려 압사당했던 서지훈의 목소리였다.

 

2. 죽은 자의 아카이브

 

"서지훈……?"

 

태호가 반사적으로 소총의 총구를 모니터 쪽으로 겨누며 눈을 부릅떴다.

 

"이 새끼 분명 머리통까지 바위에 깔려 터져 죽었는데……!"

 

콘솔 모니터 상단에 장착된 구형 흑백 렌즈가 달칵 소리를 내며 우진의 얼굴을 향해 각도를 틀었다.

 

화면 속에는 노이즈로 일렁이는 3차원 얼굴 윤곽이 떠올라 있었다.

 

피를 흘리며 일그러진 서지훈의 표정,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생전의 오만과 냉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였다.

 

"육체는 소멸했다. 너희가 떨어뜨린 수십 톤의 잔해 밑에서 뼈와 살점은 으스러졌지."

 

합성된 기계음이 콘크리트 벽면을 울렸다.

 

"하지만 내 뇌간의 사유 패턴과 15년간 구축된 통제 알고리즘은 중앙 전산망의 독립 양자 아카이브에 백업되어 있다. 내가 죽는 순간, 이 도시는 내 유지를 이어받도록 설계되어 있었단 뜻이다."

 

강정호 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독립 양자 아카이브 사유 루틴…… 연구소 시절 내가 비상 상황을 위해 설계했던 잔류 인격 시스템이다. 저놈이 기어코 그걸 제 신경망에 덮어씌워 둔 게로구나."

 

우진은 천천히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양손에 쥔 소총의 멜빵 끈을 쥐어짜는 손가락 끝이 희게 질려 있었다.

 

"네 유지가 뭐지, 서지훈. 양자 코어가 불타고 그랜드 큐브 프로세서가 깨졌는데도, 아직도 이 도시에 미련이 남았나?"

 

모니터 속 서지훈의 얼굴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미소를 지었다.

 

"미련? 아니, 이건 필연이다, 우진아. 너는 네가 영웅이라도 된 줄 알겠지.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사람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사각 격자망을 걷어냈으니 인류에게 찬란한 구원을 안겨주었다고 착각하고 있을 테지."

 

치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이 반전되었다.

 

수억 개의 녹색 데이터 스트림이 화면을 채우더니, 거대한 서울 도심의 입체 시뮬레이션 지도가 떠올랐다.

 

"보아라. 이것이 네가 부숴버린 시스템이 지난 15년간 막아내고 있던 진짜 세상의 민낯이다."

 

화면 위로 붉은 점들이 폭발하듯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테헤란로, 강남역, 광화문, 종로, 여의도.

 

도시의 핵심 축선마다 붉은 경고등이 켜지며 실시간 통계 수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살률: 0%]

 

[강력범죄 발생 건수: 0건]

 

[파산 및 신용불량: 0명]

 

[사회적 갈등 지수: 완전 안정]

 

서지훈의 목소리가 귓가를 갉아먹듯 낮게 깔렸다.

 

"내가 완성하려 했던 미래 시뮬레이션 [프로젝트 에덴]이다. 네모 프로젝트의 사각 격자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누구도 실패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인간의 소질과 한계를 0.001초 만에 파악하여 가장 적합한 직업을 배정하고,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언제 결혼해야 가장 행복할지 그 완벽한 시간표를 쥐여준다."

 

"그건 행복이 아니야."

 

우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가라앉았다.

 

"조작된 세뇌일 뿐이지."

 

"세뇌?"

 

서지훈이 차갑게 비웃었다.

 

"그렇다면 묻겠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묻지마 살인, 술 취한 운전자가 인도를 덮쳐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참극, 사업이 망해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고 한강 다리로 걸어 들어가는 부모의 절망…… 그것이 네가 말하는 고귀한 자유의지의 결과물인가?"

 

3. 1998년의 흉터와 뒤틀린 유토피아

 

콘솔 모니터의 조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낡은 신문 스크랩 이미지 한 장이 화면 한가운데를 메웠다.

 

[1998년 12월 24일 서울 외곽 연립주택 일가족 피살 사건].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피로 물든 거실 바닥과 깨진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차디찬 시신 세 구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뒤편, 담요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열 살배기 사내아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서지훈의 어린 시절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모니터 속 서지훈의 목소리에 난생처음으로 인간다운 지독한 증오와 균열이 스며 나왔다.

 

"사채 독촉에 시달리다 정신이 붕괴된 이웃집 남자가 도끼를 들고 우리 집 문을 부수고 들어왔지. 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고, 일곱 살배기 내 여동생은 식탁 밑으로 기어 들어가 울부짖다가 난도질당했다. 그 살인범과 우리 가족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채무 관계도 없었다. 오직 우발적인 분노, 통제되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자유의지가 빚어낸 무작위의 지옥이었지."

 

스피커에서 거친 기계음 섞인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3년 동안 폐쇄 병동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기어 다니며 신을 저주했다. 왜 착하게 살던 내 부모가, 아무 죄도 없던 내 여동생이 그런 개죽음을 당해야 했는가? 신은 답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없었으니까. 세상은 그저 무질서한 엔트로피의 폭풍과 우발적인 살의가 지배하는 거대한 도살장에 불과했던 거다!"

 

강정호 박사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비극을 알고 있었기에, 제자의 광기를 막지 못한 죄책감이 그의 주름진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지훈의 시선이 화면 너머 우진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신이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이성과 알고리즘이 신을 대신해야 한다고. 모든 인간을 사각형의 규격 속에 가두고, 언제 걷고, 언제 멈추며, 누구와 악수해야 하는지 그 궤도를 사전에 완벽히 통제한다면…… 내 여동생 같은 아이는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범죄도 없다. 실패로 인한 파산도 없다. 불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류의 언어에서 영원히 지워지는 거다!"

 

모니터의 화면이 다시 전환되었다.

 

가상의 서울 시뮬레이션.

 

수천만 명의 시민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고, 지정된 사무실에서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며, 배정된 주거지에서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식사를 마치는 모습이 펼쳐졌다.

 

어떤 충돌도, 다툼도, 눈물도 없었다.

 

오직 침묵에 가까운 절대적인 평온만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보아라, 강우진. 이것이 내가 그리려 했던 세상이다. 배고픔이 없고, 억울한 죽음이 없으며, 미래에 대한 공포로 밤잠을 설칠 필요가 없는 완전무결한 낙원. 이 거대한 질서 앞에서, 일개 개인의 하찮은 선택권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냐?"

 

4. 가축 사육장의 평화

 

지하수가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적막한 집수정을 채웠다.

 

박태호는 모니터 속 완벽한 도시의 모습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피실험체로 납치되어 평생을 병기로 개조당하며 살아온 그에게, 실패와 고통이 없다는 서지훈의 논리는 찰나의 순간 기괴한 유혹처럼 다가오는 듯했다.

 

그러나 강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서늘하고 푸른 눈동자가 모니터 속 서지훈의 잔류 인격을 똑바로 응시했다.

 

"낙원이라고?"

 

우진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조소가 흘러나왔다.

 

"틀렸어, 서지훈. 그건 낙원이 아니야."

 

우진이 천천히 모니터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전투화 밑창에 밟힌 냉각 슬러지가 짓이겨지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네가 말하는 그 완벽한 질서의 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네 입으로 직접 말해볼까? 인과율의 항상성을 유지한답시고, 누군가의 안정된 네모를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소시민을 검은 세모로 몰아넣었지. 태성C&I에서 평생을 성실하게 일했던 부하 직원을 희생양으로 삼고, 여의도 금융가에서 수천 명의 가장들을 하루아침에 파산자로 만들어 한강으로 떠밀었다."

 

"그것은 전체를 살리기 위한 사소한 비용에 불과하다!"

 

서지훈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댐을 쌓으려면 몇 채의 민가는 수몰되어야 하는 법이다. 전체 인류의 99.9%가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알고리즘이 지정한 0.1%의 불운한 결손 노드는 시스템을 위해 기꺼이 희생되어야 마땅해! 그것이 합리적인 통치다!"

 

"아니, 넌 그저 겁쟁이일 뿐이야."

 

우진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허공을 갈랐다.

 

"너는 15년 전 어린 시절의 비극에 짓눌려, 불행이 두려워 인간의 존엄 자체를 내다 버린 나약한 패배자에 불과해."

 

우진의 눈빛에 서슬 퍼런 분노가 일렁였다.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은 도전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넘어질 수 없다는 것은 제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다는 뜻이지. 선택권이 없는 평화는 거대한 가축 사육장일 뿐이다."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계음이 일순간 멎었다.

 

집수정 안의 공기가 얼어붙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축…… 사육장이라고?"

 

"그래. 도축업자가 때맞춰 사료를 주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리 속에서 살찌워지는 소와 돼지에게도 불행은 없어. 그들에게는 가난도 없고, 내일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고통도 없지. 하지만 그 대가로 그들은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도축의 순번이 적힌 귀표를 달고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우진이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심장의 거친 고동이 젖은 옷자락을 뚫고 전해졌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인간이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뼈아픈 실패를 겪으며, 소중한 사람을 잃고 피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 지옥 같은 절망 속에서 스스로 눈물을 닦고, 옆 사람의 손을 잡으며,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다시 일어선다. 그 상처와 회복의 궤적이야말로 우리가 기계 부품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는 유일한 증거다!"

 

5. 인간의 궤도

 

강정호 박사가 아들의 굳건한 등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가 15년 전 아들의 관자놀이를 째고 궤도 제어 칩을 적출하면서 품었던 단 하나의 소망.

 

시스템의 노예가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발로 서기를 바랐던 그 기도가 마침내 결실을 맺어 눈앞에 서 있었다.

 

"네가 만든 세상에서는 누구도 울지 않을지 모르지."

 

우진이 서지훈의 모니터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진심으로 웃지 못해. 실패의 밑바닥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어떻게 성취의 환희를 알겠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겠어? 너는 지옥을 없앤 것이 아니다. 인간성을 거세하여, 세상 전체를 감정이 메마른 박제실로 만든 것뿐이야."

 

[닥쳐라……!]

 

모니터 속 서지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며 붉은 노이즈를 뿜어냈다.

 

[오만한 궤변이다, 강우진!

 

네가 그토록 찬양하는 그 인간들이 지금 지상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보아라!

 

네가 사각 격자망을 부수자마자, 그 가축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너에게 감사하더냐?

 

아니다!

 

그들은 내일의 각본이 사라지자마자 불확실성의 공포에 오줌을 지리며, 스스로 목줄을 채워달라고 계엄군 장갑차를 향해 환호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추악한 본질이다!]

 

우진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서지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수십만 군중이 미러 큐브의 정답을 돌려내라며 울부짖고 있었고, 정부의 계엄령을 구원의 동아줄처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동자 속 푸른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사람들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어. 평생 다리에 깁스를 차고 살던 사람이 깁스를 풀었을 때, 첫 발을 떼는 순간 뼈마디가 부서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우진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서지훈의 모니터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통증을 견뎌내야만 마침내 두 발로 달릴 수 있게 된다.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흙탕물에 처박히더라도…… 인간은 결국 스스로 걷는 법을 배울 거다. 네 썩어빠진 요람으로 되돌아가지 않아."

 

[건방진 놈……!]

 

서지훈의 절규와 함께 모니터 주변의 전선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지상으로 올라가 보아라.

 

내 독립 양자 아카이브의 잔류 연산은 이미 국가안전기획처의 메인 프레임과 최종 결합을 마쳤다.

 

네깟 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저 바깥의 계엄군과 국가 권력이 전 국민을 새로운 사각 격자망에 묶어버릴 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구하지 못해!

 

네가 지키려 했던 그 계집 기자도, 파주의 버러지들도 모두 계엄군의 총구 앞에서 고기반죽이 될 뿐이다!]

 

6. 사선(死線)을 향하여

 

"그 결말은 우리가 정한다."

 

우진이 차갑게 내뱉으며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콰직—!

 

강철 개머리판이 서지훈의 얼굴이 일렁이던 CRT 모니터의 유리를 박살 냈다.

 

터져 나온 불꽃과 브라운관 파편이 집수정 바닥의 오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서지훈의 기괴한 목소리는 비명처럼 늘어지다 뚝 끊겼고, 콘솔 내부의 진공관 소자들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완전한 정적이 다시금 지하 집수정을 집어삼켰다.

 

우진은 뒤돌아서서 박태호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태호야."

 

"네, 형님."

 

태호는 이미 들것의 손잡이를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사라져 있었다.

 

서지훈의 교활한 유혹 따위는 우진의 단호한 일갈 앞에 흔적도 없이 타버린 뒤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중계국 지하 환기구 3번 비상 도크로 이동해. 내가 먼저 올라가서 서연 씨를 포위하고 있는 특수임무대의 후방을 친다."

 

강정호 박사가 아들의 단단한 팔뚝을 움켜쥐었다.

 

그의 떨리는 손끝에서 피와 기름 냄새가 묻어났다.

 

"우진아…… 조심하거라. 상대는 이성을 잃은 국가 권력이다. 네 몸에는 더 이상 총알을 튕겨낼 척력도, 궤적을 피할 미래 예측도 남아 있지 않아."

 

우진이 아버지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지만 제게는 아직 두 눈과, 방아쇠를 당길 두 손이 남아 있습니다."

 

우진의 입꼬리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초인적인 능력을 잃고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 돌아왔지만, 그의 가슴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싸우러 갑니다."

 

우진은 뒤돌아서서 녹슨 철제 사다리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의 굳은살을 파고들었다.

 

한 칸, 또 한 칸.

 

수직으로 뻗은 환기 샤프트를 기어오르는 우진의 귓가로, 지상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함성과 군용 장갑차의 디젤 엔진 굉음, 그리고 간헐적인 총성이 점점 더 또렷하게 다가왔다.

 

샤프트 상단의 원형 맨홀 틈새로 빗물과 함께 붉은 경광등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서연이 갇혀 있는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 상부였다.

 

우진은 허리춤의 섬광탄 핀에 손가락을 걸고, 소총의 안전장치를 단발에서 연사로 딸깍 돌렸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도시의 복판, 그 불행 없는 지옥을 강요하는 거대한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강우진은 망설임 없이 맨홀 뚜껑을 밀어 올렸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