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어의 문 앞
1. 무너져 내리는 지하
쿠구구구궁!
발밑의 지반이 거칠게 요동치며 귀를 찢는 파열음이 암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천장에 매설된 고압 스프링클러 배관이 우그러지며 차가운 암모니아 냉각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벽면을 감싸고 있던 백색 세라믹 패널들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성긴 그물망 모양으로 쩍쩍 갈라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콘크리트 분진과 매캐한 테르밋 연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목구멍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우진 씨! 서둘러야 해요! 사옥 지하 전체의 폭파 시퀀스가 이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어요!"
인이어 너머로 들려오는 한서연의 목소리는 거친 잡음과 호흡 곤란으로 짓이겨져 있었다.
서연은 지상으로 연결되는 비상 통신망의 잔류 패킷을 붙잡은 채, 파주 거점의 무너진 신호망과 국가안전기획처의 차단벽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있었다.
강우진은 메인 콘솔에서 뜯어낸 외장 하드를 단단히 움켜쥐며 턱 끝까지 차오른 피비린내를 삼켰다.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푸른 궤적선도, 타인의 머리 위에 떠오르던 네모와 세모의 기하학적 도형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암전 뒤에 찾아온 세상은 그저 차갑고 잔혹한 날것의 물리 법칙만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초인적인 감각이 사라진 육체는 그저 평범한 서른두 살 남자의 피와 살에 불과했다.
하지만 관자놀이에 깊게 팬 4센티미터의 흉터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둔중한 맥동으로 뛰고 있었다.
"태호야, 일어설 수 있겠어?"
우진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던 박태호의 어깨를 단단히 부축했다.
태호의 검은 전투복은 이미 찢겨 나가 있었고, 옆구리와 팔뚝에서는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와 타일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적들의 인공 격자망을 깨부수기 위해 온몸을 내던졌던 탓에 근육 파열과 타박상이 심각한 상태였다.
"괜…… 찮습니다. 형님…… 채린이 누나가…… 누나가 목숨 걸고 버텨줬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태호는 피가 맺힌 입술을 질끈 깨물며 부러진 소총 개머리판을 지팡이 삼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 속에는 형들을 잃었던 지옥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자책 대신, 반드시 살아서 이 지옥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원초적인 투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 한구석에는 뇌신경 쇼트로 완전히 실신한 서지훈이 거품을 문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텅 빈 암흑의 사각 프레임마저 형체를 잃고 산산이 바스러져 있었다.
평생을 완벽한 통제와 사각 규격의 유토피아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남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쿠과과광!
머리 위 20미터 상공에서 거대한 철골 H빔이 휘어지며 비상 통로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우진 씨, 들려요? 국가안전기획처 민경택 차장이 발동한 '코드 테라 인코그니타'는 단순한 발파가 아니에요! 넥스트 큐브 사옥 지하 4층부터 6층까지 매설된 액체 테르밋과 고폭탄을 3단계로 연쇄 기폭시키는 증거 인멸 프로토콜이에요. 지상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샤프트와 비상계단은 이미 1차 폭파로 완전히 함몰됐어요!"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에요. 지하 6층 암반 최심부…… 양자 슈퍼컴퓨터 코어룸으로 들어가는 비상 격벽이에요. 그곳은 군용 중성자 폭탄의 직격을 견디도록 설계된 3중 텅스텐 격벽 구조예요. 거기서 코어를 완전히 다운시키고 비상 배수로 환기 댐퍼를 강제로 열어야만 살 수 있어요!"
우진은 서연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밖으로 달아나는 길은 이미 막혔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채린이 피로 지켜낸 진실의 쐐기를 박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스스로 지옥의 가장 깊은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가자, 태호야. 앞으로 뚫고 들어간다."
우진은 K2C1 소총의 노리쇠를 후퇴 고정했다가 놓았다.
찰칵, 묵직한 쇳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벙커의 굉음 속에서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2. 침묵의 복도와 센서의 덫
중앙 통제 홀을 지나 코어룸으로 향하는 지하 6층 최심부 복도는 그야말로 살육의 흔적과 파괴의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에서 늘어진 수천 가닥의 광섬유 케이블이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뱀처럼 꿈틀거렸다.
두 발로 바닥을 디딜 때마다 깨진 방탄유리 파편과 탄피들이 사각거리며 짓밟혔다.
우진은 벽면에 몸을 바짝 밀착한 채 전방을 주시했다.
도형 시각화 능력이 사라진 지금, 그는 오직 인간의 오감과 군 복무 시절 몸에 익힌 실전 전술 감각에 의존해야 했다.
공기의 흐름, 타는 냄새, 그리고 미세하게 진동하는 바닥의 떨림.
모든 것이 위험 신호였다.
삐비빅, 삐빅.
복도 중간 지점, 천장 모서리에 숨겨져 있던 적외선 감지 터렛 두 대가 붉은 레이저 조준선을 바닥에 긋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반쯤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자율 방어 루틴으로 구동되는 근접 센서망이 침입자의 열원과 윤곽을 탐색하고 있었다.
"터렛이야. 전방 15미터."
우진이 낮게 속삭였다.
태호가 벽 뒤로 몸을 숨기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탄약은 턱없이 부족했다.
우진의 탄창에는 열두 발, 태호의 탄창에는 고작 일곱 발만이 남아 있었다.
화력으로 정면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연 씨, 전방 통로 복도 구간 센서 제어권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우진이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잠시 거친 타건음이 인이어를 통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기다려요…… 지금 파주 벙커의 남겨진 예비 라우터를 우회해서 넥스트 큐브 내부 전력망 백도어를 긁고 있어요. 3초만요…… 됐어요! 4구역 배전반 전압을 강제로 떨어뜨릴게요. 센서가 리부팅되는 틈은 단 2초예요!"
치지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의 붉은 레이저 센서가 파르르 떨리며 푸른빛으로 꺼져 들어갔다.
동시에 회전하던 터렛의 총구가 힘없이 아래로 꺾였다.
"지금이에요! 뛰어넘어요!"
우진과 태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차가운 바닥을 미끄러지듯 슬라이딩하며 터렛의 사격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쿵!
쿵!
정확히 2초가 지나자 터렛이 다시금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맹렬하게 좌우로 총구를 돌렸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센서의 감지 반경을 벗어난 기둥 뒤편에 안착한 뒤였다.
"하아…… 하아……."
태호가 가슴을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과 피가 눈가를 따갑게 적셨다.
우진 역시 어깨의 둔중한 통증을 견디며 복도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전의 그 어떤 문과도 격이 다른 거대한 격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로 5미터, 세로 8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원형 차폐문.
표면에는 군용 특수 장갑차에 쓰이는 고밀도 복합 텅스텐 강판이 빈틈없이 둘러쳐져 있었고, 중앙에는 세 개의 유압식 락킹 볼트가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었다.
문 정중앙에는 칠흑빛 금속판 위에 희미하게 음각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SECTOR-OMEGA : QUANTUM CORE VAULT]
마침내 도달했다.
15년 전 부친 강정호 박사가 설계의 붓을 들었고, 서지훈과 국가 카르텔이 전 인류의 인생을 가두기 위해 완성했던 최후의 감옥.
양자 슈퍼컴퓨터 코어룸의 문 앞이었다.
3. 닫힌 격벽과 마지막 방어선
육중한 격벽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외벽 패널의 디지털 키패드는 이미 계엄군의 강제 폐쇄 명령에 의해 붉은색 경고등만을 깜빡이고 있었다.
[LOCKDOWN LEVEL-5 : SYSTEM ACCESS DENIED]
우진은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격벽의 콘솔 패널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 아래로, 기이할 정도로 맹렬한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식 모터의 회전 진동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혈관이 맥동하듯,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었다.
"서연 씨, 문이 잠겨 있어요. 외부 신호로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진이 차분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인이어 너머에서 서연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있어요…… 민경택 차장이 지상 메인 프레임에서 수동 오버라이드를 걸어버렸어요. 내부 폭파 카운트다운이 종료될 때까지 격벽을 물리적으로 용접해 잠그는 '데드맨 락(Dead-man Lock)'이에요. 외부에서는 그 어떤 암호 코드로도 열 수 없어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15년 전 아버지가 남겨둔 백도어는요?"
우진의 물음에 서연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다급하게 대답했다.
"강정호 박사님의 설계 데이터에 기록이 있어요! 코어룸 차폐 격벽은 외부 충격이나 해킹에는 절대 열리지 않지만, 내외부의 양자 상태가 완벽하게 동기화될 때 비상 냉각을 위해 10초간 인터록이 풀리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 코어 내부에서 방출되는 양자 맥동 주파수와 정확히 같은 역위상 신호를 외부 콘솔의 바이패스 단자에 직접 흘려 넣어야 해요."
"역위상 신호……."
우진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든 외장 하드와, 소월도에서부터 품에 지니고 온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만지작거렸다.
아버지가 15년간 챔버 속에서 자신의 피와 신경망으로 깎아 만들었던 최후의 열쇠.
비록 능력은 사라졌으나, 그 열쇠에 각인된 알고리즘의 본질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에요, 우진 씨!"
서연의 목소리에 비명이 섞여 들었다.
"지하 4층과 5층의 2차 폭약이 방금 유폭됐어요! 배수로 상부 암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지하 6층 전체가 압쇄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6분도 남지 않았어요!"
쿠구구구구궁!
그 순간, 천장의 비상 유도등이 일제히 깨져 나가며 암흑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비상 발전기의 붉은 스트로브 조명만이 깜빡이며 기괴한 그림자를 복도 벽면에 드리웠다.
바닥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며 발목 깊이의 균열 사이로 붉은 테르밋 화염의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유독가스와 고열이 복도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형님! 저기…… 바닥 배선관을 뜯어야 합니다!"
태호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격벽 하부의 두꺼운 철제 점검구를 뜯어냈다.
점검구 안쪽에는 팔뚝 굵기의 초전도 케이블 다발과 아날로그 바이패스 단자가 얽혀 있었다.
그러나 단자의 접속 포트는 두꺼운 강화 플라스틱 캡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특수 보안 볼트 네 개가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공구가 없으면 이걸 풀 수 없어……."
태호가 이를 갈며 대검을 틈새에 쑤셔 넣었지만, 단단한 특수 합금 볼트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대검의 칼날이 쨍 하는 비명과 함께 부러져 튕겨 나갔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4. 박동하는 괴물
쿵.
쿵.
쿵.
그때였다.
부러진 대검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진의 귓전에, 기괴한 소리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폭발음도, 무너져 내리는 암반의 마찰음도 아니었다.
쿵…… 쿵…… 쿵…….
격벽 너머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공간 전체의 중력을 쥐락펴락하는 거대한 진동에 가까웠다.
일정한 간격, 묵직하고 규칙적인 박동.
'이건…….'
우진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율이 내달렸다.
심장 박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한 인간의 가슴에서 울려 퍼질 수 있는 나약한 박동이 아니었다.
수만, 수십만 명의 맥박이 단 하나의 기계식 거인 안에서 강제로 동기화되어 뿜어내는 듯한 거대하고 괴기스러운 울림이었다.
쿵…… 쿵…… 쿵…….
박동이 한 번 울릴 때마다 격벽 표면의 텅스텐 강판이 눈에 띌 정도로 미세하게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바닥에 흩어진 깨진 유리 조각들이 그 리듬에 맞춰 파르르 떨리며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전자기장의 간섭으로 인해, 우진의 목덜미와 팔뚝의 솜털이 곤두섰다.
"우진 씨…… 들려요?"
인이어 너머의 서연 역시 말을 잇지 못하고 떨고 있었다.
"지상 관제망의 지진계 센서에…… 말도 안 되는 주파수가 잡히고 있어요. 넥스트 큐브 지하 6층 암반 심도에서…… 55헤르츠의 극저주파가 맥동하고 있어요. 이건…… 코어룸 내부의 양자 프로세서가 단순 연산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저 안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우진이 숨을 죽인 채 격벽에 귀를 바짝 댔다.
격벽의 차가운 금속 너머로,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기계의 열기가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체온이었다.
"서지훈이 말했던…… '전 인류 궤도 통합 제어'의 마지막 백업 프로세스예요. 오르비스가 파괴되고 라이프 플래너가 소각되자, 시스템의 최후 방어 기제가 스스로의 연산 회로를 극단적으로 압축시키고 있어요. 그리고…… 그 연산의 중심에……."
서연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서연의 침묵 속에서, 우진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잔혹한 진실을 직감했다.
15년 전 연구소 참사 이후 사라졌던 부친 강정호 박사.
역삼역 지하 7층 액체 챔버에서 건져 올렸으나, 소월도와 테헤란로의 결전을 거치며 행방이 묘연해졌던 아버지의 실체.
그리고 서지훈이 마지막까지 비웃음 속에 흘렸던 말.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시스템은 결코 죽지 않아. 시스템의 심장은…… 처음부터 너희가 가장 사랑하는 자의 숨결로 뛰고 있었으니까.'
쿵…… 쿵…… 쿵…….
격벽 너머의 박동 소리가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도형을 보던 능력은 사라졌지만, 유년기 뇌간에 새겨졌던 혈육의 기억과 신경망의 잔흔은 그 박동의 주인을 너무나도 명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이 거대한 양자 슈퍼컴퓨터의 심장부에 갇힌 채, 시스템의 최후 붕괴를 막기 위해 스스로의 뇌와 생명력을 연료로 태우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강정호 박사였다.
5. 서연의 결단과 해킹의 불꽃
"우진 씨, 정신 차려야 해요! 슬퍼할 시간도, 절망할 시간도 없어요!"
서연의 날카로운 외침이 멍해지던 우진의 의식을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박사님은 지금 코어 내부에서 필사적으로 시스템의 자폭 폭주를 억누르고 계신 거예요. 박사님의 뇌파가 코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저 박동이 유지되는 거예요. 만약 이 격벽이 폭파로 무너지거나 시스템이 강제로 셧다운되면, 박사님의 뇌세포는 고압 전자기 쇼크로 그 자리에서 증발해요!"
우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구해야 했다.
15년을 잃어버린 채 괴물이 되어버린 세상을 부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아버지였다.
아들을 위해 자신의 뇌간을 찢고, 아들의 기억을 지워내며 차가운 족쇄를 홀로 짊어졌던 남자였다.
그 아버지를 이 차가운 지하 암반의 무덤 속에 홀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
"격벽을 열어야 해. 서연 씨, 볼트를 풀 방법이 없어요. 물리적으로 파괴할 화력도 부족합니다."
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서연이 숨을 몰아쉬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제 쪽에서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위험이라니요? 서연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상 상황은 어때요?"
"저는 지금 사옥 맞은편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에 숨어 있어요. 계엄군 전파 탐지 차량이 바로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가진 마지막 카드가 있어요. 넥스트 큐브가 전국 언론망을 통제하기 위해 구축해 두었던 '레벨-4 긴급 송출 권한'…… 그 백도어의 잔류 세션을 제가 아직 쥐고 있어요."
"그걸 쓰면…… 당신 위치가 즉각 노출됩니다! 계엄군이 1분도 안 돼서 들이닥칠 거예요!"
우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채린이 파주 벙커에서 스스로를 희생했던 악몽이 뇌리를 스쳤다.
또다시 누군가를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연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우진 씨, 채린이는 자신의 궤도를 믿고 문을 닫았어요. 그 애가 보여준 건 체념이 아니라 자유의지였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기자로서, 그리고 당신들의 동료로서…… 여기서 발을 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면, 그 진실을 끝까지 지켜내는 게 제 일이에요."
타타타타탕!
인이어 너머로 맹렬한 기계음과 함께, 중계국 상부에서 군홧발 소리와 거친 고함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계엄군의 포위망이 서연의 턱밑까지 조여들고 있었다.
"지금 넥스트 큐브 지하 전력망의 예비 비상 라인을 강제로 역류시킬게요. 차폐 격벽의 유압 락킹 모터에 순간적으로 4만 볼트의 과전압을 때려 박을 거예요. 모터 내부의 솔레노이드 밸브가 타들어가면서 기계식 락이 0.5초 동안 풀릴 거예요!"
"서연 씨!"
"우진 씨, 준비해요!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들고…… 볼트가 풀리는 그 찰나에 단말기에 꽂아 넣어야 해요! 카운트다운 시작합니다!"
우진은 품속에서 서늘한 사파이어 칩을 꺼내 들었다.
단결정 보석의 차가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태호가 우진의 곁으로 다가와 남은 힘을 다해 격벽의 비상 수동 레버를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셋!"
지하 벙커 전체가 흔들리며 천장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둘!"
원거리에서 테르밋 연쇄 폭발의 화염이 복도 입구를 집어삼키며 붉은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나…… 지금이에요!"
콰지지직!
푸른색 고압 전호가 격벽 상부의 배전반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텅스텐 격벽 내부에서 육중한 톱니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덜컥, 하고 1센티미터가량 틈을 벌렸다.
유압식 락이 풀렸다.
6. 문 너머의 심연
"으아아아악!"
태호가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지르며 수동 레버를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리눌렀다.
끼기기긱, 쇠와 쇠가 맞물려 갈리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은 주저하지 않고 몸을 던졌다.
격벽 틈새로 드러난 아날로그 바이패스 단자, 그 좁은 슬롯을 향해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거칠게 찔러 넣었다.
딱!
맑고 투명한 금속음이 암반의 진동을 뚫고 복도에 울려 퍼졌다.
사파이어 칩이 완벽하게 슬롯에 결합된 순간, 칩 내부의 미세 회로를 따라 영롱한 백색 섬광이 번져 나갔다.
치지지직!
단자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전류가 격벽 표면의 텅스텐 장갑판을 거미줄처럼 뒤덮었다.
쿠구구궁…… 쿵!
육중한 세 개의 유압 볼트가 차례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15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인류 통제의 최후 보루가 서서히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격벽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것은 지옥의 유독가스나 화염이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영하 40도의 극저온 액체 질소 냉기였다.
순백의 서리 안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와 복도의 뜨거운 분진과 화염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우진과 태호의 눈썹과 속눈썹에 순식간에 하얀 성에가 맺혔다.
냉기 너머로 드러난 공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활했다.
축구장 크기만 한 원형 돔 형태의 지하 암반 챔버.
바닥부터 까마득한 천장까지, 수만 대의 양자 블레이드 서버가 끝없는 원기둥을 이루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서버들의 표면에서는 수억 개의 초록색과 푸른색 LED 인디케이터가 마치 살아 있는 신경세포처럼 쉴 새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원형 돔의 한가운데.
허공에 매달린 지름 10미터의 구형 유리 챔버가 푸른 냉각수 속에 잠긴 채 기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 소리는 바로 그 구형 챔버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수천 가닥의 투명한 튜브와 초전도 전극 케이블이 거미줄처럼 유리 챔버의 상하좌우를 붙들고 있었고, 챔버 내부의 푸른 액체 속에는 한 인간의 형상이 부유하고 있었다.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인.
앙상하게 마른 사지에는 수많은 센서가 박혀 있었고, 관자놀이와 목덜미에는 굵은 광케이블 다발이 직접 꽂혀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척수를 따라 이식된 티타늄 인공 신경망이 푸른빛을 맥동하며 거대한 양자 슈퍼컴퓨터의 메인 프레임과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아…… 버지……."
우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눈물로 얼룩졌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곳에 갇혀 있는 남자는, 15년 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우진이 비틀거리며 챔버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챔버 내부의 푸른 조명이 핏빛으로 반전되었다.
동시에 메인 프레임 상단의 스피커에서, 서지훈의 목소리도, 계엄군의 목소리도 아닌, 차갑게 합성된 인공지능의 기계음이 암반 돔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WARNING : BIOMETRIC HOST STABILITY 12.4%]
[CORE OVERLOAD IMMINENT]
[SYSTEM PURGE SEQUENCE ACTIVATED]
냉각수 속에 잠겨 있던 강정호 박사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고통스러운 경련과 함께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