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72화

세뇌된 능력자들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붉은 타이머의 독촉

 

비상 사이렌의 파열음이 무균 타일로 마감된 지하 6층 전산 통로를 뒤흔들었다.

 

벽면 상단에 박힌 경보등이 핏빛 섬광을 흩뿌릴 때마다, 바닥에 낭자한 슬러지와 탄피가 번들거렸다.

 

중앙 콘솔 상단에 투사된 거대한 홀로그램 전광판에서는 붉은색 아라비아 숫자가 초 단위로 깎여 나가고 있었다.

 

[SYSTEM INITIALIZATION COUNTDOWN : 18분 29초]

 

19분 42초였던 타이머는 서지훈의 강제 오버클럭 명령 이후 멈추지 않고 현실의 시간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강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K2C1 소총의 총열 덮개를 고쳐 쥐었다.

 

소총의 멜빵끈이 어깨를 파고들었고, 뜨겁게 달아오른 약실에서는 희뿌연 화약내가 폐부를 찔렀다.

 

유년기 절제술의 상흔이었던 관자놀이 부근의 신경통은 완전히 멎어 있었다.

 

하지만 머리 위에 떠오르던 네모나 세모, 은빛 동그라미 같은 기하학적 도형은 더 이상 망막에 비치지 않았다.

 

0.3초 앞선 미래의 탄도를 그려주던 푸른 궤적선도, 공간을 일그러뜨리던 무형의 척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근육의 떨림과 귓가를 때리는 심장 박동, 그리고 폐 속으로 들이차는 비린 화약 연기뿐이었다.

 

"우진 씨, 괜찮아요?"

 

뒤편 통신 분전함 모서리에 등을 기댄 한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글록 19 권총의 슬라이드가 땀방울로 젖어 있었다.

 

방탄조끼 위로 드러난 쇄골 부근에는 1차 방어선 돌파 당시 파편에 스친 붉은 찰과상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품 안에는 소월도에서부터 목숨을 걸고 지켜온 인프라 테러 및 궤도 조작 증거가 담긴 외장 하드가 안전하게 안겨 있었다.

 

"괜찮습니다. 서연 씨야말로 파편 맞은 곳은요?"

 

"버틸 만해요. 뼈는 안 다쳤어요."

 

서연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지만, 렌즈 너머의 눈빛은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그때 통로 우측의 방열 배관을 묵직한 배관 렌치로 후려치며 통로 안쪽을 경계하던 박태호가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제길, 저 새끼들…… 걸음걸이가 아까 그놈들이랑 달라요."

 

태호의 거친 숨결이 마스크 틈새로 뿜어져 나왔다.

 

외곽 방어선에서 드론을 때려잡느라 찢겨 나간 작업복 소매 아래로 단단한 전완근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지하 6층 예비 코어 룸 중앙을 가로지르는 폭 10미터, 길이 40미터의 백색 복도였다.

 

바닥에는 1차 교전에서 파괴된 케르베로스 드론의 파편들이 널브러져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잔해 너머, 짙은 백색 연무를 뚫고 여덟 개의 그림자가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2. 네트워크화된 거미줄

 

치익, 칙.

 

우진의 가슴팍에 고정된 아날로그 단파 무전기 스피커에서 거친 잡음이 터져 나왔다.

 

144.820MHz 주파수를 타고 들려온 목소리는 파주 거점 7번에 있는 송민규였다.

 

- 우진아!

 

들리냐?

 

우진아!

 

"듣고 있습니다, 송 선배. 상태는 어떻습니까? 채린 씨는요?"

 

우진이 송수신 버튼을 누르며 다급하게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억눌린 울음과 함께 송민규의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 젠장…… 채린이가…… 각혈을 멈추질 못해.

 

아까 그 양자 서버 펄스를 억지로 억누르다가 시냅스가 완전히 타버렸어.

 

의식은 붙잡고 있는데…… 머리 위 동그라미가…… 붉게 갈라져서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아.

 

"……!"

 

- 그런데도 이 지지배가 콘솔에서 손을 안 뗀다.

 

저 개자식들이 중앙 복도에 풀어놓은 놈들…… 단순한 경비 병력이 아니야.

 

2세대랑 3세대를 억지로 융합시킨 생체 네트워크 부대다!

 

무전기 너머로 윤채린의 가냘픈 기침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콜록, 쿨럭.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는 듯한 거친 호흡 뒤로, 유리창을 긁는 듯한 채린의 쉰 목소리가 마이크를 쥐어짰다.

 

- 우진…… 오빠…… 내 말…… 잘 들어요…….

 

"채린 씨, 말하지 마요. 링크 끊어요! 당장 접속 해제해요!"

 

우진이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더 이상 자신에게는 도형이 보이지 않지만, 채린이 어떤 고통 속에 처해 있는지는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가 15년 동안 뇌간을 짓누르던 그 끔찍한 압박감을, 채린은 지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 안 돼요…… 끊으면…… 오빠들 다 죽어…….

 

채린이 숨을 들이켜며 단어를 토해냈다.

 

- 그 여덟 명…… 뇌간에 박힌 나노 전극이…… 각각 독립된 게 아니에요.

 

하나의 마스터 알고리즘에…… 병렬로 묶여 있어요.

 

시야…… 반사 신경…… 근육 출력까지…… 전부 하나로 공유하고 있어…….

 

"뭐라고요?"

 

- 그놈들은…… 여덟 명이 아니야…… 여덟 개의 팔다리를 가진…… 거대한 단 하나의 기계예요…… 머리 위에…… 거대한 검은 네모가…… 여덟 명 전체를 관통해서 뒤덮고 있어요……!

 

채린의 경고가 끝남과 동시에, 복도 저편에서 걸어 나오던 여덟 명의 강화 능력자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탁.

 

여덟 쌍의 군화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마치 단 한 사람이 발을 구른 것처럼 완벽하게 일치했다.

 

우진의 시야에는 그들의 머리 위 도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기가 달랐다.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절대적인 중압감, 그리고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인과율의 차가운 냉기가 복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정수리 위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칠흑빛 사각 틀이 씌워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개별적인 인간의 생체 반응이 아니라, 거대한 슈퍼컴퓨터의 서브 단말 여덟 개가 물리적인 육체를 입고 서 있는 형국이었다.

 

3. 오버클럭된 살상 인형들

 

치이익.

 

강화 능력자들의 목덜미에 박힌 티타늄 생체 단말 소켓에서 푸른 냉각 가스가 일제히 뿜어져 나왔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흰자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동공 전체가 칠흑빛 렌즈처럼 확장되어 있었고, 눈가와 콧구멍, 귓바퀴에서는 검붉은 피가 가느다란 줄기를 그리며 흘러내렸다.

 

생체 오버클럭.

 

중앙 통제 시스템이 그들의 생명 유지 한계치를 강제로 해제한 증거였다.

 

체온이 41도를 넘어서고 심박수가 분당 200회를 상회하며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0분 뒤면 폐기될 목숨들을 장작처럼 태우고 있는 살상 인형에 불과했다.

 

"크아아……."

 

맨 앞줄 좌측에 선 강화 능력자의 입에서 짐승의 것과 같은 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뒤편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켜졌다.

 

화면 속에는 테헤란로 본사 비상 관제실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서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붕대를 감은 이마 아래로, 그의 비틀린 입꼬리가 기괴한 호를 그렸다.

 

- 제법이더군, 강우진.

 

이능을 완전히 잃고 버러지 같은 육체만 남았으면서도 1차 방어선을 기어넘어 오다니 말이야.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서지훈의 목소리는 조롱과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 아버지가 남긴 실패작들과 네놈의 그 얄팍한 동료애가 어떤 결말을 낳는지 똑똑히 보아라.

 

저 아이들이 누군지 알아보겠나, 박태호?

 

"닥쳐, 서지훈!"

 

박태호가 렌치를 움켜쥐며 핏발 선 눈으로 포효했다.

 

- 15년 전, 너희와 함께 연구소 차가운 침대에 누워 있던 네 동기들이다.

 

Subject-09, Subject-11…… 그리고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도 저기 섞여 있지.

 

내 명령 하나면 저 아이들의 뇌세포는 5분 안에 잿더미가 된다.

 

하지만 상관없어.

 

18분 뒤면 국가 라이프 플래너가 이 나라 5천만 명의 뇌간을 저렇게 아름답게 묶어버릴 테니까!

 

서지훈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것은 완전한 광기였다.

 

그는 이미 국가 권력과 결탁해 법과 제도의 왕관을 썼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의 뒤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계엄군이 있었고, 손안에는 전 국민의 운명을 쥐어짤 중앙 콘솔이 있었다.

 

- 죽여라.

 

사지를 찢어서라도 콘솔 앞에 무릎 꿇려라.

 

서지훈의 잔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4. 숨 쉴 틈 없는 사선

 

철컥!

 

여덟 명의 강화 능력자가 쥐고 있던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총구가 일제히 정렬했다.

 

그 동작에는 단 0.01초의 틈도 없었다.

 

"엎드려!"

 

우진이 서연의 어깨를 낚아채며 통로 바닥의 콘크리트 엄폐벽 뒤로 몸을 던졌다.

 

콰콰콰쾅!

 

푸른빛의 인과율 광탄이 폭풍처럼 쏟아져 내렸다.

 

화약 총탄의 둔탁한 파열음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밀도로 집속된 시스템 격자 파동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와 두께 30센티미터의 방폭 타일을 원자 단위로 으스러뜨렸다.

 

타일 파편이 면도날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며 우진의 뺨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긁고 지나갔다.

 

"크윽!"

 

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과거였다면 2단계 '변화 감지'를 통해 허공에 떠오른 푸른 궤적선을 읽고 0.3초 전에 탄도를 피해 몸을 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날카롭게 귓전을 찢는 파공음과 피부로 느껴지는 살인적인 열기만이 적의 공격 방향을 알려줄 뿐이었다.

 

타타타탕!

 

박태호가 엄폐벽 모서리에서 K2C1 소총을 빼곡히 내밀고 점사를 날렸다.

 

정확히 맨 앞줄 중앙에 선 적의 가슴팍을 노린 탄환이었다.

 

그러나 기괴한 일이 벌어졌다.

 

피탄당해야 할 첫 번째 적이 몸을 비틀지 않았다.

 

그 우측에 서 있던 두 번째 적이 번개처럼 총열을 뻗어 태호가 쏜 5.56밀리 실탄을 소총 몸통으로 쳐내 튕겨버린 것이다.

 

팅!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말도 안 돼……!"

 

태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격 각도를 보고 피한 것이 아니었다.

 

태호가 방아쇠에 검지손가락을 걸고 근육을 수축시키는 그 찰나의 생체 신호를, 정면에 있던 적이 감지하자마자 우측에 있던 적이 사각지대에서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막아낸 것이다.

 

- 시야를…… 공유하고 있어요!

 

무전기 속에서 채린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 각자 보는 각도가 달라요!

 

사각지대가 없어!

 

한 놈이 보면 여덟 놈이 동시에 보는 거예요!

 

개별적으로 쏘면 전부 막혀요!

 

"빌어먹을!"

 

태호가 엄폐물 뒤로 머리를 처박았다.

 

그가 숨어 있던 콘크리트 기둥 모서리가 인과율 집속탄 연사에 맞아 두부처럼 깎여 나갔다.

 

파편이 쏟아져 내리며 태호의 방탄모를 강타했다.

 

사격이 끊이지 않았다.

 

네 명이 번갈아 가며 탄창을 갈아 끼우는 동안, 나머지 네 명이 맹렬한 제압 사격을 퍼부었다.

 

재장전의 빈틈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기계적 윤번 사격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좁혀져 왔다.

 

벅, 벅, 벅.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엄폐벽 너머에서 죽음의 카운트다운처럼 울려 퍼졌다.

 

남은 거리는 불과 25미터.

 

이대로 10초만 지나면 적들은 엄폐벽을 우회해 우진 일행의 정수리에 영거리 사격을 꽂아 넣을 것이 분명했다.

 

5. 0.4초의 균열

 

"서연 씨, 섬광탄 있어요?"

 

우진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서연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전술 조끼 파우치에서 은색 원통형 캔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두 개 남았어요. 하지만 저놈들 눈이 이미 저 상태인데 섬광이 먹힐까요?"

 

"빛을 보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렌즈에 과부하를 걸어야 해요."

 

우진의 뇌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비록 도형을 보는 초인적인 능력은 사라졌지만, 수년간 시스템의 알고리즘과 싸워오며 단련된 감각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여덟 명이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연결망 어딘가에 데이터가 집중되는 중계 노드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검은 네모.'

 

채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중앙 시스템의 명령이 여덟 명에게 분배되고, 여덟 명의 시각 정보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

 

완벽해 보이는 기계의 회로 속에도 반드시 신호가 병목을 일으키는 물리적 물리 법칙의 지연이 존재한다.

 

"채린 씨! 내 말 들려요?"

 

우진이 무전기에 대고 낮게 외쳤다.

 

- 으윽…… 네…… 듣고…… 있어요…….

 

"저놈들 네트워크의 중심점…… 패킷이 가장 굵게 모이는 놈이 누굽니까? 어디에 서 있습니까?"

 

파주 벙커의 콘솔 앞에서 채린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전해졌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채린의 떨리는 숨결이 이어졌다.

 

- 세 번째…… 중앙 열 뒤편…… 목덜미 소켓에서 푸른빛이 세 줄기로 갈라지는 놈…… 그놈이 서브 라우터예요…… 놈의 연산 처리가 0.1초라도 지연되면…… 전체 동기화가 흔들려요!

 

"알겠습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태호와 서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 비장한 결의가 맺혔다.

 

"서연 씨는 신호와 동시에 섬광탄 두 개를 바닥으로 굴려요. 높이 던지면 공중에서 격추당합니다. 바닥 잔해 틈으로 굴려야 해요."

 

"알겠어요."

 

"태호는 섬광이 터지는 순간, 좌측 벽면의 고압 질소 파이프를 쏴서 시야를 가려요. 놈들의 시각 데이터에 물리적 노이즈를 쏟아붓는 겁니다."

 

"형님은요?"

 

태호가 우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진의 손에는 K2C1 소총과 함께 소월도 등대에서 챙겨왔던 아날로그 탄소강 대검이 들려 있었다.

 

"난 그 0.4초 사이에 중앙의 라우터를 끊는다."

 

"미쳤어요? 총알이 빗발치는데 맨몸으로 뛰쳐나가겠다고요?"

 

서연이 기겁하며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능이 있던 시절에도 목숨을 건 도박이었는데, 지금 우진은 총알 한 발만 스쳐도 목숨을 잃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우진은 서연의 손등 위에 자신의 거친 손을 얹었다.

 

"서연 씨. 내 머리 위에 네모나 세모가 사라졌을 때, 두려웠습니다. 세상을 보던 눈이 멀어버린 것 같았으니까요."

 

우진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도형에 의존해 살던 때야말로 난 시스템이 보여주는 환각 속에 갇혀 있던 거였어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각본이 아니라 진짜 현실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는 현실이요."

 

우진이 K2C1 소총의 조정간을 단발에서 연사로 딸깍 돌렸다.

 

"인간의 의지는, 알고리즘 따위보다 빠릅니다."

 

서연은 우진의 맑고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기하학적인 기호도, 꼭두각시 줄의 그림자도 없었다.

 

오직 흔들리지 않는 한 인간의 굳건한 영혼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서연은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섬광탄의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살아서 콘솔 앞으로 와요. 외장 하드는 내가 지킬 테니까."

 

"갑니다. 셋, 둘, 하나…… 투척!"

 

6. 어둠 속의 칼날

 

핑, 핑!

 

안전핀이 튕겨 나가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서연이 엄폐벽 밑바닥 틈새로 섬광탄 두 개를 나란히 굴렸다.

 

바닥에 깔린 케르베로스 드론의 파편 사이를 미끄러져 들어간 섬광탄이 강화 능력자들의 군화 코앞에서 멈추어 섰다.

 

적들의 고정된 검은 렌즈가 바닥의 물체를 인식한 순간.

 

콰아아앙!

 

백만 촉광의 맹렬한 백색 섬광과 170데시벨의 뇌성이 좁은 통로를 집어삼켰다.

 

동시에 박태호가 상체를 일으키며 좌측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당!

 

정밀하게 박힌 탄환들이 영하 190도의 액체 질소가 흐르는 고압 냉각 파이프 밸브를 산산조각 냈다.

 

푸슈우우욱!

 

압축되어 있던 백색 질소 증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복도 전체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순백의 장막으로 뒤덮었다.

 

초저온의 냉기가 적들의 열화상 센서와 광학 렌즈를 일시에 마비시켰다.

 

- 지금이에요!

 

라우터의 수신 대기 시간이 0.4초 늘어났어요!

 

채린의 처절한 비명이 무전기 스피커를 찢었다.

 

그 찰나의 공백.

 

우진의 다리 근육이 폭발하듯 바닥을 박찼다.

 

타앙!

 

우진의 신형이 백색 질소 연무 속으로 총알처럼 쏘아져 들어갔다.

 

눈앞이 새하얗게 지워진 극저온의 공간.

 

피부를 도려내는 냉기 속에서 우진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도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가 있었다.

 

지이잉, 지잉.

 

중앙 세 번째 적의 목덜미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고주파 냉각 팬 소음.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세 대원들의 거친 금속성 호흡음.

 

우진은 전방 3미터 지점에서 질소 안개를 뚫고 솟아오른 적의 총구를 향해 몸을 낮추며 슬라이딩했다.

 

푸른 인과율 광탄이 우진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허공을 스치며 천장 타일을 날려버렸다.

 

타는 냄새와 함께 머리카락 몇 올이 불에 그슬렸다.

 

하지만 우진의 시선은 이미 타깃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탕, 탕!

 

우진이 슬라이딩하는 자세 그대로 K2C1의 총구를 치켜들고 라우터의 양 무릎 관절을 향해 2점사를 날렸다.

 

5.56밀리 철갑탄이 티타늄 방탄복의 사각지대인 무릎 관절 경첩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콰직!

 

기괴한 파열음과 함께 라우터 역할을 하던 세 번째 강화 능력자의 신형이 앞으로 푹 꺾였다.

 

동기화의 붕괴.

 

그 순간, 주변에 서 있던 나머지 일곱 명의 동작이 마치 전원이 일시적으로 끊긴 인형들처럼 0.3초간 굳어버렸다.

 

서로 다른 시각 정보가 한순간에 뒤엉키며 시스템 알고리즘에 치명적인 데이터 병목이 발생한 것이다.

 

우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을 짚고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우진은 왼손의 소총을 버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탄소강 대검을 역수로 쥐었다.

 

"미안하다."

 

우진의 입술 사이로 낮고 비통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비록 세뇌되어 살상 병기로 개조되었지만, 이들은 15년 전 자신과 같은 연구소에서 고통받았던 무고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죽음이었다.

 

푸욱!

 

우진의 대검이 무릎을 꿇은 라우터의 목덜미, 푸른빛을 뿜어내던 티타늄 제어 소켓의 틈새로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파지지직!

 

날카로운 칼날이 나노 전극의 주 배선을 끊어버리는 순간, 푸른 고전압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며 라우터의 신체가 격렬하게 경련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소켓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대원의 턱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7. 붕괴하는 사각의 감옥

 

라우터가 침묵하자, 복도를 지배하던 거대한 중압감이 유리창 깨지듯 와장창 부서져 나갔다.

 

여덟 명을 하나로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검은 네모'의 결속이 끊어진 것이다.

 

"크아아악!"

 

"아악…… 머리가……!"

 

남은 일곱 명의 강화 능력자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붓던 연산 제어가 끊기자, 오버클럭으로 타들어 가던 뇌세포의 살인적인 고통이 그들의 신경계를 정면으로 타격한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칠흑 같던 렌즈의 빛이 흐려지며, 억눌려 있던 인간의 고통이 비명으로 터져 나왔다.

 

- 이 멍청한 쓰레기들이……!

 

벽면 모니터 속 서지훈이 책상을 내리치며 악을 썼다.

 

- 강제 퍼지!

 

뇌간 전압을 150%로 올려!

 

자폭 회로를 닫아라!

 

서지훈이 콘솔의 비상 레버를 당기려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그 손 떼, 개자식아!"

 

질소 연무를 뚫고 돌진해 온 박태호가 라우터의 손에서 떨어진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낚아채 벽면의 모니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콰과과광!

 

푸른 광탄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서지훈의 얼굴이 떠 있던 대형 모니터와 통제 스피커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불꽃과 파편이 비산하며 서지훈의 역겨운 목소리가 마침내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태호야, 쏘지 마! 죽이지 마라!"

 

우진이 비틀거리는 나머지 대원들을 겨누려던 태호의 총열을 손으로 밀어내며 소리쳤다.

 

태호의 거친 숨소리가 헬멧 너머로 흩어졌다.

 

"형님! 이놈들 놔두면 회복해서 다시 덤벼요!"

 

"아니, 끝났어. 라우터가 죽어서 세뇌 루프가 깨졌다."

 

우진의 말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대원들은 더 이상 총을 들지 못했다.

 

그들은 바닥을 긁으며 각혈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에 박힌 나노 소켓에서는 과부하 차단 밸브가 열리며 희뿌연 냉각 슬러지가 흘러나왔다.

 

자아를 잃고 살상만을 반복하던 인형들이, 비로소 고통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으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쓰러진 라우터의 가슴팍에서 군번줄처럼 걸려 있던 낡은 인식표 하나를 발견했다.

 

그을린 은색 티타늄 플레이트 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

 

[PROJECT NEMO : Subject-09 / 민성훈]

 

태호가 그 이름을 본 순간, 들고 있던 총구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성훈이…… 성훈이 형이었어……?"

 

태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눈가에 굵은 눈물이 고였다.

 

15년 전, 연구소 지하실에서 자신에게 사탕을 쥐여주며 탈출하면 꼭 바다를 보러 가자던 그 형이었다.

 

그 형이 서지훈의 손에 뇌간을 난도질당한 채, 자신들을 죽이려는 살상 기계의 심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조용히 성훈의 감겨진 눈을 쓸어내려 주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는 불덩이처럼 뜨거웠지만, 입가에 어리던 기괴한 경련은 멈추어 있었다.

 

"……미안하다. 편히 쉬어라."

 

우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8. 마지막 문을 향하여

 

치익.

 

무전기에서 송민규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 우진아!

 

해냈구나!

 

지하 6층 로컬 방어망의 신호가 완전히 죽었어!

 

"채린 씨는요? 채린 씨 괜찮습니까?"

 

우진이 성훈의 몸에서 물러서며 다급히 물었다.

 

- 하아…… 하아…… 오빠…….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난…… 괜찮아요…… 죽진 않아요…… 하지만…… 이제 원격 해킹은 무리예요…… 내 머릿속 링크가…… 완전히 끊어졌어요…….

 

채린의 은빛 동그라미가 마침내 산산이 부서져 영구 소멸했음을 알리는 말이었다.

 

그녀 역시 우진처럼 모든 이능을 잃고 평범한 인간의 육체로 내려앉은 것이다.

 

하지만 채린의 목소리에는 후회가 없었다.

 

- 콘솔 문이 열렸어요…… 어서 가요…… 시간이 없어…….

 

우진이 고개를 들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중앙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3중 티타늄 방폭문이 둔중한 유압 소리와 함께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치이익 하는 감압음과 함께 드러난 내부의 광경.

 

축구장 절반 크기의 거대한 원형 챔버, 그 정중앙에 위치한 높이 15미터의 거대한 원통형 양자 슈퍼컴퓨터 메인 프레임이 푸른빛을 맥동하며 서 있었다.

 

[국가 라이프 플래너 : 메인 서버]

 

전광판의 붉은 숫자는 이제 단 1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COUNTDOWN : 11분 58초]

 

"서연 씨, 태호야. 가자."

 

우진이 복도 바닥에 버려져 있던 K2C1 소총을 다시 주워 들었다.

 

서연이 품 안의 외장 하드를 단단히 쥐며 고개를 끄덕였고, 태호 역시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세 사람은 피와 슬러지가 낭자한 중앙 통로를 지나, 대한민국의 모든 운명을 사각의 감옥에 가두려는 마지막 심장부를 향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