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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9화

마지막 결사대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지하의 망명자들

 

지하철 2호선 역삼역과 강남역 사이, 전기가 차단된 폐쇄 환기 터널에는 축축한 물비린내와 녹슨 쇠 냄새가 엉겨 붙어 있었다.

 

선로 갓길에 깔린 자갈을 밟을 때마다 서걱거리는 거친 마찰음이 낮게 깔렸다.

 

강우진은 왼쪽 어깨를 짓누르는 화끈한 열기를 참아내며 강정호의 휠체어를 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시야를 어지럽히던 허공의 선들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타인의 머리 위를 부유하던 기하학적 도형도, 0.3초 앞서 뻗어 나가던 푸른 궤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은 그저 막막한 어둠일 뿐이었고, 선로 너머의 공간은 오직 흐릿한 손전등 불빛이 닿는 만큼만 윤곽을 드러냈다.

 

"우진아, 잠시 멈추거라."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가 쉰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벽면에 돌출된 낡은 배수 밸브를 짚었다.

 

15년 전, 테헤란로 지하 깊숙이 묻혀 있던 연구소가 전소되던 날 그가 직접 손으로 돌려 잠갔던 청동 밸브였다.

 

"여기다. 이 위로 올라가면 과거 공조용으로 쓰이던 중간 배기실이 나온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천장 구석, 삭아버린 철제 그릴 너머로 미세한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주머니 속에 넣어둔 아날로그 무전기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 씨!

 

제 목소리 들려요?

 

3번 배기 갱도 바로 아래예요!]

 

한서연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우진은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듣고 있습니다, 서연 씨. 아버지 모시고 배기실 하단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에요…… 계엄군 수색대가 지상 환기구를 전부 통제하기 시작했어요.

 

지혜랑 태호가 위에서 로프를 내릴 테니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끼기긱 하는 쇳소리와 함께 녹슨 그릴이 젖혀졌다.

 

위쪽에서 떨어진 두꺼운 나일론 로프 두 가닥이 허공을 흔들었다.

 

위쪽 개구부로 익숙한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폭 테르밋 소켓을 뜯어내고 안전 구역으로 피신시켰던 피실험자 동생들, 한지혜와 박태호였다.

 

"형!"

 

박태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소년은 온몸에 그을음을 묻힌 채 우진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박사님도 무사하신 거죠? 저희가 도르래 걸어뒀어요. 휠체어부터 끌어올릴게요!"

 

지혜와 태호가 사철 와이어를 휠체어 프레임에 단단히 결속했다.

 

우진이 아래에서 받치고 두 사람이 위에서 끌어당기자, 육중한 휠체어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깨의 상처가 찢어지는 듯 욱신거렸으나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능이 사라진 육체는 사소한 부하에도 비명을 질렀지만, 그 통증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였다.

 

강정호가 배기실 안으로 무사히 올려진 뒤, 우진 역시 로프를 잡고 벽면의 디딤돌을 밟아 올라섰다.

 

배기실 안쪽으로 들어서자 굳게 닫힌 방화문 너머에서 희미한 백열등 불빛이 비쳐 들었다.

 

2. 어둠 속의 재회

 

공조 배기실 안쪽의 예비 부품 창고는 이미 임시 지휘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벽면에는 방음용 담요가 겹겹이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구형 브라운관 모니터와 군용 무전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촛불 하나가 일렁이며 방 안의 얼굴들을 비추었다.

 

"우진 씨!"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서연이 달려와 우진의 상태를 살폈다.

 

피로 물든 그의 왼쪽 어깨를 본 서연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총상을 입었잖아요…… 세상에,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스친 겁니다. 뼈는 상하지 않았어요."

 

우진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서연은 구급 상자에서 소독약과 거즈를 꺼내 능숙하게 우진의 어깨를 지혈하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알코올이 상처에 닿자 차가운 통증이 척수를 찔렀지만 우진은 표정을 굳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테이블 한쪽에 놓인 낡은 모니터의 화면이 켜지며 윤채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주 거점 7번 아날로그 은신처와 단파 무전으로 연결된 저화질 비디오 링크였다.

 

채린의 뒤편으로는 땀에 젖은 송민규가 무전 콘솔을 조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다친 데는 어때요?

 

코어가 소각될 때 발생한 전자기 펄스 때문에 파주 쪽 릴레이 장비도 절반 이상 타버렸어요.

 

그래도 오빠들이 살아 나와서 정말…….]

 

채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면 너머 그녀의 얼굴에는 감격과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채린아, 우린 괜찮다. 지혜와 태호도 안전해."

 

우진의 말에 모니터 옆에 서 있던 지혜가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

 

자폭의 공포에 질려 떨던 소녀의 얼굴에 비로소 온기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서연이 붕대를 동여매며 어두운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라디오를 켰다.

 

잡음 섞인 국영 방송의 아나운서 목소리가 좁은 창고 안을 울렸다.

 

[……계엄사령부는 금일 정오를 기해 수도권 전역에 발령된 데이터 보안 특별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합동수사본부는 이번 사태를 테헤란로 지하 통신망을 무단 점거한 무장 테러 단체의 조직적 도발로 규정하였으며, 주범 강우진과 한서연에 대해 국가보안법 및 기간통신망 파괴 혐의로 A급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정부는 국민 생활 안정을 위해 민간 IT 인프라를 국가로 긴급 귀속하고, 내일 오전 6시부터 '국가 라이프 플래너' 임시 단말기 1차 보급을 개시할 예정입니다…….]

 

라디오를 끄는 서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시민들은…… 완전히 속아 넘어가고 있어요."

 

서연의 목소리에 깊은 자괴감이 묻어났다.

 

"우리가 목숨 걸고 터뜨린 폭로 영상은 '적대 세력이 제작한 정교한 딥페이크 가짜 뉴스'로 공식 발표됐어요. 도심 전광판은 군이 장악했고, 포털과 SNS는 전부 정부 합동 검열망 아래 들어갔어요. 사람들은…… 거리에 탱크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오히려 박수를 치고 있어요. 내일 아침이 되면 국가가 나눠주는 단말기를 받으려고 동사무소 앞에 줄을 설 거래요."

 

"그것이 저들이 노린 진짜 각본이다."

 

벽에 기대어 있던 강정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박사의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씁쓸한 고통이 번져 나갔다.

 

"오리진 코어는 파괴되었지만, 인간의 공포는 파괴되지 않았어. 15년 동안 길들여진 사각의 틀이 사라지자 대중은 스스로 더 크고 견고한 우리를 찾아 들어간 게다. 넥스트 큐브라는 사기업의 가면을 벗고, '국가'라는 합법적인 절대권력의 외피를 입은 채 시스템이 완성되려 하고 있어."

 

3. 흩어진 저항의 불씨

 

무거운 침묵이 공조실을 짓눌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모니터 너머 송민규의 거친 목소리였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강 박사님, 우진 씨.

 

화면 좀 보시죠.]

 

송민규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자, 파주 벙커 벽면에 설치된 수십 대의 아날로그 단파 수신기가 보였다.

 

녹색 신호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이며 각기 다른 주파수에서 타자기 소리 같은 신호음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리진 코어가 타버리면서 상임이사회가 전국 통신망에 걸어뒀던 레벨-4 보안 락이 풀렸던 그 찰나의 순간 기억하시죠?

 

그 몇 초 사이에 우리 P2P망을 통해 원본 데이터를 다운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 숨어 있던 독립 해커들, 해직 언론인들, 그리고 미러 큐브의 조작으로 삶을 난도질당했던 피해자 유가족들이에요.]

 

화면 속 지도에 작은 점들이 하나둘 붉게 켜졌다.

 

[언체인드(Unchained) 네트워크입니다.

 

144.820MHz 비상 주파수를 타고 전국의 12개 지하 거점이 응답해 왔어요.

 

대구, 부산, 광주, 대전…… 전부 군의 검열을 피해 자체 발전기로 구동되는 순수 아날로그 기지들입니다.

 

저들은 여론이 완전히 장악됐다고 믿고 있지만, 물밑에서는 의심을 품은 수천 명의 인간들이 무전을 두드리고 있어요.]

 

우진은 모니터 속 붉은 점들을 응시했다.

 

자신의 시야에서 초월적인 기호들은 지워졌지만, 인간들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그물망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저항 세력이 존재한다는 건 다행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우진이 말했다.

 

"서지훈은 내일 오전 6시를 기점으로 '국가 라이프 플래너'를 가동한다고 했습니다. 넥스트 큐브 본사 사옥을 접수한 계엄사령부가 중앙 통제 홀을 국가 데이터 통합 관리청의 중추로 전환하고 있어요. 그 단말기가 배포되는 순간, 전 국민의 생체 정보와 일상 동선이 국가 전산망에 영구 결속됩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뒤집을 기회는 없습니다."

 

"맞아요."

 

채린이 모니터 화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가 칠 곳은 단 하나뿐이에요.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에 구축되고 있는 '신규 메인 데이터 뱅크'예요.

 

서지훈은 오리진 코어가 파괴될 것을 대비해, 본사 지하 6층 암반 구역에 국가 기간망과 직결되는 예비 코어 룸을 이미 세팅해 뒀어요.

 

내일 오전 6시, 그곳에서 국가 라이프 플래너의 최초 기동 신호가 전국 기지국으로 송출될 예정이에요.]

 

"지하 6층……."

 

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본사 건물은 지금 계엄군 1개 여단 병력이 외곽을 삼중으로 포위하고 있습니다. 정문과 화물 반입로는 물론이고, 지상 환기구까지 장갑차와 센서 부대가 틀어막고 있어요.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입니다. 게다가 내겐…… 이제 총알을 피하거나 튕겨낼 힘이 없습니다."

 

우진이 자신의 떨리는 왼손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방 안의 공기가 다시금 가라앉았다.

 

항상 선두에서 초인적인 척력과 예측으로 길을 열어주던 우진의 이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결사대 모두에게 뼈아픈 현실이었다.

 

"우진아."

 

강정호가 조용히 품속으로 손을 넣었다.

 

박사가 꺼내든 것은 낡은 가죽 케이스였다.

 

지퍼를 열자, 얇은 기름종이에 감싸인 채 15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청사진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4. 15년 전의 쐐기

 

바래버린 푸른빛 도면 위에는 복잡한 관로와 격벽의 구조가 손으로 정밀하게 제도되어 있었다.

 

도면 상단에는 낯익은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극비 기반 시설 설계도 : 지하 냉각 및 압력 배출 덕트망]

 

강정호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도면의 한 지점을 짚었다.

 

"넥스트 큐브 본사 건물은 15년 전 불타버린 우리 연구소의 옛 터 위에 그대로 세워졌다. 놈들은 지상을 철거하고 45층짜리 유리 빌딩을 올렸지만, 지하 6층 암반을 지탱하는 기초 콘크리트 토목 구조물까지는 손대지 못했어. 비용과 시간 때문이었지."

 

박사의 손가락이 미로처럼 얽힌 선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것은 당시 슈퍼컴퓨터의 초고열을 식히기 위해 한강 하류 지하 암반 수계와 직결해 두었던 '특수 고압 냉각수 배출 갱도'다. 직경 1.2미터의 특수 합금관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이 2호선 폐쇄 환기 터널 하부 집수정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배수로를 타고 들어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서연이 도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렇다. 하지만 단순한 침투로가 아니다. 서지훈과 군 당국은 이 통로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거나,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을 게다. 15년 전 화재 직후, 내가 시스템을 파괴하려다 체포되기 직전 이 배관의 중간 차단 밸브를 수동으로 용접해 밀폐시켜 버렸거든."

 

강정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성이 번뜩였다.

 

"군용 열화상 센서나 음향 탐지기는 두께 50센티미터의 방폭 콘크리트와 냉각수 슬러지로 가득 찬 배관 내부를 스캔하지 못한다. 배관을 따라 잠수해 올라가면,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 6층 메인 전산실 바로 아래에 위치한 비상 공조 피트실로 단숨에 직결된다. 지상의 계엄군 1개 여단을 완벽하게 우회할 수 있는 유일한 사각지대다."

 

"하지만 박사님."

 

박태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동으로 용접된 배관이라면…… 안쪽이 물로 가득 차 있거나 막혀 있는 것 아닙니까? 산소 장비 없이 잠수해서 통과할 수 있나요?"

 

"그 관로의 배수 밸브 키는 내가 가지고 있다."

 

강정호가 자신의 목에 걸려 있던 낡은 황동 열쇠를 꺼내 보였다.

 

"밸브를 열면 수천 톤의 슬러지와 지하수가 역삼역 하부 방수로로 일시에 방출된다. 물이 빠지는 시간은 정확히 14분. 그 14분의 배수 공백기 동안 배관 내부에 공기층이 형성된다. 그 틈을 타 관로를 타고 300미터를 기어올라가야 해."

 

14분.

 

물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배관 바닥의 잔류 유독가스가 차오르기 전, 칠흑 같은 수직 배관을 돌파해야 하는 가혹한 시간제한이었다.

 

5. 결사대의 편성

 

우진은 도면을 내려다보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시뮬레이션했다.

 

예전처럼 망막에 푸른 선이 그어지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단련된 그의 감각이 차가운 현실의 수치들을 계산해 내고 있었다.

 

"침투 조는 소수로 편성해야 합니다. 배관의 직경이 좁고, 진입 후 은밀 기습이 필수적입니다."

 

우진이 고개를 들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제가 들어갑니다."

 

"저도 갑니다, 우진 씨."

 

한서연이 망설임 없이 나섰다.

 

서연은 품속에서 테헤란로 사건의 전말과 소월도 증거가 담긴 암호화 하드디스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지하 6층에 진입하면 메인 서버에 접근해 국가 라이프 플래너의 부팅 코드를 셧다운시켜야 해요. 그 시스템의 방송망 강제 접속 프로토콜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현장에서 메인 콘솔을 장악하고, 전국의 언체인드 네트워크로 시스템의 백도어 코드를 쏴줄 사람이 필요해요."

 

"서연 씨는 지상에 남아 언론 대응을 하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한 곳은 이제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어요."

 

서연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어요. 기자가 현장을 피하면 그 기사는 죽은 문장에 불과해요. 우진 씨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우진은 서연의 결연한 눈을 바라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피실험자 소년 박태호가 우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형, 저도 갈게요."

 

"태호야."

 

"저랑 지혜는…… 15년 동안 그놈들의 손에 개조당했어요. 이능은 사라졌지만, 넥스트 큐브 놈들이 지하 벙커에 깔아둔 차폐 센서의 신호 주기와 경비 드론들의 이동 패턴을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지하 6층의 보안 격벽을 해제하려면 시설 내부의 하드웨어 스위치를 물리적으로 부숴야 하는 구간이 있어요. 그건 제 손으로 할 수 있어요."

 

태호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더 이상 실험실의 공포에 질려 떨던 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던 괴물에게 스스로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지였다.

 

지혜 역시 휠체어 옆에 서서 강정호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저는 박사님 곁에 남을게요. 지상 배기실에서 무전을 유지하면서, 오빠들이 신호를 주면 배수 밸브를 다시 잠가서 퇴로를 확보할게요. 저도 제 몫을 할 거예요."

 

모니터 속 윤채린과 송민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파주 벙커는 전력을 다해 언체인드 주파수를 증폭시킬게요.

 

오빠들이 지하 6층 메인 프레임에 외장 하드를 꽂는 순간, 전국 12개 거점의 송신탑이 동시에 전파를 쏘아 올릴 수 있도록 세팅을 끝내두겠어요.]

 

결사대의 윤곽이 잡혔다.

 

침투 조는 강우진, 한서연, 박태호 세 사람.

 

지상 지원 및 퇴로 확보는 강정호와 한지혜.

 

그리고 후방 전파 교란과 전국 동시 타격은 파주의 윤채린과 송민규.

 

초능력도, 시스템의 가호도 없는 순수한 인간들의 마지막 작전 회의였다.

 

6. 껍질을 깨는 고통

 

작전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새벽 2시의 차가운 공기가 배기실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우진은 창고 구석에서 소총의 약실을 점검하고 탄창을 결속했다.

 

노획했던 계엄군의 표준 제식 K2C1 소총이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 손가락에 서늘한 쇠의 감촉이 전해졌다.

 

과거 인과율 집속 병기나 척력의 광륜을 다루던 손에 쥐어진, 투박하고 무거운 화약 무기였다.

 

"우진아."

 

강정호가 휠체어를 밀고 다가왔다.

 

박사의 손에는 기름때 묻은 공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 안에는 산소호흡기 마스크 세 개와 소형 수중 산소통, 그리고 배관 차단 밸브를 열기 위한 특수 스패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강정호가 아들의 성한 오른쪽 어깨를 짚었다.

 

노학자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능력을 잃고 두려운 건 당연한 게다. 15년 동안 네 뇌와 감각을 지배하던 감각이 사라졌으니, 세상이 마치 칼날 위를 맨발로 걷는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겠지."

 

우진은 잠시 침묵하다 나직이 털어놓았다.

 

"……솔직히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아버지."

 

우진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예전에는 적이 총을 겨누면 어디로 피해야 할지 보였습니다. 0.3초 뒤의 미래가 보였고,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 총알이 내 심장을 뚫을지, 어깨를 뚫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불확실성이…… 살갗을 베는 것처럼 차갑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강정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발을 내딛는 게야. 내일 죽을지 살지 알 수 없기에, 오늘 곁에 있는 동료의 손을 잡고 두려움을 견뎌내는 법이지. 서지훈이 만든 세상에서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대신 아무도 살아있지 않았다."

 

박사는 아들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심장이 쿵쿵 울리는 소리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너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다. 특이점이라는 버그도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고,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선택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 네 안의 두려움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 두려움을 딛고 내딛는 한 걸음이야말로 진짜 용기란다."

 

우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를 채우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가슴속을 맴돌던 불안의 잔재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7. 배수 밸브를 향하여

 

새벽 3시 정각.

 

배기실 바닥의 배수 해치가 열렸다.

 

아래쪽 수조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냉기와 유황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왔다.

 

우진과 서연, 태호는 잠수복 대용의 방수 재킷을 단단히 여미고 산소마스크를 목에 걸었다.

 

서연의 방수 배낭 속에는 언체인드용 마스터 펌웨어가 든 외장 하드가 방수 팩에 삼중으로 밀봉되어 있었다.

 

"채린아, 송 부소장님. 주파수 대기해 주세요."

 

우진이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준비 끝났어요.

 

침투가 확인되는 즉시 서울 전역의 교통 통제망에 미약한 더미 신호를 흘려서 지하 감시 센서의 전압을 분산시킬게요.

 

행운을 빌어요, 오빠.]

 

채린의 목소리를 끝으로 무전 통신이 암전 모드로 전환되었다.

 

이제부터는 일체의 전파를 쓸 수 없는 순수 아날로그 침투였다.

 

강정호가 휠체어에서 상체를 뻗어 배수관 입구의 대형 청동 밸브에 황동 열쇠를 꽂아 넣었다.

 

박사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태호야, 와서 거들어라!"

 

태호가 달려들어 스패너를 밸브 림에 걸고 온몸의 체중을 실었다.

 

끼기기긱- 쾅!

 

15년 동안 굳어 있던 쇳덩이가 비명을 지르며 반 바퀴 돌아갔다.

 

쿠구구구궁-!

 

배관 깊은 곳에서 거대한 수압이 풀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수천 톤의 냉각 슬러지가 역삼역 하부 방수로로 쏟아져 내려가며 배관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흡입력이 배수구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였다.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강정호가 스톱워치를 누르며 소리쳤다.

 

타이머의 숫자가 14분 00초에서 거꾸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14분이다! 저 배관 안의 수위가 낮아지면 주저 없이 기어올라가거라!"

 

우진은 산소마스크를 입에 물었다.

 

그는 소총을 등 뒤로 돌려 메고, 서연과 태호의 눈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도 긴장감과 결의가 서려 있었다.

 

콸콸거리던 배수음이 점차 잦아들고, 관로 안쪽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거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물이 빠진 직경 1.2미터의 암흑의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진이 먼저 배수관 입구로 발을 디뎠다.

 

미끄러운 슬러지와 차가운 철판의 감촉이 부츠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출발합니다."

 

우진의 몸이 칠흑 같은 지하 냉각 배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서연과 태호의 그림자가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국가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시 거대한 사각형 속에 가두려는 자들과, 스스로의 발로 서기 위해 어둠 속으로 뛰어든 마지막 결사대의 최후의 진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