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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8화

국가 통제령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멈추지 않는 균열

 

콘솔 깊숙이 박혀 들어간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섬광은 지하 100미터의 암흑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그것은 눈을 태울 듯 강렬했으나, 묘하게도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강우진의 귓가를 짓누르던 기괴한 이명과 관자놀이 흉터의 욱신거림이 신기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경고. ROOT 권한 침식 감지. 메인 프레임 수식 해체 시퀀스 개시."

 

차폐벽 전면에 부착된 수십 개의 적색 모니터가 일제히 백색으로 반전되며 미친 듯이 에러 로그를 쏟아냈다.

 

오리진 코어 중앙의 거대한 양자 냉각 챔버를 감싸고 있던 초전도 링들이 불꽃을 튀기며 정지했다.

 

기계음이 하나둘 잦아들고, 테헤란로 지하를 15년 동안 지배해 온 둔중한 중저음의 진동이 맥없이 가라앉았다.

 

강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콘솔을 짚었던 손을 뗐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시야 한구석을 집요하게 얽어매던 푸른색 궤적선, 타인의 몸짓보다 반 박자 앞서 허공에 잔상처럼 떠오르던 미래의 동선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정수리 위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중압감도 깨끗이 비워졌다.

 

그것은 상실이자, 동시에 지독히도 가벼운 해방이었다.

 

초월적인 감각이 거두어진 자리에는 오직 자신의 두 발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딛고 서 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각만이 오롯이 남았다.

 

"우진아."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다.

 

박사의 수척한 얼굴 위로 콘솔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지막 잔광이 내려앉았다.

 

그의 머리 위 역시 어떠한 기하학적 도형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공백이었다.

 

"끝났다…… 드디어 저 거대한 사각의 틀이 깨졌어."

 

강정호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15년 동안 자신의 척수와 뇌간을 옥죄며 온 세상을 규격 속에 가두었던 지옥의 연산식이 마침내 스스로를 불태우며 소멸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던 서지훈의 입꼬리는 천천히 기괴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깨진 안경 너머로 드러난 그의 눈동자는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상했던 수순이 도래했다는 듯한 섬뜩한 조소가 번져 있었다.

 

"끝났다고? 착각하지 마라, 강 박사."

 

서지훈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팍의 옷감이 찢겨 나가며 드러난 맨살에는 흉측하게 타버린 회로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네놈들이 한 짓은 고작 기계 몇 대를 부순 것에 불과해. 진짜 시스템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는 거냐?"

 

그 순간, 지상과 연결된 통신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코드 블랙 4단계 발령.

 

임시 정부 비상 각료회의 긴급 의결에 따라 국가 기간망 비상 조치 프로토콜을 가동합니다.]

 

2. 침묵의 광장

 

지상 테헤란로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그 거대한 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뼈를 깎는 듯한 적막과 뒤이은 기괴한 웅성거림이었다.

 

한서연은 상가 건물 지하 계단참에 몸을 웅크린 채 밖을 내다보았다.

 

손에 쥔 태블릿 화면에는 전국 각지의 도심 전광판과 스마트폰을 통해 송출되었던 폭로 영상의 접속 수치가 실시간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화면이 꺼진 것이 아니었다.

 

영상이 중단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화면을 끄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서연의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입수했던 소월도 인프라 테러 문건, 인생 궤도 조작의 실태를 폭로한 수천 쪽의 기밀 데이터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거리의 반응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야, 미러 큐브 안 켜져?"

 

"서버 접속 불가래. 내일 출근 경로도 안 뜨고, 다음 주 계약 일정 추천도 전부 날아갔어!"

 

"어쩌라는 거야? 당장 내일 주식을 팔아야 하는지 사야 하는지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얼굴에는 분노 대신 극도의 당혹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무엇을 먹고 누구를 만나며 어떤 길로 걸어야 가장 안전한지 알려주던 '알고리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정답이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갓 태어난 눈먼 짐승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때, 광장 외곽의 통제선을 뚫고 육중한 궤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국방색 도색 위에 흰색으로 '수도방위사령부'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차륜형 장갑차 여덟 대가 도로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장갑차의 해치가 열리며 완전무장한 계엄군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하차해 총구를 허공으로 겨눈 채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시민 여러분, 동요하지 마십시오!"

 

장갑차 상부에 장착된 대형 확성기를 통해 굵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재 국가 핵심 전산망에 대한 불순 세력의 대규모 사이버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즉각 국가 비상 안보 체제를 선포하고, 데이터 보안 특별 계엄령을 발동했습니다. 시민 여러분의 안전과 일상 데이터 복구를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설 것이니, 일체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마시고 질서를 유지해 주십시오!"

 

테러범.

 

불순 세력.

 

진실을 밝혀낸 우진과 서연의 이름은 어느새 국가 기간망을 파괴한 흉악한 사이버 테러리스트로 둔갑해 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군중의 반응이었다.

 

총칼을 든 군대의 등장에 위축되기는커녕,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군대가 왔다……."

 

"정부가 서버를 복구해 준대!"

 

"살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군인들을 향해 터져 나오는 박수와 환호.

 

그 비틀린 광경을 바라보며 서연은 숨이 턱 끝까지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진실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간절히 바란 것은 오직 자신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려줄 견고하고 안전한 울타리뿐이었다.

 

3. 그림자의 거래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의 콘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점점 더 노골적인 승전가로 변해 가고 있었다.

 

치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중후하고 메마른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지훈 감사관, 듣고 있나?]

 

국가안전기획처 제1차장이자 내각 비상상임위원회 간사인 민경택의 목소리였다.

 

서지훈은 바닥에 고인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무전 단말을 귀에 가져다댔다.

 

"듣고 있습니다, 차장님."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광화문과 테헤란로 일대의 소요 사태는 테러 집단 K-07에 의한 국가 전산망 파괴 공작으로 공식 브리핑을 마쳤다.

 

언론 데스크는 이미 비상 보도 지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통제되고 있어.

 

여론은 우리 쪽이다.]

 

서지훈이 턱 끝으로 우진을 가리키며 서늘하게 웃었다.

 

"지하의 물리적 설비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업 데이터베이스와 알고리즘의 원형은 안전합니다.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인프라 지원이 필요합니다."

 

[걱정할 것 없다.

 

방금 전 국무회의에서 긴급 재정명령권이 발동되었다.

 

넥스트 큐브의 모든 데이터 관제 시스템과 지적 재산권을 전액 국비로 인수하여, 대통령 직속 '국가 데이터 통합 관리청'으로 승격시키는 법안이 의결되었다.

 

귀하는 해당 기관의 초대 총괄 기획관으로 내정되었네.]

 

국유화.

 

그것은 민간 기업이라는 외피를 벗어던지고, 국가 공권력이라는 절대적인 방패를 손에 쥐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까지는 사기업의 은밀한 알고리즘과 감시망을 통해 숨어서 사람들의 인생을 조작해 왔다면, 이제부터는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전 국민의 궤도를 합법적으로 통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현명한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국민들에게는 더 완벽하고 친절한 형태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겠지요. 이름은…… '국가 라이프 플래너'가 적당하겠군요."

 

서지훈의 메마른 음성이 텅 빈 지하 홀을 음산하게 울렸다.

 

통신이 끊어지자, 서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우진을 응시했다.

 

"들었나, 강우진?"

 

서지훈의 눈빛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경멸과 비소가 서려 있었다.

 

"너는 이 콘솔을 부수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 믿었겠지. 사람들에게서 족쇄를 풀어주면 그들이 기뻐하며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줄 알았겠지. 하지만 현실을 봐라."

 

서지훈이 벽면에 남은 보조 모니터를 턱으로 가리켰다.

 

화면 속에서는 계엄군이 쳐놓은 철조망 앞에 줄을 선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내밀며 정부의 임시 데이터 복구 인증을 받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않아. 그들에게 자유란 축복이 아니라, 매 순간 지옥 같은 선택과 책임을 강요하는 저주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을 이끌어줄 목자를 찾아 헤매지. 네가 그 목자를 쏘아 죽였으니, 이제 그들은 국가라는 더 거대하고 합법적인 목자의 발밑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는 거다."

 

4. 거세된 감각

 

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금 사이사이에 묻은 검은 그을음과 굳은살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서지훈의 몸 주변통에서 뻗어 나오는 시커먼 꼭두각시 줄과 그가 0.3초 뒤에 내지를 발길질의 궤적이 푸른 선으로 망막에 맺혔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지훈이 한 걸음 다가오는 동작, 그가 숨을 들이쉬며 주먹을 쥐는 물리적인 움직임만이 보통 인간의 동체 시력으로 포착될 뿐이었다.

 

신경 궤도 절제술의 상흔이었던 관자놀이의 통증도, 세상을 왜곡하여 도형으로 치환하던 기형적인 시각 부작용도 완전히 소멸했다.

 

완벽한 무력화.

 

마스터 암호 키가 오리진 코어의 연산식을 태워버림과 동시에, 세상의 격자망과 비정상적으로 공명하던 우진의 특이점 능력 역시 영구히 소각된 것이다.

 

"우진아, 낙담하지 마라."

 

강정호가 휠체어 바퀴를 굴려 아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노학자의 메마른 손이 우진의 차가워진 손등을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길들여진 가축의 관성일 뿐이야. 다리에 차고 있던 쇠사슬을 막 풀어주었을 때, 죄수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부짖는 법이다. 발목의 피가 통하고, 굳어 있던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일어설 수 있는 거야."

 

강정호의 시선이 서지훈을 향해 서릿발처럼 내리꽂혔다.

 

"너희는 그 진통의 순간을 틈타 더 무거운 족쇄를 채우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한 번 부서진 껍질은 결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 저들이 지금은 공포에 질려 통제를 갈망할지라도, 자신들의 삶이 조작되었다는 진실의 파편은 이미 그들의 가슴속에 깊은 균열을 냈다."

 

"균열이라……."

 

서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시스템의 인과율 집속 병기가 아닌, 9밀리 구경의 차가운 강철제 실탄 권총이었다.

 

"낭만적인 헛소리는 무덤에서나 나누시지, 강 박사. 이미 지상 1층 로비에는 계엄군 특수임무대가 진입했다. 네놈들이 여기서 살아서 나갈 방법은 없다. 테러범의 사살. 그것으로 이 소동의 완벽한 마침표가 찍힐 테니까."

 

서지훈의 총구가 정확히 강정호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 순간, 우진의 몸이 움직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0.3초의 예지선도, 허공의 탄도를 굴절시키던 특이점의 절대 척력도 없었다.

 

오직 인간의 반사 신경과 육체의 근육만이 반응한 돌진이었다.

 

탕-!

 

밀폐된 지하 공간을 찢는 총성과 함께 화약 연기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5. 인간의 방식

 

총알은 우진의 왼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차폐벽 콘크리트에 틀어박혔다.

 

타는 듯한 격통이 어깨를 타고 신경망을 자극했다.

 

이능으로 인과율을 왜곡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살이 찢기고 피가 배어 나오는 지극히 원초적인 고통이었다.

 

하지만 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통증을 삼키며 그대로 서지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능력을 잃었을지언정, 6년 동안 야근과 현장을 구르며 다져진 악착같은 생존 본능과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체득한 실전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진의 오른손이 서지훈의 권총을 쥔 손목을 강하게 꺾어 올렸다.

 

서지훈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두 번째 격발을 시도하려 했으나, 우진의 무릎이 먼저 서지훈의 명치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서지훈의 몸이 뒤로 꺾이며 바닥을 굴렀다.

 

손에서 빠져나간 권총이 요란한 금속음을 내며 저 멀리 콘솔 구석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커헉……!"

 

서지훈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었다.

 

항상 시스템의 완벽한 계산 뒤에 숨어 우아하게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던 설계자의 몰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역시 살과 뼈로 이루어진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우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지훈의 멱살을 틀어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서지훈의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너는 우리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했지."

 

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지훈의 심장을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당장은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국가의 통제를 반길 수도 있겠지. 안전하다는 착각 속으로 다시 숨어들고 싶어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서지훈,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우진의 푸른 눈동자가 서지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한 번 의심을 품은 인간은, 두 번 다시 예전처럼 온순한 가축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 정답이 가짜였다는 걸 안 이상, 사람들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거다. 그 질문 하나하나가 너희가 세우려는 사각의 감옥에 끝없는 실금을 낼 거야."

 

"닥쳐라…… 닥쳐! 계엄군은 이미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너희는 여기서 끝장이야!"

 

서지훈이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수직 중성자 차폐 터널 방폭문 너머에서 육중한 군화 소리와 함께 차폐벽을 뚫으려는 산소절단기의 마찰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계엄군 특수임무대가 메인 홀 진입로를 절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몇 분 남짓이었다.

 

6. 지하의 맹세

 

치익, 치지직.

 

우진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구형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진 씨!

 

들려요?

 

우진 씨!]

 

한서연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서연 씨, 나 여깄습니다. 아버지도 무사해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지만 지금 테헤란로는 완전히 봉쇄됐어요.

 

정부가 데이터 특별 계엄령을 선포하고 넥스트 큐브를 국유화하겠다고 발표했어요.

 

본사 건물 전체가 군 병력에 포위됐어요!]

 

"알고 있습니다. 방폭문 바깥에 이미 계엄군이 도착했어요."

 

우진은 서지훈을 바닥으로 내던진 뒤, 콘솔 벽면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어깨의 출혈이 심해지며 시야가 조금씩 아찔해져 왔다.

 

그때, 무전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파주 거점 7번에 있는 윤채린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우진 오빠, 내 말 잘 들어요.

 

본사 정문 쪽은 완전히 막혔지만, 15년 전 아버지가 설계해 둔 냉각수 비상 방류관이 있어요.

 

지하 5층 배수 펌프실 뒤편에 300밀리 구경의 슬러지 배관이 2호선 역삼역 본선 환기 터널로 직결돼요.

 

거긴 군대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사각지대예요.]

 

"채린아, 하지만 아버지의 휠체어가 통과하기엔 너무 좁다."

 

우진이 강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강정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휠체어 옆에 놓여 있던 비상용 아날로그 작업 레버를 가리켰다.

 

"아니다, 우진아. 저 배관은 수동 레버를 당기면 비상 슬라이드 형태로 격벽이 열리게 되어 있어. 내가 휠체어째로 들어갈 수 있다. 15년 전, 내가 이 지옥에서 탈출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마지막으로 파놓은 쥐구멍이다."

 

강정호의 눈에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자의 결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서지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서지훈. 너는 그 위대한 국가 라이프 플래너의 꼭대기에서 우리를 기다려라."

 

"강우진…… 네놈은 빠져나가지 못해. 국가가 네놈을 영원히 쫓을 것이다……."

 

"쫓아와 봐."

 

우진이 담담하게 말을 맺었다.

 

"정해진 궤도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는 그 어떤 슈퍼컴퓨터도 계산해 내지 못할 테니까."

 

쿵-!

 

티타늄 방폭문의 잠금장치가 절단되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찌그러졌다.

 

방탄 방패를 앞세운 계엄군 병력들의 총구가 틈새로 들이밀어지는 순간, 우진은 아버지의 휠체어를 힘껏 밀며 지하 5층 배수 펌프실의 비상 해치 속으로 몸을 던졌다.

 

7. 새로운 궤도를 향하여

 

어둠과 곰팡내, 그리고 차가운 지하수가 소용돌이치는 좁은 배관을 따라 세 사람은 미끄러져 내려갔다.

 

등 뒤에서 계엄군의 섬광탄 터지는 소리와 소총 사격음이 메아리쳤지만, 배관의 미로를 뚫고 쏟아지는 지하수의 격류는 이미 그들을 저 멀리 역삼역 지하의 깊은 어둠 속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얼마나 흘러갔을까.

 

쿵 하는 충격과 함께 휠체어와 우진의 몸이 낡은 철로 갓길의 자갈밭 위로 곤두박질쳤다.

 

지하철 2호선 역삼역과 강남역 사이, 전기가 끊겨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폐쇄 환기 터널이었다.

 

멀리서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배수 펌프의 아날로그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우진은 젖은 옷을 털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지하수와 섞여 붉게 번져 나갔지만, 숨을 들이쉴 때마다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했다.

 

"우진아, 괜찮으냐?"

 

어둠 속에서 강정호가 손을 더듬어 아들의 팔을 잡았다.

 

"네, 괜찮습니다. 아버지."

 

우진은 품속에서 깨진 액정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통신망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지만, 단파 무전망을 통해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잡히고 있었다.

 

[우진 씨…… 어디 계세요?

 

무사하신 거죠?]

 

"역삼역 본선 환기 터널입니다. 합류 지점으로 가겠습니다. 서연 씨도 몸을 숨기세요."

 

[네…… 정부가 방금 특별 담화를 발표했어요.

 

넥스트 큐브 본사를 접수한 계엄사령부가 내일 오전 6시를 기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국가 라이프 플래너' 임시 단말기 배포를 강행한대요.

 

국가 비상 안보 체제의 이름으로, 모든 국민의 금융과 통신을 단일 국가 서버로 강제 통합하겠다고…….]

 

괴물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대하고 합법적인 권력의 갑옷을 입고 부활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심장은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남의 머리 위에 뜬 도형을 보지 못한다.

 

0.3초 뒤에 날아올 탄환을 예측할 수도 없고, 공간을 비틀어 총알을 튕겨낼 수도 없다.

 

그는 이제 완벽하게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시스템이 정해놓은 네모의 각본도, 파멸을 예고하던 세모의 공포도, 그를 규정하던 이레귤러의 족쇄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부터 내딛는 모든 걸음은 온전히 그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개척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었다.

 

"가자, 우진아."

 

강정호가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어둠 너머의 선로를 응시했다.

 

"저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네모로 세상을 덮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 틀 밖에서 끝없이 싸워나가야 한다.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발로 서는 그날까지."

 

"예, 아버지."

 

우진은 휠체어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어깨의 상처를 부여잡고, 그는 차가운 선로의 자갈을 밟으며 칠흑 같은 터널 속으로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머리 위의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걷는 길 앞에는 그 어떤 시스템도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궤도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