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도심
1. 멈춰 선 심장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의 묵직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졌다.
공기를 채운 것은 기계의 웅웅거림만이 아니었다.
수직 차폐 터널을 찢고 들어온 것은 살인적인 전압 강하의 냄새, 그리고 저 아득한 지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보이지 않는 비명이었다.
강우진은 메인 통제 홀 중앙에 멈춰 섰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일찍이 타인의 머리 위를 어지럽히던 네모나 세모 같은 기하학적 도형이 더는 맺히지 않았다.
신경 궤도 절제술의 흉터가 남긴 15년간의 공감각적 왜곡이 걷힌 자리에는, 오직 서늘할 정도로 투명하고 순수한 푸른빛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 푸른 시선 끝에 원통형 유리 챔버가 있었다.
녹색 냉각액 속에 잠긴 채 수십 가닥의 굵은 튜브와 전극에 온몸이 관통당한 사내.
하반신이 뒤틀린 채 축 늘어져 있는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강정호의 뺨은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었고, 뇌간에 직결된 은색 포트에서는 불꽃 같은 전압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 콘솔 바로 앞, 서지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서지훈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형색이 아니었다.
붉은색 에러 경고창이 수백 개나 중첩되어 떠오른 메인 홀의 홀로그램 스크린이 그의 일그러진 안면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서지훈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우진을 노려보았다.
손에 쥔 비상 통제 단말기가 파르르 떨렸다.
"500만 개의 포트가 전부 역류했다고? 전국 옥외 전광판과 공영 방송망이 모조리 털려? 내 알고리즘이…… 내 시스템이 완벽하게 짜놓은 시간표가……!"
"완벽한 시간표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어."
우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손안에 쥐인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가 서늘한 감촉으로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너는 그저 사람들의 공포를 먹고 자란 사기꾼일 뿐이야. 통제라는 이름으로 영혼을 도려내고, 언제 죽을지, 언제 실패할지 제멋대로 규격화한 기계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닥쳐라!"
서지훈이 콘솔을 세차게 내리쳤다.
"네놈이 무얼 안다고 지껄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맡겨 두면 어떻게 되는지 네가 봤어? 탐욕과 우발적 충돌, 제멋대로 날뛰는 이기심이 어떤 지옥을 만들어내는지 아느냐고! 1998년 그날, 우리 가족을 난도질한 그 살인마 새끼도 자유의지로 칼을 휘둘렀다! 통제되지 않는 인간은 쓰레기야! 네모의 질서 속에 박제되어야만 비로소 문명이란 게 유지되는 거란 말이다!"
서지훈의 고함과 동시에 메인 홀 상공의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경보음이 터져 나왔다.
[경고: 결손 엔트로피 1,200만 EP 돌파.]
[전국 단위 집단 인과율 거부 반응 가시화.
통제 격자망 손실률 71.4%.]
"들리지 않나, 우진아?"
서지훈이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승리자의 여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의 파멸적 광기였다.
"지상을 봐라. 네 잘난 폭로가 지상에 어떤 낙원을 가져왔는지 직접 확인해 보란 말이다!"
서지훈이 콘솔의 비상 스위치를 내리자, 홀로그램 벽면 하나가 지상 서울 도심의 실시간 감시 카메라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우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화면 속 테헤란로, 광화문, 여의도의 풍경은 해방의 환호가 아니었다.
그곳에 펼쳐진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2. 거리를 덮친 아비규환
지상은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테헤란로의 빌딩 숲 전광판마다 넥스트 큐브의 내부 기밀 문서와 소월도 생체 실험 영상이 선명하게 재생되고 있었다.
[PROJECT NEMO : 대국민 궤도 조작 로드맵]
[미러 큐브 사용자 1,200만 명 대상 희생 노드 사전 할당 리스트]
거리의 모든 대형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문자와 영상은 시민들의 눈을 강제로 찔렀다.
손에 쥔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진동하며 알림을 쏟아냈다.
미러 큐브 앱의 백그라운드 포트가 역이용되면서, 그들이 일상이라 믿었던 모든 행적이 적나라한 데이터로 화면에 박제되었다.
'당신이 지난 3년간 내린 결정의 99.2%는 사전에 세팅된 대체 알고리즘의 유도였습니다.'
'당신의 첫 직장 탈락, 당신의 파혼, 당신의 대출 부결은 시스템 엔트로피 유지를 위한 희생 노드 할당의 결과였습니다.'
차가운 텍스트가 시신경을 관통한 순간, 도심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인파의 침묵이 찢어졌다.
"말도 안 돼……."
서류 가방을 든 30대 회사원이 횡단보도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았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자신이 3년 전 극단적 선택을 고민할 만큼 몰렸던 사채 빚과 부도 위기가 사실은 큐브 네트웍스의 궤도 강제 덮어쓰기 결과물이었다는 분석 리포트가 떠 있었다.
"내가 무능해서가 아니었어? 우리 회사가 망한 게……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었다고?"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헛웃음은 이내 짐승 같은 오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곁에 선 다른 이들의 반응은 결코 안도가 아니었다.
강남역 교차로를 지나던 승용차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신호등은 제멋대로 점멸하고 있었고, 운전자들은 차 문을 박차고 나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내 삶은 대체 뭔데?"
정장을 차려입은 한 중년 여성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내가 밤낮없이 일해서 합격한 그 자리가, 내가 죽도록 사랑해서 맺어진 내 가정이…… 전부 어떤 미친 컴퓨터가 짜놓은 각본이었다고?"
그것은 배신감이 아니었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간이 송두리째 증발해 버린 자들이 느끼는 존재론적 공포였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숨을 쉬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 질문이 도심 전체를 전염병처럼 휩쓸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길을 지나던 남자가 옆 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너도 알고 있었지? 너 미러 큐브 추천대로 나 만난 거지? 너도 그 네모 새끼들 단말기였지!"
"이거 놔! 나도 방금 알았다고! 나도 피해자야!"
폭력은 순식간에 불꽃처럼 번져나갔다.
교차로 한복판에서 차들이 뒤엉키며 연쇄 추돌 사고가 일어났지만, 누구 하나 보험사를 부르거나 경찰을 찾지 않았다.
경찰 순찰차마저 길가에 버려져 있었고, 방패를 든 의경들은 멍하니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질서라는 이름의 얇은 막이 찢겨 나간 테헤란로는 거대한 혼돈의 도가니였다.
부서진 자동차 유리창 파편이 아스팔트 위에 흩날렸고, 고층 빌딩에서는 사원들이 집어 던진 서류 뭉치가 눈송이처럼 쏟아졌다.
누군가는 광기에 차서 웃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허공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 어떤 기도도 쏟아지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해 내지 못했다.
3. 해방이라는 이름의 지옥
지하 100미터의 오리진 코어 홀 안에서도 그 아비규환의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서지훈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광소를 터뜨렸다.
"보아라, 강우진! 저것이 네가 바란 자유다!"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침이 튀었다.
"네모의 틀을 깨부수면 인간이 자유를 노래하며 서로를 보듬을 줄 알았더냐? 천만에! 인간은 나약해 빠진 짐승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순간, 저들은 공포에 질려 스스로를 뜯어먹기 시작해!"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참상은 뼈아프게 가슴을 찔렀다.
폭로만 성공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시스템의 사기극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억압받던 이들이 고리를 끊고 주체적인 삶을 되찾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인했다.
15년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시스템이 제공하는 '짜인 각본'에 길들어 있던 인간들에게, 준비되지 않은 완전한 자유는 곧 낭떠러지에서의 추락과 같았다.
[위험: 서울 권역 신경망 쇼크 발생자 급증.]
[공황 상태에 따른 심정지 및 우발적 사고율 4,800% 상승.]
콘솔 모니터에 떠오르는 데이터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수만 명의 시민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길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자유의지를 되찾았다는 환희보다, '이제 내 미래를 보장해 줄 절대적 기준이 사라졌다'는 근원적 공포가 인간의 뇌간을 직접 쥐어짜고 있는 것이었다.
"우진아……."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부름이 들려왔다.
챔버 속의 냉각액이 푸른 거품을 일으키며 흔들리고 있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강정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열렸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간신히 아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아버지……!"
우진이 챔버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서지훈이 품속에서 군용 기폭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이면 이 챔버에 매설된 인과율 자폭 테르밋을 작동시키겠다."
서지훈의 엄지손가락이 붉은색 스위치 위에 얹혀 있었다.
"네 아버지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리진 코어의 2차 커널을 유지하기 위한 생체 부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시스템의 결손치가 1,200만을 넘은 마당에 그따위 보존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나와 함께 여기서 먼지가 되든가, 아니면 저 단말기 앞에 무릎을 꿇어라!"
우진은 걸음을 멈추었다.
서지훈의 눈빛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자신의 평생이 부정당한 남자는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상태였다.
그는 우진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심장에 불을 붙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챔버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강정호의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진아…… 저자의…… 말을 듣지 마라."
"아버지, 말씀하지 마세요. 신경망이 다 타들어 가고 있어요."
"아니다…… 들어야 한다."
강정호가 피 섞인 침을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지상의 아수라장을 비추는 모니터로 향했다.
"저것은…… 당연한 진통이다."
강정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껍질이 부서지는 고통이 없을 수 있겠느냐. 15년 동안…… 아니 수십 년 동안 거짓된 안전 속에 갇혀 있던 이들이…… 맨발로 대지를 딛는 순간의 시림이다. 그 시림을 두려워해 다시 감옥으로 기어들어가게 할 수는 없어."
"닥쳐, 늙은이!"
서지훈이 기폭 단말기를 든 손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네놈이 그 잘난 이상론으로 수백 명의 아이들을 실험체로 갈아 넣었지! K-07 저놈의 뇌를 째서 만든 백신이 지금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란 말이다! 저 아비규환이 네가 바라던 해방이냐?"
"그래, 내가 지은 죄는 지옥에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강정호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서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지훈아. 너는 통제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네 나약함을 거대한 시스템 뒤에 숨겼을 뿐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세상 모든 인간의 목에 네가 채운 족쇄를 매달아 놓았던 거야."
"입 닥쳐!"
서지훈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강하게 눌렀다.
치이익!
챔버 하단에서 맹렬한 고압 방전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인과율 자폭 테르밋의 예열 코일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4. 찢겨진 시간표
"우진아, 지금이다!"
강정호의 절규와 함께 챔버 내부의 압력 밸브가 역류했다.
우진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더 이상 0.3초의 미래를 보여주던 푸른 잔상선은 없었다.
하지만 왜곡된 도형이 사라진 우진의 시야에는, 세상의 물리적 법칙과 인과율의 압력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선명하게 들어찼다.
쿵!
우진이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 속도는 인간의 반응 한계를 아득히 초과해 있었다.
서지훈의 망막에 우진의 형상이 맺히기도 전, 우진의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특이점의 절대 척력.
어떠한 도형의 굴레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자유의지의 파동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앙!
서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기폭 단말기가 허공에서 그대로 으스러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아악!"
서지훈의 신체가 거대한 충격파에 휩쓸려 벽면의 주 모니터로 날아가 처박혔다.
강화유리가 거미줄처럼 박살 나며 스파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우진은 서지훈을 지나쳐 곧장 챔버 앞으로 몸을 던졌다.
달아오르기 시작한 테르밋 뇌관의 표면 온도는 이미 수백 도에 달하고 있었다.
이대로 3초만 지나면 챔버는 섭씨 수천 도의 고온 플라스마에 녹아내릴 터였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치이익!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극심한 작열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그러나 우진은 이를 악물며 비명을 삼켰다.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 속에 내재된 신경 궤도 절제의 힘, 시스템의 모든 인과율 명령을 거부하는 방화벽 백신의 파동을 손끝으로 쥐어짜 냈다.
쩌저적!
뇌관의 도화선 역할을 하던 나노 회로가 역위상 전류를 이기지 못하고 파열되었다.
붉게 타오르던 예열 코일이 힘없이 빛을 잃으며 검게 식어 내렸다.
간발의 차였다.
단 0.1초만 늦었어도 아버지의 육신은 흔적도 없이 증발했을 터였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화상을 입은 손을 떨구었다.
챔버 너머의 강정호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내 아들."
그 순간, 깨진 유리 파편을 헤치고 서지훈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의 온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놓인 메인 콘솔에서는 붉은 비상 알림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있었다.
[최종 방어 프로토콜 가동 실패.]
[지상 통제망 붕괴율 89.2%.]
[시스템 자율 복구 불능 상태 돌입.]
서지훈이 피 묻은 손으로 콘솔을 붙잡으며 헐떡였다.
"끝난 줄 아느냐……? 네가 이 챔버를 구했다고 해서…… 저 바깥의 지옥이 사라질 것 같으냐!"
서지훈이 광기 어린 눈으로 지상 모니터를 가리켰다.
화면 속 테헤란로의 군중은 이제 단순한 방황을 넘어, 시스템의 본사 건물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쇠파이프와 깨진 보도블록, 화염병이 들려 있었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마천루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결코 해방의 함성이 아니었다.
마이크를 타고 지하로 내려온 군중의 목소리는, 우진의 귓전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내 네모를 돌려내!"
"내일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줘!"
"시스템을 다시 켜라! 정답을 알려달라고!"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해진 시간표를 빼앗긴 수감자들이, 활짝 열린 감옥 문 앞에서 질려 교도관을 향해 울부짖는 절규였다.
5. 침묵의 심연
우진은 멍하니 스피커를 응시했다.
'내 네모를 돌려내라.'
그 한마디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들은 시스템이 옥죄어 오는 굴레 속에서 고통받던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학생들이었고, 부모들이었다.
사채에 쫓기며 눈물 흘렸고, 부당한 인사 처분에 피눈물을 삼켰으며, 언제 닥칠지 모를 불행에 가슴을 졸이던 소시민들이었다.
우진은 그들을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그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을 찢어발기면, 모두가 자신의 두 발로 당당히 서서 숨을 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내뱉은 것은 감사가 아닌 저주였다.
"보아라! 똑똑히 보아라, 강우진!"
서지훈이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정답이 없는 도화지를 받아 든 순간 미쳐버리는 버러지들이란 말이다! 저들은 자유를 원한 게 아니야! 그저 실패해도 내 탓이 아니라는 핑계, 내일의 비극이 정해져 있다는 체념의 안락함을 원했을 뿐이다!"
서지훈의 조롱 섞인 고함이 텅 빈 메인 홀을 찌렁찌렁 울렸다.
"네가 한 짓은 구원이 아니야. 저들의 등 뒤에 있던 유일한 난간을 걷어차 버린 학살이다!"
우진의 손이 파들거렸다.
주머니 속에 든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러왔다.
이 키를 저 중앙 콘솔의 메인 소켓에 꽂는 순간, 오리진 코어는 영구 소각된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지막 인과율의 잔재마저 흔적도 없이 타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진 자신을 포함해 이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능력자들의 이능은 영원히 소멸한다.
하지만 그다음엔?
코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저 미쳐버린 군중은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이 뽑혀 나간 저 수백만 명의 영혼은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쿵!
쿵!
쿵!
지하 100미터 깊은 곳까지 지상의 진동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성난 군중이 넥스트 큐브 사옥의 1층 로비를 부수고 진입하기 시작한 소리였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가는 파열음과 함께 수만 명의 발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시스템을 부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꺼져가는 시스템의 스위치를 다시 켜라고, 내 정해진 운명을 다시 돌려놓으라고 협박하기 위해 몰려오는 것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챔버 속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강정호는 조용히 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후회도 없었다.
오직 오랜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깊고 그윽한 슬픔만이 고여 있었다.
강정호가 산소마스크 너머로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우진은 그 입 모양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선택해라, 우진아.'
거짓된 안전의 네모 속으로 세상을 다시 밀어 넣을 것인가.
아니면 피를 흘릴지언정 정답 없는 미지의 바다로 인류를 내던질 것인가.
콘솔 위의 비상등이 깜빡이며 서지훈의 피 묻은 얼굴과 우진의 굳게 다문 입술을 번갈아 비추었다.
지상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군중의 광기 어린 함성이 차폐벽을 흔들기 시작했다.
파멸과 해방의 경계선에서, 시간의 추가 멈춘 듯 지독한 침묵이 오리진 코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