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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1화

탈출과 오열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붉게 타오르는 절벽

 

바닷물은 살갗을 바늘로 찌르듯 차가웠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와 시커먼 기름 찌꺼기가 뒤엉킨 해수면 위로 머리를 내민 순간, 귓전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소월도(蘇月島)의 깎아지른 절벽 끝, 흉물스럽게 솟아 있던 백색 등대가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온 시뻘건 화염 기둥에 휘감긴 채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군용 테르밋의 고온 방전과 플라스마 폭발이 뒤섞인 불길은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다.

 

수천 도에 달하는 열기가 허공을 집어삼키며 콘크리트와 철골을 순식간에 유리질 덩어리로 녹여 내리고 있었다.

 

"우진 씨, 이쪽이에요! 어서 손잡아요!"

 

파도 너머에서 한서연의 다급한 비명이 물보라를 뚫고 날아들었다.

 

해식동굴 앞바다에 띄워진 검은 고무보트 위에서 그녀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옆에서 키를 쥐고 있던 늙은 선장이 굵은 밧줄을 바다로 집어 던졌다.

 

우진은 밧줄을 낚아채며 선체 위로 몸을 솟구쳤다.

 

축축하게 젖은 군용 방탄복과 살갗으로 스며드는 해풍이 뼛속까지 시려왔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관자놀이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박동이었다.

 

쿵.

 

쿵.

 

쿵.

 

15년 전 아버지가 직접 메스를 대어 잘라냈던 신경 궤도의 4센티미터 흉터.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던 시린 한기는 이제 잦아들었으나, 대신 심장 박동과 맞물려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보트 바닥에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우진이 붉게 물든 절벽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회전날개 소리가 바다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사각 격자 돔을 뚫고 솟구쳐 오른 칠흑빛 수송 헬기 한 대가 불타는 등대 상공을 선회하며 짙은 먹구름 속으로 기수를 돌리고 있었다.

 

헬기의 측면 개폐구 사이로, 휠체어에 결박된 채 고개를 떨군 노인의 모습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아버지였다.

 

자신과 동료들을 이 비밀 해수로로 밀어 넣기 위해, 스스로 서지훈의 총구 앞에 서서 미끼가 되어버린 아버지 강정호(姜正浩).

 

'우진아,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네 선택을 믿어라.'

 

아비가 마지막으로 토해냈던 그 처절한 절규가 바닷바람을 타고 귓가에 맴돌았다.

 

"아버지……."

 

우진의 입술 사이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이 찢어질 듯 보트의 고무 튜브를 쥐어뜯었다.

 

손톱 밑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가 검은 선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안 돼…… 돌아가야 해. 아직 저 상공을 벗어나지 못했어. 내가…… 내 손으로 헬기를……!"

 

우진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눈앞에 번뜩이는 은빛 파동을 강제로 끌어올리려 온 신경을 쥐어짜는 순간, 망막을 도려내는 듯한 격통이 뇌간을 강타했다.

 

"커헉!"

 

우진의 입에서 한 줄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시야 전체가 백색 노이즈로 새하얗게 지워지는 백색 암전(White Blackout)의 잔상이 찰나의 순간 다시금 우진의 눈앞을 암흑으로 덮쳤다.

 

"우진 씨, 안 돼요! 제발 진정해요!"

 

서연이 달려들어 우진의 젖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금 가면 박사님의 희생이 전부 물거품이 돼요! 박사님이 왜 스스로 미끼가 되셨는지 잊었어요? 우진 씨를 살리려고…… 우리를 살려서 테헤란로로 보내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내가…… 내가 아버지를 두고…… 어떻게……!"

 

우진의 목구멍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15년 만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역삼역 지하 7층 액체 챔버 속에서 생체 배터리로 착취당하던 아버지를 겨우 찾아냈는데.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고, 따뜻한 밥 한 끼 함께 먹어보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또다시 아들을 위해 자신의 남은 척수와 목숨을 내던졌다.

 

자신의 삶을 온통 저주와 절망으로 채워 넣었던 그 지독한 수술이, 사실은 자신을 가축화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던 아비의 유일한 구원이었다는 진실을 겨우 받아들였는데.

 

그런 아버지를 또다시 그 지옥 같은 자들의 손에 넘겨주고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이 우진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으아아아아악!"

 

우진은 고개를 꺾어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그 비명은 헬기의 굉음과 무너져 내리는 절벽의 파열음에 묻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바다 위로 굵은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서해의 하늘은 마치 세상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음산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2. 사라진 기하학의 흔적

 

"엔진 올립니다! 꽉 잡으쇼!"

 

조타간을 잡은 늙은 선장이 거친 손으로 스로틀을 힘껏 당겼다.

 

부르르릉!

 

콰아아앙!

 

15년 동안 해식동굴 안쪽 방수포 밑에 봉인되어 있던 고출력 선외기 엔진이 매캐한 백색 매연을 토해내며 격렬하게 포효했다.

 

순수 기계식 밸브와 카뷰레터로 구성된 구형 엔진은 전자기 펄스나 시스템의 격자 감시망 따위에는 반응조차 하지 않는 완벽한 아날로그 심장이었다.

 

보트의 스크루가 서해의 거친 조류를 찢어발기며 회전하자, 선체가 뱃머리를 번쩍 치켜들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콰아아아악!

 

등대가 완전히 붕괴하며 바다로 쏟아져 내린 거대한 콘크리트 암석들이 높은 파도를 일으켰다.

 

소월도를 둘러싸고 있던 군용 차폐 해무가 폭풍우와 폭압에 찢겨 나가며, 섬 전체가 불타는 지옥으로 화해 멀어져 갔다.

 

우진은 보트 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거렸고, 뇌간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항상 이런 극단적인 신경 과부하를 겪고 나면, 관자놀이 흉터 부근에 살갗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편두통이 수 시간 동안 이어져야 정상이었다.

 

타인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도형의 내부 구조를 파헤치려 들 때마다 시신경을 옥죄던 그 지옥 같은 두통.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뇌간의 압박은 존재했으나, 시신경을 갈가리 찢던 그 특유의 신경학적 거부 반응이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만졌다.

 

그리고 옆에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한서연을 바라보았다.

 

"어……?"

 

우진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연의 정수리 위.

 

언제나 그곳에 은은하게 떠올라 있어야 할 도형이 보이지 않았다.

 

일상의 규칙과 질서를 상징하던 그 백색 네모(□)가, 그리고 방금 전까지 아웃라이어의 저주로 인해 차가운 서리 노이즈와 미세한 실금을 일으키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 기하학적 형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서연의 머리 위는 완벽한 허공이었다.

 

단순히 빛이 꺼진 것이 아니었다.

 

선이나 면, 꼭두각시 줄의 잔상조차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었다.

 

"우진 씨? 왜 그래요? 어디 다친 거예요?"

 

서연이 우진의 퀭한 눈빛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어린 것은 오직 자신을 향한 순수한 걱정과 비통함뿐이었다.

 

우진은 멍하니 선장을 돌아보았다.

 

조타간을 쥐고 파도를 응시하는 선장의 머리 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딸의 목숨을 빌미로 협박당하며 위태롭게 깜빡이던 그 불안정한 세모(△)도, 허공으로 뻗어 있던 검은 꼭두각시 줄도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그저 비바람을 맞으며 이를 악물고 있는 한 늙은 어부의 젖은 백발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라졌다…….'

 

우진은 젖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하철 2호선 역삼역에서 대기업 임원의 죽음을 목격한 그날 이후, 단 한 순간도 우진의 시야를 떠나지 않았던 세상의 기하학들.

 

네모, 세모, 동그라미.

 

그것들이 전부 사라졌다.

 

제56화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신경망을 통해 전해주었던 그 참혹한 진실이 뇌리를 스쳤다.

 

'도형 관찰 능력은 초월적인 이능이 아니다. 15년 전 신경 궤도 절제술로 인해 궤도가 끊겨 나간 네 뇌간과 시신경이, 세상의 사각 격자망과 엔트로피의 흐름을 억지로 해석하려 들며 발생한 영구적인 감각의 비틀림…… 공감각적 왜곡 부작용이었을 뿐이다.'

 

그렇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상처였다.

 

절제된 신경이 뿜어내던 시각적 노이즈이자 기형적인 흉터의 비명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소월도 지하 5층에서 아버지의 목덜미 소켓에 바이패스 단말을 직결하고, 위성 백도어를 소각하며 자신의 방화벽 백신 코어를 한계까지 쥐어짠 순간.

 

우진의 뇌신경계는 시스템과의 접속 경로를 완전히 태워버렸다.

 

세상을 사각형의 감옥으로 규정하던 배후의 격자망과 우진의 뇌를 잇고 있던 마지막 연결선이 끊어진 것이다.

 

"우진 씨…… 눈이……."

 

서연이 숨을 들이켜며 우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우진의 눈가를 스쳤다.

 

"눈이 어떻게 된 거예요?"

 

"내 눈이…… 왜 그럽니까?"

 

"도형의 잔상이…… 사라졌어요."

 

서연의 목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경이가 배어 있었다.

 

그녀가 바라본 우진의 눈동자 속에는, 언제나 불안정하게 명멸하던 은빛 원환이나 미세한 기하학적 균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오직 깊은 심연의 바다처럼 맑고 투명하며, 서늘할 정도로 순수한 푸른빛만이 고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수식도, 왜곡된 공감각의 착란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억압과 조작을 거부하고, 기하학적 규격을 벗어던진 유일한 존재.

 

완전한 인간의 의지가 빚어낸 영혼의 빛이었다.

 

3. 단결정 사파이어의 무게

 

우진은 젖은 코트 안쪽 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닿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

 

가로세로 3센티미터 남짓한 정육면체.

 

지하 5층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손에 쥐여주었던 단결정 사파이어 반도체 칩, '마스터 암호 키(Master Cipher Key)'였다.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도 칩은 은은한 미열을 내뿜고 있었다.

 

그 투명한 사파이어 외피 안쪽으로, 아버지가 15년간 액체 챔버 속에서 뇌세포를 깎아내며 새겨 넣은 나노 회로들이 극미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PROJECT NEMO : ROOT DELETION / MASTER CIPHER]

 

그것은 넥스트 큐브의 심장, 서울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암반에 은폐된 배후의 최종 중추 '오리진 코어(ORIGIN CORE)'를 내부에서부터 영구 소각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우진아, 이 키를 콘솔에 꽂는 순간…… 격자망에 묶여 있던 세상의 모든 궤도가 해방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시스템과 공명하던 너의 힘도, 세상에 남은 모든 이레귤러의 흔적도 완전히 지워질 게다. 너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아비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평범한 인간.

 

도형을 보지 못하고, 미래의 궤적을 예측하지 못하며, 날아오는 탄환을 척력으로 튕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살덩어리.

 

그것이 아버지가 예고했던 대가였다.

 

하지만 우진의 입가에는 서늘한 자조의 미소가 번졌다.

 

"이미…… 시작되었군요, 아버지."

 

우진이 중얼거렸다.

 

머리 위의 도형들은 이미 사라졌다.

 

세상을 기하학의 틀로 가두어 보던 그 기괴한 눈동자는 이미 닫혔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마주해야 할 비정한 현실뿐이었다.

 

자유의지란 언제나 불확실하고 두려운 법이다.

 

다음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고, 내딛는 발걸음마다 파멸의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타인이 정해준 사각의 궤도 위에서 가축처럼 사육당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의 온 인생을 바쳐 이 작은 사파이어 조각을 깎아냈다.

 

"서연 씨."

 

우진이 고개를 돌려 서연을 응시했다.

 

서연은 품속에서 방수 팩에 밀봉된 검은색 외장 하드를 꺼내 보였다.

 

소월도 지하 4층 관제실 메인 프레임에서 도진우의 숨통을 끊어놓으며 추출해 낸 국가 인프라 테러의 전모.

 

팔당댐 수문 강제 개방, 수도권 전력망 차단, 원자력 발전소 냉각 시스템 조작, 그리고 1,200만 명을 대상으로 했던 3세대 생체 칩 배포 음모까지 낱낱이 기록된 절대적인 스모킹 건이었다.

 

"자료는 안전해요."

 

서연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외벽 차폐가 완벽해서 바닷물은 한 방울도 안 들어갔어요. 인천에 상륙하는 즉시, 최진석 선배와 연결된 해외 분산 서버망을 통해 전국 언론사와 인터넷 독립 미디어로 동시 송출할 수 있어요."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진이 선장에게 다가갔다.

 

"선장님, 선내에 비상 단파 무전기가 있습니까?"

 

선장이 빗물에 젖은 얼굴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엔진 덮개 밑에 배터리 직결식으로 하나 있소. 15년 전에 강 박사가 직접 납땜해서 달아둔 물건이지. 군용 주파수 대역까지 잡히는 놈이오."

 

선장이 조타대 아래의 녹슨 철제 패널을 걷어 올렸다.

 

먼지와 기름때가 엉겨 붙은 검은색 트랜시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은 지체 없이 다이얼을 돌렸다.

 

지지직…… 쉭…….

 

잡음 사이로 주파수를 맞추었다.

 

144.820MHz.

 

강정호 박사가 한서연의 취재 수첩에 남겨두었던 바로 그 비상 조난 주파수 대역이었다.

 

"파주 거점 7번. 들립니까? 여기는 Node-1. 송민규, 응답하라."

 

치이익…… 치직…….

 

스피커에서는 메마른 백색 소음만이 흘러나왔다.

 

우진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제58화에서 들려왔던 송민규의 다급한 비명이 떠올랐다.

 

'우진아! 파주 벙커 외벽이 뚫렸다! 본사 청소 기동대가…… 놈들이 들이닥쳤어! 상임이사회가 테헤란로에 계엄을 선포했다! Subject-05 한지혜와 06번 박태호의 뇌간을 오버클럭해서…… 오리진 코어의 자폭 병기로……!'

 

그 비명을 끝으로 끊겨버렸던 신호.

 

파주 은신처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보내고 15년 동안 눈물로 지새웠던 어머니가.

 

그리고 척력 파동을 쥐어짜 내어 자신을 살려내고 탈진해 쓰러진 윤채린이, 챔버에서 겨우 구출해 낸 열 살배기 어린아이 이서진이 있었다.

 

우진은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송민규! 살아있다면 대답해! 한민우 부소장님! 채린아!"

 

지지직…… 솨아아아…….

 

거친 파도 소리와 빗소리만이 스피커를 메웠다.

 

침묵이 1초, 2초, 3초간 이어졌다.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녀 역시 파주 은신처가 완전히 유린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였다.

 

치익…… 탁!

 

잡음 너머로 거친 금속성 파열음과 함께, 누군가의 밭은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 쿨럭!

 

쿨럭……!

 

우…… 우진이냐……?

 

송민규의 목소리였다.

 

비록 피를 토하듯 갈라지고 헐떡이고 있었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자의 음성이었다.

 

4. 파주의 비보와 피실험자들의 비극

 

우진은 반사적으로 마이크를 입가에 바짝 가져다 댔다.

 

"민규야! 무사한 거냐? 은신처 상황은 어떻게 됐어! 어머니는? 채린이는?"

 

- 하아…… 하아…… 겨우…… 격퇴했다…….

 

송민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 한민우 부소장님이…… 미리 설치해 뒀던 구리 분말 고전압 트랩을…… 벙커 진입로에서 터뜨렸어.

 

기동대 놈들 셋을 잡고…… 나머지는 후퇴했다.

 

어머니랑 채린이…… 서진이도 무사해.

 

안쪽 차폐 방공호로 피신시켰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서연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송민규의 목소리는 전혀 안도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얼음장처럼 차가운 전율과 거대한 절망이 스피커를 타고 흘러들고 있었다.

 

- 우진아…… 안도할 때가 아니야.

 

강 박사님은…… 어떻게 되셨어?

 

확보했어?

 

우진의 목구멍이 콱 막혀왔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우진의 침묵 속에서, 송민규는 이미 모든 것을 직감한 듯 이를 갈았다.

 

- 젠장…… 뺏겼구나.

 

서지훈 그 개자식한테…….

 

"아버지가…… 스스로 미끼가 되셨다."

 

우진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우리를 탈출시키려고 스스로 놈들에게 잡히셨어. 놈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테헤란로로 향했다."

 

- 역시 그랬군…….

 

송민규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 놈들이 왜 그렇게 서둘러 철수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우진아, 똑똑히 들어.

 

놈들이 물러가기 직전에 도청된 본사 통제감사실 긴급 지령망을 해킹했어.

 

상임이사회는 지금 완전히 미쳤어.

 

"무슨 지령이지?"

 

- 결손 엔트로피가…… 무려 84만 EP(Entropy Point)를 넘어섰어.

 

네가 소월도의 위성 백도어를 날려버리면서, 서울 전역에 전개되려던 수도권 인프라 장악 계획이 완전히 파탄 났잖아.

 

그 때문에 시스템 전체의 항상성 네트워크가 연쇄 붕괴 직전에 몰렸어.

 

송민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 상임이사회는 그 결손을 메우기 위해…… 테헤란로 본사 칠흑빛 마천루 전체에 민간인 출입 통제와 비상 계엄을 선포했어.

 

그리고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를 강제로 열기 위해, 강정호 박사님의 망막과 뇌간 바이패스를 강제 동기화하는 '생체 강제 연동 시퀀스'를 승인했다.

 

"생체 강제 연동……?"

 

- 그래.

 

박사님의 뇌세포가 타버리든 말든, 고전압 전류를 척수에 흘려 넣어서 억지로 오리진 코어의 2차 커널 봉인을 뜯어내겠다는 거야.

 

놈들이 예상한 동기화 소요 시간은 단 3시간.

 

3시간 뒤면 강 박사님의 뇌는 완전히 타버려서 뇌사 상태에 빠져.

 

쿵.

 

우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3시간.

 

소월도에서 인천까지 보트로 내달려 상륙하고, 테헤란로까지 돌파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리고…… 피실험자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거냐?"

 

우진이 피를 토하듯 물었다.

 

송민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 Subject-05 한지혜, 그리고 Subject-06 박태호…….

 

그 이름들이 나오는 순간, 무전기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은신처 침상에 누워있던 윤채린이 의식을 되찾고 무전기 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 우진 오빠…….

 

채린의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 지혜랑…… 태호의 뇌간 소켓에…… 군용 인과율 자폭 테르밋이 심어졌대요…….

 

"자폭 테르밋……?"

 

- 네…… 상임이사회가 그 아이들의 뇌파를 오버클럭해서…… 오리진 코어로 진입하는 지하 100미터 유일한 진입로인 '수직 중성자 차폐 터널'에 인간 방패로 배치했어요.

 

비인가 침입자가 접근하면…… 0.01초 만에 뇌간이 쇼트되면서 반경 50미터를 통째로 소각하는 자폭 스위치로 개조된 거예요……!

 

채린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15년 전 연구소에서 함께 도망치지 못하고 넥스트 큐브에 납치되었던 동생들.

 

장기 동면 상태에서 살상 알고리즘만을 주입당하며 인간 병기로 사육되었던 그 가련한 아이들이, 이제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일회용 자폭 폭탄으로 내몰린 것이다.

 

"서지훈…… 상임이사회…… 네놈들……!"

 

우진의 눈에서 핏빛 분노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인간의 인생을 사각형 틀에 가두고, 말을 듣지 않으면 파멸을 내리고, 쓸모가 다하면 뇌를 태워 폭탄으로 써먹는 괴물들.

 

그것이 바로 저 배후 세력의 추악한 민낯이었다.

 

- 우진아…….

 

송민규가 채린을 달래며 비장하게 말했다.

 

- 인천 연안부두는 지금 완전히 봉쇄됐어.

 

경찰과 해경, 그리고 넥스트 큐브의 위장 보안 요원들이 부두 전체에 깔렸다.

 

정상적인 접안은 불가능해.

 

배를 대는 순간 테러범으로 몰려 사살당할 거다.

 

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정상적으로 댈 생각 따위 애초에 없었다."

 

- 뭐……?

 

"선장님."

 

우진이 무전기를 든 채 조타간을 쥔 선장을 돌아보았다.

 

"해성호가 부서지기 전, 인천항 서쪽 화물 전용 부두 옹벽에 대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선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이미 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소. 옛 석탄 부두 4부두 옹벽 말이오. 수심이 얕고 조류가 험해서 해경 경비정도 접근 못 하는 폐쇄 구역이지. 하지만 콘크리트 옹벽이 깎아지른 절벽처럼 서 있어서 배를 댔다간 선체가 박살이 날 거요."

 

"박살 내면 됩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서늘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이 보트로 다시 바다로 나갈 일은 없습니다. 옹벽에 그대로 전속력으로 들이받고, 튕겨 나가는 순간 뛰어내려 상륙합니다. 놈들의 포위망 뒤통수를 치고 육상으로 진입할 겁니다."

 

선장이 거친 침을 꿀꺽 삼키며 흉터투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흉포한 미소가 걸렸다.

 

"좋소! 늙은 목숨 하나 강 박사 덕에 건졌는데, 옹벽 하나 못 들이받겠소? 내 모든 마력을 쥐어짜서 석탄 부두 옹벽에 이 고무 뼉다구를 꽂아 넣어 주겠소!"

 

우진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민규야, 들어라."

 

- 어, 듣고 있어.

 

"우리가 인천 4부두 옹벽을 돌파해 상륙하는 시간은 지금부터 정확히 1시간 40분 뒤다. 상륙 즉시 차량을 탈취해 테헤란로로 직행한다."

 

- 알겠어.

 

부소장님과 내가 은신처에 남은 비상 아날로그 통신망을 전부 긁어모아서, 테헤란로 사옥 주변의 방범 카메라와 신호 제어망을 역해킹해 둘게.

 

어떻게든 본사 지하 100미터 환기구 진입로까지 길을 열어주마.

 

"그리고 채린아."

 

우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혜와 태호……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 목숨을 걸고, 그 아이들의 목덜미에 박힌 자폭 테르밋을 뜯어낼 거야. 15년 전 아버지가 나를 구해냈듯이, 이번엔 내가 그 아이들을 구해내마."

 

무전기 너머에서 채린의 흐느낌이 잦아들며, 단단한 결의가 깃든 목소리가 돌아왔다.

 

- 믿어요, 오빠.

 

살아서…… 다 같이 살아서 만나요.

 

치익.

 

통신이 끊겼다.

 

우진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코트 주머니 속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굳게 쥐었다.

 

5. 차가운 결의와 비상하는 보트

 

거센 비바람이 고무보트의 외벽을 사정없이 때렸다.

 

인천 앞바다로 향할수록 파도는 더욱 거칠어졌고, 집채만 한 너울성 파도가 선체를 집어삼킬 듯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보트는 멈추지 않았다.

 

선장은 노련한 감각으로 파도의 골을 타넘으며 선외기 엔진의 스로틀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콰아아앙!

 

콰르릉!

 

보트가 파도를 찢고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수면으로 내리꽂힐 때마다, 척추를 울리는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서연은 흠뻑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우진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우진 씨."

 

서연이 우진의 굳게 다문 입술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불렀다.

 

"무서워요?"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연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두려움 대신, 자신을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우진은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지하철 2호선에서 사람들의 머리 위에 뜬 도형을 처음 보았던 그날부터…… 나는 늘 공포 속에 살았습니다. 정해진 죽음, 거역할 수 없는 파멸, 그리고 내 머리 위에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세모를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버텼죠."

 

우진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타인이 그어놓은 선 안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요."

 

우진의 두 눈 속에서 순수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세상을 조작하던 넥스트 큐브의 차가운 시스템 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뿜어내는 생명의 빛이었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그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아들이 언젠가 찾아와 이 거짓된 세상을 부숴주기를 바라면서요."

 

우진이 사파이어 칩을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나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구해내고, 동포들을 해방시키고, 저들이 세워놓은 사각의 감옥을 내 손으로 완전히 무너뜨릴 겁니다."

 

서연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우진의 차가운 주먹을 겹쳐 쥐었다.

 

"저도 끝까지 함께 갈게요. 세상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거예요. 당신과 박사님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록해서 온 세상에 퍼뜨릴 거예요."

 

두 사람의 손이 거친 바다 위에서 단단히 맞물렸다.

 

그때, 뱃머리를 잡고 있던 선장이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전방 보시오! 인천 4부두 옹벽이요!"

 

우진과 서연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폭풍우와 해무를 뚫고, 거대한 잿빛 콘크리트 장벽이 거인처럼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옛 석탄 부두의 4부두 옹벽.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콘크리트 벽면 아래로 날카로운 테트라포드와 암초들이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너머 저 멀리, 비바람 속에 갇힌 인천 도심의 불빛들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심의 도로망 끝자락, 서울 테헤란로를 향해 뻗어 있는 고속도로의 윤곽이 번개 섬광 속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속도 줄이지 마쇼!"

 

우진이 젖은 선체를 딛고 일어서며 포효했다.

 

그의 몸 주위로, 더 이상 도형의 형태를 띠지 않는 순수한 무형의 반발력이 대기 전체를 찢어발기며 팽창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들이받습니다! 꽉 잡으시오!"

 

선장이 스로틀을 부러뜨릴 듯 꺾어 쥐며 고함을 질렀다.

 

비상 고무보트가 거대한 파도를 타고 솟구쳐 올랐다.

 

시속 60킬로미터가 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보트의 뱃머리가 잿빛 콘크리트 옹벽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쾅!

 

충돌 직전, 우진의 발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척력의 폭풍이 선체를 감싸 안으며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부서져 나가는 파도와 폭풍우를 뚫고, 검은 선체가 옹벽 너머 지상을 향해 비상했다.

 

서울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를 향한 최후의 진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