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대가
1. 찰나의 안도, 번져가는 파열
강남역 승강장을 뒤흔들었던 참혹한 비명과 파열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진입하던 전동차가 둔탁한 마찰음을 토해내며 멈춰 섰다.
귓전을 찢어발기던 쇠바퀴의 비명소리와 승객들의 경악 섞인 외마디 비명이 한데 뒤엉켜 고막을 난타했다.
강우진(姜宇鎭)은 바닥에 처박힌 상태에서도 품에 안아 든 작은 몸뚱이를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품 안에 파묻힌 아이의 가냘픈 심장 박동이 우진의 흉곽을 울리며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우진은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도 번뜩 눈을 치켜떴다.
아이의 정수리 위를 확인해야만 했다.
조금 전까지 피처럼 붉게 타오르며 광폭하게 회전하던 그 죽음의 세모(△).
금방이라도 아이의 생명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진동하던 붉은 궤도가, 거짓말처럼 멈춰 서 있었다.
세모의 날카로운 세 꼭짓점이 허공으로 길게 빛줄기를 뻗어 올리더니, 좌우와 상하로 둔중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살의의 장력이 끊어지듯, 날카롭던 붉은빛이 부드럽고 차분한 백색 광배로 정화되었다.
치지직, 하는 미약한 스파크 소리와 함께 세 꼭짓점이 네 개의 단단한 직각으로 맞물렸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백색 네모(□).
그것은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 아무런 굴곡 없이 내일로 이어지는 안전한 궤도의 증표였다.
'바뀌었다.'
성공했다는 확신이 우진의 뇌리를 강타했다.
정해진 파멸의 궤도라 할지라도, 인간이 온몸을 던져 물리적인 개입을 감행한다면 강제로 비틀어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민우야! 내 새끼, 민우야!"
정신을 놓을 듯 울부짖으며 달려온 여인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우진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채듯 안아 올렸다.
아이 엄마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아이의 온몸을 더듬었고, 이내 피 묻은 우진의 재킷을 바라보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저 때문에, 우리 아이 때문에 다치셔서 어떡해요……!"
아이는 뒤늦게 밀려온 공포에 질려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다.
스크린도어 너머 멈춰 선 전동차 안에서는 승객들이 웅성거리며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경악 어린 시선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관자놀이 안쪽, 유년기 수술 흉터 부근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며 맥동하고 있었다.
눈앞이 일순 하얗게 탈색되었다가 돌아오는 시각적 왜곡 속에서도,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닙니다……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채 3초를 넘기지 못했다.
징, 하는 불길한 저주파 진동음이 우진의 귓바퀴를 긁고 지나갔다.
그것은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시신경과 뇌간을 직접 쥐어짜는 듯한 기괴한 공명이자, 허공의 질서가 산산이 부서져 나갈 때 발생하는 인과율의 파열음이었다.
우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이의 머리 위에서 승강장 전체로 뻗어 나갔다.
"……어?"
우진의 입술 사이로 경악에 찬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이를 구출한 3-2번 스크린도어 일대를 중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의 잔물결이 거대한 동심원을 그리며 승강장 공기를 뒤흔들고 있었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거대한 바위를 던져 넣었을 때처럼, 소멸하지 못한 궤도의 충격파가 허공으로 맹렬하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충격파는 승강장에 우두커니 서 있던 주변 사람들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쩌적, 쩌저적.
평화롭게 부유하던 수십 개의 백색 네모(□)들이 동시에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의 네모 모서리에 가느다란 실금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저만치 떨어진 여대생의 백색 네모 역시 표면에 거미줄 같은 파열을 일으키며 빛을 잃고 탁하게 흐려졌다.
소멸했어야 마땅한 붉은 세모의 파멸적 에너지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진이 아이를 밀쳐내고 궤도를 수정한 그 지점에서 갈 곳을 잃은 채, 인접한 시공간의 타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전이되고 있었다.
2. 전이된 파멸
청년이 떨어뜨린 스마트폰 액정의 파편 위로 승강장의 차가운 밤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릴 때 어깨를 세게 부딪치며 뒤로 밀려났던 20대 청년의 정수리였다.
청년은 바닥에 떨어뜨린 스마트폰을 주우려 쪼그려 앉은 채,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이고 있었다.
"헉...... 커흑!"
청년의 입에서 마른 구역질과 함께 찢어지는 듯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의 눈동자가 그 청년의 머리 위로 향했다.
그리고 우진은 숨을 쉬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청년의 머리 위에 정갈하게 떠 있던 백색 네모(□)의 한가운데로, 검은 먹물이 튀듯 불길한 균열이 파고들고 있었다.
콰직!
귓전을 때리는 환청과 함께 백색 네모가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났다.
깨져 나간 백색 파편들은 허공으로 증발하는 대신, 청년의 정수리 부근에서 맹렬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뭉쳐들었다.
직각의 선들이 잔혹하게 꺾여 나갔다.
안정과 균형을 상징하던 네 면이 파괴되더니, 피처럼 붉고 칠흑처럼 어두운, 기괴한 '검붉은 세모(△)'로 흉측하게 재조립되었다.
그것은 우진이 지하철에서 보았던 최 본부장의 단순한 붉은 세모와 달랐다.
박민재 팀장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절대적인 외압의 상징, 그 칠흑 같은 검은색이 핏빛과 기괴하게 뒤섞인 형태였다.
위잉, 위잉, 위잉.
검붉은 세모는 공기를 찢는 고주파음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모의 꼭짓점 세 개에서는 검붉은 피고름 같은 빛줄기가 흘러나와 청년의 관자놀이와 어깨를 옭아맸다.
"아, 아아악……! 가슴이, 숨이 안 쉬어져……!"
청년은 시멘트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데굴데굴 굴렀다.
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은 극심한 산소 결핍과 쇼크로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우진은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다잡으며 청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정신 차려요!"
우진의 떨리는 손이 청년의 어깨에 닿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바닥에 뒹굴던 청년의 스마트폰 화면이 요란한 진동과 함께 번쩍 켜졌다.
징- 징- 징-.
화면에는 '엄마'라는 두 글자가 굵게 박혀 깜빡이고 있었다.
청년은 경련하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헤집어 스마트폰을 낚아챘다.
떨리는 엄지로 통화 버튼을 밀어내자, 스피커폰이라도 켠 듯 찢어질 듯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승강장 바닥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민수야! 민수야아아악! 어떡하니, 어떡해!]
숨을 헐떡이던 청년 민수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엄, 엄마……? 왜, 왜 그래…… 컥, 가슴이 너무 아파서……"
[네 아빠가......
네 아빠 공장에서 기계가......!
크레인 와이어가 끊어져서 아빠가 그 밑에 깔렸대!
으아아앙!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는데 숨이 안 붙어 있단다!
민수야, 제발 빨리 와라!
아빠 얼굴 못 보고 보내게 생겼어!]
뚝.
전화는 거짓말처럼 끊어졌다.
승강장의 거센 소음 속에서도, 통화기 너머로 터져 나온 날것의 비극은 주변의 공기를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 아빠......?"
민수는 휴대폰을 쥔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헐떡이던 숨소리가 턱 하니 멎고, 청년의 눈동자에서 일체의 초점이 증발해 버렸다.
조금 전까지 취업 준비 서류를 뒤적이며 평범한 퇴근길 전동차를 기다리던 무고한 한 청년의 세계가, 단 1분 만에 지옥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아빠가...... 왜......? 왜 하필 지금......?"
민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던 그는 쥐어짜는 듯한 절규를 토해내며 계단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아아아!"
청년이 질주하는 등 뒤로, 머리 위에 떠오른 검붉은 세모가 맹렬한 궤적을 그리며 핏빛 잔상을 흩뿌렸다.
허공에는 꼭두각시 줄 같은 검은 실선들이 매달려 요동치고 있었다.
우진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박힌 채, 멀어져 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사고의 시각.
아이의 추락을 물리적으로 저지한 바로 그 찰나, 청년의 부친이 일하던 공장의 크레인 와이어가 끊어졌다.
우진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 조각들이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맞물렸다.
'내가 바꾼 게 아니었어.'
구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궤도의 파멸을 없앤 것이 아니라, 억지로 튕겨내어 바로 곁에 있던 다른 생명에게 전가한 것에 불과했다.
전체 시스템이 요구하는 '파멸의 총량'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존되고 있었다.
한 아이를 살려낸 대가로, 아무런 죄도 없는 다른 가정의 아버지가 기계 밑에 깔려 죽어가는 비극이 결제된 것이다.
극심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진은 입을 틀어막은 채 승강장 기둥에 이마를 찧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살점을 태우듯 뜨겁게 박동하고 있었다.
3. 인과율의 보존 법칙
테헤란로의 차가운 밤공기도 우진의 가슴속에 들어찬 잿빛 한기를 걷어내지 못했다.
강남역을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내, 우진의 시야는 온통 기괴한 선과 도형들의 잔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수백 개의 백색 네모(□)들이 이제는 더 이상 평온한 일상의 상징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든 외부의 충격 한 번에 깨져 나가 붉은 피를 토해낼 수 있는, 유리알처럼 위태로운 허상에 불과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직한 어둠이 우진을 맞이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신발을 벗어 던진 우진은 거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릎에서 번진 피가 바지 안감에 들러붙어 쓰라렸지만, 그런 육체적 고통 따위는 뇌리를 난타하는 죄책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쇄 법칙(Ripple Effect).'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외투 안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자 삭막한 단칸방의 풍경이 드러났다.
책상 위에는 박민재 팀장 사건 때부터 정리해 둔 기록들이 빼곡했다.
우진은 수첩의 새로운 페이지를 거칠게 펼쳤다.
펜촉이 종이를 찢을 듯 짓누르며 활자를 토해냈다.
[규칙 4. 능동적 궤도 수정의 한계와 인과율 전이]
- 물리적 직접 개입을 통해 타인의 세모(△)를 네모(□)로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 그러나 본래 그 대상에게 집행되었어야 할 '파멸적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는다.
- 방출된 잉여 파동은 시공간적으로 가장 인접한 관찰 대상에게 전이된다.
- 인접 대상의 백색 네모(□)에 미세 균열을 유발하며, 최악의 경우 도형을 완전히 파괴하고 검붉은 세모(△)로 뒤틀어 새로운 파멸적 사건을 촉발한다.
- 결론: 시스템은 전체의 파멸 총량을 유지하려 한다.
국소적 구원은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펜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진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젖혔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만약 자신이 그 아이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청년의 아버지는 지금도 무사히 퇴근길에 오르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목숨을 건진 손이, 동시에 다른 누군가의 목을 조른 꼴이었다.
'이 능력이 대체 뭐길래.'
우진은 책상 구석,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서류 봉투로 시선을 돌렸다.
15년 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증발해 버린 아버지 강정호(姜正浩).
시스템 공학자이자 전산 통계학의 권위자였던 아버지가 실종되기 직전, 우진에게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우진은 서류 봉투 안에서 빛바랜 노트를 꺼내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모서리가 닳고 헤진 하드커버 노트.
첫 장을 넘기자, 아버지의 거칠고 날카로운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확률로 움직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인간의 모든 동선과 수명을 거대한 격자망 안에 가두고 궤도를 통제하고 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정신적 착란에 빠진 과학자의 헛소리라고 치부했던 문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살을 파고드는 진실이 되어 우진의 망막을 불태우고 있었다.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노트의 뒷장을 넘겼다.
복잡한 다이어그램과 양자역학, 위상수학 기호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페이지가 나타났다.
그 한가운데에 굵은 만년필로 네모, 세모, 그리고 동그라미의 모식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적힌 아버지의 메모.
[항상성 네트워크(Homeostasis Network): 단일 노드의 상태 변화는 격자망 전체의 잠재 에너지를 왜곡시킨다.
궤도의 강제 이탈은 인접 노드로의 에너지 방출을 유발하며, 시스템은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리 집행을 감행한다.]
[임의의 구원은 고립계 내부의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없다.
한 노드의 복원은 반드시 다른 노드의 붕괴로 상쇄된다.]
우진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거야."
아버지는 15년 전에 이미 이 끔찍한 인과율의 메커니즘을 이론적으로 규명해 두고 있었다.
왜 아버지가 그토록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는지, 왜 어린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어루만지며 피눈물을 흘렸는지, 어렴풋이 퍼즐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실종된 것은 단순한 가출이나 사고가 아니었다.
이 궤도 통제 시스템의 법칙을 깨닫고, 그 질서에 균열을 내려다 배후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거나, 시스템 너머로 격리당한 것이 분명했다.
우진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타인에게 튈 불똥이 두려워 방관해야만 하는가?
검은 세모의 꼭두각시 줄에 매달려 정해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인간들을 그저 백색 네모의 방관자로 지켜보아야 하는가?
4. 편의점의 그림자
띠링.
적막을 깨고 책상 위의 스마트폰이 짧은 알림음을 울렸다.
화면에 뜬 것은 메신저 알림이었다.
[발신: 동네 편의점 김 사장님]
[강 대리,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아직 안 자지?]
우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화면을 터치했다.
김 씨는 우진이 사는 다세대 주택 골목 어귀에서 7년째 편의점을 운영해 온 50대 초반의 점주였다.
퇴근길 늦은 밤, 야근에 지친 우진에게 유통기한이 임박한 삼각김밥이나 따뜻한 두유를 덤으로 건네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소박한 이웃이었다.
몇 달 전부터 편의점 매출이 급감하고 본사와의 위약금 문제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는 푸념을 들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장문의 메시지와 함께 사진 파일 서너 장이 연달아 도착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지인 소개로 기가 막힌 투자 건을 하나 받았거든.
강 대리가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니까 이런 서류는 눈에 훤할 것 같아서 염치 불고하고 좀 봐달라고 보냈네.]
[원금 보장에 월 수익률이 8퍼센트라는데, 요즘 편의점 정리하고 이쪽으로 갈아탈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야.
계약서 검토 좀 해줄 수 있나?
내일 오전에 바로 도장을 찍어야 해서 말이지.]
첨부된 이미지 파일을 열어본 우진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원금 보장에 월 8퍼센트?'
상업 금융과 물류 기획을 6년 동안 다뤄온 우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숫자였다.
연리도 아닌 월리가 8퍼센트라면, 그것은 100퍼센트 폰지 사기이거나 사채 조직의 덫이었다.
사진 속 서류의 첫 페이지 상단에 박힌 로고를 확인하는 순간, 우진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주)큐브 네트웍스 자산관리 컨설팅 계약서]
큐브 네트웍스(Cube Networks).
정교하게 디자인된 푸른색 육면체 로고 아래에 적힌 문구들이 지극히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본질은 명확했다.
담보 설정 조항, 손실 보전 면책 특약, 그리고 하단에 적힌 강제 집행 인낙 조항까지.
이것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계약서가 아니었다.
계약자의 모든 유동 자산과 부동산을 합법적인 외피를 쓰고 일거에 집어삼키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도살용 계약서'였다.
'김 사장님이 전 재산을 털어 넣으려는 거야.'
우진의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단순한 우연인가?
회사에서는 박민재 팀장이 외부 세력의 조작에 의해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했고,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아이의 죽음과 청년의 파멸이 인과율의 거미줄로 얽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매일 마주치는 가장 가까운 일상의 이웃에게, 합법의 탈을 쓴 거대 배후의 덫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네모 프로젝트.'
아버지가 경고했던 그 시스템의 하수인들이,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을 파멸의 궤도로 강제 밀어 넣고 있는 현장이었다.
우진은 침대 맡에 걸쳐 두었던 재킷을 거칠게 낚아챘다.
찢겨 나간 팔꿈치와 무릎의 통증이 다시금 욱신거렸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문자를 보낸 시간은 불과 5분 전.
김 씨는 지금도 골목 어귀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 저 독이 든 사과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터였다.
5.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줄
심야의 골목길은 스산한 적막에 잠겨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아스팔트 바닥 위로 우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밤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늘한 긴장감이 차올랐다.
백색 네모의 일상을 지키는 것과, 파멸을 예고하는 세모의 궤도를 부수는 것.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대가가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눈앞에 닥친 파멸을 보고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자, 환하게 불을 밝힌 24시간 편의점의 유리창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통유리 너머로 카운터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쓴 채 서류 뭉치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 김 씨의 모습이 보였다.
우진은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려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충격과 함께 관자놀이의 흉터가 맹렬한 열기를 뿜어냈다.
김 씨의 정수리 위.
그곳에 떠 있는 것은 매일 보아오던 평범한 백색 네모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주변의 형광등 불빛마저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심연의 색.
거대한 '검은 세모(△)'가 서서히 회전하며 서늘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세모의 상단 꼭짓점으로부터, 가느다란 검은 실선 잔상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편의점 천장을 뚫고, 서울 상공의 짙은 어둠 너머, 도시를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배후 시스템을 향해 까마득하게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꼭두각시의 줄.
박민재 팀장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바로 그 잔혹한 조작의 궤도였다.
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당겼다.
딸랑.
맑은 도어 벨 소리가 고요한 편의점 안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