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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8화

마스터 암호 키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불타는 섬과 바다의 침묵

 

철제 선체가 거친 파도를 짓이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묵직한 디젤 엔진의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의 뼈마디로 전해졌다.

 

등 뒤로 아득히 멀어지는 소월도의 상공은 칠흑 같은 밤안개를 뚫고 타오르는 붉은 화염으로 물들어 있었다.

 

군용 공격 헬기 세 대가 섬의 폐등대와 암반 절벽을 향해 쏟아부은 2.75인치 로켓탄과 기관포의 잔열이 바다 안개 위로 기괴한 핏빛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코드 엑스터미네이션……."

 

강우진은 갑판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소금기 밴 차가운 밤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혔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자리한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여전히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후벼 파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것은 방화벽 백신 코어가 시스템의 위성 백도어를 소각하며 받아낸 맹렬한 과부하의 여진이었다.

 

요새 전체를 증발시켜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배후 세력, 네모 프로젝트 상임이사회의 잔혹한 숙청 방식이었다.

 

자신들의 하수인인 도진우 수석 감사관과 청소 기동대원들마저 한 줌의 재로 덮어버린 채, 세상의 진실을 철저히 매몰하려는 기계적 광기였다.

 

바다 위로 흩어지는 포격의 굉음은 점차 잦아들었으나, 그 침묵이 몰고 올 다음 폭풍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선장님, 침로는 그대로 유지해 주십시오."

 

한서연이 조타실 문을 열고 나오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얼굴과 카키색 야상 점퍼는 검은 그을음과 바닷물에 젖어 얼룩덜룩했다.

 

하지만 한 손에 쥐고 있는 소형 디지털 캠코더와 위성 외장 하드만큼은 방수 팩 속에 온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소월도 지하 4층 관제실에서 벌어진 인프라 테러 공작의 전모, 팔당댐 수문 개방과 원자력 발전소 냉각 마비 시도의 증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엔진 회전수를 최대로 올렸네. 이 낡은 해성호가 버텨줄지 모르겠지만, 군용 스캔이 닿지 않는 저수심 암초 수로를 타고 인천 쪽으로 최대한 붙을 테니 걱정들 말게."

 

조타실 창문 너머로 늙은 선장이 타륜을 꽉 쥔 채 쉰 목소리로 답했다.

 

선장의 머리 위에는 과거 그를 옥죄던 검은 꼭두각시 줄과 위태로운 파멸의 세모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우진이 던진 구원의 손길이 인위적인 인과율의 족쇄를 끊어낸 결과였다.

 

우진은 서연의 젖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 맑고 투명했던 일상의 백색 네모 주변으로 여전히 차가운 서리 형태의 미세한 노이즈가 옅게 맴돌고 있었다.

 

'아웃라이어의 저주.'

 

궤도 통제 시스템의 모든 계산식을 거부하고 정수리 위의 도형마저 완전히 소멸한 우진 자신.

 

그 무형(無形)의 결함체이자 버그와 닿은 주변 사람들에게 세계가 가하는 은밀한 배척과 인과율의 균열.

 

우진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갑판 한구석, 녹슨 드럼통 옆에 놓인 접이식 휠체어였다.

 

2. 아버지의 손과 굳은살

 

두 다리가 비틀려 굳어버린 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내.

 

15년이라는 잔혹한 세월 동안 지하 7층과 해상 요새의 액체 챔버에 갇혀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를 지탱하는 생체 연산 핵으로 갈려 나갔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칼 사이로 앙상하게 드러난 목덜미에는 굵은 케이블이 박혀 있던 원형 생체 소켓이 검붉은 흉터로 짓무르고 있었다.

 

강정호는 바다를 바라보며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폐 깊은 곳에서 긁혀 나오는 쇳소리가 밤바다의 파도 소리에 섞였다.

 

우진은 묵묵히 다가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아버지의 굽은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바람이 찹니다, 아버지."

 

강정호의 메마른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4센티미터의 붉은 흉터를 바라보는 노학자의 눈동자에 걷잡을 수 없는 회한과 눈물이 차올랐다.

 

"우진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강정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아들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힌 굳은살과 흉터가 거칠게 살갗을 스쳤다.

 

15년 전, 일곱 살에 머물러 있던 어린 아들의 온기 대신 이제는 세파와 싸우며 차갑게 벼려진 청년의 단단한 턱선이 손끝에 닿았다.

 

"내가…… 내가 네 머리를 갈랐다. 네 머릿속에 박혀 있던 그 흉측한 통제 칩을 뽑아내기 위해, 의사도 아닌 이 손으로 메스를 쥐고 네 관자놀이를 찢었어. 아이의 자지러지는 비명을 들으면서도, 궤도 신경을 칼로 잘라내며 백신 코드를 쑤셔 넣었다. 그 대가로 네 머릿속에서 나와 네 엄마의 웃는 얼굴까지 전부 하얗게 태워버렸지. 내가 네 인생을 송두리째 도려낸 거다."

 

노인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깊게 파인 주름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15년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을 아비의 형벌이자 씻을 수 없는 죄의 무게였다.

 

우진은 아버지의 거친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온기가 전해졌다.

 

공감각적 착란으로 타인의 머리 위에 뜬 기하학체들을 보아오며 홀로 질식할 것 같았던 10년의 세월.

 

기억이 지워진 텅 빈 머릿속을 끌어안고 영문 모를 두통에 시달리며 버텨왔던 날들.

 

그 모든 고통의 시작이 아버지의 칼끝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월도 지하 5층에서 아버지의 신경망과 접속했을 때 보았던 그날의 기억,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오열하며 메스를 쥐었던 한 남자의 찢어지는 심장을 우진은 생생히 느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아버지가 그 신경을 잘라내지 않았다면, 저는 서지훈이나 도진우처럼 머리 위에 검은 큐브를 얹고 남의 목숨을 궤도라는 이름으로 도륙하는 괴물이 되었을 겁니다. 기억은 지워졌지만, 아버지가 남겨준 백신 덕분에 저는 제 의지로 걸어왔습니다. 누군가의 각본이 아니라, 내 두 발로요."

 

강정호는 숨을 들이켜며 흐느꼈다.

 

아들의 단단한 눈빛 속에서, 그는 자신이 15년 동안 지옥 속에서 견뎌온 이유를 확인하고 있었다.

 

3. 15년의 산물, 마스터 암호 칩

 

강정호는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환자복 안쪽, 살갗과 붕대 틈새 깊숙한 곳을 한참 동안 더듬던 그의 손가락 끝에 얇고 딱딱한 감촉이 걸렸다.

 

그가 꺼내어 우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것은 가로세로 1센티미터 남짓한 초소형 반도체 칩이었다.

 

일반적인 실리콘 기판이 아니었다.

 

빛을 흡수하지 않고 푸르스름한 은빛 파동을 희미하게 머금고 있는 투명한 단결정 사파이어 기판.

 

그 중심에는 머리카락 수천 분의 일 굵기로 식각된 복잡한 나노 3차원 격자 회로가 내장되어 있었다.

 

기판 표면에는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레이저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PROJECT NEMO : ROOT DELETION / MASTER CIPHER]

 

우진은 숨을 죽이고 칩을 응시했다.

 

손바닥 위에 닿은 칩의 차가운 금속 감촉을 통해, 우진의 신경계에 잠들어 있던 방화벽 백신 코어가 미세하게 공명하며 찌릿한 전류를 뿜어냈다.

 

"이것이…… 뭡니까, 아버지?"

 

강정호가 거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네모 프로젝트의 모든 통제 격자망을 영구 무력화할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 암호 키(Master Cipher Key)'다."

 

"마스터 암호 키……."

 

"그래. 15년 전, 서지훈과 상임이사회가 내 연구를 강탈해 도시 전체를 사각 격자로 가두려 했을 때부터 준비했던 거다. 그들이 나를 역삼역 지하 7층 챔버에 가두고 내 뇌수를 도시의 연산 핵으로 빨아먹는 동안, 나는 그 거대한 시스템의 신경망 한구석에 매일 밤 수식 하나, 알고리즘 한 조각씩을 몰래 깎아 넣었다. 그놈들이 인간의 운명을 재단하는 동안, 나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역위상(Reverse Phase)을 이 작은 크리스털 안에 새겨 넣은 게야."

 

노인의 눈빛에 형형한 광채가 어렸다.

 

15년간의 생체 실험과 고문 속에서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은 천재 과학자의 집념이 그 작은 칩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서연 역시 숨을 죽인 채 다가와 칩을 바라보았다.

 

"이 칩을 사용하면, 역삼역이나 소월도 같은 개별 거점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다, 서연 양."

 

강정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월도의 플랜 B 서버를 태웠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야. 역삼역의 중앙 코어 역시 지엽적인 단말에 불과했지. 이 거대한 재앙의 진짜 발원지…… 상임이사회 늙은이들이 똬리를 틀고 전 세계의 금융과 문명 궤도를 주무르는 심장부,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암반층의 '오리진 코어(ORIGIN CORE : SECTOR-OMEGA)'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오리진 코어의 메인 콘솔에 이 칩을 삽입하고 백신을 구동해야만, 대한민국 상공과 대지 전체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통제 격자가 근원부터 소각된다."

 

4. 거대한 대가와 독소 조항

 

하지만 설명을 이어가는 강정호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오히려 칩을 넘겨주는 그의 손끝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진은 그 주저함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무언가 숨기시는 게 있군요. 이 마스터 암호 키를 기동하는 데 또 다른 대가가 따르는 겁니까?"

 

소월도 요새를 빠져나오기 직전, 아버지는 우진이 시스템을 파괴할 유일한 '살아있는 백신 키'이며 자신의 뇌파를 오리진 코어에 직접 100퍼센트 동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우진의 뇌신경계 전체가 타버릴 수 있는 자살적인 위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눈빛에 담긴 것은 아들의 목숨에 대한 걱정을 넘어선, 무언가 근원적인 파멸에 대한 공포였다.

 

강정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우진뿐만 아니라 곁에서 듣고 있던 서연의 숨통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마스터 암호 키가 오리진 코어의 루트 커널에 진입하는 순간, 시스템의 모든 사각 격자 연산식은 역위상 펄스에 의해 강제 붕괴된다. 그것은 시스템의 해방을 의미하지. 하지만 우진아, 이 칩에는 절대로 우회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연쇄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연쇄 조항이라니요?"

 

우진이 칩을 쥔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강정호가 휠체어 등받이에 힘없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네모 프로젝트는 단순한 컴퓨터 전산망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인간의 뇌파, 생체 전기, 그리고 공간의 엔트로피를 물리적으로 묶어낸 거대한 공명 회로야. 너나 채린 양, 그리고 민우와 서진이 같은 피실험자 아이들이 도형을 보고 척력을 쓸 수 있었던 근원이 무엇이겠느냐?"

 

정적이 흘렀다.

 

우진의 뇌리 속으로 지난 수십 일간 겪었던 수많은 기현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타인의 머리 위에 떠오르던 네모, 세모, 동그라미.

 

미래의 경로를 0.3초 앞서 읽어내던 '변화 감지'.

 

시간 축을 역행해 상처와 기억을 더듬던 4단계 '과거 추적'.

 

그리고 허공에서 탄환을 멈춰 세우던 무형의 특이점 척력까지.

 

"……방금 전 깨달았습니다. 제 시각화 능력이란 건 초월적인 마법 따위가 아니라, 유년기 수술로 궤도가 끊겨 나간 뇌간과 시신경이 시스템의 통제 격자 압력을 억지로 해석하려 들며 토해낸 공감각적 감각 장애였다는 것을요."

 

"맞다.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구나."

 

강정호가 슬픈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희가 지닌 모든 특이 이능은, 시스템이 세상에 쳐놓은 고밀도 인과율 격자망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형적인 파생물이다. 마스터 암호 키가 오리진 코어를 소각하고 격자망을 영구히 해체한다는 것은…… 그 격자와 연결되어 특수 주파수를 수신하던 인간들의 신경 회로 역시 송두리째 리셋된다는 것을 의미해."

 

말의 무게가 서서히 선실 갑판을 짓눌렀다.

 

"즉, 이 암호 키가 작동하는 그 순간…… 시스템에 연결되어 능력을 각성했던 세상의 모든 능력자들, 이레귤러들의 힘은 영구히 소멸한다."

 

5. 평범해진다는 것의 공포

 

"능력이…… 영구히 사라진다고요?"

 

서연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채린 씨의 은빛 동그라미도, 우진 씨가 보는 그 모든 시각화 능력과 척력도…… 전부 다 없어진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예외는 없어."

 

강정호의 단호한 확언이 비수처럼 꽂혔다.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도, 우진이 너의 변화 감지와 과거 추적도, 그 어떤 기적도 남지 않는다. 시스템이 사라진다는 것은 너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던 그 뒤틀린 감각의 통로가 완전히 닫히고, 너희 모두가 아무런 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인간으로 영구히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얼핏 들으면 그것은 저주받은 운명으로부터의 해방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타인의 파멸을 지켜보며 관자놀이가 쪼개지는 두통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매 순간 인과율의 칼날 위를 걷지 않아도 되는 평온한 삶.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오리진 코어는 네모 프로젝트의 심장부였다.

 

그곳에는 상임이사회가 수십 년간 육성해 온 최상위 중앙 집행관들과 정예 병력,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시스템 방어 기제들이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그 사지로 걸어 들어가 마스터 암호 키를 꽂는 순간, 우진은 자신의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던 '무형의 특이점 척력'과 '변화 감지'를 영구히 잃게 된다.

 

한 번 발동되면 되돌릴 수 없는 영구 소멸.

 

만약 시스템을 해체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단 한 발의 총탄이라도 날아온다면, 능력을 잃고 평범한 살덩어리로 돌아간 우진은 그 총탄을 막아낼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파주 은신처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윤채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스템의 격자를 밀어내며 생존을 지탱해 오던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이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몸에 남겨진 생체 나노 전극의 후유증이 어떻게 발작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진아."

 

강정호가 굳은 얼굴로 아들의 손을 꽉 쥐었다.

 

"오리진 코어가 무너지며 능력자들의 힘이 증발할 때, 뇌신경계에 가해질 역위상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할 게다. 시스템과의 링크가 강제로 단절되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뇌세포가 타버려 영구적인 기억 상실이나 혼수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어. 이 암호 키는 세상을 구하는 열쇠이지만, 동시에 너 자신과 동료들의 존재 기반을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양날의 검이다."

 

선실 갑판 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장의 조타실에서 흘러나오는 낡은 나침반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서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진이 지난 40여 일 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를 깎아내며 싸워왔는지 곁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고, 망막이 하얗게 지워지는 백색 암전의 공포 속에서도 그 능력이 있었기에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힘을 스스로 불태워 없애야만 이 지옥 같은 연쇄가 끝난다니.

 

"우진 씨……."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6. 손바닥 위의 결단

 

우진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푸르스름한 은빛을 머금은 사파이어 크리스털 칩.

 

그 작은 사각형 조각 안에 담긴 것은, 아버지가 15년 동안 어둠 속에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참회의 기록이자 수천만 명의 인생을 사각의 궤도에서 해방할 단 하나의 열쇠였다.

 

그는 손가락을 천천히 쥐었다.

 

단단하고 모난 모서리가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며 선명한 통증을 일으켰다.

 

그 통증이 우진의 흐려지려던 정신을 차갑게 깨웠다.

 

'능력의 소멸.'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타인의 머리 위를 보지 못하게 되고, 날아오는 흉탄의 궤적을 읽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마치 어두운 심연 속에 발가벗겨진 채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원초적인 공포였다.

 

하지만 우진은 기억하고 있었다.

 

강남역 승강장에서 자신의 발아래로 굴러떨어지던 아이의 겁에 질린 눈망울을.

 

영문도 모른 채 채용 비리의 희생양이 되어 절망하던 취업 준비생의 구부정한 등을.

 

그리고 1998년의 비극 속에서 영혼을 난도질당한 채 세상을 거대한 네모 상자로 만들려 했던 서지훈의 공허한 눈빛을.

 

그 모든 비극의 출발점은 바로 '통제'였다.

 

누군가가 타인의 삶을 완벽하게 계산하고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

 

그 오만이 빚어낸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정해진 도형의 궤적을 걷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설령 그 대가로 초월적인 시각과 척력을 영구히 잃어버린다 해도.

 

다시 지하철 2호선의 빽빽한 인파 속에서 발을 디디며 내일의 끼니와 월세를 걱정하는 보잘것없는 직장인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 평범함이야말로 인간이 되찾아야 할 가장 위대하고 존엄한 권리였다.

 

우진의 입꼬리에 희미한, 그러나 서늘할 정도로 단단한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

 

우진이 입을 열었다.

 

강정호가 숨을 멈추고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는 처음부터 이 능력을 원해서 얻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신경을 찢었을 때 생겨난 상처의 흉터였고, 시스템이 만들어낸 끔찍한 부산물이었을 뿐입니다."

 

우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를 짚었다.

 

화끈거리던 흉터의 열기가 기묘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능력이 사라진다고 해서 두렵지 않습니다. 남들의 머리 위에 뜬 도형 따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채로, 불안해하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삶 아닙니까?"

 

강정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15년 전 자신이 연구소의 콘솔 앞에서 잊어버렸던, 과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두었던 인간의 본질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노학자의 입술 사이로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괴물이 되어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또 다른 무기를 만드는 동안…… 너는 이미 그 기하학의 굴레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구나."

 

강정호는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

 

부자간의 시선이 밤바다의 차가운 어둠 속에서 하나로 얽혔다.

 

그것은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 설계자와 피실험자의 관계가 아니었다.

 

세상의 뒤틀린 운명에 맞서 함께 마침표를 찍으러 가는 두 영혼의 온전한 연대였다.

 

7. 안개를 뚫고 울린 단파 신호

 

치이익- 치익-.

 

그때, 서연의 카키색 야상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구형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정전기 잡음이 터져 나왔다.

 

아날로그 조난 주파수, 144.820MHz였다.

 

"서연 선배! 우진이 형! 들립니까?!"

 

무전기 스피커를 찢을 듯한 다급한 목소리.

 

파주 거점 7번 아날로그 은신처에 남아 있던 송민규의 목소리였다.

 

주변에 빗발치는 총성과 둔탁한 타격음, 쇠붙이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무전 너머로 고스란히 섞여 들어왔다.

 

서연이 사색이 되어 무전기를 낚아채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민규 씨! 우리 탈출했어요! 소월도에서 빠져나와 지금 인천 해역으로 이동 중이에요!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소리는 대체 뭐죠?!"

 

치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송민규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기동대입니다!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 놈들이…… 파주 폐공장 지하 벙커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한민우 부소장님이 EMP 지뢰로 입구를 틀어막고 계시지만 10분을 버티기 힘들어요! 놈들이…… 놈들이 최후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최후의 카드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진이 서연의 손에서 무전기를 넘겨받으며 차갑게 다그쳤다.

 

무전기 너머에서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민규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상임이사회가…… 테헤란로 본사 빌딩에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지하 4층 잔해에서 회수해 갔던 피실험자들…… Subject-05 한지혜와 Subject-06 박태호의 뇌간에 3세대 나노 전극을 강제 오버클럭해서…… 오리진 코어 최종 방어선에 투입했습니다! 형, 그 아이들은 이미 자아가 완전히 거세된 인간 폭탄이에요! 접근하는 순간 코어의 인과율과 함께 자폭하도록 세팅되어 있다고요!"

 

쿵-!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단파 통신이 날카로운 하울링을 일으키며 끊어졌다.

 

"민규야! 송민규!"

 

우진이 무전기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마른 치익거리는 백색 소음뿐이었다.

 

파주 은신처마저 함락 위기에 처했다.

 

거기에 더해, 15년 전 자신과 함께 연구소의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울부짖었던 어린 동포들.

 

지혜와 태호.

 

그 아이들이 상임이사회 늙은이들의 손에 의해 최후의 인간 방패이자 자폭 병기로 오리진 코어에 배치되었다.

 

"이 개새끼들이……."

 

우진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그는 손바닥 안에 쥐고 있던 마스터 암호 키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망설일 시간은 단 1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조타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선장을 향해 외쳤다.

 

"선장님! 인천까지 얼마나 남았습니까?!"

 

조타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선장이 땀투성이가 된 얼굴을 내밀었다.

 

"전속력으로 밟아도 40분은 족히 걸려! 하지만 연안부두에 해경과 경찰 병력이 쫙 깔렸다는 무선이 잡히고 있네! 정상적인 접안은 불가능해!"

 

"상관없습니다."

 

우진의 눈빛이 푸른 섬광처럼 번뜩였다.

 

머리 위의 도형이 사라진 아웃라이어의 눈동자에, 타인의 통제를 부숴버릴 절대적인 척력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접안 시설 따위 필요 없습니다. 배를 그대로 부두 옹벽에 처박으십시오. 우리는 곧바로 테헤란로로 갑니다."

 

선장은 잠시 넋을 잃고 우진의 서늘한 기세를 바라보다가, 이내 거칠게 침을 뱉으며 타륜을 꺾었다.

 

"좋아, 빌어먹을! 갈 때까지 가보자고!"

 

해성호의 디젤 엔진이 흑연을 토해내며 서해의 검은 파도를 찢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마천루들이 밀집한 도시, 서울의 불빛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깊이 100미터의 차가운 암반 속에 도사린 괴물의 심장.

 

오리진 코어를 향한 최후의 진격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