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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5화

용서받지 못할 자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멈추지 않는 초침

 

지하 5층의 공기는 쇳물과 냉각액이 뒤섞인 비릿한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원자로 차폐벽 표면을 따라 핏줄처럼 뻗은 광케이블들이 붉은 박동을 토해내며 바르르 떨렸다.

 

방폭 격벽 위쪽에 매설된 비상 표시등이 섬뜩한 주홍빛을 뿜어내며 벽면 전체를 물들였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을 흉내 낸 기계음이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뼈마디까지 울렸다.

 

강우진의 시야 한구석에서 붉은색 시스템 로그가 맹렬한 속도로 갱신되고 있었다.

 

[ALERT: SATELLITE BACKDOOR ACTIVATED]

 

[COUNTDOWN TO INFRASTRUCTURE COLLAPSE: 14분 48초]

 

1초, 또 1초.

 

숫자가 허공에서 부서져 내릴 때마다 테헤란로 상공을 휘감았던 그물망의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도진우의 다포체 큐브를 산산조각 내며 관제실을 마비시켰지만, 본사의 괴물들은 멈추지 않았다.

 

현장의 목줄이 끊기자마자 대기권 밖의 군용 위성망을 통해 소월도의 원자로로 직접 파멸의 패킷을 꽂아 넣은 것이다.

 

15분도 남지 않았다.

 

팔당댐의 수문이 강제로 열리고, 수도권 전력망의 변전 설비가 연쇄 과부하로 불타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도시의 숨통을 죄는 밧줄이 바짝 당겨지고 있었다.

 

우진은 바닥에 뒹구는 탄피와 전자기 파편을 짓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원통형 원자로 차폐실 정중앙, 냉각수 증기가 희뿌옇게 피어오르는 둔덕 위에 낡은 휠체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수많은 바이오 튜브와 직렬 전선이 휠체어 뒤편 콘솔로 흉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내.

 

깡마른 뺨, 잿빛으로 세어버린 머리칼, 그리고 앙상한 손가락.

 

강정호였다.

 

15년 전, 테헤란로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아들의 손을 놓고 홀연히 불길 속으로 사라졌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우진의 발걸음이 굳어졌다.

 

시신경을 찌르던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흉터가 불에 달군 바늘처럼 요동치며 맥박을 쳤다.

 

머리 위의 하늘.

 

아니, 찌그러진 천장 아래 사내의 정수리를 향해 우진의 시선이 박혔다.

 

어떠한 도형도 없었다.

 

순응을 뜻하는 백색 네모도, 외부의 조작과 파멸을 상징하는 검은 세모도, 자유의지의 은빛 동그라미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무(無).

 

모든 기하학적 형태가 탈색되어 지워진 순수한 공백이었다.

 

시스템의 수학적 계산식을 비웃듯 튕겨 나간 자신과 똑같은 '무형(無形)'의 상태였다.

 

궤도 방정식의 창시자이자, 스스로 그 궤도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식이었다.

 

2. 피와 눈물의 참회

 

"……우진이냐."

 

갈라지고 쉰 음성이 정적을 찢었다.

 

마치 젖은 모래를 긁어내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였다.

 

휠체어에 기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잃고 부옇게 흐려진 동공이 우진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 메마른 눈동자 가장자리로 붉은 실핏줄이 터져 나와 피눈물 같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우진은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물어야 할 질문이 수천 가지였다.

 

왜 나를 버렸느냐고, 왜 내 머릿속을 헤집어 기억을 불태우고 그 끔찍한 흉터를 남겼느냐고, 왜 15년 동안 이 축축한 지하 무덤에 틀어박혀 도시를 가축으로 만드는 괴물들의 부품 노릇을 했느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원망이 칼날이 되어 혀끝을 찔렀다.

 

하지만 휠체어에 앉은 사내의 전신을 본 순간, 준비했던 칼날 같은 말들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무릎 아래로 늘어진 바짓가랑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괴하게 꺾여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의 다리가 아니었다.

 

신경이 완전히 죽어버린 채 관절마저 부자연스럽게 뒤틀려, 휠체어 발판 위에 쇠사슬로 묶여 고정되어 있었다.

 

"우진아…… 내 아들아……."

 

강정호의 앙상한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끝이 우진의 옷자락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렸다.

 

눈물방울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낡은 환자복 위로 뚝뚝 떨어졌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왜 여기까지 온 거냐……."

 

"살아 계셨습니까."

 

우진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낮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지만, 억지로 턱관절을 조였다.

 

"어머니는 15년 동안 비가 올 때마다 사당에 가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잿더미 속에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타버린 줄 알고……!"

 

우진의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왜 여기 이러고 계십니까? 넥스트 큐브의 심장, 그 거대한 괴물의 생체 배터리로 15년을 앉아 계셨던 겁니까? 내 머리에 이 저주스러운 흉터를 새겨놓고……!"

 

강정호는 흐느꼈다.

 

어깨를 들썩이며 마른기침을 뱉어내는 노인의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용서하지 마라……."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변명이 아니었다.

 

처절하게 바닥을 기는 자기부정이었다.

 

"날 용서해서는 안 된다, 우진아.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 네 평생을 저주 속으로 밀어 넣은 건 서지훈도, 넥스트 큐브도 아니야…… 바로 이 못난 애비다."

 

3. 뒤틀린 다리와 15년의 고문

 

차폐벽 입구에서 소총을 겨눈 채 주변을 경계하던 한서연이 숨을 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강정호의 뒤틀린 다리와 척추 부근에 깊게 박힌 티타늄 볼트에 머물렀다.

 

우진의 시선 역시 그 기괴한 하반신으로 내려앉았다.

 

단순한 마비가 아니었다.

 

의학적인 질환으로 서서히 퇴화한 흔적이 아니었다.

 

"그 다리는…… 어떻게 된 겁니까."

 

우진이 짓씹듯 물었다.

 

강정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감각 없는 무릎 위에 머물렀다.

 

"서지훈…… 그자가 짓밟은 거다."

 

우진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서지훈이?"

 

"15년 전…… 연구소가 불타던 그 새벽이었다. 내가 오메가-루프를 숨기고 시스템의 연산식을 마비시키려 했을 때…… 서지훈이 집행관들을 이끌고 내 연구실로 들이닥쳤지."

 

노인의 메마른 목소리에 15년 전의 비명과 화염이 묻어났다.

 

"그놈은 내게 코어의 완전 통제권을 요구했다. 시스템의 항상성을 깨뜨리는 엔트로피 결손을 감당할 수 없으니, 시민들의 생체 칩에 직접 살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마스터 알고리즘을 넘기라고……."

 

강정호의 손이 휠체어 팔걸이를 부러뜨릴 듯 쥐어뜯었다.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떨렸다.

 

"내가 거부하자…… 그놈은 날 의자에 묶었다. 그리고 고전압 전류봉으로 내 요추를 지지고, 유압 프레스로 내 두 다리의 무릎 관절과 신경 다발을 하나씩 으스러뜨렸어."

 

지하 5층의 서늘한 공기 속으로 끔찍한 고통의 기억이 안개처럼 번졌다.

 

"비명을 지를 때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두개골을 울렸다. 서지훈은 웃고 있었어. '박사님, 인간의 우발적인 고통은 이토록 추악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질서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척수 신경을 완전히 절단해 하반신을 쓰레기처럼 만들어 놓았지."

 

"……아."

 

서연의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우진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지훈.

 

그 오만하고 차가운 얼굴 뒤에 숨겨져 있던 잔혹한 광기의 실체가 아비의 부서진 육신 위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놈은 날 죽이지 않았다. 죽일 수가 없었지. 내가 만든 궤도 연산식의 초기 커널은 오직 내 생체 뇌파로만 동기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 사지를 꺾어 휠체어에 결박한 채, 15년 동안 나를 이 차가운 기계 무덤 속에 처넣고 생체 프로세서로 쥐어짠 거다."

 

강정호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었다. 제발 뇌를 태워 없애달라고 매일 밤 절규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가 있었다."

 

노인이 젖은 눈으로 우진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네가…… 네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4. 아비의 죄, 아들의 상흔

 

우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격정이 소용돌이쳤다.

 

원망과 연민, 분노와 비통함이 한데 뒤엉켜 숨통을 틀어막았다.

 

강정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지만,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선명히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겠지. 네 일곱 살 적 기억은…… 전부 내가 메스로 도려냈으니까."

 

강정호의 뺨 위로 굵은 눈물이 쏟아졌다.

 

"연구소가 습격당하기 사흘 전이었다. 넥스트 큐브의 상임이사회가 연구소의 아이들에게 강제로 제어 칩을 심기 시작했어. K-07…… 그 빌어먹을 번호표를 네 목에 걸고, 네 머릿속에 감시관들의 꼭두각시 줄을 꽂으려 했다."

 

우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피부 아래 굳은살처럼 뭉쳐진 상흔.

 

그것이 칩을 심었던 자리가 아니라, 칩을 뜯어낸 자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흉터에 담긴 아비의 피비린내 나는 손길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마취제도 부족한 피난처 바닥에서…… 내 손으로 네 머리를 갈랐다. 네가 살려달라고, 아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내 옷자락을 쥐어뜯는데…… 난 멈출 수가 없었어."

 

강정호의 어깨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단어 하나를 뱉어낼 때마다 피를 토하는 듯한 고통이 묻어났다.

 

"그 칩을 뽑아내지 않으면 넌 평생 그놈들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칩을 억지로 뜯어내는 순간 네 뇌신경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경 궤도 절제술을 감행했다. 시스템의 격자망과 접속되는 신경 경로를 메스로 통째로 잘라내 버렸지."

 

노인은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그 대가로 네 유년기가 사라졌다. 네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도, 내 손을 잡고 뛰놀던 골목길의 풍경도, 네 어린 날의 따스했던 모든 감정이 그 자리에서 하얗게 타버렸어! 네게서 평범한 인간의 삶을 빼앗고, 평생 끔찍한 편두통과 고립감의 지옥 속에 살게 만든 건…… 서지훈이 아니라 바로 나다!"

 

강정호의 주먹이 자신의 감각 없는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지만 노인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울부짖었다.

 

"그러니 용서하지 마라, 우진아! 날 증오해라! 날 원망하고, 이 무덤 속에 날 버려두고 가라! 난 네 아비가 될 자격도, 너에게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이다!"

 

5. 결손의 무게를 짊어지고

 

우진은 가만히 서서 아비의 오열을 내려다보았다.

 

거센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차갑고 투명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관자놀이의 통증이 기이하게 멎어가고 있었다.

 

지끈거리던 두통 대신, 서늘하고 명징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기억이 지워졌다고 해서, 당신이 내 아버지가 아니었던 건 아닙니다.'

 

우진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대고, 휠체어에 앉은 노인의 눈높이에 시선을 맞췄다.

 

피눈물로 얼룩진 아비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노인의 손에 우진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떨림도, 원망도 묻어나지 않는 맑은 음성이었다.

 

"어머니의 사당 밑에 숨겨두셨던 일기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날 위해 남겨둔 프로메테우스의 코드를 보았습니다. 15년 동안 당신이 겪었을 지옥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강정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감히 마주할 수 없다는 듯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기억이 지워진 건……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남들처럼 따뜻한 어린 시절의 추억 하나 없이, 텅 빈 백지 같은 머릿속을 안고 사는 건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우진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칼을 들지 않았다면, 난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민규도, 서연 씨도, 채린이도…… 전부 시스템의 세모 아래서 죽어갔겠지요."

 

"우진아……."

 

"당신은 날 살리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홀로 그 죗값을 치르고 계셨습니다."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서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

 

강정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들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에, 15년 동안 굳어 있던 심장이 터져 나갈 듯 요동쳤다.

 

노인은 꺾인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아들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었다.

 

그 메마른 등판을 우진이 가만히 토닥였다.

 

차폐벽 입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서연의 눈시울에서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붉게 점멸하는 타이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은 시간은 11분 20초였다.

 

6. 마지막 속죄의 길

 

얼마나 지났을까.

 

강정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어깨에서 천천히 고개를 떼었다.

 

눈물로 젖은 노인의 눈빛 속에 처절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자책과 슬픔에 짓눌려 있던 눈동자가 차갑게 벼려진 칼날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다…… 우진아. 저 위성 백도어는 본사의 메인 프레임과 직결되어 있어. 10분 뒤면 소월도의 원자로가 강제 임계 상태에 도달하고, 그 에너지로 서울 전역의 인프라 제어망을 완전히 덮어쓸 거다."

 

강정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그곳에는 척수를 관통하는 두꺼운 금속 소켓이 박혀 있었다.

 

수많은 광섬유와 전선이 소켓 주위로 얽혀 차폐 콘솔과 직결되어 있었다.

 

"이 요새의 연산 중추는 여전히 내 신경망에 묶여 있다. 서지훈은 죽었지만, 그놈들이 남긴 시스템은 내 뇌를 마지막 발화 장치로 쓰고 있어."

 

우진이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당신의 연결을 끊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 케이블들을……!"

 

"안 된다!"

 

강정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냥 끊어내면 안전장치가 작동해 원자로가 즉각 폭발한다! 이 섬 전체가 날아가고, 그 충격파로 시스템은 최후의 파멸 명령을 전국에 일제히 방출할 거다!"

 

우진의 턱이 굳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정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앙상한 가슴을 짚었다.

 

"역위상 바이패스…… 네 관자놀이에 새겨진 그 흉터다."

 

노인의 눈이 우진의 흉터를 꿰뚫어 보았다.

 

"내가 15년 전 네 신경을 절제할 때, 단순한 흉터로 남겨둔 것이 아니야. 언젠가 네가 성장해 방화벽 백신을 각성시켰을 때…… 내 신경망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유일한 '생체 단말 포트'로 설계해 두었다."

 

우진의 눈이 커졌다.

 

자신의 머리에 새겨진 그 흉측한 상흔이, 바로 이 순간 아버지를 구하고 시스템을 끝장내기 위한 열쇠였다는 사실이 뇌리를 강타했다.

 

"네 백신 코어를 내 신경망에 직렬로 연결해야 한다. 네 순수한 척력과 백신 프로그램을 내 뇌간을 통해 코어로 쏘아 보내야 해. 그러면 내부에서 연산 회로가 역위상으로 쇼트되며 위성 백도어가 물리적으로 소각될 거다."

 

"그렇게 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됩니까?"

 

우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강정호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 담긴 의미를 우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도시 전체의 인과율 결손과 연산 부하가 역류하는 뇌간.

 

그곳에 고밀도 백신과 척력을 쏟아붓는다면, 이미 다 타버린 노인의 신경망이 온전할 리 없었다.

 

"안 됩니다."

 

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겨우 만났는데…… 15년 만에 겨우 얼굴을 마주했는데, 또다시 당신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진아, 이건 희생이 아니다."

 

강정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이건 내가 세상을 향해 지은 죄를 씻는 유일한 속죄다. 그리고…… 아비로서 네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노인은 떨리는 손을 뻗어 우진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난 이미 15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다. 네가 살아남아 이 자리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분에 넘치는 기적이다. 수천만 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망설일 시간이 없어."

 

붉은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지하 5층을 붉은 피바다로 물들였다.

 

[COUNTDOWN: 08분 15초]

 

[REACTOR OVERDRIVE CRITICAL: 84%]

 

벽면의 냉각 파이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얀 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원자로의 노심 온도가 임계점을 향해 수직 상승하고 있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7. 교차하는 신경망

 

우진은 떨리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 같았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이 그들이 걸어야 할 길이었다.

 

시스템이 정해둔 사각의 궤도를 부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살점을 도려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우진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강정호는 비로소 안도한 듯 깊은 숨을 내쉬었다.

 

우진은 품속에서 은빛으로 박동하는 마스터 칩, '프로메테우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살갗 아래 잠들어 있던 신경 궤도의 접속 회로가 체온에 반응하며 푸른빛으로 떠올랐다.

 

치지직, 칫!

 

미세한 생체 전기가 피부를 뚫고 허공으로 불꽃을 튀겼다.

 

"서연 씨."

 

우진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불렀다.

 

"네, 우진 씨!"

 

"입구를 봉쇄하세요. 제가 접속을 시작하면 엄청난 인과율 척력이 방출될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오지 마세요."

 

한서연은 눈술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폐실 출입문의 비상 유압 레버를 당겨 육중한 삼중 방폭문을 닫아걸었다.

 

두꺼운 방탄유리 너머로 우진과 강정호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비쳤다.

 

우진은 휠체어 뒤편으로 다가섰다.

 

강정호의 목덜미에 박힌 티타늄 소켓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계적 파동이 피부에 닿았다.

 

우진은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를 아비의 목덜미 소켓에 천천히 밀착시켰다.

 

찌르르르륵!

 

두 사람의 신경망이 맞닿는 순간, 고압 전선이 합선되는 듯한 맹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강정호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진의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백색 암전의 전조였다.

 

시신경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15년 치의 거대한 데이터.

 

도시 전체의 생체 신호, 수백만 명의 인생 궤도 방정식,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아비의 끔찍한 고통과 비명이 우진의 뇌세포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버텨야 해……!'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찢어지고 턱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방화벽 백신의 푸른 불꽃을 쥐어짰다.

 

그리고 품속의 프로메테우스 코드를 아비의 척수 신경망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 보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과 푸른빛의 파동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지하 5층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원자로 벽면을 뒤덮고 있던 붉은색 위성 백도어의 격자망이 비명을 지르며 균열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파멸적인 인과율의 충돌 속에서, 우진은 보았다.

 

아비의 뇌간 깊은 곳, 가장 은밀한 메모리 섹터에 봉인되어 있던 또 하나의 칠흑빛 암호 덩어리를.

 

그것은 위성 백도어가 아니었다.

 

서지훈조차 알지 못했던, 네모 프로젝트의 가장 깊고 추악한 진원지를 가리키는 미지의 좌표였다.

 

'이건…… 대체 뭐지?'

 

의식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혼돈 속에서, 우진의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