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의 대면
1. 허공을 가르는 도약
지하 3층 배관 피트의 차가운 철제 그레이팅을 뜯어낸 틈새로 살을 에는 냉각 기화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시야 한구석에 여전히 어른거리는 백색 암전의 후유증 탓에 망막 언저리가 찌르는 듯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강우진(姜宇鎭)은 망설이지 않았다.
발밑으로 아득하게 펼쳐진 30미터 아래, 거대한 티타늄 서버 랙들이 도열한 지하 4층 중앙 관제실의 전경이 번쩍이는 푸른빛과 붉은 경고등에 물들어 있었다.
우진은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를 손가락으로 꾹 짓누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우진 씨!"
등 뒤에서 배관 점검구 철망을 움켜쥔 한서연의 절규 어린 외침이 냉각 배관을 타고 메아리쳤다.
낙하하는 찰나의 순간, 우진의 시선은 관제 콘솔 중앙에 우뚝 선 도진우의 머리 위로 꽂혔다.
4차원 다포체 형태로 기괴하게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핏빛 잔상을 토해내는 거대한 입체 큐브.
그 큐브 표면을 타고 흐르는 연산 코드가 팔당댐 수문 개방과 영광 원전 3호기 냉각 밸브의 차단 시각을 시시각각 줄여 나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38분.
공기를 찢으며 강하하는 우진의 온몸에서 머리 위의 도형을 지워버린 아웃라이어의 무형 척력이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슈우우우웅!
관제실 천장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고압 케이블 트레이들이 우진의 주위를 감싼 보이지 않는 반발장에 부딪혀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낙하 속도를 죽이기 위해 우진은 손을 뻗어 4번 메인 냉각 강관을 낚아챘다.
마찰열로 가죽 장갑이 타들어 가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원심력을 이용해 반 바퀴 회전한 우진은 티타늄 서버 랙 상판을 박차며 바닥으로 육중하게 착지했다.
쿵!
육중한 충격음과 함께 바닥의 강화 세라믹 타일이 방사형으로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경보! 적색 격자 구역 내 침입자 발생!"
관제 콘솔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계화 청소 기동대원 여섯 명이 기계적인 반응 속도로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총구를 돌렸다.
그들의 정수리 위에는 한 치의 미동도, 떨림도 없는 완벽한 '고정된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중앙 시스템의 살상 알고리즘이 뇌간으로 직결되어 근육을 움직이기까지 걸리는 인과율 지연 시간은 정확히 0.3초.
우진에게는 그 찰나의 지연이 태산보다 거대한 틈새였다.
타앙!
탕!
탕!
푸른빛으로 응축된 시스템 격자 광탄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우진은 땅을 차고 낮게 미끄러지듯 쇄도했다.
머릿속에서 2단계 '변화 감지'의 푸른 궤적선이 적들의 사격 탄도와 총구의 각도를 0.3초 먼저 망막 위에 그려내고 있었다.
왼쪽으로 상체를 비틀자 귓가를 스친 광탄이 뒤편의 서버 랙을 관통해 새하얀 불꽃을 튀겼다.
연이어 쇄도하는 세 발의 탄환은 가슴 앞에서 펼쳐낸 무형의 특이점 척력에 부딪혀 허공에서 운동에너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파열했다.
"0.3초의 병목. 너희는 시스템의 명령 없이는 방아쇠조차 당기지 못하지."
차갑게 읊조린 우진이 가장 가까운 기동대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왼손으로 소총의 총열을 쳐올려 사선을 허공으로 꺾는 동시에, 오른손 바닥으로 대원의 방탄 흉부를 후려쳤다.
쾅!
방화벽 백신 코어의 고밀도 인과율 펄스가 카본 장갑을 뚫고 대원의 중추신경계로 침투했다.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던 검은 네모가 바늘에 찔린 유리창처럼 쩍 갈라지며 파열했다.
대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2. 뒤틀린 격자의 균열
우진의 일격 이탈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기동대원이 총검을 앞세우며 협공을 시도했으나, 우진은 이미 4단계 과거 추적의 감각을 살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상대방의 무릎 관절과 견갑골에 누적된 과거의 미세 골절 흔적이 자수정빛 실선으로 시야에 도드라졌다.
우진은 낮게 회전하며 두 대원의 무릎 안쪽 인대를 정확히 걷어찼다.
우지끈!
관절이 뒤틀리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두 명의 자세가 무너졌고, 우진은 그들의 턱 밑으로 주먹을 꽂아 넣으며 뇌간 칩의 동기화 신호를 쇼트시켰다.
불과 10초도 지나지 않아 관제실 바닥에 네 명의 집행 병력이 쓰러졌다.
남은 두 명의 대원이 물러서며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관제 콘솔 중앙 단상에 서 있던 도진우가 손을 들어 그들을 멈춰 세웠다.
"물러서라. 수식에서 벗어난 버그를 상대하기엔 너희의 연산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도진우의 서늘하고 기계적인 목소리가 웅장한 서버실 공간을 울렸다.
그는 한쪽 눈에 장착한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의 다이얼을 천천히 돌렸다.
렌즈 너머로 우진의 신체 주변에 소용돌이치는 무형의 결손 엔트로피 수치가 붉은색 숫자로 쉼 없이 갱신되고 있었다.
"K-07. 아니, 강우진 대리."
도진우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단상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왔다.
그의 머리 위에서 역회전하던 4차원 다포체 큐브가 웅웅거리는 위상 간섭음을 내뿜으며 붉은빛의 광망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인천 앞바다의 수중 암초에서 수장되었어야 할 쥐새끼가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군. 광주 메가 허브 물류센터에서 350만 대의 큐브 핏 에어를 불량품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이 신성한 해상 요새의 격자망까지 더럽히려 드는가?"
"신성?"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진우를 노려보았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것처럼 욱신거렸으나, 시선은 도진우의 가슴에 꽂힌 넥스트 큐브 감사실 배지와 콘솔 화면의 카운트다운을 번갈아 훑었다.
"수천만 명의 목에 보이지 않는 목줄을 채우고, 언제 죽고 망할지를 제멋대로 정해두는 게 너희가 말하는 신성이냐? 팔당댐 수문을 열어 수십만 소시민의 삶의 터전을 물바다로 만들고, 원전을 세워 수도권을 영구적인 암흑에 빠뜨리려는 짓이 질서냐고."
"필연적인 정화다."
도진우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절대적인 연산식에 대한 맹신만이 차갑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은 통제되지 않는 탐욕과 엔트로피의 쓰나미를 만들어낼 뿐이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 아나? 문명의 자멸이다. 서지훈 설계자님이 세우려 했던 사각의 규격화는 그 미증유의 멸망을 막기 위한 유일한 구명선이었다. 네 녀석이 본사의 오르비스 시뮬레이터를 박살 내고 도시의 엔트로피 균형을 무너뜨렸을 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물리적 인프라를 강제로 마비시키고, 공포 속에서 국가 전체가 완벽한 비상 통제 격자망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도진우가 품속에서 은빛으로 번뜩이는 특수 인과율 집속 권총을 꺼내 들었다.
총구 끝에서 파란 불꽃이 튀며 주변 공간의 공기를 왜곡시켰다.
"네 아비가 만든 그 불완전한 시스템의 잔재는 오늘로 완전히 끝난다. 그리고 너 역시 산산조각 난 뇌간을 챔버에 담겨, 차세대 격자망의 결함을 메울 생체 데이터 조각으로 영원히 박제될 것이다."
철컥.
도진우의 총구가 우진의 미간을 겨누었다.
3. 붕괴하는 관제실
그 순간, 천장 배관 점검구 그레이팅 틈새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탕!
지하 3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서연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총탄은 도진우의 어깨를 빗겨나가며 그의 발밑 바닥에 매설된 초고압 신호 분배 케이블 함을 강타했다.
파지지직!
시퍼런 스파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관제실 한쪽 벽면의 보조 모니터들이 일제히 블랙아웃 상태에 빠졌다.
"지금이에요, 우진 씨!"
서연의 외침이 울려 퍼진 찰나, 도진우의 머리 위 4차원 큐브가 순간적인 데이터 병목을 일으키며 회전 속도를 늦추었다.
0.05초의 위상차.
우진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발끝에 전신을 실어 바닥을 박찼다.
망막에 잔상으로 맺히는 도진우의 총구 궤적선을 빗겨 차며, 우진은 품속에서 15년 전 부친이 남겨둔 역위상 패치 칩을 꺼내 들었다.
"뭐 하는 짓이냐!"
도진우가 경악하며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미 우진은 그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있었다.
발사된 푸른 인과율 광탄이 우진의 어깨를 스치며 코트 자락을 불태웠지만, 우진은 이를 악물고 도진우의 총을 든 손목을 비틀어 꺾었다.
빠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으윽...!"
도진우가 다른 한 손으로 우진의 목을 조르려 들었으나, 우진은 망설임 없이 역위상 패치 칩을 쥔 손으로 도진우의 가슴에 달린 감사실 황금 배지를 짓눌렀다.
동시에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에 흐르는 방화벽 백신의 에너지를 칩을 통해 도진우의 중추 회로로 쏟아부었다.
쿠구구구궁!
"아아아악!"
도진우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진의 신경계에서 흘러나온 절대 척력의 은빛 파동이 도진우의 머리 위에 떠 있던 4차원 큐브의 내부 코어로 역류해 들어갔다.
완벽한 기하학적 면을 유지하던 핏빛 입방체의 모서리들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꼭짓점마다 푸른 스파크가 튀며 균열이 번져 나갔다.
도진우의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 렌즈가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내... 내 연산이... 궤도가 붕괴한다...!"
도진우의 머리 위 큐브가 내부에서부터 팽창하더니,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인과율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콰앙!
투명한 충격파가 도진우를 강타했고, 그는 피를 토하며 메인 관제 콘솔 위로 나가떨어졌다.
콘솔의 유리 패널이 깨지며 붉은 경고등이 요란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SYSTEM ERROR: MASTER AUDIT LINK TERMINATED]
[플랜 B 최종 시퀀스 일시 정지 - 외부 입력 대기 중]
도진우는 의식을 잃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고, 남은 두 명의 기동대원 역시 지휘관의 큐브가 파괴되자 연산 명령을 잃고 멍하니 멈춰 섰다.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깨진 콘솔 뒤편으로 걸어갔다.
콘솔 중앙에 붉은빛으로 깜빡이던 팔당댐과 원전 차단 타이머가 '31분 12초'에서 멈춰 서 있었다.
배관 사다리를 타고 지하 4층으로 내려온 서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곁으로 달려왔다.
"우진 씨, 괜찮아요? 피가..."
서연이 우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관자놀이의 피를 보며 손을 떨었다.
무리하게 백신 코어를 오버클럭한 탓에 수술 흉터가 터져 붉은 핏물이 귓바퀴를 타고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습니다. 서연 씨, 저길 보세요."
우진의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관제 콘솔 정면의 두꺼운 특수 차폐 방폭문이었다.
강화 콘크리트와 3중 납 차폐 패널로 봉인된 육중한 원형 문.
그 표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지워지지 않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SUB-LEVEL 5: REACTOR CORE & CENTRAL NODE ARCHIVE]
(지하 5층: 원자로 및 중앙 노드 보존 구역)
방폭문 틈새로 미세한 진동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그 진동에 맞춰 규칙적인 박동을 일으켰다.
쿵.
쿵.
쿵.
그것은 15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혈육의 심장 박동이었다.
4. 지하 5층의 침묵
서연이 콘솔의 비상 개방 스위치를 조작하려 했으나, 붉은색 오류 메시지만 깜빡거릴 뿐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전력이 차단돼서 유압 락이 걸려 있어요. 전자식으로는 열리지 않아요."
"수동 밸브가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설계한 시설이라면 반드시 아날로그 바이패스를 남겨두셨을 테니까요."
우진은 방폭문 우측 하단의 배관 인입부를 샅샅이 뒤졌다.
두꺼운 먼지와 기름때가 엉겨 붙은 배관 밸브 커버를 뜯어내자, 그 안쪽에 익숙한 형태의 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사형 삼각 홈 나사.
소월도 절벽 트랩에서 보았던 부친 강정호의 고유한 결합 방식이었다.
우진은 허리춤의 다목적 공구를 꺼내 나사를 풀어내고, 내부에 숨겨진 황동 수동 개폐 레버를 힘껏 당겼다.
치이이익!
15년 동안 닫혀 있던 고압 에어 실린더가 압축 공기를 토해내며 육중한 방폭문이 둔탁한 굉음과 함께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것은 지독하게 차갑고 메마른 공기였다.
소독약 냄새와 타버린 절연체 냄새, 그리고 오래된 먼지의 냄새가 뒤섞여 폐부로 밀려들었다.
우진은 떨리는 다리를 내디디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연이 조심스럽게 권총을 쥔 채 그 뒤를 따랐다.
지하 5층은 지하 4층의 화려하고 첨단화된 서버실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거친 암반을 그대로 깎아 만든 돔형 공간의 중앙에는 소형 원자로의 냉각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한구석에 낡은 녹색 철제 책상과 수많은 브라운관 모니터, 진공관 계측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최첨단 시스템의 심장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낡고 조악한, 지독히도 아날로그적인 공간.
그리고 그 기계들의 한가운데, 낡은 휠체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끼익, 끽.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휠체어의 바퀴가 녹슨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돌아섰다.
우진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차마 뱉어내지 못한 공기가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시야 한구석에 남아 있던 백색 암전의 잔상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오직 한 사람의 형상만이 망막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은 참혹할 정도로 수척했다.
앙상하게 마른 팔목에는 수많은 링거 주삿바늘 자국과 전극 패치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가락은 여전히 구형 키보드의 자판 위에 얹혀 있었다.
머리칼은 백발로 하얗게 세어 푸석거렸으며, 깊게 패인 눈등과 앙상한 광대뼈는 그가 지난 15년 동안 겪었을 생체 프로세서로서의 지옥 같은 고통을 고스란히 웅변하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을 잃은 듯 흐릿했던 그의 눈동자가 문가에 선 우진의 얼굴에 닿는 순간,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진이니?"
갈라지고 쉰 목소리.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그 한마디가 얼어붙은 지하 5층의 공기를 찢고 우진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15년 전, 서재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던 그 따뜻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지만, 우진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얼굴마저 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던, 15년 전 실종되었던 아버지 강정호(姜正浩) 박사가 바로 눈앞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5. 무형(無形)의 진실
"아버지..."
우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턱 끝이 덜덜 떨렸다.
차마 다가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우진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진의 시신경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본능처럼 작동하던 궤도 시각화의 감각.
우진의 시선이 부친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으로 향했다.
일상의 질서와 반복을 의미하는 백색 네모(□)인가.
파멸과 죽음, 급격한 위기를 뜻하는 세모(△)인가.
아니면 시스템을 벗어난 미지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은빛 동그라미(○)인가.
혹은 15년간 시스템의 중추 노드 'Node-0'으로 혹사당했으니, 서지훈이나 집행관들처럼 칠흑 같은 검은 큐브에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닐까.
우진은 숨을 삼키며 부친의 머리 위를 응시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아니었다.
빛을 발하는 테두리도,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검은 꼭두각시 줄도, 붉은빛의 파멸적 파편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완전하고 지독한 '공백'.
마치 그 공간에만 인과율의 법칙과 시스템의 격자망이 아예 닿지 않는 것처럼, 부친의 머리 위는 완벽한 무형(無形)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형이... 없어?'
우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르비스 시뮬레이터를 박살 내고 시스템의 수식에서 탈선한 자신처럼, 아버지 강정호 박사 역시 머리 위에 아무런 기하학적 형태를 띄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객체도, 시스템의 의지에 순응하는 부품도 아닌, 궤도 그 자체를 초월해 버린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 무(無)의 표식이었다.
강정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책상 위의 낡은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화면에는 복잡한 기계어 코드와 함께 서울 상공의 전력 격자망 다이어그램이 쉼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네가...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강정호의 메마른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주름진 턱을 타고 내려와 환자복 앞섶을 적셨다.
부친의 시선이 우진의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4센티미터의 흉터에 머물렀다.
그 상처를 바라보는 노학자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과 참담한 슬픔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왔겠지. 너를 지키기 위해 내가 베어낸 네 삶의 궤적이... 너를 괴롭혀왔겠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진이 비틀거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
서연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 박사를 응시했다.
한서연 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박사님... 살아 계셨던 거군요. 15년 전 연구소 화재 때... 정말로 시스템에 납치되어 여기에 계셨던 겁니까?"
강정호는 서연을 힐끗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민우 부소장의 조카딸이로구나. 기억이 난다... 네 아비가 연구소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난... 비겁하게 살아남아 이 괴물 같은 시스템의 연산 핵이 되어 도시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강정호는 기침을 토해냈다.
폐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피 섞인 기침이었다.
우진이 다급히 다가가 부친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 쥐었다.
손끝에 닿는 아버지의 체온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체온조절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쇠약한 육체였다.
"말씀하지 마세요.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소월도 해변에 배가 기다리고 있어요. 파주 은신처에 어머니도 계십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세요!"
우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강정호는 우진의 피 묻은 손을 마른 손으로 꼭 쥐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메마른 손등 위로 우진의 피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진아. 난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제가 아버지를 구하러 왔는데!"
"이 시스템... 네모 프로젝트의 최초 설계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강정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백은, 우진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하 5층 암반 돔 전체가 무거운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6. 멈추지 않는 카운트다운
강정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낡은 브라운관 모니터의 엔터 키를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며 15년 전의 날짜가 찍힌 시스템 커널 설계도와 함께 수많은 수학 방정식이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불행을 없애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발적인 사고로 죽지 않고, 질병과 가난으로 파멸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 그래서 도형을 만들었다. 네모라는 질서 속에 삶을 가두고, 세모라는 위험을 사전에 계산해 차단하면 완전한 평화가 올 거라 믿었지. 하지만 그것은 오만이었다."
강정호가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으며 메마른 숨을 토해냈다.
"엔트로피는 보존된다. 한 사람의 세모를 지워 네모로 되돌리면, 그 파멸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전이되어 더 끔찍한 비극을 낳더구나.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다. 넥스트 큐브의 상임이사회와 군벌들이 내 연구를 빼앗아 사람들을 가축처럼 통제하는 감옥을 세웠지."
강정호의 시선이 다시금 우진의 흉터로 향했다.
"난 내 죗값을 치르기 위해 여기에 남아야 했다. 하지만 너만은... 내 피를 이어받아 궤도를 읽는 눈을 타고난 너만은 그 사각 감옥의 노예로 살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곱 살이던 너의 관자놀이를 째고, 시스템과 연결된 궤도 신경을 내 손으로 잘라낸 거다."
노학자의 메마른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너의 기억을 지우고, 평생 편두통과 고립감에 시달리게 만든 원흉이 바로 나다, 우진아. 내가... 네 아비라는 작자가 네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 넣은 거다."
우진은 숨을 들이켜지 못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자신을 괴롭혀온 유년기의 기억 공백, 관자놀이 흉터의 지옥 같은 통증, 타인과 섞이지 못하고 이물질처럼 겉돌아야 했던 15년의 세월.
그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눈앞에 앉은 아버지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는 진실.
서연이 입을 틀어막았고, 차가운 정적 속에서 낡은 계측기의 바늘만이 째깍거리며 허공을 긁었다.
삐- 삐- 삐-!
그때, 침묵을 깨고 지하 4층 콘솔과 연결된 비상 경보기가 날카로운 비명 같은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관제실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기계화된 합성 음성이 지하 5층으로 쏟아져 내렸다.
[WARNING: SECONDARY AUTOMATIC OVERRIDE INITIATED]
[넥스트 큐브 본사 비상 관제 센터 개입]
[플랜 B 최종 단계 강제 속행: 남은 시간 15분 00초]
도진우가 쓰러지며 일시 정지되었던 카운트다운이 다시금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니터 화면 속 팔당댐의 수문 개방 시퀀스가 주황색 경고등으로 깜빡였다.
강정호가 창백해진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려 했으나, 앙상한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놈들이... 본사의 독립 위성망을 통해 백도어를 강제로 열었다. 15분 뒤면... 수도권의 모든 물길과 전력망이 파괴된다."
강정호가 핏발 선 눈으로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우진아. 날 원망해라. 날 저주해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이 괴물의 심장을 멈춰야 한다. 내 뇌파만으로는 역위상 패치를 완전히 밀어 넣을 수 없어. 너의 방화벽 백신 코어가... 내 중추신경계와 직결되어야만 이 코어의 연산 회로를 내부에서 태워버릴 수 있다."
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아 자신을 눈물로 응시하는, 머리 위에 아무런 도형도 띄우지 않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15년 만의 대면.
그것은 눈물의 화해가 아닌, 잔혹한 진실과 멈추지 않는 멸망의 카운트다운 앞에서의 절박한 선택이었다.
우진의 눈빛이 흔들림을 멈추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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