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로 향하는 길
1. 칠흑의 바다와 디젤의 박동
인천 연안부두 제3물양장의 거친 시멘트 부두를 밀어낸 낡은 목선, 해성호의 기계식 8기통 디젤 엔진이 묵직하게 고동쳤다.
선체 바닥을 타고 둔중하게 울리는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척추까지 전해졌다.
사방은 집어삼킬 듯한 칠흑이었다.
수도권 전역의 전력망을 마비시킨 넥스트 큐브의 '플랜 B' 테러 탓에, 육지의 마천루와 해안 도로의 가로등은 단 한 점의 불빛조차 토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암흑으로 침몰한 육지를 등진 채, 낡은 목선은 파도를 가르며 서해의 차가운 물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강우진(姜宇鎭)은 뱃머리 난간을 쥔 채 밤바람을 들이켰다.
비릿한 소금기와 덜 연소된 경유 냄새가 차가운 바닷바람에 섞여 폐부를 찔렀다.
그의 시야에 비친 서해 상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육지의 불빛은 모조리 꺼졌건만, 저 멀리 서남쪽 하늘 높은 곳에는 푸르스름하고 붉은빛을 띤 기하학적 격자망이 거미줄처럼 촘촘한 돔을 형성하고 있었다.
'저곳이 소월도다.'
지하 5층 깊이의 암반 격벽, 독립 소형 원자로, 군용 암호 위성망과 초고압 파라볼라 안테나로 요새화된 유령 섬.
15년 전 연구소 참사 당시 빼돌려진 프로토타입 양자 코어 자재들이 집약되어, 도시 전체의 전력과 상수도를 틀어쥔 플랜 B의 총괄 지휘 서버가 웅크리고 있는 심장부였다.
우진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머리 위의 기하학적 도형은 완전히 사라진 채 절대적인 공허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침묵 속에서, 15년 전 아버지가 신경 궤도 절제술로 남겨둔 4cm의 수술 흉터만이 바늘로 찌르는 듯 희미한 맥동을 울리고 있었다.
"우진아, 바람이 차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등 뒤에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두꺼운 방한 점퍼를 걸친 한서연 기자가 따뜻한 보온병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파주 거점 7번 아날로그 은신처의 무전실에서 최진석 기자와 함께 전 세계 폭로를 지휘하던 그녀는, 출항 직전 우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재 수첩과 녹음기를 챙겨 끝내 해성호에 올랐다.
"선배야말로 쉬고 계시지 그래요. 며칠 동안 한숨도 못 잤잖아요."
"지금 눈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서울이 통째로 멈췄는데."
서연이 보온병 뚜껑에 따뜻한 보리차를 따라 건넸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너머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눈가에는 깊은 피로가 배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15년 전 진실을 쫓기 시작했을 때보다 한층 더 단단하게 벼려져 있었다.
그녀의 정수리 위에는 잔잔한 백색 네모가 은은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대문 취재 사무실이 불타고 검은 세모가 드리워졌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우진이 방화벽 백신과 프로메테우스의 파편을 각인시켜 겨우 되돌려놓은 자유의지의 궤도였다.
하지만 우진은 차를 받아들며 미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까이 다가선 서연의 백색 네모 테두리에, 아주 미세하게 서리 같은 노이즈가 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웃라이어의 저주.'
중앙 통제 시스템 오르비스가 붕괴되고 수식을 거부하는 버그가 된 우진의 존재 자체가, 인접한 타인들의 일상 궤도를 차갑게 갉아먹고 밀어내는 잔혹한 인과율의 반작용이었다.
우진은 찻잔을 쥔 채 반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미세한 거리를 알아차린 서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또 뒤로 물러선다. 내가 그 노이즈 때문에 겁먹을 줄 알아?"
"선배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럽니다. 제 곁에 오래 머물수록 인과율이 불안정해져요."
"우진아. 난 15년 전 네 아버지가 사라진 그날부터 이미 정상적인 궤도에서 벗어났어. 시스템이 정해준 사각 틀 안에서 가축처럼 사느니, 네 곁에서 깨진 파편을 맞더라도 내 두 발로 서 있을 거야. 그러니까 밀어내지 마."
서연의 단호한 음성에 우진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따뜻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내장을 달랬다.
2. 키를 쥔 사내의 머리 위
두 사람은 갑판을 지나 조타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타실 안쪽은 퀴퀴한 담배 연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달빛조차 차단하기 위해 창문에는 검은 테이프가 덧대어져 있었고, 계기판의 희미한 붉은 백라이트만이 실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키를 잡고 있는 인물은 칠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이었다.
기형적으로 굵은 마디의 손가락과 깊게 팬 주름, 소금기에 바랜 낡은 방한모가 험난한 뱃사람의 세월을 웅변하고 있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일행을 태워준 선주였다.
15년 전 강정호 박사와 인연을 맺고, 전자기 스캔에 걸리지 않는 순수 기계식 아날로그 어선을 비밀리에 관리해 오던 조력자.
"선장님, 바다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서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선장은 입에 물고 있던 필터 없는 담배를 질겅 씹으며 퉁명스럽게 뱉었다.
"덕적도 지나면서부터 조류가 지랄맞아졌어. 저 앞바다 상공을 봐라. 번개도 안 치는데 시퍼런 도깨비불 같은 게 허공에 쫙 깔렸잖냐. 나 삼십 년 배 탔어도 저런 귀신 씌인 하늘은 난생처음 본다."
선장의 시선이 가리키는 전방 유리창 너머로, 서해 상공을 뒤덮은 입체 사각 격자 돔이 희미한 펄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격자망의 중심이 바로 소월도였다.
우진은 조타실 한구석에 서서 선장의 머리 위를 유심히 응시했다.
그 순간, 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건…….'
시야를 좁히자, 2단계 심층 분석의 감각이 시신경을 자극하며 관자놀이 흉터가 욱신거렸다.
선장의 정수리 위 약 10cm 상공.
출항 전 부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희미하고 낡은 일상의 백색 네모(□)를 띄우고 있던 그의 머리 위에, 기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백색 네모의 네 변 중 우측 하단이 찌그러지며, 위태롭고 날카로운 세모(△)의 형태가 불규칙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완전한 파멸의 칠흑빛 검은 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옅은 회색과 탁한 붉은빛이 뒤섞인 채, 꼭짓점이 팽이처럼 불안정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세모.'
우발적인 죽음이나 조난, 혹은 외부의 강압에 의해 삶의 궤도가 급격히 꺾이기 직전에 나타나는 파동이었다.
"선장님. 소월도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습니까?"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장은 나침반과 구형 해도(海圖)를 번갈아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삼켰다.
"이 속도로 가면 두 시간 반은 족히 걸려. 소월도 반경 20해리 안쪽은 암초밭이라 엔진 소리를 죽이고 조류를 타야 한단 말이다. 안 그러면 배 밑바닥 다 찢어져."
말을 마친 선장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키를 쥔 거친 손등에 핏줄이 곤두서 있었고, 그의 시선은 전방의 칠흑 같은 바다가 아니라 우측 구석에 놓인 낡은 단파 수신기에 자꾸만 머물렀다.
우진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머리 위에 뜬 도형의 형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선장은 지금 단순히 거친 파도나 도깨비불 같은 상공의 이변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거나, 그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파멸의 궤도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는 상태였다.
우진은 서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서연 역시 수많은 취재와 현장을 거치며 다져진 직감으로 조타실 내부의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살그머니 주머니 속 녹음기의 스위치를 켰다.
3. 단파 수신기의 잡음
치이익― 치익―.
조타실 한구석 선반에 얹혀 있던 구형 아날로그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화이트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디지털 전파가 모조리 먹통이 된 이 암흑의 바다에서, 진공관 앰프를 거친 아날로그 신호만이 찌르륵거리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기는 거점 7번. 해성호, 응답하라. 강우진, 들리는가?"
잡음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주 은신처 무전실을 지키고 있는 송민규의 다급한 음성이었다.
우진이 즉각 무전기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강우진이다. 송민규, 무슨 일이지?"
"우진아! 방금 본사 통제감사실 잔류 서버에서 유출된 비상 군용 통신 패킷을 서연 선배 백도어로 가로챘어! 상임이사회가 소월도 기지에 최종 지령을 내렸다!"
민규의 목소리 뒤편으로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는 타건음이 요란하게 섞여 들었다.
"지령 내용이 뭐냐?"
"소월도 반경 20해리를 '절대 통제 수역'으로 선포하고, 해당 해역에 접근하는 모든 비인가 선박에 대해 무경고 격침 명령이 떨어졌어! 그리고…… 젠장, 서해안 해양경찰 관제 레이더망을 해킹해서 군용 초계정 두 척을 이미 급파했대!"
조타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키를 쥐고 있던 선장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선장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불안정한 세모가 한층 더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진은 선장의 반응을 시야 한구석에 담아두며 침착하게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초계정의 위치는 파악되나?"
"그게…… 이상해. 초계정 말고도 다른 신호가 있어. 디지털 레이더망에는 안 잡히는데, 넥스트 큐브의 사각 격자 레이더망에만 잡히는 독립 신호 하나가 해성호 바로 뒤쪽을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어!"
"뒤쪽이라고?"
"어! 출항할 때부터 인천 연안부두 외곽 암초 지대에 숨어 있던 놈이야. 전파를 전혀 쏘지 않는 완전 무소음 고속 스텔스 정인 것 같은데,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의 직속 프로토콜로 움직이고 있어! 그놈들, 해성호의 출항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민규의 다급한 외침이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출항을 알고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어. 연안부두 제3물양장은 전산망이 완전히 끊긴 아날로그 부두였잖아!"
그때였다.
우진의 뇌리 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단서가 있었다.
출항 직전, 연안부두에서 배를 띄우기 전 선장이 부두 공중전화 부스 근처에서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나누고 돌아섰던 모습.
그리고 지금, 선장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불안정한 세모의 꼭짓점에서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검은 실선 잔상.
꼭두각시 줄이었다.
외부 세력의 조작과 개입이 개입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저주받은 흔적.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장을 응시했다.
그의 서늘한 눈빛이 선장의 굳어버린 뒷덜미에 꽂혔다.
4. 찌그러진 궤도의 진실
"선장님."
우진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보다 낮았지만, 조타실 안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무게감을 담고 있었다.
선장은 키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그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와, 왜 부르냐. 거친 바다에서 조타수 정신 사납게 하지 마라."
"따라붙고 있는 배, 넥스트 큐브 놈들의 배 맞지요?"
선장의 손가락이 덜컥 떨리며 조타륜을 헛돌릴 뻔했다.
"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난 강 박사님 부탁받고 너희 목숨 걸고 태워다 주는 길이야! 은혜도 모르고 무슨 개뼛다귀 같은 소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우진이 성큼 다가섰다.
조타실의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우진의 묵직한 기세로 가득 찼다.
우진의 오른손이 선장의 어깨를 단단하게 짚었다.
그 손길은 거칠지 않았으나, 결코 뿌리칠 수 없는 바위 같은 완력이 실려 있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며, 2단계 심층 분석의 시야가 선장의 머리 위 세모를 꿰뚫었다.
세모의 내부 회전 주기와 뒤틀린 꼭짓점, 그리고 그 꼭짓점을 쥐고 흔드는 허공의 검은 실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선장님의 따님. 부천에 살고 있는 외동딸 맞습니까?"
선장의 온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굳어졌다.
천천히 돌아선 선장의 두 눈은 핏발이 선 채 경악과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자들이 딸의 목숨을 쥐고 협박했군요. 해성호를 띄워 우리를 소월도 앞바다 특정 좌표까지 유인하면, 딸의 빚을 탕감해 주고 병원비도 대주겠다고 각본을 짰을 겁니다."
우진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닌, 깊은 비애가 서려 있었다.
이것이 넥스트 큐브가 세상을 통제하는 잔인한 방식이었다.
소시민의 가장 약하고 절박한 고리를 찾아내어 쥐어짜고, 그들의 머리 위에 검은 세모를 씌워 꼭두각시로 부려 먹는 시스템의 악랄한 인과율.
선장의 주름진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키를 쥔 손에서 힘을 풀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젊은이……."
선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오열을 터뜨렸다.
"어제저녁에 검은 양복을 입은 놈들이 들이닥쳤어. 내 딸년이 사채를 쓴 병원에 산소호흡기를 떼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강 박사 아들이 배를 타러 올 테니 무조건 태워서 서해 특정 좌표로 데려가라고…… 그러면 딸도 살리고 나도 살려준다고……!"
서연이 탄식을 내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넥스트 큐브의 마수는 지상에서 무너지는 순간에도 바다 위 도주로까지 완벽하게 계산해 덫을 놓아두었던 것이다.
"좌표가 어디입니까?"
우진이 차분하게 물었다.
선장은 떨리는 손으로 해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소월도 동남쪽 12해리 지점…… '백령초' 암초 지대다. 거기서 엔진을 끄고 정지하라고 했어. 그러면 뒤따라오는 배가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백령초 암초 지대.
사방이 날카로운 수중 암초로 둘러싸여 있어 배가 멈추는 순간 독 안에 든 쥐가 되는 완벽한 수장(水葬)의 각본이었다.
5. 은빛 공명과 바다의 결단
"우진아,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뱃머리를 돌려야 하는 거 아니야?"
서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육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서울의 인프라는 1분 1초가 다급하게 무너지고 있고, 상임이사회가 계엄을 선포하면 국가 전체가 영구적인 통제 구역으로 묶여버립니다. 소월도의 서버를 부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우진의 시선이 해도 위 백령초 좌표에 고정되었다.
그때, 조타실 선반의 단파 수신기에서 다시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저씨. 제 목소리 들려요?"
윤채린이었다.
파주 거점 7번 아날로그 은신처 옥상, 거대한 단파 안테나 아래에서 송출된 그녀의 목소리였다.
우진이 즉시 마이크를 잡았다.
"채린아. 듣고 있다."
"아저씨, 관자놀이가 뜨겁지 않아요? 느껴져요?"
채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에서 은은하고 시원한 박동이 피어올랐다.
고통스러운 두통이 아니었다.
마치 차가운 새벽이슬이 상처를 적시는 듯한 청량한 파동이었다.
"파주 안테나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어요. 제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 파동을 아저씨의 관자놀이 바이패스 단말로 보내고 있어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저씨가 소월도의 격자망에 짓눌리지 않도록 제가 뒤에서 계속 밀어낼게요."
채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없었다.
자신을 가두었던 시스템의 어둠에 맞서, 우진과 함께 싸우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우진은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고맙다, 채린아. 신호는 완벽하게 닿고 있어."
우진은 무전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늙은 선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선장의 거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선장님."
선장이 눈물로 젖은 눈을 들어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놈들은 선장님의 딸을 살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저들이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다루는지, 저는 지난 수십 일 동안 똑똑히 보아왔습니다. 이용 가치가 다하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선장님도, 따님도 차가운 바다와 병실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겁니다."
선장의 눈동자가 절망으로 흔들렸다.
"그럼…… 내 딸은 어떡하냐…… 난 어떻게 해야 하냐……."
우진이 선장의 손을 굳게 쥐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맞추었다.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제가 선장님의 딸을 살리겠습니다. 파주에 있는 제 동료들이 지금 즉시 부천의 병원으로 사람을 보낼 겁니다. 넥스트 큐브의 하수인들이 손을 쓰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따님을 빼돌릴 겁니다."
우진이 서연을 돌아보았고, 서연은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 안쪽의 비상 단말기를 꺼내 파주의 민규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하기 시작했다.
선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정말 내 딸을 살려줄 수 있단 말이냐?"
"약속합니다. 그러니 선장님은 선장님의 싸움을 해주십시오."
우진이 조타륜을 가리켰다.
"저들은 우리가 백령초에서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습니다. 저 미행선을 백령초의 암초밭으로 끌어들여 박살 낼 겁니다. 서해 바다의 물길을 가장 잘 아는 건 그놈들이 아니라 바로 선장님 아닙니까?"
선장의 떨리던 눈빛에 서서히 불꽃이 되살아났다.
삼십 년 동안 거친 서해의 파도와 싸워온 늙은 뱃사람의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바로 섰다.
선장은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고는, 조타륜을 양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그 순간, 선장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깜빡이던 세모가 안정을 되찾으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비록 완벽한 백색 네모는 아니었지만, 외부의 조작에 끌려다니던 검은 실선이 끊어지며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단단한 파동이 깃들었다.
"……좋다. 썩을 놈들. 감히 내 딸년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쳐?"
선장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디젤 엔진의 스로틀 레버를 앞으로 힘껏 밀어붙였다.
쿠구구구궁―!
해성호의 낡은 8기통 엔진이 비명을 지르듯 포효하며 거대한 흑연을 내뿜었다.
선체의 진동이 두 배로 거세지며, 낡은 목선은 어둠이 깔린 바다를 맹렬한 속도로 가르기 시작했다.
6. 어둠 속의 추격자
해성호의 후방 2해리 지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파도를 베어 넘기며 소리 없이 질주하는 검은 선체가 있었다.
전자기 스텔스 도료로 마감된 날렵한 선형의 고속 특수정.
선체 어디에도 외부 식별 번호나 불빛은 존재하지 않았다.
조타실 내부에는 최첨단 사각 격자 레이더 스크린이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스크린 위에는 해성호의 궤적이 붉은색 점으로 선명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조타실에 선 남자는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직속 해상 추격대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카본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고, 정수리 위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지해 있는 '고정된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자유의지가 거세된 채, 오직 시스템의 살상 알고리즘만을 수신하는 기계화 단말이었다.
남자의 귓가에 꽂힌 골전도 이어폰에서 상임이사회의 서늘한 합성 음성이 흘러나왔다.
[타깃 K-07 강우진의 생체 신호가 해성호 내부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했다.
백령초 수역 진입 즉시 인과율 집속 어뢰를 발사하여 선체를 격침하라.
아웃라이어의 뇌간과 척수만을 회수하고, 나머지 인원은 전원 수장 처리한다.]
"명령 수신. 타깃 궤도 고정 완료. 백령초 진입 카운트다운 15분."
남자의 손가락이 콘솔의 붉은 발사 버튼 위에 얹혔다.
고속정의 양쪽 측면 발사관에서 푸른빛의 응축된 인과율 펄스를 머금은 특수 어뢰 두 발이 서서히 기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앞서 달리는 낡은 목선이 그저 정해진 시간표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보일 뿐이었다.
7. 백령초의 격랑
바람이 거세지며 파도가 집채만 한 높이로 솟구쳐 해성호의 갑판을 때렸다.
"모두 꽉 잡아라! 백령초 진입한다!"
선장의 거친 고함과 함께 배가 좌우로 45도 가까이 기우뚱거렸다.
깨진 바닷물이 조타실 유리창을 사납게 두드렸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 사이로, 칼날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암초들의 실루엣이 번뜩였다.
우진은 갑판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살을 에는 듯한 바닷바람과 물보라가 온몸을 덮쳤다.
하지만 우진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시야가 칠흑 같은 바다의 수면을 꿰뚫었다.
2단계 '변화 감지'의 오버클럭.
시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관자놀이 흉터가 불타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동시에, 파주에서 채린이 쏘아 보낸 은빛 동그라미의 원격 척력 파동이 우진의 신경계와 직결되며 거대한 공명을 일으켰다.
찌이이잉―!
우진의 망막 위에, 칠흑 같은 바다를 가르고 다가오는 붉은빛의 미래 탄도 궤적이 시각화되기 시작했다.
0.5초 뒤, 후방의 어둠 속에서 쏘아 올려질 어뢰의 수중 궤적선.
그리고 백령초의 복잡한 조류와 암초 사이를 휘감아 도는 물길의 벡터가 푸른빛 잔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선장님! 전방 2시 방향, 저 쌍둥이 여(암초) 사이로 키를 꺾으십시오!"
우진의 외침이 폭풍우 같은 파도 소리를 뚫고 조타실로 내리꽂혔다.
선장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저긴 수심이 얕아서 배 밑창이 긁힌다!"
"파도가 칠 때 솟구치는 수위 차를 타면 통과할 수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선장은 단 1초의 망설임 끝에 조타륜을 오른쪽으로 미친 듯이 꺾었다.
해성호의 뱃머리가 거대한 파도를 타고 솟구쳐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앙―!
해성호가 방금 지나쳐 온 수면이 푸른빛의 거대한 물기둥과 함께 솟구쳐 오르며 허공으로 폭발했다.
고속정에서 발사된 첫 번째 인과율 어뢰가 암초에 부딪혀 작렬한 것이었다.
선체 전체가 충격파에 휘청이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우진은 뱃머리 난간을 쥔 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검은 고속정을 서늘하게 쏘아보았다.
고속정의 함수에 설치된 중기관총의 총구가 해성호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머리 위, 텅 비어 있던 절대적 공허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특이점 척력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인과율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들."
우진이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희가 짤 수 있는 미래는 여기까지다."
소월도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백령초의 거친 격랑 위에서 목숨을 건 해상 혈투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