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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0화

반격의 서막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빗발치는 포위망

 

새벽의 냉기를 머금은 광주 메가 허브 물류센터의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괴기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비상 발전기마저 끊겨버린 B블록 특수 보관동 내부에는 배터리가 타들어 가며 내뿜는 메케한 리튬 연기와 타버린 플라스틱 냄새가 진동했다.

 

350만 대에 달하는 '큐브 핏 에어' 상자 더미가 연쇄적인 과열 쇼트로 불길을 뿜어내며 시커멓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진아, 서둘러야 해! 놈들의 전술 타격대가 외곽 차폐벽을 폭파하고 진입 중이다!"

 

송민규가 땀범벅이 된 얼굴로 찢어진 서버실 철문을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머리 위에 아무런 기하학적 도형도 띄우지 않은 강우진(姜宇鎭)은 불타는 관제 콘솔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로지르는 4센티미터의 절제 수술 흉터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리며 맥박쳤다.

 

방화벽 백신 코드를 350만 대의 기기에 강제 주입하며 감당해 낸 인과율 역류의 잔열이 여전히 뇌수를 태울 듯 들끓고 있었다.

 

그의 시야 속에서 세상은 여전히 기괴한 이물질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중앙 시스템의 수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절대적 공허'.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아웃라이어에게 현실의 시공간이 뿜어내는 차가운 반발력이 살갗을 바늘처럼 찔렀다.

 

"민규야, 단말기 챙겨. 장비 챙기는 대로 바로 빠져나간다."

 

우진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낮고 메말라 있었다.

 

"이쪽이다! 외벽 비상 환기 통로를 확보했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한민우 부소장이 구형 무전기와 EMP 발생기를 가슴에 품은 채 손짓했다.

 

그 뒤편에는 기름때와 분진으로 뒤덮인 화물차 기사가 묵직한 소화기를 어깨에 멘 채 퇴로를 엄호하고 있었다.

 

"우진 대리, 정문 쪽은 이미 끝장났어. 검은 방탄복을 입은 놈들이 장갑차까지 몰고 와서 집하장 게이트를 틀어막았다고. 벽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어."

 

화물차 기사의 말과 동시에 거대한 폭음이 B블록 남쪽 벽면을 강타했다.

 

쾅-!

 

두꺼운 콘크리트 벽체가 산산조각 나며 붉은 화염과 함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욱한 먼지 구름을 뚫고 칠흑 같은 카본 마스크와 방탄 전술 장구를 착용한 넥스트 큐브 청소 기동대원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원들의 헬멧 위에는 한 치의 미세한 흔들림도 없는 '고정된 검은 네모(■)'가 기괴한 침묵을 유지한 채 떠올라 있었다.

 

자유의지와 감정이 완벽히 거세된 살상 단말들이었다.

 

"타깃 K-07 포착. 상임이사회 비상 칙령 발령. 사지 절단 후 뇌간 생포를 최우선으로 집행한다."

 

선두에 선 조장의 기계적인 음성이 통신망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들의 총구 끝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타타타탕-!

 

인과율 에너지를 고밀도로 압축한 집속 탄환들이 허공을 가르며 우진의 일행을 향해 빗발쳤다.

 

탄환이 스쳐 지나가는 공간마다 현실의 사각 격자망이 파열되며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일었다.

 

민규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몸을 웅크렸고, 한민우 부소장이 반사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찰나의 순간, 우진이 앞으로 나섰다.

 

우진의 정수리 위 허공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으나,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전신에서 무형의 거대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아웃라이어의 절대 척력.

 

시스템이 구축한 인과율 법칙 자체를 거부하는 초월적인 반발력이 허공에 투명한 장벽을 형성했다.

 

키이이잉-!

 

쇄도하던 수십 발의 푸른 탄환들이 우진의 눈앞 30센티미터 지점에서 마치 끈적한 젤리에 처박힌 듯 일제히 정지했다.

 

탄환에 실려 있던 고밀도 인과율 벡터가 급격히 방향을 잃고 비틀리기 시작했다.

 

기동대원들의 카본 마스크 너머로 미세한 경악의 숨결이 스쳤다.

 

그들에게 하달된 사전 전술 시뮬레이션 어디에도 탄환이 공중에서 완전 정지하는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0.3초.'

 

우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위 코어의 명령이 하달되고 기계화된 단말들의 근육이 반응하기까지 발생하는 인과율의 데이터 병목.

 

우진의 손끝이 허공을 튕겨내듯 앞으로 뻗어나갔다.

 

콰아아앙-!

 

정지해 있던 수십 발의 집속 탄환들이 정반대의 궤적으로 폭발하듯 튕겨 나갔다.

 

파열된 인과율 역류가 기동대원들의 전술 방탄복을 강타했다.

 

선두에 섰던 대원 세 명의 가슴팍이 부서지며 뒤로 나뒹굴었고, 그들의 머리 위에 고정되어 있던 검은 네모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나갔다.

 

"지금이야! 뛰어!"

 

우진의 서늘한 외침과 함께 일행은 환기구를 뚫고 집하장 지하 계단실로 몸을 던졌다.

 

2. 암흑 속에 잠긴 도시

 

지하 계단실을 빠져나온 일행은 외곽 화물 반출로에 대기시켜 두었던 1톤 탑차에 간신히 몸을 실었다.

 

화물차 기사가 거칠게 클러치를 밟으며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짓이겼다.

 

쿠구구궁-!

 

탑차의 범퍼가 찌그러진 철제 펜스를 들이받고 부수며 광주 외곽의 한적한 국도로 뛰쳐나갔다.

 

룸미러 너머로 불길에 휩싸인 메가 허브 물류센터의 거대한 잔해가 멀어져 갔다.

 

하늘을 찌를 듯 솟구치는 검은 연기 기둥 위로 새벽의 여명이 푸르스름하게 번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민규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수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운전대를 쥔 화물차 기사의 얼굴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살긴 뭘 살아. 앞을 봐라.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기사의 낮은 목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들어 앞유리 너머를 응시했다.

 

국도를 벗어나 서울로 진입하는 외곽순환도로 톨게이트 부근에 이르자, 기괴할 정도로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로등은 전부 꺼져 있었고, 도로 위의 신호등은 완전히 먹통이 되어 붉고 푸른 불빛 대신 공허한 검은 렌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백 대의 차량이 엉켜 멈춰 선 채 끝없는 경적을 울려댔고, 도로변의 아파트 단지와 상가 건물들은 단 하나의 불빛도 밝히지 못한 채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암흑.

 

도시는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지직, 지지지직-.

 

대시보드 위에 놓여 있던 아날로그 단파 수신기에서 거친 노이즈를 뚫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주 아날로그 은신처에 머물고 있는 한서연 기자의 목소리였다.

 

"우진 씨! 들려요? 제 목소리 들려요?"

 

우진이 무전기 마이크를 쥐었다.

 

"듣고 있습니다, 서연 씨. 저희는 물류센터를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큐브 핏 에어 350만 대는 전량 쇼트되어 출하가 차단됐습니다."

 

무전기 너머에서 안도의 한숨이 짧게 터져 나왔으나, 이내 극도의 긴장감이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지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요. 놈들이 기어이 플랜 B를 가동했어요."

 

"서울 전체가 정전인 것 같더군요. 신호망도 전부 마비됐습니다."

 

"단순한 정전이 아니에요. 넥스트 큐브가 수년간 한국전력 계통 제어 소프트웨어와 상수도 관리망, 지하철 관제 시스템에 심어두었던 사각 격자 백도어를 일제히 활성화시켰어요. 수도권 전역의 전력 공급이 80퍼센트 이상 강제 차단됐고, 정수장 밸브가 원격 잠금되어 수돗물 공급마저 중단됐어요. 병원 중환자실과 국가 비상 통신망까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어요."

 

우진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스마트 밴드를 통한 전 국민의 규격화 가축화가 실패로 돌아가자, 놈들은 도시의 목줄을 직접 쥐어짜는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인간들을 공포와 혼란의 극단으로 몰아넣어, 결국 시스템의 비상 통제 체제에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려는 악랄한 각본이었다.

 

그때 무전기 너머로 익숙하고도 깊은, 그러나 쇠약한 기침이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진아……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15년간 역삼역 지하 7층 차폐 챔버에 갇혀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를 떠받치는 생체 프로세서(Node-0)로 착취당했던 아버지.

 

그 처절했던 구출 이후 처음으로 무전을 통해 마주하는 육성이었다.

 

우진의 메말랐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

 

짧은 한마디였지만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네가 해낸 일을 들었다. 장하다, 내 아들…… 350만 개의 칩을 홀로 막아내다니. 하지만 놈들의 발악이 극에 달했어. 서지훈은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스템의 유령과 상임이사회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강정호 박사의 호흡은 거칠었으나, 그 안에는 15년의 세월을 관통해 온 서슬 퍼런 결의가 담겨 있었다.

 

"플랜 B의 핵심 관제 서버는 육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은 애초부터 국가 인프라를 인질로 삼을 때를 대비해, 지상의 모든 법률과 물리적 타격에서 벗어난 고립 구역에 최종 지휘 거점을 구축해 두었어."

 

"그게 어디입니까?"

 

우진이 묻자, 잠시 무전기 너머에서 거친 종이 넘기는 소리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 넥스트 큐브의 추락

 

"그 전에, 우진 씨. 이것부터 확인해야 해요."

 

다시 서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수신기 너머로 타자기 소리와 함께 민우가 챙겨온 군용 위성 단말기의 신호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지금 여의도 증권가와 외신 금융망이 완전히 뒤집혔어요. 민규 씨가 본사 데이터 센터를 뚫고 유출했던 분산 백업 코어의 원본 회계 장부와 채용 비리, 그리고 방금 광주 물류센터에서 전량 폐기된 큐브 핏 에어의 폭발 영상이 저희 해외 독립 분산 서버를 통해 전 세계로 동시 폭로됐어요."

 

민규가 조수석에서 자신의 태블릿 화면을 켜며 탄성을 내질렀다.

 

"우진아, 이거 봐! 떴어!"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주식 시장 전산망의 붉은 그래프가 떠 있었다.

 

수도권 전력망 마비 속에서도 해외 전산망과 연동된 글로벌 금융 시장은 공포에 질려 패닉 셀을 쏟아내고 있었다.

 

[속보: 넥스트 큐브, 대규모 횡령 및 불법 생체 실험 의혹 폭로]

 

[신제품 '큐브 핏 에어' 전량 폭발 결함…… 초도 물량 350만 대 출하 중단 확인]

 

[넥스트 큐브 주가, 개장 직후 하한가 직행…… 시가총액 12조 원 증발]

 

[검찰 및 금융감독원, 넥스트 큐브 본사 및 페이퍼 컴퍼니 압수수색 착수]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쓰나미가 되어 넥스트 큐브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사망한 서지훈이 수십 년간 쌓아 올렸던 난공불락의 아성이, 그들이 신봉하던 완벽한 통제의 알고리즘과 함께 뿌리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사각형 규격에 가두어 통제하려던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외피가 벗겨지자, 그 안에서 썩어 문드러진 추악한 범죄 카르텔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서지훈이 구축해 둔 독점적 시장 지배력이 완전히 붕괴했어요."

 

서연의 목소리에 일말의 전율이 감돌았다.

 

"외국계 투자 자본들이 일제히 소송을 제기하며 발을 빼고 있고, 상임이사회 소속 위장 법인들의 법인 계좌가 줄줄이 동결되고 있어요. 지상에서의 넥스트 큐브는 이제 완전히 끝장난 거나 다름없어요."

 

"하지만 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우진이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지상의 껍데기가 부서졌으니, 남은 건 무력을 앞세운 플랜 B의 완성뿐이겠죠. 도시의 전력과 물을 틀어막은 채 정부를 협박해 합법적인 계엄과 비상 통제권을 요구할 겁니다. 그걸 막으려면…… 놈들의 심장을 완전히 멈춰야 합니다."

 

탑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상의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이 해체된다 한들, 당장 수도권 수천만 시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인프라 테러를 멈추지 못한다면 이 승리는 절반에 불과했다.

 

아니, 오히려 벼랑 끝에 몰린 쥐가 마지막 발악으로 독을 뿜어내듯, 넥스트 큐브의 잔류 군사 조직은 더욱 극단적인 파멸을 선택할 터였다.

 

"맞다, 우진아. 바로 그거다."

 

강정호 박사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지상의 혼란은 놈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패막이에 불과해. 상임이사회의 진짜 핵심 수뇌부는 이미 지상을 버리고 그곳으로 집결했다. 오메가-루프의 잔류 로그와 민규의 백도어 패킷을 교차 분석해 놈들의 최종 암호화 통신을 해독해 냈다."

 

4. 바다 위에 뜬 요새

 

무전기 너머에서 펜으로 종이를 긁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위치는…… 서해다."

 

강정호 박사의 단호한 선언에 탑차 안의 모두가 숨을 삼켰다.

 

"서해안의 외딴 무인도, 해도(海圖)상에 '소월도'라 표기된 폐쇄 구역이다. 인천항에서 서남쪽으로 42해리 떨어진 암초 지대 한복판이지."

 

"소월도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민우 부소장이 흠칫 놀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곳은 과거 군부 정권 시절 대공 레이더 기지로 쓰이다가 90년대 말에 공식 폐쇄된 유령 섬입니다. 민간인 출입 통제선에 묶여 있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곳인데……."

 

"그래, 바로 그 폐기지를 넥스트 큐브가 인수해 지하 암반 전체를 깎아내고 해상 요새를 구축해 두었다."

 

강정호 박사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하 5층 깊이의 암반 격벽, 군용 암호 위성망과 직결된 초고압 파라볼라 안테나, 그리고 육상 전력망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 소형 원자로를 갖추고 있지. 그 섬의 지하 메인 프레임이 바로 수도권 인프라를 마비시키고 있는 플랜 B의 총괄 지휘 서버다."

 

서해의 고립된 무인도.

 

육상 통신망이 완전히 절단된다 해도 해저 광케이블과 위성 링크를 통해 한반도 전역의 국가 기간망을 원격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궁극의 디지털 요새.

 

그곳이 바로 15년 동안 이어져 온 네모 프로젝트의 진짜 마지막 심장이었다.

 

"놈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진이 물었다.

 

"정오를 기점으로 국가 비상 통제 선언을 정부에 강요할 셈이다. 대통령실과 국방부의 비상 통신망마저 사각 격자 백도어로 장악해 가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수도권에 군 병력을 투입해 완전한 계엄 체제로 전환하려 하고 있어. 남은 시간은 채 여섯 시간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없었다.

 

도시의 전기가 끊기고 물이 마른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시민들의 공포는 임계치에 도달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 군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비상 통제망이 완전히 굳어지면, 그때는 요새를 부순다 한들 되돌릴 수 없는 국가적 파국이 닥칠 터였다.

 

"인천으로 갑니다."

 

우진이 지체 없이 결단을 내렸다.

 

"서해로 배를 띄워 소월도로 직접 침투하겠습니다. 그곳의 메인 서버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백도어 제어권을 탈환하겠습니다."

 

"기다려라, 우진아."

 

강정호 박사가 다급하게 아들을 불러 세웠다.

 

그 목소리에는 자식을 또다시 사지로 밀어 넣어야 하는 아비의 애끓는 고통이 묻어 있었다.

 

"그곳의 방어 체계는 지상의 본사 사옥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상임이사회의 마지막 군사 조직인 특수 집행 부대가 섬 전체를 요새화하고 있어. 해안선에는 군용 대함 레이더와 고속 초계정이 배치되어 있고, 상공은 위성 스캔 격자망으로 덮여 있다. 배 한 척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야."

 

"알고 있습니다."

 

우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제가 끝내지 않으면, 아버지가 15년간 겪었던 지옥이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반복될 테니까요."

 

무전기 너머에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이내 강정호 박사의 젖어 든 숨소리가 들려왔다.

 

"……인천 연안부두 제3물양장으로 가거라. 그곳에 15년 전 나와 함께 일했던 옛 연구원의 동생이 운영하는 소형 선박 수리소가 있다. 붉은 깃발이 꽂힌 '해성호'를 찾아라. 아날로그 디젤 엔진으로 개조되어 있어 전자기 스캔에 걸리지 않는 어선이다. 그 배라면 레이더의 사각지대를 파고들 수 있을 게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살아서…… 살아서 돌아오너라, 우진아."

 

통신이 끊기자, 우진은 운전석의 화물차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이미 룸미러를 통해 우진의 눈빛을 확인하고 있었다.

 

"연안부두라고 했지?"

 

기사의 거친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기름은 넉넉하다. 톨게이트 뚫고 서해안고속도로로 직행한다. 꽉 잡아라!"

 

쿠구구궁-!

 

1톤 탑차가 굉음을 내지르며 정체된 차량들 사이의 갓길을 뚫고 인천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5. 은빛 공명

 

차량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질주하는 동안, 우진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차량 내부의 시거잭에 연결된 구형 위성 데이터 단말기를 통해 한서연의 화상 통신이 연결되었다.

 

화면 속 서연의 등 뒤로는 파주 거점 7번의 낡은 벽돌 벽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침상 한구석에는 링거를 맞으며 안정을 취하고 있는 어린 이서진(Subject-04)과 그 곁을 지키는 윤채린의 모습이 보였다.

 

"우진 씨."

 

화면 너머 서연의 눈가에는 핏발이 서 있었으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상의 언론망 통제는 완전히 무너졌어요. 최진석 선배와 함께 해외 보안 서버를 통해 넥스트 큐브의 실체와 15년 전 연구소 참사의 전말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전 세계 통신사로 타전하고 있어요. 이미 외신 탑뉴스로 도배되기 시작했어요. 놈들이 지상에서 숨을 곳은 이제 단 한 뼘도 없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연 씨. 지상의 진실을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진의 진심 어린 말에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건 우진 씨와 민규 씨,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이 목숨을 걸고 증거를 가져와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잖아요."

 

서연의 시선이 화면을 뚫을 듯 우진을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은은하고 맑은 백색 네모(□)가 안정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대문 화재 현장에서 우진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그녀의 일상과 신념의 궤도였다.

 

그때, 화면 속에서 채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서연의 곁에 섰다.

 

채린의 정수리 위에는 티 없이 맑은 은빛 동그라미(○)가 영롱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우진이 화면을 마주하는 순간, 채린의 은빛 동그라미 중심부에 선명한 점이 맺히며 완벽한 과녁 형태(⊙)로 재구성되었다.

 

상호 인지와 공명의 식별 코드.

 

찌릿-.

 

우진의 텅 빈 정수리 부근에서 시린 전율이 일었다.

 

머리 위에 아무런 도형도 존재하지 않는 우진이었지만, 채린의 은빛 파동과 시선이 닿는 순간 공간을 초월한 깊은 유대감이 신경계를 타고 흘러들었다.

 

"아저씨."

 

채린의 맑고 단호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렸다.

 

"서진이는 무사해요. 생체 신호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방금 죽도 조금 먹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다, 채린아. 서진이를 잘 부탁한다."

 

"그것 때문에 부른 게 아니에요."

 

채린이 고개를 저으며 품 안에서 작고 낡은 흑백 나침반 하나를 꺼내 화면 앞에 비췄다.

 

15년 전 그녀의 부친 윤상혁 선임 연구원이 남겨두었던 유품 중 하나였다.

 

놀랍게도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이 아닌, 서해안의 특정 방위를 가리키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연구 기록에 적혀 있었어요. 서해의 소월도는 단순한 군사 기지가 아니라, 15년 전 화재 당시 빼돌려진 연구소의 프로토타입 양자 코어 자재들이 집약된 장소예요. 그곳의 시스템 격자망은 지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촘촘하고 기괴하게 꼬여 있어요."

 

채린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아저씨의 머리 위에서 도형이 사라진 건, 아저씨가 시스템의 수식을 거부한 아웃라이어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중앙 연산기가 아저씨라는 버그를 강제로 지워버리기 위해 공간 전체의 인과율을 쥐어짤 거예요."

 

"알고 있어. 각오하고 가는 길이다."

 

"혼자 싸우게 두지 않을 거예요."

 

채린이 자신의 은빛 동그라미를 가리키며 힘주어 말했다.

 

"파주 거점 7번의 대형 단파 안테나를 통해 제 동그라미의 척력 파동을 아저씨의 관자놀이 바이패스 단말로 증폭 송출할 준비를 마쳤어요. 아저씨가 요새의 핵심부에 도달했을 때, 제가 여기서 시스템 격자망을 찢는 사각지대를 열어드릴게요. 그러니까…… 절대로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공간을 뛰어넘는 이레귤러들의 연대.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라 생각했던 아웃라이어의 길에,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 하나가 켜지는 순간이었다.

 

우진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깊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 믿고 있겠다."

 

화상 통신이 종료되고, 탑차는 어느덧 잿빛 서해 바다의 짠내가 훅 끼쳐오는 인천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6. 서해로 향하는 칼날

 

인천 연안부두 제3물양장은 전력 마비의 여파로 짙은 어둠과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바닷바람을 타고 녹슨 쇠 냄새와 비릿한 갯벌 냄새가 섞여 들었다.

 

부두 안쪽 후미진 선착장, 강정호 박사가 말했던 붉은 깃발이 꽂힌 낡은 목선 한 척이 어둠 속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선체 측면에 페인트가 벗겨진 채 '해성호'라는 선명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우진 일행이 탑차에서 내려 선착장으로 다가서자, 선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랜턴을 비추며 나타났다.

 

노인은 우진의 얼굴, 특히 오른쪽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흉터를 유심히 응시하더니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강 박사님의 아들이로군. 눈매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어."

 

"배를 쓸 수 있겠습니까?"

 

우진이 묻자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엔진실 해치를 걷어찼다.

 

"엔진은 이미 예열해 뒀다. 전자 제어 장치 따윈 하나도 없는 순수 기계식 8기통 디젤이다. 놈들의 레이더나 전자기 스캔에는 그저 둥둥 떠다니는 통나무 토막 하나로 보일 게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면 상황이 다를 텐데."

 

노인이 서쪽 밤하늘을 가리켰다.

 

먹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칠흑 같은 서해 상공 멀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진의 감각에는 선명하게 잡히는 거대한 이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상의 전산망이 마비된 것과 대조적으로, 서해 바다 상공에는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엉킨 거대한 입체 사각 격자망(Grid)이 하늘 전체를 돔 형태로 뒤덮고 있었다.

 

그 격자망의 정점, 모든 데이터 회선과 인과율의 꼭두각시 줄이 굵은 쇠사슬처럼 모여드는 소실점에 바로 소월도가 위치해 있었다.

 

"놈들이 이미 서해 상공을 전면 봉쇄했습니다."

 

한민우 부소장이 쌍안경을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소월도 반경 20해리 이내에 접근하는 모든 선박과 항공기를 적으로 간주하고 격침하겠다는 암호 통신이 감청됐어요."

 

"그래도 갑니다."

 

우진이 배 위로 뛰어올랐다.

 

송민규와 한민우, 화물차 기사가 그 뒤를 따랐다.

 

탕, 타앙-!

 

노인이 굵은 계류 로프를 걷어내자, 육중한 디젤 엔진이 묵직한 고동음을 토해내며 칠흑 같은 바다를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스크루가 물살을 가르며 하얀 포말을 일으켰다.

 

연안부두의 불 꺼진 실루엣이 빠르게 뒤로 밀려나고, 사방은 오직 출렁이는 검은 파도와 차가운 밤안개만이 가득 들어찼다.

 

우진은 뱃머리에 우뚝 서서 안개를 뚫고 서쪽을 응시했다.

 

정수리 위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뇌간과 신경망 속에는 15년 전 아버지가 심어두었던 방화벽 백신이, 그리고 채린과 서연이 보내온 자유의지의 파동이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넥스트 큐브의 지상 왕국은 무너졌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바다 너머, 인간을 가축으로 사육하려 했던 통제 시스템의 마지막 심장을 도려내는 일뿐이었다.

 

파도가 뱃전을 거세게 때리며 물보라를 흩뿌렸다.

 

반격의 서막이 올랐고, 아웃라이어의 칼날은 마침내 서해의 심연을 향해 똑바로 겨누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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