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개입
1. 썰물의 잔재
사무실 공기는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본사 감사 1팀이 휩쓸고 지나간 기획 2팀의 플로어는, 거대한 태풍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황량하고 서늘했다.
쫓겨나듯 끌려간 박민재 팀장의 빈자리는 책상 위의 모니터 전원조차 켜지지 않은 채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서랍은 아무렇게나 뒤틀려 열려 있었고, 흩어진 서류 뭉치 사이로 그가 늘 신경질적으로 씹어 삼키던 담배 향 탈취제의 비릿한 잔향만이 남아 있었다.
팀원들은 약속이나 한 듯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타닥, 타닥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마저 허공에서 겉돌았다.
그 누구도 박민재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가 감사팀 수사관들에게 팔을 붙들려 나가면서 내뱉었던 단말마 같은 비명, '그놈들이 날 버렸다'는 그 끔찍한 절규는 벽지 틈새마다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 유령 같았다.
우진은 모니터 모서리에 꽂아둔 사원증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원증에 박힌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의 무기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년 대리 강우진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테헤란로의 빌딩 숲에 자신을 갈아 넣으며 체득한 처세술은, 오직 튀지 않고 시키는 일에 고개 숙이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십 시간 동안 겪은 일들은 평범했던 그의 삶을 완전히 궤도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기하학적 도형들
거리를 메운 수천 명의 직장인 머리 위에 떠 있던 백색 네모(□)
그 무기력하고 규칙적인 일상의 반복을 뜻하던 그 도형들이, 실은 누군가에 의해 완벽하게 재단된 거대한 통제의 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슴속을 짓눌렀다.
"강 대리님…."
옆자리 파티션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부름이 들려왔다.
김 주임이었다.
평소 발랄하게 사내 메신저를 울려대던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수리 위에는 여전히 은은한 빛을 내뿜는 백색 네모가 규칙적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백색의 테두리는 평소보다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 환경의 공포와 긴장이 그녀의 안정된 궤도조차 미세하게 교란하고 있는 증거였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아, 네. 정리할 게 조금 남아서요. 김 주임님은 먼저 들어가세요. 오늘 여러모로 놀라셨을 텐데."
우진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김 주임은 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가방 끈을 꼭 쥐었다.
"대리님, 아까 박 팀장님이 하신 말씀… 진짜일까요?"
"어떤 말이요?"
"그… 누군가 자기를 시켰다느니, 버려졌다느니 하던 거요. 정말 회사 안에 그런 거대한 비리가 또 있는 걸까요?"
"글쎄요. 감사팀이 조사하면 밝혀지겠죠. 우리가 신경 쓸 영역은 아닙니다. 우린 그저 내일 출근해서 밀린 기획안이나 마무리하면 돼요."
"…그렇겠죠? 괜히 무서워서요. 저 먼저 가볼게요. 대리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김 주임이 목례를 하고 조심스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머리 위 백색 네모가 문밖으로 멀어지며 엘리베이터 홀의 주황빛 조명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진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15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 강정호가 남긴 물건이었다.
빛바랜 양장본 수첩의 모서리는 닳아 헤져 있었고, 그 안에는 아버지가 남긴 복잡한 수학 공식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우진은 오늘 옥상에서 자신이 연필로 덧붙여 적었던 메모를 다시 응시했다.
'네모(□): 정체와 반복, 시스템에 순응하는 안정된 일상의 궤도.'
'세모(△): 붕괴와 충돌, 파동. 삶의 방향이 급격히 꺾이거나 절단되는 파멸의 궤도.'
'동그라미(○): 미지의 가능성.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이레귤러(Irregular).'
그리고 색상의 법칙.
백색은 온전히 개인의 자유의지와 자연스러운 환경 변화가 빚어낸 일상의 궤도였다.
반면 칠흑 같은 검은색은 보이지 않는 외부 세력의 개입과 강제 조작이 낳은 왜곡된 파멸의 궤도였다.
박민재의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것은 분명 검은 세모였다.
그리고 그 세모의 꼭짓점에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상공 어딘가로 뻗어나가는 칠흑의 잔상이 매달려 있었다.
'그놈들이 날 버렸다.'
그 말은 단순한 궁지에서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박민재는 태성C&I라는 거대한 기업조차 하수인으로 부리는 정체불명의 시스템, 이른바 '네모 프로젝트'의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찌르르.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의 유년기 수술 흉터가 날카롭게 박동했다.
시신경을 긁어내는 듯한 두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진은 엄지손가락으로 흉터를 깊게 짓누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수첩을 덮어 품속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 사옥 안에, 이 테헤란로 한복판에 더 머물다가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가방을 챙겨 일어선 우진은 텅 빈 사무실의 형광등을 끄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왔다.
2. 퇴근길의 붉은 신호
테헤란로의 밤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넘쳐났지만, 우진의 눈에 비친 도시는 거대한 기하학의 감옥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수백 명의 인파.
야근을 마치고 지친 걸음으로 지하철역 입구를 향해 쏟아져 들어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예외 없이 백색 네모가 질서정연하게 떠 있었다.
1변의 길이가 약 15센티미터에 달하는 반투명한 정육면체에 가까운 형상들.
그것들은 사람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미세하게 위아래로 흔들릴 뿐, 정해진 격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안정.
사회가 강요하고 시스템이 보장하는 평온한 궤도.
그러나 그 평온함은 언제든 외부의 의지에 의해 칠흑의 어둠으로 물들거나, 붉은 파동으로 찢겨나갈 수 있는 모래 위의 성에 불과했다.
우진은 강남역 2호선 지하 개찰구로 내려갔다.
지하철역 특유의 후텁지근하고 퀴퀴한 쇳가루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퇴근길 러시아워는 지났지만 승강장은 여전히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스크린도어 너머의 어두운 선로에서는 서늘한 풍압이 불어오고 있었다.
우진은 승강장 기둥 옆에 기대어 서서 주머니 속의 손을 쥐락펴락했다.
유년기 수술 흉터가 계속해서 미약하게 욱신거렸다.
이 통증은 타인의 궤도를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시공간의 인과에 비정상적인 왜곡이 발생할 때 찾아오는 일종의 경고 신호였다.
'왜 강남역이지?'
역삼역에서 일어났던 대기업 임원의 사망 사고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도 사고가 일어나기 3분 전, 포털 뉴스에 이미 사망 속보가 떠 있었다.
시스템은 인간의 죽음마저 사전에 스케줄링하고 전산에 입력해 둔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머리 위에서는 궤도가 파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진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승강장에 서 있는 승객들의 정수리를 훑었다.
백색 네모, 백색 네모, 백색 네모….
지친 표정으로 스마트폰 쇼츠를 넘겨보는 30대 남성.
통화하며 쇼핑백을 고쳐 쥐는 중년 여성.
단속적인 대화를 나누는 대학생 무리.
모두가 규격화된 백색 네모의 궤도 안에서 안전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징-
고막을 직접 긁는 듯한 기괴한 이명이 귓전을 때렸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불에 달군 바늘로 찔린 것처럼 타는 듯한 격통을 토해냈다.
"윽…!"
우진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삼키며 기둥을 짚었다.
눈앞의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더니, 승강장 중앙, 스크린도어 3-2번 구역 부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파동이 시신경을 강타했다.
붉은빛이었다.
하지만 역삼역에서 보았던 대기업 임원의 붉은 세모와는 결이 달랐다.
검은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타오르는 핏빛의 붉은 세모(△).
그것은 타의에 의한 공작이나 조작이 아니었다.
순수한 우연, 혹은 통제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가 한 생명을 집어삼키려 할 때 발생하는 본질적인 파멸의 궤도였다.
우진의 시선이 그 붉은 세모의 진원지로 내리꽂혔다.
정수리에 그 위험천만한 세모를 달고 있는 존재는, 놀랍게도 어른이 아니었다.
노란색 유치원 원복 조끼를 입고 파란색 가방을 맨, 고작 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3. 3-2번 승강장의 시한폭탄
"민우야, 가만히 있어. 엄마 가방에서 물병 좀 꺼낼 테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아이의 곁에는 쇼핑백과 유모차를 챙기느라 정신이 팔린 아이 엄마가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일상의 평온을 뜻하는 백색 네모가 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바로 코앞에서 자기 자식의 운명이 핏빛으로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로봇 장난감…!"
아이, 민우는 손에 쥐고 있던 작은 플라스틱 로봇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며 콩콩 뛰고 있었다.
민우의 정수리 위 약 10센티미터 상공에서 회전하는 붉은 세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윙-, 윙-
세모의 세 꼭짓점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회전하며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붉은색 잔상이 파편처럼 허공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이 소멸하기 직전에 내뿜는 단말마의 에너지였다.
'시간이 없어.'
우진의 뇌리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지난번 역삼역의 임원은 방관했다.
보이지 않는 배후의 거대한 질서에 압도당해, 그저 사고의 순간을 지켜보며 시계의 오차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 결과 남자는 처참하게 덤프트럭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그 후회가, 방관자로서의 죄책감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다.
'또 그냥 보고만 있을 텐가?'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박민재처럼 사내 권력욕에 눈이 멀어 시스템의 하수인이 된 자도 아니었고, 비리를 저지른 대기업 임원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수한 어린아이였다.
우진의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인의 궤도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차가운 이성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심장이 내지르는 고동이 그 이성을 산산조각 냈다.
쿵!
바로 그 순간, 민우의 손에서 작은 플라스틱 로봇 장난감이 미끄러졌다.
딱딱한 승강장 바닥에 떨어진 장난감은 경쾌한 파열음을 내며 스크린도어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하필이면 스크린도어 유리벽 하단, 선로와 승강장 사이의 틈새를 향해 직진했다.
"앗! 내 로봇!"
민우가 탄성을 지르며 장난감을 쫓아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엄마는 여전히 가방 바닥을 뒤지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민우야, 잠깐…!"
스크린도어가 열려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3-2번 도어의 비상탈출문 틈새, 노후화되어 유격이 벌어진 고무 패킹 사이로 장난감 팔 하나가 끼어들어 갔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선로 저편의 암흑 속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구구구궁-!
터널 벽면을 타고 2호선 전동차가 진입하는 둔중한 진동이 승강장 바닥을 뒤흔들었다.
스크린도어 상단의 경고등이 붉게 점멸하며 비프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기계음의 안내 방송이 울리는 순간, 장난감을 잡으려던 민우의 작은 발이 노란색 안전선 턱에 걸려 헛돌았다.
중심을 잃은 아이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스크린도어의 안전문 틈새로 아이의 상체가 빨려 들어가듯 기울어졌다.
머리 위의 붉은 세모가 한계치까지 팽창하며 피비린내 나는 진홍색으로 물들었다.
0.5초.
그 짧은 순간 뒤면, 열차가 들이닥치는 차가운 선로 바닥으로 아이가 추락하거나 비상문에 끼여 형체도 없이 으스러질 터였다.
4. 궤도의 강제 수정
망설일 틈은 없었다.
우진은 승강장 기둥을 박차고 전력으로 질주했다.
시야의 모든 풍경이 느리게 흘러갔다.
귀를 찢는 열차의 제동음, 뒤늦게 고개를 들며 경악으로 입을 벌리는 아이 엄마의 얼굴, 스마트폰을 보다가 멍하니 굳어버린 주변 승객들의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스쳐 지나갔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터져나갈 듯 뜨거워졌다.
'닿아야 해!'
우진은 슬라이딩하듯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거친 아스콘 타일 바닥에 무릎과 팔꿈치가 사정없이 갈려 나갔지만, 고통을 느낄 감각조차 마비되어 있었다.
콰아아앙-!
진입하는 전동차의 강풍이 머리칼을 거칠게 쥐어뜯었다.
아이의 작은 몸이 스크린도어의 틈새로 완전히 넘어가려는 찰나, 우진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홱!
우진의 억센 손아귀가 민우의 파란색 배낭 어깨끈과 노란 원복 조끼의 뒷덜미를 단단히 낚아챘다.
뼈마디가 부러질 듯한 충격이 우진의 어깨를 타고 척추까지 전해졌다.
"잡았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온 체중을 뒤로 실어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쾅-!
그와 동시에 거대한 쇳덩어리 열차가 스크린도어 너머의 선로를 무서운 속도로 짓이기며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브레이크 패드가 휠을 갉아먹는 비명 같은 쇳소리와 함께 뜨거운 마찰열이 스크린도어 틈새로 뿜어져 나왔다.
우진의 코앞 불과 5센티미터 거리에서 은빛의 육중한 열차 몸체가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지체만 있었어도, 우진의 손이나 아이의 머리가 그 쇳덩이에 갈려 나갔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털썩!
우진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나가떨어졌다.
승강장 바닥을 거칠게 구르며 안전선 안쪽으로 두 바퀴를 돈 뒤에야 간신히 멈춰 섰다.
"으아앙! 엄마!"
품 안에서 민우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운 채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 끝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보았다.
민우의 정수리 위에서 미친 듯이 회전하던 핏빛 세모(△)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쐐애액-!
팽창하던 붉은 세모의 꼭짓점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외부에서 가해진 거대한 물리력에 의해 날카로운 각이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붉은 파동이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한 백색의 섬광으로 정화되었다.
셋이었던 꼭짓점이 넷으로 나뉘고, 날카로운 경계면이 완벽한 90도의 직각을 이루며 맞물렸다.
백색 네모(□).
파멸과 절단의 궤도가 붕괴하고, 안정과 생존을 상징하는 순백의 정육면체가 아이의 머리 위에 찬연히 자리 잡았다.
그것은 그 어떤 진동도 없는, 지극히 견고하고 평온한 일상의 복귀였다.
'바뀌었다….'
우진의 가슴이 벅차오르는 전율로 요동쳤다.
정해진 죽음의 궤도.
피할 수 없는 참사로 예정되어 있던 세모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부수고 백색 네모로 재구성해 낸 것이었다.
인간은 시스템의 장기말이 아니었다.
정해진 운명의 틀은 외부의 직접적인 개입과 의지에 의해 바뀔 수 있었다.
"민우야! 내 새끼! 민우야!"
정신을 차린 아이 엄마가 사색이 되어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우진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제발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아이가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어서 안쪽으로 데려가세요."
우진은 뻐근한 팔을 털어내며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찢겨 나간 와이셔츠 소매 사이로 무릎과 팔꿈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가슴을 채운 고양감에 비하면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희열은 찰나에 불과했다.
5. 인과의 균열
찌지직.
차가운 얼음판이 갈라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귓전에 박혔다.
현실의 소리가 아니었다.
오직 우진의 뇌간과 시신경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영혼의 파열음이었다.
"…어?"
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진의 몸과 부딪히며 뒤로 물러섰던 승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승객들의 머리 위가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승강장에 서 있던 예닐곱 명의 승객들.
그들의 머리 위에 안정되게 떠 있던 백색 네모(□)의 표면에, 가느다란 실금들이 거미줄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쩌적, 쩌저적.
마치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나타나는 열팽창의 균열 같았다.
백색의 표면 사이로 미세한 빛의 파편들이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게… 무슨…?'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우의 세모를 네모로 강제로 펴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소멸해야 마땅했던 파멸의 에너지와 인과율의 충격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동이 되어 가장 가까운 주변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파동은 민우와 시공간적으로 가장 인접해 있던 무고한 승객들의 궤도에 고스란히 충돌하고 있었다.
특히 우진의 바로 오른편, 아이를 구하려던 우진의 팔꿈치에 밀쳐져 승강장 벤치 모서리에 부딪혔던 한 20대 청년 승객의 상태는 심각했다.
감색 후드티를 입고 백팩을 멘 평범한 취업준비생 차림의 청년이었다.
"커억…!"
청년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헛구역질을 하듯 목을 쥐어뜯으며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컥, 우웨엑…!"
"저기요, 괜찮으세요?"
주변에 있던 다른 승객이 놀라 청년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청년은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우진의 눈동자가 청년의 정수리로 향했다.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청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백색 네모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네 개의 모서리가 뒤틀리고 깨진 틈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과 불길한 붉은빛이 뒤엉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네모의 파편들이 공중에서 재조합되더니, 날카로운 모서리를 치켜세우며 서서히 기형적인 세모의 형태로 찌그러져 가고 있었다.
'안 돼….'
우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인과의 보존 법칙.
한 사람의 정해진 파멸을 강제로 걷어내면, 그 궤도에서 방출된 불길한 인과의 총량이 허공으로 증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 전이된다.
아이를 구했다는 오만한 성취감이 한순간에 지옥 같은 공포로 뒤바뀌었다.
내가 아이를 구한 대가로, 저 청년의 궤도가 파괴된 것인가?
청년은 비틀거리며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청년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렸다.
스피커폰 너머로 다급하고 찢어지는 듯한 중년 여성의 울음소리가 승강장의 소음을 뚫고 새어 나왔다.
"민수야! 어떡하니, 민수야…! 네 아버지 공장에서 크레인이… 크레인이 쓰러져서…!"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절규로 얼룩져 있었다.
청년, 민수의 손에서 스마트폰이 힘없이 떨어져 차가운 승강장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쨍그랑.
액정이 거미줄처럼 박살 난 화면 위로 '어머니'라는 세 글자가 깜빡거렸다.
청년의 머리 위에서 뒤틀리던 도형이 완전히 형태를 굳혔다.
그것은 칠흑의 어둠과 핏빛이 흉측하게 뒤엉킨, 완벽한 파멸의 '검붉은 세모(△)'였다.
우진은 못 박힌 듯 자리에 굳어버렸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찢어질 듯한 격통과 함께, 귓가에 차가운 기계적 냉소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시스템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는다.
궤도를 벗어난 자가 있다면,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삶을 제물로 삼아 균형을 맞춘다.
지하철 안내 방송이 열차 문의 닫힘을 알리며 무심하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우진은 자신이 열어젖힌 거대한 재앙의 첫 번째 문 앞에 오롯이 홀로 서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