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의 공포
1. 무너지는 지하 7층을 탈출하여
지하 7층 암반이 갈라지는 굉음은 지축을 뒤흔드는 거인의 단말마와 같았다.
천장에 매설된 고압 냉각 파이프들이 수축과 팽창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지며 뿜어낸 백색 질소 증기가 시야를 가렸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암흑 속에서, 우진은 왼팔로 의식을 잃은 피실험자 이서진을 품에 안고 오른어깨로는 부친 강정호의 메마른 팔을 단단히 둘러메었다.
“우진아, 날 두고 가라…… 내 몸은 이미 코어와 결손 에너지를 받아내느라 회복할 수 없다…… 서진이만 데리고…….”
“헛소리하지 마세요.”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갈비뼈의 미세 골절 부위가 폐를 찌르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5년 만에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대신 짊어진 세월, 이제 제가 갚을 겁니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발이나 움직이세요.”
우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강정호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치지직, 치직―!
어깨에 둘러멘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과 함께 절박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진 씨! 들려요?! 서대문 배수로 쪽으로 통하는 4번 환기구 셔터를 강제로 개방했어요! 3분 안에 올라오지 못하면 지하 전력선 폭발로 샤프트 전체가 매몰돼요!”
한서연의 다급한 비명이었다.
“지금 샤프트 하단 도달했습니다! 채린이한테 척력 광륜으로 상부 낙석을 막으라고 전해주세요!”
우진이 무전기에 소리친 순간, 샤프트 상공에서 은빛 동그라미의 눈부신 파동이 원형으로 펼쳐지며 떨어지던 수백 킬로그램의 콘크리트 슬래브를 바깥으로 튕겨냈다.
윤채린이 위쪽 비상 철계단 난간을 짚고 서서 은빛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저씨! 빨리요!”
채린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진은 초인적인 악력으로 서진과 아버지를 끌어안은 채 수직 철계단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머리 위의 도형이 사라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아웃라이어 척력이 중력을 밀어내듯 우진의 도약을 밀어 올렸다.
쿵―!
콰아앙!
일행이 4번 환기 셔터 틈새로 몸을 던져 빠져나온 바로 그 찰나, 지하 7층 코어 챔버가 완전히 함몰되며 거대한 분진 구름이 환기구를 타고 뿜어져 나왔다.
지하철 2호선 역삼역 변전실 뒤편의 노후 관리 통로 바닥에 주저앉은 네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서연이 달려와 피투성이가 된 강정호의 맥박을 짚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사님…… 살아계셨군요. 정말로 살아계셨어…….”
“한 기자…… 자네가 우진이를 지켜주었군…… 고맙네…… 정말 고마워…….”
강정호는 떨리는 손으로 서연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러나 감격에 젖어 있을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강정호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쿨럭…… 우진아……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내 품 안쪽…… 방수 포켓을 열어봐라…….”
우진은 황급히 아버지의 해진 연구원 가운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피로 물든 두꺼운 특수 재질의 반투명 태블릿 단말기였다.
화면에는 넥스트 큐브와 상임이사회의 최상위 기밀 워터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PROJECT NEMO : PHASE 3 OPERATION DIRECTIVE — D-DAY LAUNCH].
붉은 글씨로 번쩍이는 화면을 본 우진과 서연, 채린의 눈동자가 일제히 얼어붙었다.
2. 스마트 헬스케어의 가면
“이게…… 대체 뭡니까, 아버지?”
우진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자, 넥스트 큐브가 극비리에 추진해 온 신제품의 설계도와 마케팅 기획서가 줄줄이 펼쳐졌다.
화면 상단에는 세련되고 미니멀한 디자인의 무광 블랙 스마트 밴드가 3D 그래픽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제품명은 [큐브 핏 에어(Cube Fit Air)].
겉보기에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출시하는 최첨단 스마트 워치나 피트니스 밴드와 다를 바 없었다.
실시간 심박수 측정, 수면 패턴 분석, 스트레스 완화 뇌파 유도, 체지방 분석, 그리고 혈당 무채혈 모니터링까지 지원하는 혁신적인 차세대 웰니스 기기.
심지어 가격조차 일반 보급형 밴드 수준인 4만 9천 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서연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기획서의 수치를 읽어내려갔다.
“사전 예약자만 이미 1,200만 명……? 내일 아침 9시 정각을 기점으로 전국 통신사 대리점과 대형 마트,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동시 배포 및 무료 체험단 300만 대가 당일 특송으로 풀린다고요?”
“그게 바로 서지훈과 상임이사회가 판을 짠 방식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강정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숨을 몰아쉬었다.
“역삼역의 중앙 코어는…… 15년 전의 구형 방식이었어. 5,100만 명의 엔트로피를 한곳에 모아 연산하려니 발열과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내가 그 결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지. 하지만 서지훈은 깨달은 거다. 하나의 거대한 코어를 두는 대신…… 인간 스스로가 단말기가 되어 서로의 궤도를 얽어매는 분산형 네트워크를 만들면 된다는 것을.”
우진은 방금 전 자신이 지하 7층 콘솔에서 박살 냈던 3세대 생체 칩, ‘프로토타입 파라독스’를 떠올렸다.
살아있는 신경처럼 꿈틀거리던 반투명한 나노 바이오 섬유질과 그 중심에서 박동하던 극미세 다이아몬드 코어.
우진이 설계도를 하단으로 스크롤하자 숨겨진 내부 하드웨어 스펙이 드러났다.
밴드의 안쪽 손목 접촉 패드.
사용자의 피부와 맞닿는 티타늄 전극 표면에 직경 5나노미터의 미세 액체 캡슐 수만 개가 코팅되어 있었다.
그 캡슐 안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서지훈이 자랑하던 3세대 나노 바이오 제어 전극이었다.
“피부에 착용하는 순간…… 밴드 뒷면에서 미세한 온열 자극과 함께 나노 전극이 땀구멍과 모세혈관으로 스며듭니다.”
우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굳어졌다.
“사용자는 그저 미세 전류가 흐르는 혈당 측정 기능이나 체지방 분석 기능이라고 착각하겠지만…… 침투한 나노 섬유질은 혈류를 타고 뇌간으로 직행해요.”
“그래…… 맞다…….”
강정호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체내로 들어간 나노 섬유질은 뇌의 보상 회로와 전두엽 시냅스에 결합한다.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명목으로 특정 알파파를 강제 유도하고, 도파민 분비를 억제하여 분노나 저항감, 의문을 품는 감정 자체를 마비시키지. 그리고 손목에 감긴 밴드는 통신망을 통해 24시간 실시간으로 착용자의 위치와 생체 데이터를 상임이사회 서버로 전송한다.”
“착용자의 머리 위에 뜨는 도형은 어떻게 되는 거죠?”
채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강정호의 메마른 입술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절망 그 자체였다.
“완벽한 칠흑의 검은 네모(■)다. 더 이상 흔들림도, 의심도, 반발도 없는 고정된 규격품. 밴드를 착용하고 3일이 지나면 뇌세포와 나노 전극이 100% 동기화되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영구히 거세된다. 시스템이 내리는 지령을 자신의 본능이자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되지.”
3. 1,200만 명의 목줄
“단 3일 만에……?”
서연의 손에서 수첩이 툭 떨어졌다.
기자로서 수많은 권력형 비리와 음모를 취재해 왔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재앙이었다.
총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군사 독재가 아니었다.
감옥에 가두고 매질을 가하는 폭력이 아니었다.
세련된 광고와 편리한 기능, 건강을 챙겨준다는 친절한 속삭임 뒤에 숨어, 스스로 목줄을 차게 만드는 완벽한 가축화.
“사전 예약자만 1,200만 명입니다. 게다가 이동통신 3사와 제휴해서 최신 스마트폰을 개통하면 사은품으로 무조건 지급하도록 계약이 끝났어요.”
서연이 단말기 속 유통 계약서를 넘기며 경악했다.
“정부 기관과 대기업들조차 ‘임직원 건강 증진 복지 캠페인’이라는 명목으로 전 사원에게 의무 착용을 권고하고 있어요. 내일 아침 9시가 지나 배송이 시작되면, 일주일 안에 대한민국 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저 검은 목줄을 차게 돼요!”
지하 환기구 통로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마치 도시 전체가 질식해 가는 비명처럼 들렸다.
역삼역 지하 7층의 코어를 부수고, 서울 상공의 사각 격자망을 찢어발겼다고 생각했던 승리감은 산산조각 났다.
중앙의 거대한 탑을 무너뜨렸더니, 적들은 이미 수천만 개의 미세한 감옥을 만들어 각자의 손목에 채울 준비를 끝내둔 상태였다.
“디데이(D-Day)…….”
우진이 중얼거렸다.
단말기 화면 하단에 굵은 적색 폰트로 박혀 있는 단어였다.
[LAUNCH COUNTDOWN: D-DAY 09:00:00].
현재 시각은 새벽 2시 15분.
전국에 큐브 핏 에어가 살포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채 7시간도 되지 않았다.
“우진아, 이 밴드가 시중에 풀리는 순간, 네가 가진 아웃라이어의 힘도 무력해진다.”
강정호가 피 묻은 손으로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도시 전체가 1,200만 개의 검은 네모로 뒤덮이면, 그들이 형성하는 거대한 항상성 네트워크가 너라는 단 하나의 특이점을 이물질로 규정하고 현실 세계에서 완전히 짓밟아버릴 게다. 길을 걷는 모든 시민이 넥스트 큐브의 감시 카메라가 되고, 너를 향해 칼을 겨누는 집행관이 되는 거야.”
온 세상이 적이 되는 악몽.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구가 스스로의 의지를 잃은 채 시스템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신을 사냥하는 세상.
서지훈이 죽어가며 내뱉었던 저주가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시민들은 제 발로 찾아와 돈을 지불하고 이 목줄을 기꺼이 차게 될 것이다!’
우진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들끓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관자놀이를 뚫었던 그 잔인한 칩을, 이제는 온 나라의 사람들에게 건강이라는 거짓 가면을 씌워 먹이려 하고 있었다.
“막아야 합니다.”
우진의 목소리에 서릿발 같은 결의가 실렸다.
“내일 아침 9시. 첫 번째 택배 상자가 문 앞에 도착하기 전에, 저 끔찍한 물건들이 세상 밖으로 단 한 대도 나가지 못하게 틀어막아야 해요.”
4. 물류 기지의 거대한 그림자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죠?”
채린이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전국에 배송된다면 공장이나 물류 창고가 한두 군데가 아닐 텐데요.”
“아니다, 채린아.”
강정호가 고개를 저으며 단말기 화면의 물류 탭을 눌렀다.
“3세대 나노 바이오 칩은 극도의 민감성을 지니고 있어. 다이아몬드 코어의 양자 상태를 유지하고 나노 섬유질의 활성도를 보존하려면, 출하 직전까지 영하 40도의 초저온 질소 챔버에 보관되어야만 한다. 전국에 그런 특수 콜드체인 시설을 갖춘 초대형 허브 터미널은 단 한 곳뿐이야.”
화면이 전환되며 위성 지도 한 장이 떠올랐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산자락에 은폐된 거대한 부지.
[넥스트 큐브 수도권 통합 메가 허브 물류센터(Mega Hub Terminal)].
축구장 15개 크기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복합 물류 기지였다.
단말기에 표시된 보관 물량 데이터가 우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초저온 B블록 특수 보관동: 큐브 핏 에어 초도 물량 350만 대 적재 완료].
[전국 16개 서브 터미널 간선 수송 트럭 480대 집결 중].
[출하 승인 개시 시각: 오전 05:00].
“5시……!”
서연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이 2시 20분이에요! 앞으로 2시간 40분 뒤면 전국으로 향하는 대형 트럭들이 저 물류센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는 뜻이에요!”
일단 트럭들이 고속도로를 타고 흩어지면 물리적으로 회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말기에는 출하 프로토콜의 세부 내용까지 적혀 있었다.
오전 5시에 메가 허브를 출발한 간선 트럭들은 오전 7시까지 각 지역 거점에 도착하고, 오전 9시 정각에 전국 대리점 개점과 동시에 배송 기사들이 문 앞 배송을 시작한다.
완벽하게 계산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파멸의 시간표였다.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눈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트럭들이 출발하기 전에 광주 메가 허브 물류센터로 침투합니다. B블록 특수 보관동의 메인 서버를 장악해서 기기들의 펌웨어를 통째로 오염시켜야 해요.”
“오염시킨다고요……?”
서연이 되물었다.
“네. 저 기기들은 나노 전극의 전압과 뇌파 동기화 주파수를 제어하는 펌웨어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백신 코드를 서버에 주입해 펌웨어를 비틀어버리면, 전원을 켜는 즉시 기기 내부의 나노 코어가 쇼트를 일으키며 자가 방전될 겁니다.”
강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펌웨어가 파괴되면 기기는 단순한 플라스틱 껍데기로 전락하지. 전자기기 안전 인증 오류와 배터리 과열 경보가 동시에 뜨면서, 시스템 전체에 강제 리콜 명령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긴 넥스트 큐브의 심장부나 다름없어요!”
채린이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역삼역 코어가 무너졌다는 걸 상임이사회도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물류센터는 지금 군대 수준의 경비 병력과 감사실 요원들이 깔려 있을 텐데, 이 부상을 입고 거길 어떻게 뚫겠다는 거예요?”
“뚫어야 해.”
우진은 채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우리가 멈추면, 내일 아침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네모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아버지와 네가 15년 동안 겪었던 그 지옥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어.”
채린은 우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저도 가요. 제 은빛 동그라미로 물류센터 센서망을 교란할게요.”
“아니, 채린아. 너는 서연 씨와 함께 아버지를 파주 벙커로 모셔다드려.”
“우진 씨!”
서연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혼자 가겠다는 거예요?! 그건 자살행위예요!”
“혼자가 아닙니다.”
우진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광주로 가기 전에, 테헤란로 지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원군을 만날 겁니다.”
5. 폭풍 속으로
지하철 2호선 역삼역 3번 출구 인근의 골목길.
역삼역 일대는 코어 붕괴의 여파로 도로 곳곳이 함몰되고 신호등이 꺼져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경찰차와 소방차의 붉은 경광등이 밤안개 속을 어지럽게 가르는 사이, 골목 어귀에 시동을 켠 채 대기하고 있던 육중한 1톤 탑차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고 있었다.
탑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낯익은 체구의 화물차 기사가 뛰어내렸다.
“강 대리님! 무사하셨군요!”
기사의 얼굴은 안도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뒤편 탑차 적재함 문이 열리며 송민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진아!”
성산대교에서 투신 직전 우진에게 구출되었던 고교 동창 송민규였다.
파주 거점 7번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어야 할 민규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서연과 채린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민규야, 몸은 좀 어때?”
우진이 다가가 친구의 어깨를 짚었다.
“네 덕분에 목숨 건졌는데 몸 사릴 때냐? 한민우 부소장님한테 대강 이야기 들었다. 네가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민규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내가 운영하던 스타트업이 물류 IoT 관제 솔루션 개발사였잖아. 큐브 네트웍스 놈들이 내 회사를 집어삼키고 세탁 계좌로 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물류 전산망 백본 때문이었어. 광주 메가 허브 물류센터의 화물 반출입 게이트 시스템, 내가 짠 코드가 아직 심어져 있다.”
우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외벽 센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보안 백도어가 있다는 뜻이야?”
“그래. 관제실 메인 서버와 직결되는 지하 배전실 환기 덕트 라인까지 내가 다 꿰고 있어. 내가 직접 운전해서 너를 B블록 특수 보관동 코앞까지 데려다줄게.”
민규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맑고 안정된 백색 네모가 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우진의 손을 잡고 살아난 친구의 눈빛에는 더 이상 사기 누명에 질식하던 나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맙다, 민규야.”
우진이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다.
그때, 탑차 조수석 문이 열리며 한민우 부소장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강우진 군, 자네 혼자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네.”
단파 무전기와 구형 아날로그 주파수 분석기를 목에 건 한민우가 차에서 내렸다.
그는 15년 만에 살아서 돌아온 오랜 벗 강정호를 발견하자마자 굳어버렸다.
“정호……! 자네, 정말로…….”
“민우…… 살아있었구나…….”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마주한 두 늙은 과학자의 손이 허공에서 굳게 맞잡혔다.
말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눈에 맺힌 눈물과 주름진 손의 온기만으로도 지나온 생지옥의 세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호야, 넌 서연 양과 채린 양을 따라 파주로 가라. 내가 사비로 만들어 둔 그 벙커는 완벽한 패러데이 케이지라 어떤 전파도 닿지 않아. 몸을 추스르고 있어라.”
한민우가 단호하게 말하며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 군, 내가 15년 전 자네 아버지와 함께 개발했던 광대역 전자기 펄스(EMP) 발생기 시제품 두 대를 탑차에 실어두었네. 비록 반경은 30미터에 불과하지만, B블록 서버실 주변의 기계화 경비병들과 감시 카메라를 일시에 무력화할 수 있을 걸세.”
완벽한 진용이었다.
소프트웨어 백도어를 쥔 송민규, 아날로그 하드웨어 무기를 준비한 한민우, 그리고 시스템의 궤도를 꿰뚫어 보는 아웃라이어 강우진.
우진은 서연과 채린을 돌아보았다.
“서연 씨, 파주로 복귀하면 최진석 기자와 연결해서 인터넷 독립 방송망을 대기시켜 주세요. 우리가 물류센터 펌웨어를 터뜨리는 순간, 큐브 핏 에어의 실체와 넥스트 큐브의 생체 통제 음모를 전국에 동시 폭로해야 합니다.”
“알겠어요. 공중파 전산망이 막혀도 해외 분산 서버를 통해 유튜브와 모든 SNS 라이브 피드로 영상을 강제 송출할 준비를 끝내둘게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요, 우진 씨.”
서연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 역시 우진의 손을 꼭 쥐었다.
“아저씨, 조심해요. 서진이는 제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고맙다.”
우진은 품에 안고 있던 서진을 채린에게 인계하고, 아버지 강정호의 메마른 어깨를 단단히 감싸 쥐었다.
“아버지, 금방 끝내고 돌아가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기다리고 계세요.”
강정호는 아들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무사해야 한다…… 살아남아라, 내 아들아.”
우진은 뒤돌아보지 않고 탑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민규가 클러치를 밟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디젤 엔진의 거친 굉음과 함께 1톤 탑차가 빗물 고인 테헤란로 아스팔트를 박차고 나아갔다.
경부고속도로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향하는 칠흑 같은 고속도로 저편, 먹구름 낀 새벽하늘 아래로 거대한 물류 기지의 불빛이 붉은 맹수의 눈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인류 전체를 검은 네모의 가축으로 전락시키려는 디데이(D-Day)의 카운트다운.
남은 시간 2시간 20분.
우진은 조수석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둠을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가, 다가올 혈투를 예고하듯 서늘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