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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47화

단호한 거절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무너지는 낙원의 허상

 

액체 헬륨의 백색 기화 가스가 갈라진 바닥 틈새에서 맹렬한 기세로 치솟아 올랐다.

 

영하 269도에 달하는 극한의 초저온 냉기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메인 콘솔의 강철 외피가 새하얗게 얼어붙으며 쩌적거리는 비명을 토해냈다.

 

지하 7층 암반 공동을 짓누르는 침묵 속에서, 콘솔 정중앙에 깊숙이 틀어박힌 마스터 해방 키 '프로메테우스'의 몸체가 고동치기 시작했다.

 

투명한 크리스털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백의 광휘는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구성하던 허수의 좌표들을 근본부터 태워 없애는 인과율의 불길이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붉은 자폭 테르밋 회로가 쇼트를 일으키며 단락되자, 푸른 홀로그램 빔으로 투사되던 서지훈의 얼굴이 흉측하게 뒤틀렸다.

 

독립 양자 아카이브 메모리의 연산 회로가 맹렬한 발열을 일으키며 붉은 경고창을 허공에 띄워 올렸다.

 

사각 격벽의 테두리가 비명에 가까운 고주파음을 내뿜으며 좌우로 흔들렸다.

 

“미련하구나, 강우진.”

 

양자 메모리 속에서 재구성된 서지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적인 차가움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수만 개의 픽셀 단위로 잘게 쪼개지는 홀로그램의 윤곽선 끝자락에는 숨길 수 없는 격렬한 분노와 균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자폭 회로를 태웠다고 해서 네가 이긴 줄 아는가? 이 코어를 강제로 해체하고 시스템을 셧다운시키는 순간, 지난 15년 동안 억눌려 있던 1,400만 건의 결손 엔트로피가 지상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서울 상공의 사각 격자망이 거둬지면 사람들은 다시 무작위의 지옥에 내던져질 뿐이야.”

 

서지훈의 잔류 인격체가 허공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깨져나간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유리 렌즈를 통해 1998년 그날 밤의 참극이 피비린내 나는 잔상으로 피어올랐다.

 

비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 낡은 연립주택의 헐거운 철문, 붉은 피웅덩이 속에 널브러져 있던 열 살배기 소년의 부모와 일곱 살 어린 여동생.

 

그리고 피 묻은 식칼을 든 채 알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사채 빚에 미친 살인마의 흉측한 눈빛이 허공을 메웠다.

 

“우연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필연적인 인과도 없이 일상을 짓밟아 뭉개는 맹목적인 파괴! 내가 만든 사각 격자망은 그 비극을 거세하기 위한 유일한 구원의 질서였다!”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외침이 지하 7층 암반 벽면에 부딪혀 천둥처럼 메아리쳤다.

 

“누가 실패하고, 누가 파멸하며, 누가 언제 죽어야 하는지를 정밀한 확률로 배분해 두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짐승들은 제 손으로 서로를 물어뜯어 세상을 멸망시키고 만단 말이다! 네가 지금 부수려는 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무고한 수천만 명을 지탱해 온 유일한 울타리란 말이다!”

 

머리 위에 3차원의 면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텅 빈 뼈대만 남아 삐걱거리던 서지훈의 '암흑의 프레임'이 그 광기를 대변하듯 사납게 회전했다.

 

수백 가닥의 가상 와이어가 허공에서 내려와 그의 신경망을 쥐어짜며 광기를 부추기고 있었다.

 

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 일그러진 망령을 응시했다.

 

우진의 정수리 위에는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었다.

 

어떤 기하학적 도형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절대적인 공허.

 

시스템의 수식과 통제를 완벽하게 튕겨내는 아웃라이어의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게 네가 만든 세계의 실체냐?”

 

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갈비뼈의 미세 골절과 온몸의 타박상으로 인해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의 두 눈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우연한 비극이 무서워서, 모든 사람의 삶을 사전에 계획된 도살장으로 밀어 넣은 게 네가 자랑하는 유토피아인가?”

 

“도살장이 아니다! 배분이다!”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우진의 턱밑까지 쇄도하며 핏대를 세웠다.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사회 전체의 엔트로피가 평형을 이룬다! 네놈의 아비, 강정호가 15년 전 증명해 둔 항상성 방정식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어! 한 줌의 무작위 희생을 허용하는 대가로 5,100만 명의 안전과 일상을 네모반듯하게 박제해 주는 것. 그것이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안식이다!”

 

2. 거절의 이유

 

우진은 서지훈의 격앙된 궤변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콘솔 뒤편, 초저온 액체 냉각수가 순환하는 원통형 챔버의 두꺼운 특수 강화유리벽 너머로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15년이란 세월 동안 뇌간과 척수에 굵은 생체 와이어 수십 가닥을 꽂은 채, 도시 전체의 결손과 비극을 홀로 짊어져 온 사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에게서 통제 칩을 뜯어내고 세상의 모든 파멸 궤도를 자신이 대신 삼키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었던 아버지 강정호.

 

유리창에 닿아 있던 아버지의 피 묻은 손바닥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영하의 냉기 속에서 유리창을 타고 고드름처럼 얼어붙고 있었다.

 

‘미안하다, 우진아…… 내 아들아…….’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떨리는 아버지의 메마른 입술 모양이 우진의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우진은 심장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뜨거운 오열을 턱 끝까지 억눌렀다.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가 맥박에 맞춰 맹렬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사각 감옥에 갇혀 꼭두각시로 죽어가던 어린 자식에게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대가로 새겨준 가장 처절한 자유의 증표였다.

 

우진은 다시 서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일말의 연민도, 망설임도 남아있지 않았다.

 

“틀렸어, 서지훈.”

 

우진이 한 걸음 내딛자, 그가 딛은 바닥의 얼음장 같은 냉각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고통과 슬픔, 실패와 죽음조차 인간이 감당해야 할 삶의 일부다.”

 

서지훈의 픽셀이 경련하듯 흔들렸다.

 

“뭐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찢어질 듯이 아파하는 것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움에 떨면서도 발을 내딛는 것도, 전부 살아있기 때문에 겪는 일이야.”

 

우진의 손이 콘솔 위로 뻗어 나갔다.

 

프로메테우스의 크리스털 외피를 감싸 쥔 우진의 손가락 사이로 은빛 파동이 소용돌이쳤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서야 하고, 상처를 입으면 흉터를 안고 살아가야 해. 그 흉터 속에서 인간은 타인의 아픔을 배우고, 서로 손을 내밀며 연대한다. 그런데 너는 그게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도망쳤다고? 내가? 나는 이 도시의 신이 되려 했던 자다!”

 

“아니, 넌 신이 아니라 그저 상처받은 열 살짜리 겁쟁이일 뿐이야.”

 

우진의 냉혹한 일갈이 서지훈의 심장을 꿰뚫듯 내리꽂혔다.

 

“우연히 닥친 불행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서, 세상 전체를 시체처럼 차갑고 안전한 사각 관 속에 처넣으려 했던 비겁자. 타인의 삶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도살장에 몰아넣으면서, 스스로를 구원자라고 합리화한 정신병자. 그게 바로 너의 진짜 모습이다.”

 

“닥쳐라! 입 닥쳐!”

 

서지훈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독립 양자 아카이브 메모리의 연산 한계를 넘어서는 격렬한 감정의 폭발로 인해, 홀로그램 테두리에서 붉은 불꽃 같은 노이즈가 사방으로 튀었다.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지껄여! 정해진 궤도가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 아비규환인지, 네놈 눈으로 직접 보게 해 주마! 네 아비가 만든 그 불완전한 백신 따위로 내 이상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서지훈의 잔류 인격이 메인 콘솔의 깊숙한 보조 파티션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자폭 시퀀스가 저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솔 우측 상단의 특수 차폐 래치가 요란한 금속성 유압음을 내뿜으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3. 3세대 프로토타입의 정체

 

치이익―!

 

짙은 질소 증기와 함께 콘솔 하부의 티타늄 장갑판이 양옆으로 슬라이드되며 열렸다.

 

그 안에서 천천히 솟아오른 것은 손바닥만 한 직사각형의 무광 카본 케이스였다.

 

케이스 중앙에는 넥스트 큐브의 상징인 푸른색 정육면체 양각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고, 삼중 전자 잠금장치가 우진의 눈앞에서 차례로 풀려나갔다.

 

카본 덮개가 위로 젖혀지자마자 차가운 블루 LED 조명이 어두운 공동을 비췄다.

 

완충 젤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지금까지 우진이 보아왔던 그 어떤 생체 제어 칩과도 궤를 달리하는 기괴한 물건이었다.

 

15년 전 우진의 관자놀이에 박혀 있던 K-07 칩이나, 민도현의 목덜미를 꿰뚫고 있던 차가운 티타늄 단말 소켓과는 격이 달랐다.

 

그것은 금속 기판도, 실리콘 웨이퍼도 아니었다.

 

사람의 신경 다발처럼 유연하게 꿈틀거리는 반투명한 나노 바이오 섬유질.

 

그 섬유질의 중심부에는 깨알보다 작은 크기의 극미세 다이아몬드 코어 육면체가 미세한 푸른빛을 점멸하며 규칙적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작은 심장처럼, 기괴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나노 복합체였다.

 

‘저건…….’

 

우진의 동공이 미세하게 수축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관자놀이의 수술 흉터가 찌릿하게 저려왔다.

 

시각화 능력을 2단계로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투명한 나노 섬유질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미세한 인과율 실선들이 허공을 향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잔상이 망막에 스쳤다.

 

서지훈의 잔류 홀로그램이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케이스 위의 허공을 가리켰다.

 

“보이는가, 강우진? 이것이 바로 네 녀석들과 같은 구시대의 실패작들을 영구히 대체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최종 진화형이다.”

 

서지훈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희열과 광신적인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1세대 칩은 뇌간을 물리적으로 뚫어 박아야 했기에 기억 상실과 높은 폐기율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지. 2세대 역시 목덜미에 외장 단말 소켓을 결합해야만 코어와 동기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르다. [프로젝트 네모 : 3세대 생체 궤도 조작 칩 — 프로토타입 파라독스(Paradox)].”

 

우진은 숨을 죽인 채 그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나노 칩을 응시했다.

 

“수술도, 뇌간 절제도 필요 없다.”

 

서지훈이 귓가에 뱀처럼 속삭였다.

 

“피부에 닿는 즉시 땀구멍과 모세혈관을 통해 침투하여 중추신경계와 뇌간의 신경 시냅스에 스스로 결합하지. 착용자는 자신이 통제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뇌파와 호르몬, 그리고 머리 위의 도형을 완벽한 칠흑의 네모로 고정당하게 된다.”

 

“……이런 짓을 위해 대규모 임상을 계획하고 있었던 건가.”

 

“계획이 아니다. 이미 실행 단계다.”

 

서지훈의 입꼬리가 흉측하게 찢어졌다.

 

“너희가 이 지하 코어를 부수고 오르비스를 무너뜨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넥스트 큐브는 이미 이 3세대 생체 칩을 민간의 일상 깊숙이 침투시킬 완벽한 유통 파이프라인을 구축해 두었다. 시민들은 제 발로 찾아와 돈을 지불하고 이 목줄을 기꺼이 차게 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편리함과 건강 관리라는 포장지를 씌워서 말이다!”

 

순간 우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단서들이 번개처럼 하나로 이어졌다.

 

넥스트 큐브가 500만 명의 시민에게 보급했던 라이프 스타일 AI 플랫폼 ‘미러 큐브’.

 

그 앱을 통해 축적된 방대한 생체 데이터와 행동 패턴.

 

그리고 여의도와 강남의 사모펀드를 끌어모으며 추진되던 거대한 스마트 헬스케어 상용화 프로젝트.

 

서지훈이 준비해 둔 최후의 비수는 단순한 서버 복구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의 인간들에게 물리적인 생체 나노 목줄을 합법적이고 자발적으로 채워버리는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비로소 눈앞에 드러난 것이었다.

 

“이 프로토타입이 존재하는 한, 네모 프로젝트는 결코 죽지 않는다.”

 

서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강우진. 네놈의 그 규격 외 특이점 연산 능력을 코어에 바쳐라. 나와 손을 잡고 이 3세대 칩의 제어 핵이 되어라. 그렇다면 네 아비도, 저 계집아이도, 네 주변의 버러지 같은 목숨들도 모두 평온한 네모의 궤도 안에서 살려주마. 이것이 내가 너에게 베푸는 마지막 구원이다!”

 

4. 결별의 선언

 

서지훈의 제안은 달콤하지 않았다.

 

그것은 죽어가는 망령이 산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추악한 발악에 불과했다.

 

우진은 서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것은 명백한 조소이자, 완전한 거부였다.

 

“구원?”

 

우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네가 말하는 구원은 결국 아무도 숨 쉬지 못하는 거대한 공동묘지잖아.”

 

“강우진……!”

 

“너는 실패했어, 서지훈. 15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왼손을 뻗어 카본 케이스 속에 담겨 있던 3세대 생체 칩의 반투명한 나노 섬유질을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치지직―!

 

생체 나노 전극이 우진의 피부 접촉을 감지하고 모세혈관으로 파고들기 위해 날카로운 미세 촉수 수백 가닥을 일제히 뻗어냈다.

 

푸른 다이아몬드 코어가 맹렬하게 발광하며 우진의 뇌신경을 향해 동기화 펄스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우진의 육체는 이미 시스템의 격자망과 수식을 원천 거부하는 ‘수학적 특이점’ 그 자체였다.

 

머리 위의 기하학체가 소멸한 자리에 깃든 아웃라이어의 무형 척력이 우진의 피부 표면에서 거대한 인과율 방어벽을 형성했다.

 

투두둑, 툭!

 

살을 뚫고 들어오려던 나노 촉수들이 우진의 절대 척력에 부딪혀 산산이 튕겨 나갔다.

 

동시에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에서 뿜어져 나온 방화벽 백신 코드가 나노 섬유질의 내부 회로를 역잠식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자신의 신경망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독립 양자 아카이브와 직결되어 있던 프로토타입 칩의 내부 데이터가 백신에 오염되며 새하얗게 지워져 나가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그건 인류의 유일한 구원이란 말이다!”

 

“인류의 삶은 인류가 알아서 살아간다.”

 

우진의 손아귀에 무자비한 악력이 가해졌다.

 

“너 따위 망령이 정해준 사각형 궤도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어.”

 

콰지직―!

 

우진의 손안에서 3세대 생체 궤도 조작 칩의 다이아몬드 코어가 산산조각 났다.

 

푸른 파편과 함께 나노 바이오 섬유질이 검은 재로 변하며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그 순간, 메인 콘솔 깊숙이 박혀 있던 프로메테우스의 크리스털이 우진의 결의에 반응하듯 거대한 은빛 충격파를 토해냈다.

 

쿠구구구궁―!

 

역삼역 지하 7층 암반 전체가 요동쳤다.

 

콘솔 모니터의 수천만 개 궤도 방정식들이 일제히 백색으로 반전되며 찢겨 나갔다.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허리부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강우진…… 네놈은…… 네놈은 기어이 세상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구나……!”

 

“지옥이든 낙원이든, 우리가 선택해.”

 

우진은 서지훈의 부서져 가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마지막 결별을 고했다.

 

“잘 가라, 서지훈. 다신 이 세상에 돌아오지 마라.”

 

우진의 오른손바닥이 콘솔 중앙의 마스터 해방 키, 프로메테우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찰칵―!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중앙 코어의 최종 셧다운 시퀀스가 기동되었다.

 

5. 깨어나는 아버지

 

파지지직―!

 

눈이 멀 것 같은 순백의 광선이 콘솔에서 뿜어져 나와 지하 7층 천장을 꿰뚫었다.

 

그 빛은 거대한 기둥이 되어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로를 지나, 지상의 테헤란로 아스팔트를 뚫고, 흐린 밤하늘 전체로 번져나갔다.

 

서울 상공을 15년간 짓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Grid)이 은빛 파편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다.

 

치이익― 쾅!

 

우진의 바로 앞에서 중심부 액체 냉각 챔버의 유압 잠금장치가 폭발하듯 풀렸다.

 

영하의 냉각수가 쏟아져 나오며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챔버 문이 서서히 개방되자, 15년간 그 안에 매여 있던 사내의 육체가 앞으로 쓰러져 내렸다.

 

우진은 몸을 던져 아버지를 받아냈다.

 

“……아버지!”

 

얼음장처럼 차가운 육체였다.

 

피골이 상접하고, 척수와 관자놀이에 박혀 있던 수십 가닥의 와이어가 끊어지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품에 안긴 강정호 박사의 가슴은,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기계의 박동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 소리였다.

 

강정호의 메마른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마침내 천천히 열렸다.

 

초점을 잃고 헤매던 늙은 학자의 눈동자가 자신의 턱을 받치고 있는 청년의 얼굴에 멎었다.

 

청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

 

강정호의 거친 손이 떨리며 올라와 우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에 늙은 아버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진아…… 내 아들, 우진이구나…….”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15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절절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너무 늦게 와서…….”

 

우진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철저히 억눌러왔던 감정이 일순간 터져 나오며 우진의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다…… 살아있어 주었구나. 내 끔찍한 죄를…… 네가 견뎌내 주었구나…….”

 

강정호는 아들의 가슴팍을 쥐어 잡으며 오열했다.

 

그것은 시스템의 지배자로서 흘리는 피눈물이 아닌, 지옥에서 돌아와 자식을 마주한 평범한 아버지의 울음이었다.

 

그때, 우진의 품 안에서 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옷깃을 강하게 당겼다.

 

“우진아…… 아직,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아버지, 말씀하지 마세요.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들어야 한다…… 서지훈이…… 그자가 남긴 건 그 칩 하나만이 아니야…….”

 

강정호의 시선이 콘솔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향했다.

 

“그자는 이미…… 상임이사회와 결탁해 대량 생산 라인을 지상에 완성해 두었다…… 스마트 헬스케어 기기로 위장한…… 그 칩들이…… 내일 새벽부터 전국의 물류망을 타고 풀린다…….”

 

우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자신이 부순 것은 프로토타입에 불과했다.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의 잔당들은 이미 이 끔찍한 나노 생체 칩을 일반 시민들에게 ‘혁신적인 건강 관리 밴드’로 둔갑시켜 배포할 준비를 끝내두었던 것이다.

 

코어가 부서져 격자망이 걷히더라도, 시민들 스스로가 그 기기를 손목에 차고 귀에 꽂는 순간 도시는 다시 거대한 사각 감옥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렁찬 지진과 함께 지하 7층 암반 천장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역삼역 코어의 완전한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우진은 쓰러져 있던 피실험자 동생 이서진(Subject-04)을 살폈다.

 

서진의 보조 챔버 역시 열려 있었고, 소녀의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우진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다른 한 팔로 어린 서진을 감싸 안았다.

 

지하 암반 통로 저편에서, 무전기를 든 채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진 씨! 들려요?! 위쪽 환기 터널 확보했어요!”

 

지상에서 격자망을 뚫고 내려온 한서연과 윤채린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우진은 무너져 내리는 콘솔과 완전히 소멸한 서지훈의 빈자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통제된 평화는 거절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인간의 삶에 심어두려는 마지막 독니를 완전히 뽑아버리는 것뿐이었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두 사람을 안은 채 무너지는 지하의 어둠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