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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45화

서지훈의 과거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차폐벽 너머의 대치

 

지하 7층의 차가운 공기는 살점을 에는 칼날처럼 살벌했다.

 

벽면을 따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액체 헬륨 냉각 파이프에서는 허연 서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강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깊게 패인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는 마치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맹렬한 박동과 함께 진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도시 전체의 궤도 연산과 엔트로피 결손이 한꺼번에 신경망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고 시신경이 팽창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열린 4번 냉각 라인의 생체 바이패스 백도어 차폐 격벽.

 

그 투명한 강화 아크릴 창 너머로, 녹색 생체 유지액이 가득 찬 중앙 원통 챔버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그 안에는 수십 가닥의 굵은 신경 케이블을 척수와 뇌간에 꽂은 채, 15년 전의 시간 속에 박제된 아버지 강정호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우측 보조 냉각 챔버에는,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채 눈을 감고 있는 피실험자 여동생 이서진(Subject-04)이 산소마스크를 쓴 채 갇혀 있었다.

 

"크흐……."

 

우진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길 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 위 수직 샤프트 고속 승강기 상판에서 묵직한 금속음이 울리더니, 칠흑빛 전투복을 입은 사내들이 밧줄을 타고 번개처럼 강하했다.

 

가장 선두에 내려앉은 자는 도진우 수석 감사관이었다.

 

도진우의 머리 위에는 붉은빛을 뿜어내며 기괴하게 일그러진 4차원 입체 큐브가 떠 있었다.

 

오르비스 폭발의 여파로 큐브 모서리 곳곳에는 허연 실금이 가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오히려 광기에 물들어 한층 더 흉포했다.

 

도진우의 좌우로는 표면에 세 겹의 검은 육면체가 중첩되어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특수 기하학체를 띄운 중앙 집행관 여섯 명이 완벽한 부채꼴 진형으로 바닥을 딛고 섰다.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 내려왔군, K-07."

 

도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메마른 비소가 흘러나왔다.

 

"죽은 줄 알았던 배신자 연구원 놈의 쥐새끼 같은 안내를 받아 4번 라인을 뚫었다라. 제법이야. 하지만 거기까지다. 네놈의 관자놀이에 박혔던 칩의 백신 코드는 이미 한계야. 그 정도의 인과율 역류를 뇌로 받아내고도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게 기적이지."

 

도진우가 손짓하자, 중앙 집행관들이 일제히 품에서 푸른빛을 응축하고 있는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치켜들었다.

 

총구 끝에서 번뜩이는 에너지 스파크가 암반 동굴의 천장을 푸르게 물들였다.

 

"사지를 분쇄해서라도 뇌간만 뜯어내면 된다. 상임이사회의 명령은 생포다. 네놈의 신경망을 복제해 붕괴된 오르비스의 빈자리를 채워 넣고, 저 늙은 Node-0 대신 저 계집아이를 챔버에 완전히 동기화시키면 새로운 질서가 완성된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머리 위에는 아무런 도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네모도, 세모도, 은빛 동그라미도 없는 완벽한 공허.

 

세상의 모든 시스템 수식에서 완전히 탈선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아웃라이어의 절대적인 무(無).

 

그 무형의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척력이 우진의 전신을 감싸며 푸른 스파크를 밀어내고 있었다.

 

우진이 핏발 선 눈으로 도진우를 노려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끝없이 사람을 부품으로 갈아 넣어야만 유지되는 이 쓰레기 같은 감옥을 질서라고 부르더군."

 

"질서가 아니면 뭐란 말이냐?"

 

도진우의 목소리가 수직 샤프트의 거대한 공동을 울렸다.

 

"통제되지 않는 자유의지가 무엇을 낳는지 보아라. 탐욕과 충돌, 그리고 끝없는 살육뿐이다. 세상에 무작위로 방치된 인간들은 서로를 물어뜯어 파멸로 몰고 갈 뿐이지. 이 격자망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짐승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파제다."

 

"그 더러운 변명을 정당화하려고 아이들의 머리에 칩을 박고, 무고한 사람들을 참사로 몰아넣었나?"

 

우진의 주먹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때였다.

 

지하 7층의 고압 케이블이 매설된 암벽 구석의 아날로그 단파 수신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치익거림과 함께 노이즈 섞인 무전 음성이 터져 나왔다.

 

"……우진 씨! 들려요? 제 목소리 들려요?"

 

한서연 기자의 다급하고 떨리는 음성이었다.

 

2. 불타는 서대문과 아날로그 신호

 

서대문 노후 상가 뒷골목.

 

공기는 15년 전의 참사를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처럼 유황 냄새와 메케한 플라스마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한서연의 취재 사무실이 입주해 있던 4층 석조 건물은 이미 군용 테르밋 방전으로 인해 내부가 섭씨 수천 도의 열기로 녹아내려, 콘크리트 외벽 틈새로 검붉은 슬래그 고드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방차 수십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물을 뿜어댔지만, 시스템이 일으킨 비정상적인 화학 방전 화재는 물을 들이붓는 족족 허연 유독 가스를 토해낼 뿐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골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서연의 뺨은 검댕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우진이 자신의 품에서 꺼내 건네주었던 손바닥만 한 청백색 크리스털, '프로메테우스'가 쥐어져 있었다.

 

그 크리스털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스스로 맥동하며 서연의 손바닥을 은은한 미열로 덥히고 있었다.

 

그리고 서연의 곁에는 윤채린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잔여 전원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채린의 정수리 위 은빛 동그라미(○)는 화재 현장의 독기 속에서도 맑은 파동을 내뿜으며, 본사 감사실에서 급파된 청소 수습반 요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국소 사각지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연은 품에서 낡은 아날로그 단파 무전기를 꺼내 144.820MHz 주파수를 맞추고 마이크를 움켜쥐었다.

 

"우진 씨! 서지훈에 대한 자료를 찾았어요! 연구소 화재 이전, 넥스트 큐브의 전신 기업과 서지훈의 인사 파일 원본이 제 외장 백업 드라이브에 남아 있었어요!"

 

무전기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는 지하 7층의 차가운 정적을 찢었다.

 

도진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이미 죽어서 데이터로만 부유하던 서지훈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도진우의 머리 위 붉은 큐브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서지훈……? 그 실패자 놈의 이름을 여기서 꺼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도진우가 차갑게 비웃었지만, 우진은 무전기를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진의 귓가로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서지훈은…… 처음부터 악마로 태어난 괴물이 아니었어요."

 

서연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전기 스위치를 억세게 눌렀다.

 

"28년 전, 1998년 겨울이었어요. 당시 열 살이었던 서지훈의 가족은 서울 외곽의 평범한 연립주택에 살던 소시민이었어요. 아버지는 중소기업 부품 공장의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작은 야채 가게를 꾸렸죠. 그에게는 일곱 살 난 여동생도 있었어요."

 

서연이 전해오는 과거의 기록.

 

지하 7층의 메아리가 기괴할 정도로 잦아들고, 오직 서연의 목소리만이 얼어붙은 암벽을 타고 흘렀다.

 

3. 1998년 겨울, 무작위의 지옥

 

199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의 서울은 축축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외환 위기의 칼바람 속에서도 소시민들은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귀가하던 밤이었다.

 

열 살의 서지훈은 삐걱거리는 작은 단칸방 문지방에 엎드려 여동생과 함께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공장에서 받아온 특별 수당으로 사 온 귤 서너 개가 알루미늄 쟁반 위에서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그 평온은 불과 3초 만에 박살이 났다.

 

콰앙-!

 

얇은 합판 문이 거친 발길질에 박살 나며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문틈으로 들이닥친 것은 술 냄새와 피비린내를 풀풀 풍기는 한 사내였다.

 

인근 유흥가 골목에서 사채 빚 독촉에 시달리다 완전히 정신이 붕괴된 채, 식칼을 손에 쥐고 도주하던 무작위 묻지마 살인범이었다.

 

사내에게는 아무런 동기도 없었다.

 

서지훈의 가족과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훔칠 만한 패물이나 돈이 있는 집도 아니었다.

 

단지 그 골목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문이 열려 있었을 뿐이었다.

 

"누구…… 누구세요? 나가세요!"

 

서지훈의 아버지가 반사적으로 아이들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하지만 사내의 눈에는 이성의 빛이 완전히 꺼져 있었다.

 

번뜩이는 흉기가 허공을 갈랐다.

 

서지훈의 아버지는 단 한마디 비명조차 온전히 지르지 못한 채 목덜미를 베여 차가운 장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붉은 피가 마치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방바닥 도화지 위로 쏟아져 내렸다.

 

열 살 아이의 망막에 새겨진 세상의 첫 번째 붕괴였다.

 

"여보! 여보! 안 돼! 아악!"

 

부엌에서 뛰쳐나온 어머니가 살인범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광기에 휩싸인 흉기는 어머니의 가슴과 복부를 맹수처럼 난도질했다.

 

어머니는 어린 지훈과 눈을 마주친 채 피거품을 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오빠…… 무서워……."

 

일곱 살 난 여동생이 구석에서 오줌을 지리며 서지훈의 옷자락을 쥐어뜯었다.

 

서지훈은 몸이 마비된 채 굳어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도,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감각도 시신경 너머로 증발해 버렸다.

 

살인범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을 늘어뜨린 채, 구석에 웅크린 남매를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여동생의 작은 등 뒤로 칼날을 내리꽂았다.

 

푸욱, 뼈와 살이 갈라지는 끔찍한 파열음.

 

여동생의 작은 손이 허공을 몇 번 허우적거리더니 지훈의 무릎 위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단 2분의 시간이었다.

 

서지훈이 살아가던 세계, 그가 믿었던 가족이라는 우주가 단 하나의 우발적이고 무작위적인 변수에 의해 완전히 도륙당했다.

 

살인범은 방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열 살 서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살인의 광기가 식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공포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인형처럼 굳어버린 아이의 눈빛에 질린 것인지, 사내는 칼을 내던지고 열린 문 너머 눈 내리는 골목으로 도망쳐 버렸다.

 

피바다가 된 방 한가운데에, 열 살의 서지훈만이 홀로 남겨졌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시신, 눈을 뜬 채 굳어버린 어머니의 시신, 그리고 자신의 바지를 피로 물들인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동생의 작은 손.

 

그날 밤, 서지훈의 안에서 무언가가 영원히 죽어버렸다.

 

4. 통제의 망령이 된 아이

 

무전기 너머 한서연의 목소리는 깊은 슬픔과 전율로 떨리고 있었다.

 

"경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 살인범은 재판에서 이렇게 진술했대요. '그냥 눈앞에 문이 보이길래 들어갔다. 그 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다. 그냥 세상이 다 싫어서 아무나 찔렀다'라고요."

 

서연의 숨결이 거칠게 이어졌다.

 

"열 살의 서지훈은 병원 정신과 폐쇄 병동에 3년 동안 감금되었어요. 말을 잃었고, 음식도 거부했죠. 그 아이가 13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벽에 남긴 글귀가 무엇이었는지 알아요?"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서 서늘한 파동이 일었다.

 

"'우연을 없애야 한다.'"

 

서연이 읊조렸다.

 

"'세상이 확률과 우연에 맡겨져 있는 한, 인간은 언제든 무작위의 지옥에 던져진다. 모든 사건과 모든 만남, 모든 죽음은 철저한 계산과 통제 아래 놓여야만 한다.' 그것이 서지훈이 평생 동안 뇌리에 각인시킨 신념이었어요."

 

서지훈은 고아원에서 자라며 오직 수학과 시스템 공학, 통계 예측 모델링에만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우발적 사고라는 개념 자체를 증오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자, 무고한 가족을 도륙하는 맹수들의 흉기일 뿐이라고 믿었다.

 

그 뒤틀린 집착이 그를 국책 연구 과제를 수행하던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인간의 궤도를 사전에 예측하고 통제하려던 초기 네모 프로젝트의 설계자로 합류하게 만든 것이었다.

 

우진의 뇌리 속에, 과거 태성C&I 옥상과 지하 3층에서 마주쳤던 서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황금 육면체 배지를 달고, 오만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을 규격화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그 사내.

 

하지만 그 사내의 정수리 위에 떠 있던 것은 화려한 권능의 상징이 아니었다.

 

3차원의 면조차 형성되지 않은 텅 빈 사각 테두리, '암흑의 프레임'.

 

수백 가닥의 꼭두각시 줄이 그 텅 빈 테두리를 관통해 뇌간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서지훈은 스스로 세상을 통제하는 절대적 설계자가 되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어린 시절 겪은 거대한 공포에 짓눌려 스스로를 시스템의 가장 비참한 부품으로 헌납해 버린 가련한 희생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가족을 앗아간 그 '무작위의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거대한 사각 감옥의 문지기가 되는 길을 택했다.

 

"하하…… 하하하하!"

 

지하 7층의 차폐벽 앞, 도진우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괴한 폭소를 터뜨렸다.

 

도진우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조차 없었다.

 

오직 차가운 시스템의 광기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서지훈의 과거가 그토록 애절해서 눈물이라도 흘려주어야 한단 말이냐?"

 

도진우가 총구를 우진의 심장으로 겨누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렇기에 서지훈은 옳은 방향을 보았던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자유의지 따위를 방치해 두었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보아라. 사채에 쫓겨 일가족을 찌르는 인간,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고 인도로 돌진하는 인간, 탐욕에 눈이 멀어 수천억을 횡령하고 수만 명을 파탄 내는 인간들! 그들이 바로 네놈이 말하는 '자유의지'의 결과물이다!"

 

도진우의 목소리에 핏대가 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궤도를 사각 격자망에 묶어두는 편이 백배는 자비롭다! 언제 죽을지, 언제 실패할지, 어떤 직업을 갖고 누구와 결혼할지까지 시스템이 오차 없이 계산해 배정해 준다면, 최소한 저런 무작위의 참극은 영원히 사라진다! 엔트로피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의 희생 노드가 필요하다면, 그것이야말로 5천만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비용이다!"

 

도진우의 궤변은 서늘할 정도로 정교했다.

 

그것은 단순한 악인의 탐욕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불완전성에 절망한 자들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하고도 차가운 유토피아의 논리였다.

 

5. 백신과 특이점의 공명

 

우진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깊고 어두운 심연처럼 가라앉은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도진우의 머리 위에서 불길하게 회전하는 붉은 큐브를 지나, 챔버 속에 갇힌 아버지 강정호와 어린 이서진에게로 향했다.

 

"너희가 만든 그 질서라는 게 정말로 무작위의 비극을 없앴나?"

 

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지하 7층의 거대한 암반 전체를 울릴 만큼 단단했다.

 

"너희는 비극을 없앤 게 아니야. 단지 너희의 안락과 시스템의 연산을 위해, 비극을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사전 배정'했을 뿐이지."

 

우진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뚜벅, 군화 굽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짓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서지훈의 가족이 무작위 범죄에 희생당한 건 끔찍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없애겠다고 도시 전체를 거대한 도살장으로 만드는 건 구원이 아니라 비겁한 도망일 뿐이야."

 

"입을 닥쳐라, 버그 자식!"

 

도진우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공기가 찢겨 나가는 굉음과 함께,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에서 푸른빛의 응축된 광탄이 우진의 미간을 향해 광속으로 쇄도했다.

 

동시에 중앙 집행관 여섯 명의 소총에서도 일제히 탄환이 뿜어져 나왔다.

 

피할 공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화망.

 

그 순간, 우진의 시야가 멈추듯 느려졌다.

 

우진의 머리 위, 텅 비어 있던 절대적 공허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척력의 파동이 솟구쳤다.

 

머리 위에 아무런 도형도 존재하지 않는 자, 시스템의 수식에서 영원히 이탈한 '수학적 특이점'.

 

우진은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던 일곱 발의 인과율 광탄이, 우진의 손바닥 전방 30센티미터 지점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강철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광탄의 탄두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스파크가 공간을 찢으며 격렬하게 뒤틀렸다.

 

"뭐…… 뭐라고?!"

 

도진우의 눈이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떤 물리적 방패도,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 장벽조차 뚫어버리도록 설계된 본사의 인과율 병기였다.

 

그런데 그 탄환들이, 아무런 도형도 띄우지 않은 자의 맨손 앞에서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우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선을 타고 떨어지며, 바닥에 매설된 4번 냉각 라인의 생체 케이블과 맹렬하게 반응했다.

 

"서지훈은 공포에 굴복해 스스로 시스템의 부품이 되었지만…… 내 아버지는 달랐어."

 

우진의 손가락이 가볍게 비틀렸다.

 

쩌저적-!

 

공중에 멈춰 서 있던 일곱 발의 광탄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나며 푸른 유리 파편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동시에 우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시스템 거부 척력이 파일벙커처럼 앞으로 폭발해 나갔다.

 

콰아아앙-!

 

"크악!"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중앙 집행관 두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척력의 충격파를 정면으로 얻어맞고 뒤로 날아갔다.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세 겹의 검은 육면체가 0.05초의 위상차 정렬 틈새를 직격당하며 허공에서 파열음을 내며 깨져 나갔다.

 

쿵, 콰직!

 

두 명의 집행관이 암벽에 처박히며 의식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도진우는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의 한쪽 눈에 장착된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 렌즈 위로 붉은색 경고 창이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TARGET: K-07]

 

[SYSTEM ERROR: OUTLIER SINGULARITY]

 

[CAUSALITY REPULSION: MEASUREMENT IMPOSSIBLE]

 

"말도 안 돼…… 수치가 측정되지 않아……? 오르비스가 꺼졌는데도 어떻게 저런 인과율 왜곡을 일으킬 수 있는 거냐?!"

 

"말했잖아."

 

우진이 깨진 광탄 파편을 짓밟으며 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시선은 도진우를 넘어, 챔버 속 아버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세상은 너희의 장기판이 아니다."

 

그때, 우진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단파 무전기에서 다시 한번 한서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었다.

 

서대문 화재 현장에서 서연이 쥐고 있던 프로메테우스 크리스털이, 지상의 넥스트 큐브 전산 격자망과 지하 7층 우진의 뇌파 백신에 동시에 반응하며 거대한 공명 주파수를 토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6. 지상과 지하의 도화선

 

서대문 골목길, 불타는 석조 건물 앞.

 

한서연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던 프로메테우스 크리스털이 눈이 멀 것 같은 은백색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지하 7층에서 우진이 방출한 특이점의 척력 파동이 아날로그 단파 회선을 타고 지상의 크리스털로 직결된 것이었다.

 

"서연 언니, 잡아요!"

 

윤채린이 서연의 어깨를 감싸 쥐며 자신의 은빛 동그라미 파동을 크리스털에 직렬로 연결했다.

 

두 사람의 의지가 하나로 맞물리는 순간, 프로메테우스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광륜이 허공으로 수백 미터나 치솟아 올랐다.

 

그 광채는 서울 밤하늘을 뒤덮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형 통제 격자망(Grid)을 칼날처럼 베어 갈랐다.

 

파바바박-!

 

테헤란로와 여의도, 서대문 일대의 고압 송전탑과 통신 기지국 안테나에서 일제히 푸른 불꽃이 튀었다.

 

넥스트 큐브가 5,100만 명의 일상을 옥죄고 있던 사각 통제 신호가 거대한 노이즈와 함께 끊겨 나가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포위하고 있던 청소 수습반 요원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고정된 검은 네모들이 굉음과 함께 금이 가며 바스러져 내렸다.

 

"아아악! 코어 링크가…… 링크가 끊어졌다!"

 

"신호가…… 역류한다!"

 

서연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악물며 프로메테우스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15년 전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청춘을 바쳐 추적해 왔던 진실의 끝.

 

서지훈이라는 한 인간이 겪은 비극이 낳은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의 목을 베어버릴 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었다.

 

"우진 씨! 들려요?! 지상의 격자망 신호가 차단됐어요! 프로메테우스가 백본망을 역으로 잠식하고 있어요!"

 

서연의 외침이 무전기를 타고 지하 7층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제 역삼 코어의 메인 제어권은 완전히 고립됐어요! 서지훈의 망령을…… 그 사각 감옥을 부숴버려요!"

 

7. 챔버의 눈동자

 

지하 7층의 차폐벽 내부.

 

지상에서 날아든 프로메테우스의 공명 파동은 지하 7층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지진으로 이어졌다.

 

위잉-!

 

위잉-!

 

천장에 매달린 적색 비상 방전관들이 하나둘 터져 나가며 백색 비상등으로 강제 반전되었다.

 

벽면을 타고 흐르던 넥스트 큐브의 제어 알고리즘 코드들이 검붉은 색에서 맑은 은빛으로 타올랐다.

 

"크아악! 이 빌어먹을 년들이 지상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도진우가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본사 서버와의 링크가 끊어지자,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4차원 붉은 큐브가 격렬하게 뒤틀리며 표면에서 검은 피 같은 연기를 뿜어냈다.

 

남아 있던 네 명의 중앙 집행관들도 데이터 병목 현상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총을 떨어뜨렸다.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시스템 단말들의 치명적인 결함.

 

중앙의 명령이 끊어지면, 그들은 0.3초의 지연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우진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도진우를 지나쳐 챔버 앞으로 걸어갔다.

 

도진우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들려 했지만, 우진이 가볍게 발을 내딛자 방출된 무형의 척력이 도진우의 손목을 짓밟듯 꺾어버렸다.

 

오도독,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도진우가 바닥을 뒹굴었다.

 

"커헉…… K-07…… 네놈이…… 네놈이 코어를 부수면…… 세상의 인과율이…… 항상성이 전부 폭발해 버린다……!"

 

도진우의 피 섞인 저주를 뒤로한 채, 우진은 중앙 원통 챔버의 강화유리 앞에 섰다.

 

녹색 액체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한 남자.

 

15년 전, 일곱 살 우진의 머리에서 칩을 손수 뜯어내고, 아들에게 쏟아질 파멸의 엔트로피를 자신이 전부 뒤집어쓰기 위해 스스로 이 차가운 기계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아버지 강정호.

 

남자의 전신은 야위어 뼈만 앙상했고, 머리칼은 백발로 세어 있었다.

 

수십 가닥의 튜브가 가슴과 목, 척수를 관통해 기계와 살을 융합시켜 놓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 곁의 보조 챔버 속 여동생 이서진의 작은 몸 역시 가느다란 호흡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우진의 손이 떨려 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차가운 챔버 유리벽에 가져다 대었다.

 

"아버지."

 

목이 메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지워졌던 15년의 세월.

 

지하철 2호선의 수많은 네모와 세모 속에서 허덕이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왔던 지난날의 고독.

 

그 모든 방황의 끝에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 차가운 액체 속에서 15년을 견뎌온 아버지의 육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지상에서 쏘아 올려진 프로메테우스의 은빛 파동이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관통해 챔버 내부로 스며들었다.

 

위이잉-.

 

챔버 내부의 녹색 액체 속에서 미세한 기포가 일었다.

 

그리고 15년 동안 감겨 있던, 뇌사 직전의 한계에 도달해 있던 강정호 박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스르륵.

 

남자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초점을 잃어가던 흐릿한 눈동자 속에, 유리벽 너머로 서 있는 청년의 얼굴이 맺혔다.

 

피를 흘리면서도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느덧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아들의 얼굴.

 

강정호의 메마른 입술이 산소마스크 안쪽에서 희미하게 달싹였다.

 

음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우진은 그 입 모양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우진아.'

 

그리고 챔버 바닥의 제어 콘솔 모니터가 번쩍이며, 15년 동안 잠들어 있던 강정호의 마지막 시스템 관리자 권한이 붉은 에러 로그를 밀어내고 최상위 화면으로 팝업 되었다.

 

[SYSTEM ROOT OVERRIDE]

 

[NODE-0: KANG JEONG-HO ACCESS CONFIRMED]

 

[OMEGA-LOOP & PROMETHEUS SYNC READY]

 

[WARNING: CORE PURGE WILL COMMENCE]

 

지하 7층의 모든 기계가 비명을 지르듯 포효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