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42화

친구의 파멸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아웃라이어의 잔향

 

덜컹거리는 1톤 탑차 적재함의 철판 바닥에서 싸늘한 진동이 뼈마디를 타고 올라왔다.

 

강우진은 무릎을 끌어안은 채 피와 흙탕물로 엉망이 된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쪽에서부터 지독한 냉기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비에 젖고 상처를 입어 생기는 육체적 한기가 아니었다.

 

세상의 인과율 전체가 자신을 궤도 밖으로 튕겨 나간 이물질로 규정하고 밀어내는, 지독하고 형벌 같은 척력이었다.

 

머리 위를 더듬어 보았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고, 시야의 상단 어디에도 그 흔한 백색 네모(□)나 붉은 세모(△)의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다.

 

완전한 공백.

 

수학적 특이점.

 

전 인류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하던 오르비스가 끝내 풀어내지 못하고 뱉어낸 'Error: ?'라는 붉은 결함 로그의 실체가 바로 지금 자신의 상태였다.

 

운명의 궤도에서 완전히 탈선한 존재.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자신이 궤도에서 벗어나 거대한 구멍이 되자, 주변의 모든 인과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그러지고 있었다.

 

파주 벙커에서 마주했던 어머니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자신의 손길이 닿자마자 어머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정갈한 백색 네모 표면에 서리처럼 번져 나가던 푸르스름한 노이즈와 미세한 균열들.

 

채린의 은빛 동그라미마저 회전을 멈춘 채 삐걱거리게 만들었던 차가운 한기.

 

'내가 다가가면, 그들의 궤도가 부서진다.'

 

자신은 시스템의 통제를 부수는 해방자이자 동시에, 곁에 있는 모든 이들의 평온한 삶을 갉아먹는 독극물 같은 아웃라이어였다.

 

게다가 시스템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도진우와 넥스트 큐브의 잔당들은 우진 자신을 직접 연산해 소거하지 못하자, 그와 인과를 맺었던 주변 인물들을 향해 연좌제식 청소 공작을 개시했다.

 

이진혁의 부당한 채용 취소와 계좌 동결, 사내망 해킹 누명.

 

김 주임의 횡령 혐의 체포.

 

그리고 지금, 탑차 운전석의 격벽 너머에서 라디오 뉴스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어젯밤 테헤란로 일대 및 파주 일대에서 발생한 폭발 및 총기 난사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전 태성C&I 대리 강 모 씨와 해직 기자 한 모 씨를 특정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이들은 극단주의 사이버 테러 단체와 연계되어 국가 기간망 및 금융 시스템 마비를 기도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운전석 격벽의 작은 미닫이 유리창이 드르륵 열리며, 비에 젖은 화물차 기사의 굵은 얼굴이 나타났다.

 

기사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 위의 백색 네모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총각, 들었어? 라디오에서 총각 이름을 부르고 난리가 났어. 대체 무슨 일에 얽힌 거야?"

 

우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기사님까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다음 교차로에서 그냥 내려주셔도 됩니다."

 

화물차 기사는 룸미러로 우진을 힐끔 보더니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쇼. 뱅뱅사거리에서 그 탱크로리 밑으로 뛰어들어 날 살려준 게 누구였는데. 내가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 괴상한 검은 옷 입은 놈들이 총을 쏴대던 것도, 총각이 차 밑에 깔릴 뻔하면서 날 꺼내준 것도. 세상에 미친놈들이 판을 쳐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은 안 해. 역삼역까지 데려다주기로 약속했으니 끝까지 갈 거요."

 

기사의 무뚝뚝하지만 단단한 어조에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기사의 머리 위 백색 네모는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빛깔만큼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백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은 차마 손을 뻗어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저 안정된 사각형에도 차가운 결손의 금이 가기 시작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스마트폰을 켰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유심을 빼고 와이파이와 GPS를 전부 차단한 단말기였지만, 임시로 설정해 둔 P2P 보안 메신저의 백도어 포트 하나가 붉은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파주 벙커를 빠져나오기 직전, 한서연 기자가 건네주었던 암호화 단말기였다.

 

화면 상단에는 역삼역 지하 7층 코어에 갇힌 아버지 강정호의 생체 신호가 떠 있었다.

 

[Node-0 생체 프로세서 잔여 동기화 한계치 : 01시간 24분]

 

오르비스가 폭파되면서 발생한 천문학적인 결손 엔트로피가 최초 설계자인 아버지의 뇌간으로 고스란히 역류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채 한 시간 반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간 안에 역삼역 지하 7층으로 침투해 아버지의 신경망을 코어에서 분리해내지 못한다면, 아버지는 뇌사 상태에 빠지고 도시 전체의 궤도망은 통제 불능의 대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조금만 버티세요, 아버지.'

 

우진이 입술을 깨물며 화면을 넘기려는 찰나였다.

 

단말기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불규칙한 디지털 노이즈를 뿜어냈다.

 

푸른색 보안 창 위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발신자로부터 긴급 음성 데이터 패킷 하나가 강제로 수신되었다.

 

2. 끊어진 신호와 붉은 세모

 

발신 번호는 공중전화 번호였다.

 

지역 번호는 02, 발신 위치는 영등포구 문래동의 어느 노후 철공소 골목.

 

단말기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의 이름표를 확인한 우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송민규(宋民奎).'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15년 지기 친구.

 

우진이 대학을 졸업하고 태성C&I에 입사할 때, 작은 IT 스타트업을 창업해 밤낮없이 서버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꿈을 키워가던 성실한 친구였다.

 

넥스트 큐브와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 이후,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하고 모든 번호를 지워버렸던 우진이었다.

 

자신의 삶이 지옥으로 변해갈 때 민규만큼은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에 머물기를 바랐기에 단 한 번도 번호를 누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암호화된 보안 단말기로 민규의 연락이 들어온 것인가.

 

우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너머로 빗소리와 함께 거칠고 불규칙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도의 공포와 절망에 질식하기 직전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우진아? 우진이 맞냐? 제발… 제발 받아줘. 나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민규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치아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마이크를 타고 전해졌다.

 

"내 회사… 내 서버실… 전부 압류 딱지가 붙었어. 우리 직원들 퇴직금 계좌까지 전부 묶였고… 나보고 횡령범이래. 40억을 가로챈 투자 사기 주범이래. 내가 서명한 적도 없는 서류에 내 인감이 찍혀 있고… 경찰들이 회사로 들이닥쳤어. 우진아, 나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 너 알잖아. 나 그런 짓 못 하는 거 알잖아!"

 

우진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오늘 아침에… 그 투자 컨설팅 회사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었어. 내 이름으로 된 법인 계좌가 큐브 네트웍스라는 곳의 해외 불법 선물 파이프라인에 연결되어 있대. 내가 그 돈을 전부 빼돌린 걸로 이미 검찰 고발까지 끝났대. 기사까지 떴어. 내 이름 석 자 박혀서… 우진아, 나 이제 끝났어. 어머니 수술비로 모아둔 통장까지 전부 지급 정지됐어. 나… 한강으로 가고 있어. 방법이 없어. 내가 죽어야 우리 가족들이라도 살아…."

 

뚝.

 

신호가 끊겼다.

 

적재함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진의 귓가에 서지훈의 잔류 영상이 내뱉었던 저주가 생생한 환청이 되어 울려 퍼졌다.

 

'너라는 버그 하나 때문에, 너와 옷깃을 스쳤던 모든 무고한 인간들의 궤도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연좌제 고립 공작.

 

시스템은 우진이 가장 아끼는 이들을 차례대로 사냥하고 있었다.

 

이진혁을 쳐내고, 김 주임을 구속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10년이 넘도록 우진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가장 순수한 친구의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민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

 

'큐브 네트웍스.'

 

15년 전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넣고, 태성C&I의 소스코드를 빼돌리려 했으며, 편의점 점주 김 씨의 전 재산을 강탈해 뇌출혈로 쓰러뜨렸던 바로 그 배후 세력의 위장 페이퍼 컴퍼니였다.

 

그들이 민규의 스타트업 법인을 집어삼키고, 40억 원에 달하는 불법 비자금 세탁의 희생양으로 민규를 내세워 파멸의 절벽으로 떠민 것이었다.

 

우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안압이 치솟으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아버지의 남은 시간은 1시간 24분.

 

역삼역으로 직행해 코어를 부수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는다.

 

하지만 지금 영등포로 핸들을 돌리지 않는다면, 민규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가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질 것이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친구의 죽음을 방관할 것인가, 친구를 구하러 가다가 아버지의 마지막 숨을 놓칠 것인가.

 

시스템이 던져놓은 가장 잔혹한 양자택일의 덫이었다.

 

우진은 피가 배어 나오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빛에서 흔들림이 사라지고, 지독할 정도의 서늘한 결의가 차올랐다.

 

'둘 다 구한다.'

 

시스템이 파멸을 정해두었다면, 그 궤도를 비틀어버리는 것이 아웃라이어인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우진은 운전석 격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기사님!"

 

격벽 창문이 열렸다.

 

"왜 그래, 총각?"

 

"죄송하지만, 올림픽대로로 빠지지 말고 여의도 하류 쪽, 성산대교 남단으로 차를 돌려주십시오! 제 친구가 지금 죽으려고 합니다!"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하지만 총각, 아까 역삼역으로 가야 한다며! 시간 없다며!"

 

"사람이 죽습니다. 지금 안 가면 영영 못 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절박하게 타오르는 우진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 눈빛에는 거짓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빌어먹을, 기름값은 나중에 곱절로 쳐서 갚아! 꽉 잡아라!"

 

쿠아아앙!

 

1톤 탑차가 거친 엔진음을 토해내며 빗길을 찢듯 유턴 차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타이어 타는 냄새와 비린 아스팔트 냄새가 적재함 틈새로 밀려들었다.

 

우진은 단말기를 켜고 성산대교 남단 일대의 교통 CCTV와 공공 위치망을 해킹하기 시작했다.

 

화면 위로 지도 데이터가 펼쳐졌다.

 

우진은 2단계 심층 구조 분석의 시신경을 가동했다.

 

관자놀이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망막 위로 푸르스름한 인과율 격자선들이 떠올랐다.

 

성산대교 남단 진입로 난간 부근.

 

수많은 자동차의 백색 궤적 사이로, 칠흑처럼 어두운 빗속에서 홀로 핏빛으로 회전하는 거대한 기하학체가 포착되었다.

 

검은 세모(△).

 

주변의 허공으로 뻗어 나간 검은 꼭두각시 줄이 굵은 쇠사슬처럼 민규의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었고, 세모의 회전 속도는 이미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자살 집행까지 남은 시간, 길어야 15분.

 

3. 빗속의 난간

 

성산대교 남단 둔치 도로는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시야가 10미터도 확보되지 않았다.

 

뿌연 빗줄기 사이로 비상등을 켠 채 버려진 민규의 낡은 아반떼 승용차가 보였다.

 

차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운전석 바닥에는 흙탕물 묻은 구두 한 짝과 구겨진 회사 서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총각! 저기 차가 있어!"

 

기사의 외침과 함께 탑차가 비명을 지르며 갓길에 급정거했다.

 

우진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적재함 문을 박차고 빗속으로 뛰어내렸다.

 

철퍽, 진흙탕에 발이 빠졌지만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리 난간 쪽을 바라보았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성산대교 보행로 난간 위,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왜소한 실루엣이 위태롭게 서 있었다.

 

송민규였다.

 

그의 머리 위 약 10cm 상공에서, 칠흑 같은 검은 세모(△)가 미친 듯이 자전하고 있었다.

 

세모의 표면에는 넥스트 큐브의 고유 식별 코드들이 핏빛 잔상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세모 꼭짓점에서 뻗어 나온 굵은 검은 실선 잔상이 하늘 저 높이 먹구름 너머로 직결되어 있었다.

 

외부 세력의 조작과 외압에 의해 강제로 주입된 파멸 궤도.

 

민규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풀려 있었고, 귓가에서는 허공의 환청을 듣는 듯 연신 고개를 저어대고 있었다.

 

"내가 안 했어… 난 그냥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민규의 발끝이 난간 바깥쪽의 아찔한 허공으로 반쯤 밀려 나갔다.

 

누런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는 한강 수면이 까마득한 아래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송민규!"

 

우진의 벼락같은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터져 나왔다.

 

난간 위의 실루엣이 흠칫 굳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물에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민규의 얼굴은 유령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진이?"

 

민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길… 아니야,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우진아!"

 

민규가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허공으로 더 내밀었다.

 

"너 뉴스 안 봤어? 너도 쫓기고 있잖아! 나 때문에 너까지 엮이면 안 돼! 그놈들이 그랬어… 내 회사에 투자금 대준 놈들이… 내가 죽어야 모든 게 덮인다고… 내가 끝내야 우리 어머니 통장이라도 풀어준다고 했단 말이야!"

 

우진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자신의 발걸음이 다가갈 때마다, 민규의 머리 위 검은 세모가 미세하게 요동치며 차가운 척력을 뿜어냈다.

 

우진의 가슴속 방화벽 백신 코드가 그 악의적인 파동에 반응해 찌릿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놈들 거짓말이야, 민규야. 네가 죽어도 네 어머니 통장 안 풀어줘. 그놈들은 네 회사를 방패막이로 삼아 돈을 빼돌린 거고, 널 죽여서 영원히 입을 막으려는 거야!"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민규가 울부짖었다.

 

굵은 눈물이 빗물과 뒤섞여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40억이야, 우진아. 내 평생 구경도 못 해본 돈이 내 이름으로 세탁됐다고! 계약서에 내 도장이 찍혀 있고, 은행 전산에 내 공인인증서 기록이 다 남아 있대! 법적으로 내가 주범이래! 내가 무슨 수로 그걸 밝혀내? 난 그냥… 우리 개발자들 월급 주려고, 투자 유치해 준다는 말에 서명 하나 해준 것밖에 없는데…!"

 

민규의 절규는 평범한 소시민이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물려 으스러질 때 내뱉는 가장 비참한 비명이었다.

 

박민재 팀장이 그랬고, 편의점 점주 김 씨가 그랬으며, 크레인 사고를 당한 준호의 아버지가 그랬다.

 

시스템은 언제나 가장 약하고 성실한 이들의 틈을 파고들어 파멸의 세모를 씌웠다.

 

그리고 그 엔트로피를 흡수해 자신들의 견고한 사각 격자망을 유지해 왔다.

 

우진의 눈에 민규의 머리 위 검은 세모의 꼭짓점이 순간 붉은빛을 뿜으며 아래로 꺾이는 것이 보였다.

 

인과율의 시계가 0을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 시스템의 강제 덮어쓰기 알고리즘이 민규의 뇌간으로 강력한 신경 차단 신호를 송출했다.

 

민규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혔다.

 

자유의지가 완전히 거세된 육체가, 허공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낙하가 시작된 것이다.

 

4. 인과율의 비틀림

 

"민규야!"

 

우진의 뇌 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망이 단번에 오버클럭되었다.

 

타앙!

 

아스팔트를 박차고 튀어 나간 우진의 몸이 빗줄기를 갈랐다.

 

0.3초의 미래를 내다보는 2단계 '변화 감지'의 푸른 궤적선이 망막에 선명하게 그어졌다.

 

민규의 몸이 무게중심을 잃고 난간 아래로 45도 기울어지는 궤적, 0.4초 뒤 그의 발목이 난간 철봉을 스치며 허공으로 완전히 내던져지는 탄도.

 

우진은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차가운 난간 모서리에 갈비뼈를 거세게 부딪쳤지만,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오른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촤아아악!

 

빗물을 머금은 민규의 셔츠 깃이 우진의 손끝을 스쳐 지나갔다.

 

놓칠 뻔한 찰나, 우진의 다섯 손가락이 민규의 손목을 쇠갈고리처럼 낚아챘다.

 

쿵!

 

육중한 충격과 함께 민규의 몸이 난간 아래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커헉!"

 

난간 철봉에 짓눌린 우진의 가슴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파주에서 입었던 옆구리의 파편창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빗물과 함께 난간을 타고 흘러내렸다.

 

까마득한 다리 밑에서는 시커먼 한강 물결이 소름 끼치는 굉음을 내며 출렁이고 있었다.

 

민규는 허공에서 바둥거리며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서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우, 우진아…!"

 

"놓지 마! 꽉 잡아, 민규야!"

 

우진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핏줄이 곤두선 팔뚝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진의 시야에 기괴한 이변이 포착되었다.

 

민규의 정수리 위에 떠 있던 검은 세모(△)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정해진 죽음의 궤도가 외부의 물리적 개입으로 저지당하자, 배후 시스템의 보정 알고리즘이 즉각 발동한 것이었다.

 

지이이잉!

 

허공의 검은 꼭두각시 줄을 타고 살인적인 전자기 스파크와 칠흑 같은 인과율 에너지가 쏟아져 내려왔다.

 

시스템의 '궤도 강제 덮어쓰기'였다.

 

민규를 반드시 이 시각, 이 장소에서 제거하여 큐브 네트웍스의 40억 비자금 증거를 인멸하려는 거대한 외압의 파동.

 

그 파동이 민규의 팔을 타고 우진의 손목으로 거꾸로 역류해 들어왔다.

 

치지지직!

 

우진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 수술 흉터가 번쩍이며 자수정빛 전류를 뿜어냈다.

 

'크윽…!'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의 격통이 뇌간을 강타했다.

 

일반인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신경계가 타버려 손을 놓쳤을 치명적인 인과율 쇼크였다.

 

하지만 우진의 몸속에는 15년 전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심어준 '방화벽 백신 코어'가 흐르고 있었다.

 

우진의 동공 안쪽에서 은빛 불꽃이 타올랐다.

 

머리 위에 도형이 없는 완전한 공백, 수학적 특이점(아웃라이어)의 절대 척력이 우진의 전신을 휘감았다.

 

'꺼져라.'

 

우진은 허공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친구는… 네놈들의 사각 격자 규격에 들어가지 않는다!'

 

파아아앙!

 

우진의 손바닥에서 방출된 순수한 반발 척력 파동이 민규의 손목을 타고 번져 나갔다.

 

은빛 파동이 민규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 칠흑 같던 검은 세모(△)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은빛 실금이 쫙 갈라졌다.

 

파가가각!

 

허공으로 이어져 있던 꼭두각시 줄이 유리관 깨지듯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검은 세모의 세 꼭짓점이 비틀리며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파멸을 상징하던 칠흑의 빛깔이 우진의 백신 코드에 의해 급격히 중화되며, 본래의 순수한 백색으로 탈색되어 갔다.

 

마침내 검은 세모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며, 불안정하지만 살아 숨 쉬는 하나의 거대한 빛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시스템의 강제 덮어쓰기가 우진의 절대 척력에 가로막혀 완전히 박살 난 것이었다.

 

"으라차차!"

 

난간 뒤쪽에서 거친 고함과 함께 화물차 기사가 달려와 민규의 다른 쪽 팔을 붙잡았다.

 

두 남자의 터질 듯한 완력에 의해, 허공에 매달려 있던 민규의 몸이 난간 안쪽의 아스팔트 바닥으로 풀썩 내던져졌다.

 

세 사람은 차가운 빗물이 고인 도로 위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5. 페이퍼 컴퍼니의 꼬리

 

"하아… 하아…."

 

민규는 아스팔트에 엎드린 채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새겨진 생생한 마찰열과 진흙의 감촉.

 

살아있었다.

 

자신을 짓누르던 그 끔찍한 추락의 충동과 귓가를 맴돌던 기계음 같은 이명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민규는 고개를 들어 옆에 쓰러져 있는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의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얼굴은 흙탕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1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고 단단했다.

 

"우진아… 나…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민규의 목에서 꺽꺽거리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아, 떨고 있는 친구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우진의 손길이 닿는 순간, 민규의 머리 위 허공에서 흩어졌던 백색 파편들이 웅웅거리며 다시 뭉쳐들기 시작했다.

 

완벽한 사각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죽음의 검은 세모는 아니었다.

 

살아남아 발버둥 치려는 인간의 거친 백색 파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은 자신의 손을 오래 올려두지 않고 슬그머니 뗐다.

 

아웃라이어인 자신의 기운이 오래 닿으면, 기껏 살아난 친구의 궤도에 다시 차가운 서리 노이즈가 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 송민규. 넌 아무 잘못 없어. 네가 죽으면 그놈들이 판 함정이 진짜 진실이 되는 거야."

 

민규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40억이야. 그 돈이 내 회사 서버를 통해 빠져나갔어. 경찰에선 날 사기단 두목으로 보고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체포조가 올 텐데… 내가 어떻게 결백을 증명해?"

 

우진은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 사기단, 어디에 있어? 널 찾아왔던 그 투자 컨설팅 회사 놈들, 지금 어디 있냐고."

 

민규는 멍하니 우진을 쳐다보다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물에 흠뻑 젖은 명함 한 장이 나왔다.

 

푸른색 육면체(큐브)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명함이었다.

 

[골든 큐브 에셋 파트너스 - 대표이사 권태훈]

 

[주소: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44-12, 삼정빌딩 14층]

 

"이… 이 사람이야. 내 서버실에 클라우드 노드를 설치해 주면 해외 벤처 자금 50억을 유치해 주겠다고 계약서를 썼어. 그런데 오늘 아침에 그 클라우드 망이 불법 자금 세탁 통로로 쓰였다면서… 들이닥쳐선 날 협박했어. 지금도… 아마 삼정빌딩 사무실에서 내 회사 서버를 포맷하고 하드를 파쇄하고 있을 거야. 증거를 전부 인멸하고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고…."

 

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골든 큐브 에셋.'

 

역시나였다.

 

큐브 네트웍스가 여의도 금융가에 심어둔 수많은 위장 페이퍼 컴퍼니 중 하나였다.

 

그들은 민규의 작은 IT 스타트업을 고기방패 삼아 대규모 비자금을 세탁하고, 일이 틀어지자 민규를 희생양으로 던져 자살로 위장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우진은 시계를 확인했다.

 

[Node-0 잔여 한계치 : 01시간 08분]

 

시간이 없었다.

 

역삼역으로 가기 전, 여의도를 거쳐 갈 여유 따위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기단의 본거지를 그대로 둔다면, 민규는 살아남았더라도 평생을 횡령 사기범이라는 오명을 쓴 채 감옥에서 썩거나 사회적으로 영구 매장당할 터였다.

 

그것 역시 시스템이 노리는 '사회적 파멸'의 또 다른 형태였다.

 

우진은 단말기를 들어 서연의 비상 채널로 접속했다.

 

파주 은신처 인근 수로를 빠져나와 이동 중일 서연에게 즉각 텍스트 데이터를 전송했다.

 

[서연 씨, 여의도 삼정빌딩 14층 '골든 큐브 에셋'.

 

넥스트 큐브의 자금 세탁 페이퍼 컴퍼니입니다.

 

제 친구 송민규의 회사를 도용해 40억을 세탁하고 하드 파쇄 중입니다.

 

그곳의 전산 장부를 확보하면 독립 미디어 폭로의 결정적 자금줄 물증이 됩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3초 뒤, 서연으로부터 답신이 도착했다.

 

[확인했습니다.

 

채린 씨와 함께 여의도 인근에 도달했습니다.

 

그리드 오버라이더 잔여 출력으로 사기단 사무실의 통신망을 마비시키고 금융감독원 백도어 포트로 원본 장부를 강제 업로드하겠습니다.

 

우진 씨는 지체하지 말고 역삼역으로 가세요.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연의 단호하고 빠른 판단에 우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격자망 밖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싸우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다.

 

우진은 젖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민규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민규야, 잘 들어."

 

우진의 목소리는 낮고 엄숙했다.

 

"지금부터 네 차를 타지 말고, 이 기사님 탑차를 타고 파주로 가. 문산천 제방도로 끝에 가면 낡은 섬유 염색 공장이 있어. 거기 지하 2층으로 들어가서 숨어 있어. 거기선 그 어떤 전파도, 경찰도 널 찾지 못해."

 

"우진아, 넌… 너는 어디 가는데?"

 

"난 끝내러 간다."

 

우진은 테헤란로 쪽의 칠흑 같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비구름 사이로 거대한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이 도시를 옥죄고 있는 진원지.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널 이렇게 만든 놈들, 우리 아버지를 15년 동안 산송장으로 만든 놈들, 그리고 이 도시 전체를 감옥으로 만든 그 거대한 기계의 모가지를 비틀러 간다."

 

민규는 멍하니 우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진의 눈동자 속에는 민규가 평생 본 적 없는 거대한 분노와, 세상을 홀로 짊어진 자의 서늘한 무게감이 서려 있었다.

 

민규는 차마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살아서 다시 보자, 우진아. 제발 죽지 마라."

 

우진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물차 기사가 민규의 어깨를 툭 쳤다.

 

"총각, 파주까지 이 친구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몸조심해. 꼭 이겨라."

 

"감사합니다, 기사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탑차의 문이 닫히고, 붉은 후미등을 깜빡이며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성산대교 남단의 차가운 빗속에, 우진은 홀로 남겨졌다.

 

6. 어둠 속의 추적자

 

홀로 남은 우진은 갓길에 버려져 있던 민규의 낡은 아반떼 운전석으로 몸을 던졌다.

 

키는 그대로 꽂혀 있었다.

 

시동을 걸자 덜덜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와이퍼가 거칠게 앞 유리의 빗물을 닦아냈다.

 

우진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차량이 굉음을 지르며 강변북로를 향해 미끄러지듯 튀어 나갔다.

 

올림픽대로와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도심의 고가도로 위는 자정이 가까운 시각임에도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계기판 옆에 거치해 둔 암호화 단말기에서 붉은 경보음이 삐- 삐- 울리기 시작했다.

 

[Node-0 잔여 한계치 : 00시간 58분]

 

1시간도 남지 않았다.

 

역삼역 지하 7층 중앙 코어의 액체 챔버 속에서, 부친 강정호의 심박수가 분당 40회 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뇌파 과부하는 99.2%.

 

뇌사 판정 직전의 한계 상태였다.

 

그때, 단말기 화면에 서연이 보내온 여의도 삼정빌딩 현장 데이터가 팝업으로 떴다.

 

[골든 큐브 에셋 서버실 제압 완료.

 

채린 씨의 척력 연막으로 사기단 일당 6명 무력화.

 

파쇄 직전이던 40억 자금 세탁 원본 장부 및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직통 송금 라인 파일 확보.

 

송민규 씨의 무고를 입증할 증거를 금융감독원 내부 공시망에 백도어로 살포했습니다.]

 

이어 짧은 한 줄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우진 씨, 장부를 털던 중 끔찍한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큐브 네트웍스를 통해 세탁된 40억 원의 최종 종착지가… 역삼역 지하 7층 독립 차폐벽 보강 전력망과, '예비 복제 프로세서(Node-2)' 기동 자금으로 전액 집행되었습니다.]

 

우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예비 복제 프로세서?'

 

단말기 화면 너머로 한서연의 다급한 추가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도진우는 강정호 박사님이 엔트로피 역류로 뇌사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박사님이 사망하는 순간, 시스템의 붕괴를 막고 새로운 생체 배터리로 갈아 끼우기 위해… 15년 전 납치했던 피실험자 중 한 명을 역삼역 코어 챔버의 대체 프로세서로 안치해 두었습니다!]

 

우진의 뇌리 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블랙 큐브 알파.

 

15년 전 연구소 참사 당시 납치되었던 동료 아이들 중, 본사 지하 4층 잔해 속에 남아있던 피실험자들.

 

도진우는 아버지가 죽더라도 시스템이 멈추지 않도록, 또 다른 무고한 동포의 뇌간을 코어에 갈아 끼우려는 극악무도한 각본을 완성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 끼치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히 아버지를 구출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코어 시스템 자체를 완전히 물리적으로 분쇄하고, 그곳에 묶여 있는 모든 인과율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이 비극의 바퀴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터였다.

 

쿠구구궁!

 

갑자기 아반떼 승용차의 차체가 옆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크윽!"

 

우진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차체가 180도 회전한 끝에 올림픽대교 남단 교각 벽면에 쾅 하고 부딪히며 멈춰 섰다.

 

에어백이 터지며 매캐한 화약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우진은 피를 흘리는 이마를 짚으며 깨진 앞 유리를 응시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텅 빈 아스팔트 도로 한가운데.

 

칠흑 같은 검은색 방탄 SUV 세 대가 역삼각형 대형으로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빗줄기를 뚫고 우진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철컥.

 

가운데 SUV의 뒷좌석 문이 열리며,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쪽 눈에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를 착용한 남자.

 

머리 위에 파열된 채 기괴하게 삐걱거리는 4차원 다포체 붉은 큐브를 띄운 남자.

 

넥스트 큐브 본사 수석 감사관, 도진우였다.

 

그의 뒤로 얼굴을 카본 마스크로 가린 청소 기동대원 12명이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겨눈 채 비를 맞으며 도열해 있었다.

 

대원들의 정수리 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정된 '검은 네모(■)'들이 섬뜩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도진우는 계측기를 톡톡 두드리며, 깨진 차 안의 우진을 향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친구놀음은 재미있었나, 특이점(Singularity)?"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지는 도진우의 변조된 목소리가 차가운 빗소리를 짓밟았다.

 

"네놈이 버러지 같은 친구 하나를 살리기 위해 궤도를 이탈하는 동안, 네 아비의 뇌세포는 정확히 84%가 사멸했다. 남은 시간은 42분. 그리고… 네가 역삼역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영원히 폐쇄된다."

 

도진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12정의 돌격소총 총구에서 푸른빛의 응축된 인과율 광탄들이 살벌한 고주파 파열음을 내뿜기 시작했다.

 

우진은 부서진 운전석 문을 발로 차 열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머리 위에 아무런 도형도 존재하지 않는 사나이.

 

세상의 모든 계산식을 거부하는 완전한 무(無)의 존재, 아웃라이어 강우진의 눈동자가 암흑 속에서 서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