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10년의 기억
1. 부서진 결계와 붉은 살의
쾅!
폐사당의 낡은 목조 정문이 푸른 섬광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날아든 목재 파편들이 사당 안쪽의 흙바닥으로 거칠게 흩뿌려졌다.
매캐한 오존 냄새와 테르밋 분말이 타들어 가는 메케한 연기가 폭우의 냉기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우진아!"
어머니의 찢어지는 비명이 사당 안을 울렸다.
강우진은 어머니를 등 뒤로 감싸며 바닥을 굴렀다.
찰나의 순간, 푸른빛의 응축된 인과율 광탄 세 발이 그가 서 있던 바닥을 관통했다.
치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석회질 바닥이 녹아내리며 새까만 구덩이가 파였다.
일반 화약 총기가 아니었다.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이 자랑하는 인과율 집속 화기였다.
"숙여요! 어서!"
문가 측면에 붙어 있던 한서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권총을 쥐어 잡았다.
윤채린은 품에서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꺼내 스위치를 올렸지만, 붉은색 배터리 경고등만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젠장, 사당 외벽의 전자기 차폐가 박살 나면서 기기 회로가 과부하로 뻗었어요! 재부팅까지 최소 3분은 걸려요!"
채린의 외침 너머로, 자박거리는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빗물을 짓밟으며 다가왔다.
부서진 문틀 사이로 칠흑 같은 방탄 코트를 걸친 사내, 도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정수리 위에는 기괴하게 팽창과 수축을 거듭하는 4차원 다포체 형태의 붉은 입체 큐브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 뒤편으로 검은 방탄 헬멧을 쓴 집행 요원 여덟 명이 소총을 겨눈 채 부채꼴로 사당을 에워쌌다.
요원들의 머리 위에는 감정도, 흔들림도 없는 '고정된 검은 네모(■)'가 죽은 듯 멈춰 서 있었다.
"참으로 끈질기군, 대상자 001. 아니, 프로토타입 K-07."
도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목소리는 스피커를 거쳐 나오는 기계음처럼 메마르고 서늘했다.
"하필 쥐새끼처럼 숨어든 곳이 15년 전 타다 남은 잿더미 위라니. 참으로 시적이지 않나? 강정호 박사가 네놈을 살리겠다고 발버둥 치며 제 목숨을 바친 자리에서, 결국 그 시체가 시스템의 부품으로 썩어간 진실을 마주했으니 말이다."
우진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갈비뼈가 부러진 부위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았지만, 그의 시선은 도진우의 심장을 꿰뚫을 듯 고정되어 있었다.
우진의 손에는 방금 사당 지하 납 상자에서 꺼낸 크리스털 저장 장치, '프로메테우스'와 낡은 일기장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
"도진우."
낮게 가라앉은 우진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렸다.
"아버지는 시스템의 부품 따위로 죽지 않았다."
"아니, 강정호는 부품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삼동 지하 7층에서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 찌꺼기를 걸러내며 뇌수를 갉아먹히고 있는 완벽한 노예지."
도진우가 차갑게 손을 들어 올렸다.
뒤통수에 겨눠진 소총들의 총구에서 푸른빛의 스파크가 일제히 차올랐다.
"그리고 이제 그 오작동의 원인인 너를 영구 소거함으로써, 시스템은 완벽한 침묵을 되찾을 것이다. 전원 사살해. 유품은 잔해 속에서 회수한다."
집행관들의 검은 네모가 일제히 붉은색 타깃 락온으로 전환되는 찰나였다.
2. 봉인된 흉터의 균열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가 펄펄 끓는 인두를 들이댄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개골 안쪽의 신경망이 비틀리며 시신경을 쥐어짜는 맹렬한 박동이 시작되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아니었다.
뇌간과 경추를 타고 흐르는 백신 코드가 전신으로 맹렬히 방출되며 일으키는 인과율의 공명음이었다.
'막아야 한다.'
우진의 두 눈에 서슬 퍼런 안광이 맺혔다.
'변화 감지(Change Perception).'
시야가 푸른빛으로 반전되며 공간의 시간이 극도로 느려졌다.
집행관 여덟 명의 총구 끝에서 뻗어 나오는 푸른 탄도 궤적선이 0.3초 뒤의 미래를 그리며 공중에 그어졌다.
어머니를 향하는 두 줄기, 서연과 채린을 노리는 세 줄기, 그리고 우진 자신의 심장과 미간을 겨눈 세 줄기.
피할 수 없었다.
갈비뼈의 부상으로 몸의 반응 속도가 0.2초 둔화되어 있었다.
우진 혼자라면 회피할 수 있을지언정, 등 뒤의 어머니와 부상당한 일행은 그대로 인과율 광탄에 분쇄될 터였다.
그 순간, 우진의 품에 안겨 있던 낡은 일기장과 프로메테우스 크리스털이 우진의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체 전류에 반응하듯 백색 섬광을 토해냈다.
파지지직!
크리스털에서 뿜어져 나온 고밀도 인과율 파동이 우진의 뇌간을 강타했다.
'으아아악!'
우진은 비명을 삼키며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단순한 편두통이 아니었다.
뇌의 가장 깊숙한 곳, 15년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미지의 문이 거대한 함마로 깨부숴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망막 뒤편에서 자수정빛의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4단계 능력, '과거 추적(Past Tracing)'.
하지만 이번에는 타인의 과거나 사물의 약점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외부의 대상을 향하던 시간 역행의 궤적선이 고스란히 유턴하여 우진 자신의 뇌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의 과거.
17세 이전, 마치 포맷된 하드디스크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그 암흑의 디렉터리로 억겁의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굉음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지워졌던 10년의 시간이, 봉인되었던 유년의 지옥이 봇물 터지듯 의식의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3. 2011년 9월 17일의 수술대
눈앞의 현실이 허물어졌다.
도진우의 조소도, 빗소리도, 사당의 흙먼지도 아득히 멀어졌다.
우진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눈이 시리도록 차가운 무영등의 백색 조명이었다.
독한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신경을 긁는 심전도 모니터의 전자음.
"체온 35.2도, 심박수 분당 140회. 시신경 동기화율 98% 돌파합니다!"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우진은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결박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주 작은 소년이 있었다.
일곱 살의 강우진이었다.
소년의 작은 머리통에는 수십 가닥의 은색 전극이 거미줄처럼 박혀 있었고, 정수리 위에는 아직 형태를 온전히 갖추지 못한 은빛 동그라미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곁에 피투성이가 된 수술복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핏발 선 눈, 하얗게 질린 입술.
젊은 날의 아버지, 강정호였다.
"정호 씨! 미쳤어요? 당장 손 떼요! 넥스트 큐브 본청 타격대가 지하 2층 방폭문까지 도달했습니다!"
연구원 가운을 입은 한민우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소리치고 있었다.
차폐벽 너머에서 묵직한 폭음이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저놈들은 우진이를 인간으로 보지 않아, 민우야."
강정호의 목소리는 울고 있었지만, 메스를 쥔 그의 손은 단 1밀리미터의 떨림도 없었다.
"이 아이는 자연적으로 태어난 최초의 완벽한 이레귤러야. 시스템의 사각 격자에 결코 갇히지 않는 유일한 특이점이라고. 넥스트 큐브 놈들은 우진이의 뇌간에 저 악마 같은 칩을 박아서, 도시 전체를 가둘 영구적 감옥의 연산 코어로 쓰려 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 칩을 강제로 뽑아내면 아이의 뇌신경이 전부 타버립니다! 기억 중추가 영구히 소실된다고요!"
"알아. 다 알고 있어."
강정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어린 우진의 이마를 적셨다.
"기억을 잃고 평범한 바보로 살아가더라도…… 내 아들이 저 괴물들의 부품이 되어 평생을 산 채로 고통받게 둘 순 없어."
지익, 치이익!
수술실 벽면의 모니터가 지직거리며 붉은 노이즈를 뿜어냈다.
[WARNING : CORE LEVEL OVERWRITE]
[SUBJECT-01 : K-07 BIOMETRIC SYNCING 99.1%]
"시간이 없다. 차폐망을 닫아라! 메인 배수로 전원을 차단해!"
강정호는 떨리는 손으로 특수 레이저 메스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절개용 메스가 아니었다.
신경망에 얽혀 들어간 시스템의 가시덤불을 물리적으로 끊어내기 위한 고주파 플라스마 절단기였다.
어린 소년이 흐느꼈다.
결박용 가죽 끈을 쥔 작은 손이 파얗게 질려 있었다.
"아빠…… 아파요. 머리가…… 머리가 너무 뜨거워요……."
"우진아. 아빠 봐라. 아빠 눈 봐."
강정호는 마스크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아버지의 얼굴이 어린 우진의 망막에 가득 들어찼다.
"숨을 깊게 쉬어라. 절대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네 머릿속에 있는 건 상처가 아니야. 아빠가 널 위해 남겨두는 가장 단단한 방패다."
"아빠…… 무서워요…… 집에 가요, 엄마한테 가요……."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우진아……."
강정호의 손이 어린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곳에는 넥스트 큐브가 강제로 박아 넣은 손톱만 한 티타늄 칩, 'K-07' 수신 단말이 시퍼런 빛을 뿜으며 뇌간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자 부품이 아니었다.
아이의 영혼과 인과율을 시스템의 사각 격자에 영구히 묶어두는 거대한 족쇄였다.
위이잉!
플라스마 절단기가 가동되며 살을 태우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아아아악!"
어린 우진의 목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빛 동그라미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산산조각 날 듯 요동쳤다.
"박사님! 안 됩니다! 뇌파가 정지합니다! 심정지 플랫라인이에요!"
한민우가 비명을 질렀다.
강정호의 눈에 핏줄이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아이의 벌어진 두개골 틈새로 밀어 넣었다.
생살을 찢고, 시신경을 타고 파고든 칠흑빛 통제 칩의 지지대를 자신의 손톱으로 붙잡았다.
우지끈!
생체 결합부가 뜯겨 나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검붉은 피가 강정호의 안면으로 분수처럼 뿜어졌다.
"끄아아악!"
어린 우진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뜯겨 나온 칩의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과율의 역류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시스템이 원래 아이에게 집행하려 했던 파멸의 총량, 수만 볼트의 전자기 폭풍과 뒤틀린 인과율이 방출구를 잃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둔다면 아이의 뇌세포 전체가 새까맣게 타죽을 판이었다.
그 찰나, 강정호가 품에서 푸른빛의 크리스털 앰플을 꺼내 아이의 관자놀이 상처에 쑤셔 박았다.
치이이익!
"이건…… 백신이다."
강정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손으로 아이의 관자놀이를 꿰매기 시작했다.
정교한 외과적 봉합이 아니었다.
아이의 뇌신경 궤도를 시스템의 격자망과 영원히 단절시키기 위해, 인과율의 경로 자체를 인위적으로 비틀어버리는 신경 궤도 절제술(Neural Orbitectomy)이었다.
정확히 4센티미터.
아이의 머릿속에서 시스템의 명령을 수신하던 경로가 완전히 도려내어졌다.
그 대가로, 아이의 뇌 속에 축적되어 있던 7년간의 모든 기억—아빠의 얼굴, 엄마의 자장가, 따뜻했던 방 안의 온기—이 하얀 백지처럼 소각되어 날아갔다.
아이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인형처럼 축 늘어진 아이의 심전도가 희미하게 한 줄기 파동을 그렸다.
"살았다…… 우진이가 살았어……."
한민우가 주저앉아 오열했다.
하지만 안도는 1초도 가지 못했다.
쿵!
콰아앙!
수술실의 두꺼운 방폭문이 폭파되며 시커먼 테르밋 화염이 들이닥쳤다.
검은 정복을 입은 사내들, 넥스트 큐브의 무장 집행대와 함께 젊은 날의 서지훈이 걸어 들어왔다.
서지훈의 얼굴은 흉포한 승리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단하군, 강정호 박사. 기어이 단말을 뜯어냈어."
서지훈이 수술대 위의 어린 우진을 경멸하듯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칩을 뽑았다고 끝날 줄 알았나? 이 아이가 거부한 인과율 결손값은 어쩔 텐가? 시스템의 총량 법칙을 잊었나? 저 아이의 뇌가 타버리지 않는다면, 방출된 에너지는 지금 당장 이 도시의 절반을 불바다로 만들 텐데?"
서지훈의 말이 맞았다.
뜯겨 나간 상처 부위에서 방출된 보랏빛 엔트로피 폭풍이 수술실 천장 콘크리트를 녹여내며 대기 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 결손 수치는 이미 통제 불능의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를 살려낸 대가로, 도시 전체가 파멸의 궤도에 휘말릴 위기였다.
강정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어린 우진의 차가운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표정에서 공포와 절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오직 거대한 평온만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받는다."
강정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서지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라고?"
"내 신경망 전체를 코어의 격자망에 직결시킨다. 우진이가 튕겨낸 모든 엔트로피와 파멸의 인과율을…… 내가 전부 대리 수용하겠다."
"미친 소리! 네놈의 뇌가 살아남을 것 같으냐? 1초 만에 자아가 소각되고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생체 연산 부품으로 전락할 거다!"
"상관없다."
강정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술실 중앙의 메인 콘솔, 역삼동 지하 코어와 직결된 굵은 신경 케이블 단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콘솔 뒤편의 비밀 슬롯에 은빛 크리스털 장치 하나를 밀어 넣고 뚜껑을 용접하듯 잠갔다.
'프로메테우스'.
언젠가 살아남은 아들이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올 때를 위해 남겨둔, 시스템의 심장을 부술 최후의 불씨였다.
강정호는 굵은 신경 동기화 케이블을 집어 들어, 자신의 목덜미와 척수 소켓에 망설임 없이 내리꽂았다.
푸쉬이이익!
푸른 냉각 가스와 함께 수억 볼트의 데이터 전류가 강정호의 전신을 관통했다.
"크으으윽……!"
강정호의 눈, 코,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방출되던 엔트로피 폭풍이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강정호의 육신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시의 파멸이, 어린 우진에게 쏟아졌어야 할 모든 저주와 칼날이 아버지의 몸속으로 강제 흡수되었다.
강정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백색 네모가 산산조각 나며, 영겁의 고통을 상징하는 거대한 암흑의 큐브가 그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의식을 잃어가며 챔버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와중에도, 피눈물을 흘리는 강정호의 시선은 오직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어린 아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살아라, 우진아.'
부서진 무전기처럼 끊어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뇌리에 메아리쳤다.
'기억을 잃어도 좋다. 네 삶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네모의 굴레에 갇히더라도…… 절대로 네 영혼을 저들에게 넘겨주지 마라.'
'살아서…… 스스로 궤도를 선택해라.'
콰아아앙!
연구소 전체가 테르밋 고온 방전으로 하얗게 타들어 가며 기억의 영상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4. 신경 궤도 절제술의 진실
"……허억!"
강우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현실의 감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폐사당의 빗소리, 화약 연기, 그리고 0.1초 뒤 우진 일행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쇄도하는 여덟 줄기의 푸른 탄도선.
시간은 멈춰 있던 것이 아니었다.
기억이 각성한 것은 찰나의 0.01초 사이였다.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상처가 아니었다.
15년 전,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쑤셔 넣어 시스템의 통제선을 강제로 끊어냈던 자리.
시스템이 부여한 사각 격자의 굴레를 영원히 거부하도록 신경을 잘라내고 비틀어버렸던 거룩한 저항의 흔적.
신경 궤도 절제술의 흉터였다.
'그랬던 거였어.'
우진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면서도 머리 위의 도형을 볼 수 있었는지.
왜 남들의 검은 세모를 볼 때마다 흉터가 찢어질 듯 아파왔는지.
왜 자신의 개입으로 튕겨 나간 파멸 에너지를 자신의 뇌가 방화벽처럼 흡수해 낼 수 있었는지.
모든 퍼즐이 완벽하게 맞춰졌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과 영혼을 통째로 갈아 넣어 아들의 신경계에 새겨준 가장 완전한 사랑이자 절대적인 방패였다.
"죽어라, K-07!"
도진우의 서늘한 명령과 함께, 집행관들의 총구에서 여덟 발의 인과율 집속탄이 일제히 격발되었다.
타앙-!
파멸의 에너지가 사당 안의 공기를 찢으며 날아들었다.
그러나 우진은 더 이상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지도, 회피하지도 않았다.
우진은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딛으며, 피 묻은 왼손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우웅-!
우진의 정수리 위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은빛이 폭발했다.
그것은 더 이상 희미하게 명멸하던 불안정한 원환이 아니었다.
완벽한 진원(眞圓).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지의 상징, 은빛 동그라미(○).
그리고 그 거대한 원환의 한가운데, 15년 동안 잠들어 있던 붉은 중심점이 벼락처럼 찍혔다.
과녁형 식별 코드(⊙).
아니, 그것은 식별 코드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연산식을 역으로 겨냥하는 특이점의 조준경이었다.
파아아앙!
우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척력 파동이 사당 내부를 구형으로 뒤덮었다.
날아들던 여덟 발의 인과율 탄환들이 허공에서 뚝 멈춰 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두꺼운 얼음벽에 처박힌 것처럼, 푸른 광탄들이 격렬한 스파크를 튀기며 공중에서 제자리 회전을 시작했다.
"뭐, 뭐라고……?!"
도진우의 두 눈이 경악으로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의 머리 위에서 역회전하던 4차원 붉은 큐브가 통제 불능의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거렸다.
"인과율 탄환을…… 공간 자체를 왜곡해서 정지시켰다고? 저건 단순한 2단계가 아니야! 저 기하학체는 대체 뭐냐!"
"도진우."
우진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차갑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을 초월한 서늘한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너희는 아버지를 부품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겠지."
우진이 허공에 뻗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콰직!
공중에 멈춰 서 있던 여덟 발의 인과율 탄환이 우진의 은빛 파동에 짓눌려 유리알처럼 산산조각 났다.
눈부신 파편들이 사당 바닥으로 힘없이 흩뿌려졌다.
"아버지는 부품이 된 게 아니다. 너희의 그 역겨운 감옥 속에서, 나를 기다리며 15년을 버텨낸 거다."
5. 역류하는 인과율
우진의 발밑에서 은빛 동그라미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사당 바닥의 진흙과 빗물이 중력을 거스르듯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집행관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고정된 검은 네모(■)'들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잉, 지지직!
요원들의 방탄 헬멧 바이저 안쪽에서 붉은색 에러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ERROR : PARADOXICAL NODE DETECTED]
[CAUSALITY RESISTANCE : INFINITE]
[SYSTEM DELAY OCCURRED : 0.8 SEC ...
1.2 SEC ...]
"사격해! 쏴라! 뭘 멍청히 서 있는 거냐!"
도진우가 악을 썼다.
그러나 요원들의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우진이 전개한 은빛 동그라미의 비간섭 척력 파동이 사각형 격자망으로 연결되어 있던 요원들의 신경 제어선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밀어내고 있었다.
완벽한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이 깨어졌다.
0.8초, 1.5초, 2.0초.
명령을 내리는 상위 큐브와 손가락 근육 사이의 데이터 병목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벌어졌다.
"채린아."
우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낮게 불렀다.
넋을 잃고 우진의 등을 바라보던 윤채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어?!"
"오버라이더는 준비됐나?"
채린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과부하로 꺼져 있던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배터리 창이, 우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밀도 백신 에너지와 공명하며 순식간에 녹색 100% 완충 상태로 번쩍이고 있었다.
채린의 목덜미에 새겨진 흉터에서도 기분 좋은 미온이 감돌았다.
"……완벽해. 반경 1킬로미터까지 날려버릴 수 있어!"
"서연 씨, 어머니를 모시고 카니발로 가요. 기사님에게 시동을 걸라고 전해요."
"우진 씨는요?"
한서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우진은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집행관의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발로 차올려 한 손으로 낚아챘다.
철컥.
노리쇠를 후퇴 고정시키는 우진의 동작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난 길을 열겠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진의 신형이 사당 문밖을 향해 탄환처럼 쏘아져 나갔다.
콰아앙!
순식간에 첫 번째 집행관의 코앞으로 쇄도한 우진의 개머리판이 적의 턱주가리를 강타했다.
투각!
방탄 헬멧이 깨져 나가며 사내의 몸이 빗물 위로 붕 떴다.
그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네모가 파열되며 검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이 건방진 쥐새끼가!"
도진우가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의 4차원 붉은 큐브가 맹렬히 회전하며 우진의 미간을 향해 초고압 인과율 빔을 쏘아 보냈다.
파지지직!
푸른 섬광이 빗줄기를 증발시키며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우진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우진의 머리 위 은빛 동그라미에서 뻗어 나온 반투명한 나선형 궤적선이 빔의 경로를 미리 비틀어버렸다.
쿠웅!
초고압 빔은 우진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 사당 뒤편의 폐벽돌 더미를 산산조각 냈을 뿐이었다.
"뭐라고?!"
도진우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궤적을…… 굴절시켰어? 시스템의 집속 궤도를 손대지도 않고 꺾었다고?!"
우진이 도진우의 턱밑까지 파고들었다.
우진의 서늘한 눈동자가 도진우의 흔들리는 동공을 똑바로 꿰뚫었다.
"네놈들의 궤도는 여기까지다."
콰직!
우진의 무릎이 도진우의 명치를 짓찧었다.
억,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도진우의 입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도진우의 육중한 신체가 허공으로 꺾이며 진흙탕 위로 처박혔다.
그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4차원 붉은 큐브의 한쪽 모서리에 길고 선명한 균열이 쫙 갈라졌다.
"크아아악! 내, 내 큐브가……!"
도진우가 머리를 감싸 쥐고 진흙탕을 뒹굴었다.
남은 일곱 명의 집행관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감정이 거세되었어야 할 기계화 단말들의 전신이, 우진이 내뿜는 압도적인 인과율의 위압감 앞에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사당 문가에서 윤채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진 씨! 엎드려요! 오버라이더 기동합니다!"
채린이 손에 든 검은 원통형 장치의 뇌관을 바닥으로 내리찍었다.
쿠구구구궁!
사당 마당 전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은빛 전자기 폭풍이 돔 형태로 폭발했다.
빛의 파도가 빗줄기를 뚫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벽돌 공장 터를 둘러싸고 있던 넥스트 큐브의 모든 통신망과 사각 격자 레이더망을 순식간에 암전시켰다.
지지직, 펑!
펑!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집행관들의 통신 팩과 무전기들이 연쇄적으로 불꽃을 튀기며 터져 나갔다.
완벽한 시스템 사각지대, 전자기 진공 구역이 완성되었다.
6. 어둠을 찢는 특이점
부르릉-!
진흙을 튀기며 검은색 카니발이 마당 한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며 한서연이 손을 내밀었다.
"우진 씨! 타요!"
어머니는 이미 뒷좌석에 안전하게 탑승해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화물차 기사가 사색이 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우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도진우를 내려다보았다.
도진우는 깨진 큐브의 파편을 붙잡으려 바둥거리며, 피 묻은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K-07…… 네놈이…… 네놈이 이겼다고 생각하나?"
도진우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조소했다.
"본사로 와라…… 지하 4층에는 네놈의 옛 동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상임이사회는 이미 서울 전체를 인질로 잡는 최종 프로토콜을 승인했다. 네놈이 코어에 손을 대는 순간…… 1천만 명의 시민들이 전부 검은 세모로 뒤틀려 자살할 것이다!"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 든 아버지의 크리스털 '프로메테우스'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차갑던 크리스털이 우진의 체온과 반응하며 심장처럼 은은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내가 갈 거다."
우진이 낮게 읊조렸다.
"너희가 만든 그 거짓된 사각 감옥을, 내 손으로 완전히 부숴버리기 위해서."
탕!
우진은 도진우가 쥐고 있던 권총을 짓밟아 부러뜨린 뒤, 몸을 돌려 카니발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이 쾅 닫혔다.
"출발해요! 어서!"
채린의 외침과 함께, 카니발이 맹렬한 굉음을 토해내며 진흙탕을 박차고 나갔다.
벽돌 공장의 녹슨 철문을 부수고 나간 차량은 어둠이 짙게 깔린 자유로를 향해 미친 듯이 속도를 올렸다.
차창 밖으로 거센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피 묻은 뺨을 감싸 쥐었다.
"우진아…… 내 아들, 우진아……."
어머니의 오열이 차 안을 채웠다.
우진은 조용히 어머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의 흉터는,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타인의 세모를 볼 때마다 뇌를 찌르던 그 끔찍했던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신경 궤도 절제술의 흉터.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각 격자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방패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무릎 위에 아버지 강정호의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피와 바랜 잉크로 가득 찬 마지막 장.
그곳에는 15년 전 아버지가 코어로 걸어 들어가기 직전, 떨리는 필체로 남겨둔 마지막 메모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우진에게.]
[동그라미는 시작도 끝도 없는 선이다.
규격에 갇히지 않는 유일한 곡선이다.]
[시스템이 너를 네모로 규정하려 할 때, 너의 심장이 뛰는 궤도를 믿어라.]
[프로메테우스의 코드는 K-07 너 자신의 뇌파와, 바깥에서 너를 부르는 또 다른 이레귤러의 숨결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우진의 시선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채린에게로 향했다.
'또 다른 이레귤러의 숨결.'
채린의 목덜미에 새겨진 2세대 프로젝트의 소켓 상처가 희미하게 은빛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시스템이 만들어내지 못한 우연이자 필연의 조력자였다.
그때, 대시보드에 놓여 있던 한서연의 노트북 화면이 지직거리며 붉은색 알림창을 띄웠다.
[EMERGENCY BROADCAST ALERT]
[METROPOLITAN GRID STATUS : CODE BLACK]
[NEXT CUBE DATA CENTER - MAXIMUM SECURITY ACTIVE]
"서울 전역의 미러 큐브 앱이 강제 업데이트되고 있어요!"
서연이 사색이 되어 화면을 가리켰다.
"서버 접속자 수가 700만 명을 돌파했어요. 도진우의 말이 맞았어요. 넥스트 큐브가 본사 데이터 센터의 코어를 지키기 위해 시민들의 단말을 역인질로 잡기 시작했어요!"
차창 너머, 저 멀리 밤안개 속에 휩싸인 테헤란로의 마천루들이 거대한 괴물의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그 빌딩들의 상공 위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칠흑빛 격자망이 서울의 하늘을 질식할 듯 짓누르고 있는 것이 우진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수천만 개의 검은 실선들이 지상의 인간들을 향해 거미줄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가자."
강우진이 일기장을 덮으며 낮게 말했다.
그의 정수리 위에서 찬란하게 타오르는 은빛 동그라미의 중심점이, 테헤란로 한복판의 넥스트 큐브 본사를 향해 서늘한 궤적을 그리며 빛나고 있었다.
"끝내러 가야지."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