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고백
1. 빗길 위의 침묵
와이퍼가 유리창을 거칠게 긁어내며 좌우로 요동쳤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강변북로의 차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한강 수면 위로 산산이 부서지는 빗방울들은 마치 도시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노이즈 같았다.
카니발 뒷좌석에 깊숙이 파묻힌 강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갈비뼈를 감싼 붕대 위로 시뻘건 피가 덧나 번져 나오고 있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뼛조각이 폐를 찌르는 듯한 찌릿한 격통이 척추를 타고 뇌간까지 치밀었다.
"우진 씨, 움직이지 마요. 출혈이 다시 심해지고 있어요."
조수석에서 몸을 돌린 윤채린이 멸균 거즈를 우진의 옆구리에 대고 지그시 눌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탱크로리의 육중한 차체 밑으로 뛰어들어 기어이 킹핀을 부러뜨렸던 우진의 모습이 여전히 망막에 선명한 탓이었다.
운전대를 쥔 한서연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끊임없이 뒤쪽을 살폈다.
빗길을 찢는 타이어 소리 사이로 계기판 옆에 놓인 군용 무전기의 거친 지직거림이 차 안의 적막을 날카롭게 베어 물었다.
- 전 부대, 코드 블랙 발령.
- 대상자 001의 변수 임계치 이탈 확인.
- 뱅뱅사거리 인근 격자망 붕괴율 34%.
- 중앙 통제감사실 직권으로 즉각 사살 지령을 재확인한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음성은 더 이상 사람의 언어가 아니었다.
오직 시스템의 논리 회로가 뱉어내는 서늘한 집행 통보였다.
차량 뒷좌석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화물차 기사는 여전히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파멸의 검은 세모는 사라졌지만,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온 공포는 쉽게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제가 정말 사람들을 칠 뻔했다는 겁니까? 브레이크가, 분명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발이 전혀 안 움직였습니다. 핸들도 제 손으로 꺾은 게 아니었어요."
기사의 젖은 목소리에 서연이 백미러로 그를 쏘아보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누군가 당신의 신경과 도로의 신호를 통째로 쥐고 흔든 거니까요. 일단 묻는 말에만 답하고 조용히 엎드려 계세요."
우진은 지그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깊게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후벼 파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눈꺼풀 안쪽으로 푸른빛 잔상들이 기괴한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며 명멸했다.
탱크로리의 킹핀을 분쇄하며 시스템의 인위적 참사를 막아낸 대가는 참혹했다.
방화벽 백신 코드가 체내로 역류한 인과율 에너지를 억지로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시신경과 혈관에 막대한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의 한가운데서 우진은 기이할 정도로 맑아지는 감각을 느꼈다.
시스템의 사전 예측 오차 범위를 완전히 깨부순 자에게 주어지는 기이한 공백.
'수학적 특이점.'
무전기 속 도진우의 목소리가 그렇게 선언했었다.
도시 전체의 인생 궤도를 1초 단위로 직조해 내던 거대 시스템이 마침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계산식에서 영구히 놓쳐버린 것이다.
"서연 씨, 자유로 쪽은 어때요?"
우진이 턱 끝까지 차오른 핏물을 삼키며 물었다.
"아직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의 감시 카메라는 잠잠해요. 하지만 시내 주요 교차로마다 검문 검색이 시작됐어요. 공중파는 물론이고 포털 메인에도 우진 씨와 채린 씨의 얼굴이 강력범죄 수배자로 걸렸어요."
서연이 내비게이션 화면을 힐끔 보며 핸들을 꺾었다.
"고양시 외곽 벽돌 공장 터까지 20분 남았어요. 정말…… 어머니가 그곳에 계신 게 확실해요?"
"확실해요."
우진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늘한 확신이 흘러나왔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집에 계신 적이 없었어요.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어린 저를 방 안에 홀로 남겨두고, 흠뻑 젖은 우산을 든 채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시곤 했죠. 그때마다 어머니의 옷자락에서는 붉은 벽돌 가루 냄새와 매캐한 향 냄새가 났습니다."
그것은 삭제된 17세 이전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인화지처럼 박제되어 남아 있는 서글픈 감각이었다.
비, 붉은 흙,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무언가를 참회하듯 방바닥을 적시던 어머니의 숨죽인 흐느낌.
"도진우가 도심 격자망을 옥죄고 있는 지금, 시스템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날로그 사각지대는 그곳뿐입니다."
우진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옆구리에서 쏟아지는 고통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2. 비에 젖은 폐사당
차가 덜컹거리며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좁은 비탈길은 차체의 하부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안개비 속에서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린 붉은 벽돌 벽면들을 비추었다.
1980년대에 가동을 멈추고 버려진 옛 벽돌 공장 부지였다.
깨진 벽돌 더미와 녹슨 철근들이 잡초 더미 사이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공장 부지 가장 깊숙한 안쪽, 빽빽한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언덕배기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낡은 단층 목조 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혹은 그보다 이전에 지어졌을 법한 사당 형태의 폐건물이었다.
처마 끝에서 굵은 낙숫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축축한 흙바닥을 패어내고 있었다.
"이곳이에요."
서연이 시동을 끄고 전조등을 완전히 내렸다.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과 빗소리가 차량을 집어삼켰다.
채린이 품에서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반경 1킬로미터 내에 디지털 신호선이 일체 잡히지 않아요. 통신 기지국 전파도,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Grid)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완벽한 아날로그 진공 구역이에요."
"기사님은 차 안에 계세요. 고개 숙이고, 아무 소리가 나도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우진이 화물차 기사에게 낮게 이른 뒤 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흙비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절뚝이며 바닥에 발을 디딘 우진을 서연과 채린이 양옆에서 부축했다.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지는 언덕길을 올라 사당의 삐걱거리는 나무 문 앞에 섰다.
문살 틈새로 미약한 노란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등 불빛이 아니었다.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의 빛이었다.
매캐하면서도 아스라한 백단향 냄새가 빗줄기를 뚫고 우진의 코끝을 스쳤다.
우진의 심장이 묵직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거세된 15년 동안, 단 한 번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유일한 혈육.
아버지를 지우고, 세상을 사각형의 안정된 감옥으로 받아들이라 강요하던 어머니가 바로 저 문 너머에 있었다.
우진이 떨리는 손을 뻗어 낡은 미닫이문을 밀었다.
끼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습기 찬 목조 건물의 퀴퀴한 냄새와 짙은 향 연기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사당 정면의 낡은 목제 제단 위에는 아무런 위패도 없었다.
다만 수십 개의 하얀 초가 녹아내리며 바닥을 적시고 있었고, 그 앞에는 15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누렇게 바랜 종이 타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앞에,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왜소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늘게 떨리는 여인의 손마디 사이로 염주알이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 정수리 위에는 아무런 도형도 떠 있지 않았다.
시스템의 격자망이 닿지 않는 공간이었기에, 그녀를 짓누르던 통제선도, 일상의 백색 네모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살과 뼈를 지닌 가냘픈 한 인간의 웅크린 육신만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
우진의 갈라진 목소리가 고요한 사당 안을 울렸다.
염주를 굴리던 손길이 그 자리에 뚝 멈추어 섰다.
여인의 마른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기 시작했다.
3. 찢겨진 진실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흘러내린 우비 모자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며칠 새 십 년은 늙어버린 듯 초췌했다.
깊게 패인 눈가와 핏기 없는 입술, 그리고 짓무른 눈시울.
우진의 찢겨진 옷자락과 피범벅이 된 옆구리, 그리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머니의 동공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우진아……."
비명조차 되지 못한 메마른 탄식이 어머니의 목구멍을 넘어왔다.
여인은 바닥을 기다시피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우진에게 다가왔다.
거칠게 튼 마른 손이 우진의 피 묻은 뺨을 감싸 쥐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그 떨림은 뼈를 깎는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어이…… 기어이 여기까지 온 거냐. 내가 그렇게 도망치라고, 제발 아무것도 보지 말고 평범하게 살라고 빌었는데……."
눈물이 여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우진의 옷깃에 떨어졌다.
"어머니, 이제 그만 숨기세요."
우진이 어머니의 메마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전 이미 봤습니다. 아버지가 갇혀 있던 역삼역 지하의 코어를 보았고, 아버지가 남긴 연구 노트와 오메가-루프를 손에 넣었습니다. 도진우와 넥스트 큐브가 이 도시를 어떻게 가축처럼 사육하고 있는지도 전부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숨결이 거칠게 멎었다.
'강정호'라는 이름이 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그녀의 전신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아버지는 가출한 게 아니었어요. 가족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그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 갇혀서, 도시 전체의 궤도를 지탱하는 생체 부품으로 이용당하고 있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터져 나왔다.
"왜 저한테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왜 아버지가 절 팔아넘겼다고, 아버지가 절 버렸다고 거짓말을 하셨어요? 제 머릿속 기억을 지우고, 관자놀이에 이 끔찍한 흉터를 남긴 게 정말 누구입니까!"
사당 안의 촛불이 우진의 격앙된 외침에 파르르 요동쳤다.
뒤편에 서 있던 서연과 채린조차 숨을 죽인 채 그 비극적인 모자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려 턱 끝을 적셨다.
"널 살리려고 그랬다……."
여인의 입술 사이로 찢어지는 듯한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네가 네 아버지를 찾아 나설 테니까! 네가 그 빌어먹을 도형들을 쫓다가 그놈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테니까! 내가 널 어떻게 살려냈는데…… 네 아버지가 피를 토하며 어떻게 널 빼돌렸는데……!"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제단 바닥에 주저앉았다.
통곡 소리가 낡은 사당의 천장을 때리며 빗소리와 뒤섞였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럼 말해주세요. 15년 전 연구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버지는 왜 코어에 남았고, 저는 왜 살아남았습니까?"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제단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양철 통을 끌어당겼다.
녹이 슬어 붉게 변한 양철 통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불에 반쯤 그을린 두툼한 서류철과 15년 전의 테이프 리코더가 모습을 드러냈다.
4. 괴물이 된 아버지
어머니의 손가락이 떨리며 테이프 리코더의 플라스틱 외피를 쓸어내렸다.
그것은 2011년 9월 17일, 테헤란로의 연구소가 불타오르던 그 비극적인 새벽에 멈추어 선 유물이었다.
"그 사람…… 네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학자였어."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가 촛불 너머로 아득하게 번져 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순수한 마음이었단다. 인간이 왜 불행해지는지, 왜 착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고로 죽고 파멸하는지…… 그 인과의 법칙을 수학으로 풀어내면 비극을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어. 그게 '인간 궤도 모델링' 연구의 시작이었지."
하지만 국가의 지원을 가장해 연구소에 침투한 자들은 학자들이 아니었다.
넥스트 큐브의 전신이자, 배후의 통제 세력이었던 자들이 연구 자금을 대며 연구소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비극을 막는 알고리즘을 원한 게 아니었다.
인간의 궤도를 규격화하여 통제하고, 사회 전체의 엔트로피를 지배 계급의 입맛대로 재배치하는 완벽한 사각 격자의 감옥을 만들고자 했다.
"네 아버지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어. 이미 연구소 지하에는 거대한 중앙 코어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고, 그놈들은 살아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뇌간에 칩을 박아 넣는 생체 실험을 시작했단다."
채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자신의 목덜미에 박혀 있는 흉터의 기원이 어머니의 입을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연구를 중단하고 모든 데이터를 파기하려 했어. 하지만 놈들이 먼저 눈치챘지. 놈들은 연구소를 봉쇄했고…… 가장 잔인한 인질을 잡았다."
어머니가 피맺힌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바로 너였다, 우진아."
우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네 일곱 살 생일날이었어. 열이 펄펄 끓던 너를 데리고 연구소 의무실로 갔을 때……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 놈들이 널 납치했다. 그리고 네 아버지의 눈앞에서, 네 머릿속에 'K-07'이라는 프로토타입 제어 칩을 강제로 박아 넣었어."
어머니의 오열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네 아버지를 복종시키기 위한 목줄이었단다! 시스템의 명령을 거부하면 언제든 원격으로 네 뇌를 태워버릴 수 있는 스위치를 쥐고, 네 아버지를 협박한 거야. 그 사람더러 중앙 코어의 완성판을 내놓으라고…… 네 목숨을 인질로 잡고 밤낮없이 코드를 짜게 만들었어!"
우진의 손이 저절로 오른쪽 관자놀이의 흉터로 향했다.
4cm의 수술 흉터.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자신을 옭아매고 아버지를 노예로 부리기 위해 박아 넣었던 악마의 족쇄.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진이 턱을 떨며 물었다.
어머니는 양철 통 속에서 불에 탄 서류 한 장을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그것은 피실험자 수술 일지였다.
수술 집도의의 이름 칸에 '강정호'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네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어. 시스템의 격자망이 완성되어 도시 전체가 닫히기 직전, 2011년 9월 17일 새벽에 연구소의 모든 전자기 밸브를 열어 자폭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화염 속에서…… 제 손으로 직접 너를 수술대에 눕혔단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찢어지듯 갈라졌다.
"시스템의 제어 신호가 쏟아져 들어오는 그 아비규환 속에서, 네 머릿속의 칩을 강제로 적출해 냈어. 마취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신경과 엉겨 붙은 칩을 뜯어내느라 네 머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지. 그 과정에서 네 유년기의 뇌세포와 기억들이 통째로 타버린 거야!"
우진의 뇌리에 벼락같은 충격이 내리꽂혔다.
17세 이전의 기억이 인화지처럼 하얗게 비어 있던 이유.
지워진 기억 속에서 왜 늘 피비린내와 타는 냄새만이 맴돌았는지, 그 지옥 같은 진실이 마침내 맞춰지고 있었다.
"칩을 떼어내자마자 중앙 코어가 널 '결손 노드'로 인식하고 즉각 소거하려 들었어. 도시의 격자망이 너를 향해 파멸의 인과율을 쏟아부으려 할 때…… 네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 아니?"
어머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네 아버지는 널 지키려고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한 거다!"
사당 안을 찢어발기는 어머니의 오열에 촛불들이 일제히 거칠게 요동쳤다.
"그 파멸의 에너지를…… 너에게 쏟아지는 그 끔찍한 인과율의 저주를 자신이 전부 받아내려고! 네 머릿속에 방화벽 백신을 새겨 넣은 뒤, 스스로 역삼역 지하의 액체 챔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거야! 자신의 뇌와 신경을 시스템의 중앙 코어에 직결시키고, 스스로 'Node-0'이 되어 그 거대한 기계의 심장이 되어버렸단 말이다!"
5. 마지막 유품
"아버지가…… 스스로 코어에?"
우진의 목구멍에서 헛바람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이 캄캄하게 암전되었다.
역삼역 지하 7층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광경.
수백 가닥의 케이블이 머리통에 박힌 채 차가운 액체 속에서 부유하던 아버지의 메마른 육신.
그것은 시스템에 붙잡혀 강제로 개조당한 희생양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들을 향해 쏟아지는 도시 전체의 파멸적 인과율을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내기 위해, 스스로 지옥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 한 아버지의 처절한 방패였던 것이다.
"그 사람이 챔버에 갇히면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 아니?"
어머니가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테이프 리코더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치익― 하는 거친 테이프 노이즈가 흐르고, 이내 스피커 너머로 15년 전의 굵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화염과 전자기 방전의 폭음이 배경음으로 깔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한 남자의 목소리.
- 여보, 우진이를 데리고 도망쳐.
- 가능한 한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 아이의 관자놀이에 백신을 심었지만, 기억은 돌아오지 않을 거야.
- 아니,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아.
- 우진이가 평범한 네모의 삶을 살게 해줘.
- 내가 코어에 묶여 있는 한, 시스템은 우진이의 존재를 '이미 소거된 결손 데이터'로 오인할 테니까.
- 내가 버틸게.
- 이 거대한 괴물의 심장을 내가 틀어쥐고 버틸 테니까…… 내 아들이 평범하게 숨 쉴 수 있게 해줘.
테이프 속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피를 토하듯 헐떡이면서도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는,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초인적인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 하지만 만약…… 아주 먼 훗날, 시스템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내 아이가 기어이 스스로 눈을 뜨게 된다면.
- 머리 위에 뜬 도형들을 자각하고 궤도를 의심하게 된다면…….
- 그때는 이 사당의 바닥을 열어줘.
- 내가 인간으로서 남겨둔 마지막 심장을 우진이에게 쥐여줘.
딸깍.
테이프가 멈추어 섰다.
사당 안에는 오직 처마 끝을 때리는 빗소리와 어머니의 숨죽인 흐느낌만이 감돌았다.
우진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갈비뼈의 통증도, 관자놀이를 후벼 파던 두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통째로 뜯겨 나간 듯한 거대한 공동 속으로, 아버지가 홀로 감내해 온 15년의 지옥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어머니는 제단 뒤편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낡은 돗자리를 걷어내자, 바닥에 붉은 벽돌로 정교하게 짜 맞춘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비밀 덮개가 드러났다.
어머니가 벽돌 틈새의 걸쇠를 잡아당기자,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지하로 통하는 작은 철제 수납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두꺼운 납 판으로 3중 밀봉된 검은색 하드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케이스 표면에는 아버지 강정호의 친필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Node-1 K-07 강우진을 위한 해방 키 : PROMETHEUS]
우진이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납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치이익―
내부의 진공이 풀리며 차가운 질소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상자 안에는 두 가지 물건이 안치되어 있었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반투명한 크리스털 저장 매체였다.
중앙 코어의 기하학적 격자망을 영구 무력화할 수 있는 마스터 소스코드의 최종 파편.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것은, 낡은 가죽 일기장 한 권이었다.
일기장의 첫 장을 넘기자, 어린 우진을 안고 활짝 웃고 있는 젊은 부부의 흑백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 사진 아래, 15년 전 아버지가 피 묻은 손가락으로 눌러 쓴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내 아들아.
세상이 네게 사각형의 벽을 강요하더라도 결코 무릎 꿇지 마라.
너는 누군가의 체스 말이 아니라, 스스로 궤도를 그리는 살아있는 별이다.'
우진은 가죽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어머니가 우진의 어깨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부짖었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흐르는 눈물을 삼켰다.
슬픔은 이미 그의 안에서 차가운 칼날로 벼려지고 있었다.
6. 포위망의 붉은 눈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채린의 손에 들려 있던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화면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경보음이 터져 나왔다.
액정 위에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WARNING : GRID OVERRIDE COMPROMISED]
[외부 고출력 스캔 펄스 감지]
[아날로그 진공 차폐벽 붕괴율 89%]
"채린 씨!"
서연이 사당 문가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신호가 잡혔어요! 누군가 이 폐벽돌 공장 일대로 광대역 인과율 펄스를 쏘아 보내고 있어요!"
채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박힌 나노 전극 소켓에서 파란색 스파크가 튀었다.
"도진우예요……! 그자가 본사의 분산 연산망을 총동원해서 서울 외곽의 모든 통신 음영 지역을 강제로 스캔하고 있어요! 우리 위치가 특정됐어요!"
우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맹렬하게 박동하며 2단계 '심층 분석'의 시야가 강제로 개안되었다.
사당의 나무 벽면 너머, 빗줄기가 쏟아지는 숲속의 풍경이 망막에 투명하게 겹쳐 들어왔다.
언덕 아래, 폐벽돌 공장 부지를 둘러싸고 수십 대의 검은색 밴이 헤드라이트를 끈 채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 차들에서 쏟아져 나온 자들의 머리 위.
일반 감시관들의 단순한 검은 큐브가 아니었다.
세 겹으로 중첩되어 회전하는 기괴한 입체 큐브.
그리고 그 중앙에서, 지휘관의 표식인 4차원 다포체 형태의 붉은 큐브를 머리 위에 띄운 도진우가 빗속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푸른빛을 번뜩이는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이 쥐여 있었다.
- K-07.
사당 외부의 확성기를 통해 도진우의 서늘하고 오만한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 참으로 눈물겨운 가족 상봉이로군.
- 네 아비가 스스로를 갈아 넣어 만든 그 좁아터진 무덤 속에서, 기어이 마지막 유품을 찾아냈나?
우진은 크리스털 저장 매체를 품에 넣고, 벽에 기대어 있던 충격 바톤을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경악에 질려 우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우진아…… 안 된다.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야. 도망쳐야 해, 어서 뒤쪽 숲으로……!"
"어머니."
우진이 어머니의 거친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켜낸 자유의지의 불꽃만이 그의 두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우진이 낮게, 그러나 사당 전체를 진동시키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그 차가운 기계 속에서 저를 위해 버텼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버지를 끝내드릴 차례입니다. 이 도시의 사각 감옥을 부수고, 그 가짜 신들을 끌어내릴 겁니다."
우진의 머리 위로 은빛의 미세한 파동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이레귤러의 빛, 동그라미(○)의 은빛 원환이 그의 정수리 위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채린의 그것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선명한 핵이 찍혀 있었다.
쾅―!
사당의 낡은 나무 문이 인과율 집속탄의 푸른 충격파에 산산이 박살 나며 날아갔다.
폭풍 같은 빗줄기와 함께,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도진우의 집행 부대가 총구를 들이밀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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