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설계 구역
1. 지하의 포위망
콘크리트 계단을 부수며 내려오는 살기는 피부를 바늘로 찌르듯 서늘했다.
부서진 백열전구의 잔해 위로 붉은색 레이저 스캔이 거미줄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개의 인영은 인간의 온기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주변의 빛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침묵하는 칠흑빛 원환.
'검은 동그라미(●)'.
동면 장치에서 막 깨어난 피실험자 병기, Subject-02와 Subject-05였다.
그들의 관자놀이와 목덜미에는 3중 억제 티타늄 소켓이 흉측하게 결착되어 있었고, 무감각한 회색 눈동자는 오직 눈앞의 타깃인 강우진만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Subject-02의 손목에서 푸른빛의 응축된 인과율 집속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조차 없는, 반사신경과 살상 시뮬레이션이 결합된 극한의 선제공격이었다.
우진은 숨을 들이켜며 뒤통수를 향해 쏘아지는 궤적을 직관적으로 읽어냈다.
2단계 '변화 감지'의 푸른 궤적선이 허공에 무수히 겹치며 파열음과 함께 흩어졌다.
피할 수 있는 각도가 아니었다.
적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쾅-!
우진은 허리춤의 충격 바톤을 전개해 칼날을 가까스로 빗겨 쳐냈다.
그러나 벼락같은 충격이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 관절을 짓눌렀다.
시멘트 바닥이 두 동강으로 쪼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진 씨!"
작업대 뒤편에서 마이크를 쥔 서연이 비명을 질렀다.
"신경 쓰지 마세요! 방송을 유지해요!"
우진이 피를 머금은 입술을 악물며 외쳤다.
그 순간, Subject-05가 어둠을 가르고 서연과 채린이 있는 통신 콘솔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단말기를 부수고 라이브 방송을 강제로 중단시키려는 기계적 알고리즘의 판단이었다.
채린이 이를 악물고 품 안에서 은빛으로 박동하는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꺼내 들었다.
"우리 언니 손대지 마!"
파아아앙-!
채린의 정수리에 떠 있던 은빛 동그라미(○)가 격렬하게 공명하며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통해 순수한 비간섭 척력 파동을 방출했다.
반경 5미터 이내의 공간이 일순간 진공 상태처럼 일그러졌다.
쇄도하던 Subject-05의 머리 위 검은 동그라미가 척력 파동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둔탁한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갔다.
콰르릉!
벽면에 매달려 있던 수백 장의 LP 판들이 폭풍 같은 충격파에 휩쓸려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피실험자 병기의 목덜미 소켓에서 푸른 스파크가 치직 튀어 올랐다.
순간적인 연산 쇼트였다.
0.5초의 빈틈.
그 찰나의 순간을 우진은 놓치지 않았다.
우진의 안광에 4단계 '과거 추적'의 자수정빛 섬광이 번뜩였다.
관자놀이의 수술 흉터가 불타는 듯한 열기를 뿜어내며 적들의 경추와 척추 결합부로 이어지는 과거의 수술 자국을 자수정빛 실선으로 낱낱이 투영해 냈다.
'보인다.'
민도현에게 새겨져 있던 것과 동일한 구조적 결함.
15년 전 급조되었던 뇌간 전극 접합부의 미세한 균열이었다.
우진은 바닥을 차고 날아올라 충격 바톤의 끝을 Subject-02의 경추 3번 결합부에 정확하게 틀어박았다.
동시에 자신의 신경망 속에 깃든 방화벽 백신 코드를 고전압 전류처럼 쏟아부었다.
찌지지지직-!
"크그극……!"
Subject-02의 전신이 감전된 듯 경련했다.
머리 위에 박제되어 있던 칠흑빛 검은 동그라미의 중심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져 나갔다.
동시에 놈의 입술 사이로 기계음이 아닌, 고통에 짓눌린 어린아이 같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바톤을 회수하고 옆으로 굴렀다.
완벽한 파괴가 아니었다.
세뇌를 푼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신경 제어 시스템을 마비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15년 전 자신과 함께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뒹굴었던 피해자들이었다.
2. 단파 수신기의 조력자
"채린 씨, 그리드 연막!"
우진의 외침과 동시에 채린이 주머니에서 백색 캡슐을 바닥에 내던졌다.
치이익-!
농밀한 은백색 연무가 지하 공방 전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은빛 동그라미의 비간섭 파동을 응축시킨 연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적들의 레이저 락온 센서와 시신경 스캔을 완벽한 장님으로 만들었다.
벽면에 부딪힌 Subject-05가 비틀거리며 방향 감각을 잃고 허공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지금입니다! 장비 챙겨요!"
서연은 작업대 위의 웹캠과 핵심 송출 단말기를 재빨리 백팩에 쑤셔 넣었다.
라이브 방송은 이미 최진석 대표의 해외 분산 서버로 성공적으로 미러링되어, 수만 명의 시청자들에게 녹화본과 실시간 폭로가 계속해서 전파되고 있었다.
우진은 채린과 서연을 이끌고 공방 구석의 비상 탈출구로 향했다.
오래된 환기 덕트와 연결된 좁은 철제 사다리였다.
그 순간, 작업대 구석에 놓여 있던 구형 단파 수신기에서 다시 한번 날카로운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치익…… 치지직…….
[K-07…… 강우진!
내 말이 들리나?]
우진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이즈를 뚫고 들려오는 그 쉰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조작된 음성이 아니었다.
실제로 숨을 헐떡이며 극도의 긴박감 속에서 마이크를 쥐고 있는 인간의 호흡이었다.
우진은 벽면의 마이크를 낚아채며 응답했다.
"듣고 있습니다. 거점 7번이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내 코드명과 아버지의 비상 주파수를 알고 있는 겁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에서 네 아버지 강정호 박사와 함께 궤도 예측 시스템을 연구했던 부소장, 한민우다.]
우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민우.
아버지 강정호의 친필 연구 노트 속, 연구진 명부 두 번째 줄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화재 사건 당시 실종 처리되어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던 핵심 인물이었다.
"한민우 부소장님…… 살아 계셨던 겁니까?"
[살아남은 게 아니다.
네 아버지가 시스템에 납치당하기 직전, 내 신경망에 걸어둔 억제 회로 덕분에 간신히 코어의 동기화에서 벗어나 숨어 있었을 뿐이지.
우진아,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지금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네놈들이 테헤란로 사옥과 인터넷 방송으로 터뜨린 결손치가 시스템의 허용 임계값을 완전히 박살 냈다.]
노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현재 누적 인과율 결손 수치, 플러스 240,000 EP.
본사 지하의 통제감사실과 상임이사회가 비상 집행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이 결손을 방치하면 서울 상공을 덮고 있는 사각 격자망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하거든.
그놈들은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체 엔트로피 수확을 시작했다.]
"대체 엔트로피 수확……?"
서연이 사다리를 붙잡은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그래.
한 사람의 구원으로 튕겨 나간 파멸 에너지를 메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비극을 전이시키는 인과율 보존 법칙.
그걸 국가 규모로, 대량으로 집행하는 거다.]
3. 궤도 청소 구역의 정체
노인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단파 수신기 너머로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와 복잡한 전산 경보음이 아스라하게 섞여 들려왔다.
[도시에는…… 통제되지 않는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시스템의 사각 격자 규격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불만을 품거나 노조를 결성하고, 미러 큐브의 추천을 거부하며 자유의지를 고집하는 반항적 인간들 말이다.
넥스트 큐브는 그런 자들을 은밀히 추적해 특정 거주지와 통근 경로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매일같이 지나다닐 수밖에 없는 길목에…… 사전에 완벽하게 계산된 살상 트랩을 설치해 뒀지.]
우진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그게…… 아까 말한 교차로입니까?"
[그렇다.
시스템 내부 코드명 '오르빗 스위퍼(Orbit Sweeper)'.
우리가 부르는 명칭은 '궤도 청소 구역'이다.
겉으로는 도로 구조의 결함이나 운전자의 부주의로 인한 '단순 사고 다발 구역'으로 위장되어 있지만, 실체는 시스템이 필요할 때마다 거대한 피의 제물로 엔트로피를 수확하는 도살장이다.]
노인이 내뱉는 진실은 끔찍했다.
우진은 테헤란로에 근무하며 뉴스에서 끊임없이 보았던 의문의 교통사고들을 떠올렸다.
비만 오면 유독 브레이크가 밀려 대형 참사가 발생하던 특정 교차로들.
사망 원인은 늘 운전자의 졸음운전이나 제동장치 불량으로 서둘러 종결되곤 했다.
그 모든 비극이, 사실은 시스템의 연산 오차와 결손을 메우기 위해 사전에 정밀하게 설계된 살육극이었다는 뜻이었다.
"그 교차로가 어디입니까?"
우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 뱅뱅사거리 남단 입체교차로다.]
노인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사고 예정 시각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3분 뒤.
자정 12시 정각이다.
인근 주유소로 향하던 25톤 초고압 액화석유가스(LPG) 탱크로리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승객 40여 명을 태운 광역버스가 정면충돌하도록 신호 체계가 이미 덮어쓰기 되었다.]
"LPG 탱크로리와 광역버스……!"
서연이 경악에 차 입을 틀어막았다.
그것이 실제로 폭발한다면 버스 승객뿐만 아니라 인근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수십 대의 차량과 보행자들까지 연쇄적으로 화염에 휩싸이게 된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대참사가 될 터였다.
[그 탱크로리 운전자의 머리 위에는 이미 칠흑빛 검은 세모(△)가 떠 있다.
그는 며칠 전 큐브 네트웍스의 불법 사채에 얽혀 전 재산을 날리고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다.
시스템은 그에게 과로와 뇌출혈을 강제로 유도해 신호 위반을 일으키도록 알고리즘을 짰다.
그리고 광역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명부를 확인해라.]
노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려왔다.
[채린아, 네 단말기로 내가 전송하는 보안 패킷을 열어봐라!]
채린이 즉시 태블릿을 조작했다.
단파 수신기를 통해 인코딩된 데이터가 채린의 단말기 화면 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두운 지하 공방의 벽면 위로, 수십 명의 신상 정보와 직업, 성향 분석 보고서가 푸른빛으로 떠올랐다.
4. 희생양들의 공통점
채린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떠오른 승객 명부 옆에는 붉은색 글씨로 시스템 내부 분류 코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승객 1 : 김민석 (42세) - 태성C&I 하청업체 노조위원장 / Class-D 처분 대상]
[승객 2 : 이은영 (28세) - 넥스트 큐브 불공정 약관 집단소송 대표 청구인 / 시스템 순응도 12%]
[승객 3 : 박성철 (55세) - 전 금융감독원 내부고발자 / 오염 위험군]
[승객 4 : 최수진 (34세) - 독립 인터넷 언론 탐사보도 프리랜서 기자 / 블랙리스트 노드]
명단에 적힌 마흔두 명의 얼굴과 이력이 스크롤될수록, 서연과 채린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말도 안 돼……."
서연이 충격으로 무릎을 꺾었다.
"이 사람들…… 전부……."
"단 한 명도 우연히 그 버스에 탄 사람이 없습니다."
우진의 눈빛이 극도로 서늘해졌다.
명단에 오른 이들은 예외 없이 시스템의 통제와 착취에 저항했던 인물들이었다.
미러 큐브의 세뇌를 거부한 자들.
부당한 해고에 맞서 법적 투쟁을 벌이던 노동자들.
시스템의 그림자를 눈치채고 내부고발을 시도했던 양심적 관료들.
넥스트 큐브는 그들을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고립시킨 뒤, 야근과 회식, 막차 배차 시간이라는 일상적 변수를 교묘하게 조작하여 '자정 12시 뱅뱅사거리를 통과하는 단 하나의 광역버스'에 몰아넣은 것이었다.
[그렇다.]
단파 수신기 너머 한민우 부소장의 비통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스템은 이 참사를 통해 두 가지를 한 번에 달성하려는 거다.
첫째, 네놈들이 초래한 24만 EP의 인과율 결손을 수백 명의 비극적 죽음으로 단숨에 메우는 것.
둘째, 체제에 위협이 되는 반항 노드 40여 명을 합법적인 '교통사고 사망'으로 완벽하게 청소하는 것.]
시스템의 잔혹함은 인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인간의 목숨이란 그저 거대한 격자망의 수치를 맞추기 위한 0과 1의 데이터 찌꺼기에 불과했다.
"도진우……."
우진의 주먹이 하얗게 부르텄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방화벽 백신 코드가 거센 불길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이 구해낸 사람들의 대가로, 또 다른 무고한 이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멈추지 않는 한, 시스템은 영원히 타인의 피로 결손을 메우며 이 끔찍한 윤회의 고리를 이어갈 터였다.
"막아야 합니다."
우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두 눈에 깃든 것은 두려움이 아닌, 절대 꺾이지 않을 강철 같은 투지였다.
"저 버스가 교차로에 진입하기 전에, 신호 조작을 부수고 탱크로리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시간이 없다, K-07!]
한민우 부소장이 외쳤다.
[남은 시간은 18분.
현장에는 이미 넥스트 큐브의 현장 감시관들과 신호 제어 단말들이 배치되어 외부 개입을 원천 차단하고 있을 거다.
게다가 너희 뒤를 쫓는 피실험자 병기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쿵-!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하 공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은빛 연무 속에서 묵직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마비되었던 Subject-02가 다시 일어서며 벽을 부수고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경추 소켓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놈의 붉은 안광은 여전히 우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살상 명령이 취소되지 않는 한 심장이 멎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기계의 집념이었다.
"채린 씨! 사다리를 타고 먼저 올라가요!"
우진이 충격 바톤을 휘두르며 Subject-02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연 씨와 함께 차를 타고 뱅뱅사거리로 가세요. 서연 씨의 기동력과 채린 씨의 오버라이더가 있어야 현장 제어함을 뚫을 수 있습니다."
"우진 씨는요?"
서연이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혼자서 이 둘을 상대하고 어떻게 18분 안에 거길 와요!"
"옵니다."
우진이 서연의 손을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하지만 확신에 찬 미소가 걸렸다.
"반드시 갑니다. 아버지의 궤적을 잇기로 맹세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전에는…… 저따위 인형들에게 절대로 죽지 않아요. 먼저 가서 신호 제어망의 위치를 확보하세요! 제가 10분 안에 뒤따라갑니다!"
우진의 단호한 눈빛에 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교차로에서 죽어도 기다릴 테니까, 살아서 와."
서연과 채린은 뒤돌아보지 않고 환기 덕트 사다리를 타고 지상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올라갔다.
5. 폭우 속의 질주
쾅-!
철제 사다리의 해치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진은 홀로 남은 지하 공방의 어둠 속에서 Subject-02와 마주 섰다.
뒤편에서는 연무를 뚫고 회복한 Subject-05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두 개의 검은 동그라미.
인과율 지연 제로의 절대적인 살상 기계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찢어질 듯 박동하며 망막 전체가 보랏빛 과거 추적의 좌표로 뒤덮였다.
우진은 바톤을 거꾸로 쥐며 낮게 읊조렸다.
"너희를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잠들어 있어라."
파지직-!
우진의 전신에서 방화벽 백신의 푸른 펄스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세 개의 그림자가 폭음과 함께 뒤엉켰다.
그 시각, 테헤란로의 대로변.
진회색 카니발의 와이퍼가 폭우를 뚫고 거칠게 요동쳤다.
운전석에 앉은 서연은 액셀을 끝까지 밟으며 도심의 물웅덩이를 가르고 질주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내려 도로 전체가 검은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조수석의 채린은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뱅뱅사거리 일대의 전산 신호망을 해킹하느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렸다.
"신호 제어기 위치 찾았어요!"
채린이 외쳤다.
"뱅뱅사거리 남단 교통섬 지하에 위치한 '강남 제3통합신호제어함'이에요. 그런데…… 락이 걸려 있어요. 일반 경찰청 교통 관제 센터가 아니라, 넥스트 큐브 본사의 분산 백업 코어에서 직접 초고압 암호화 패킷을 쏘아 보내 신호 주기를 고정해 놨어요."
"신호 주기가 어떻게 고정되어 있는데?"
서연이 백미러로 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남은 시간, 12분.
"자정 12시 정각이 되는 순간, 북쪽에서 진입하는 광역버스의 주행 차선에 직진 녹색 신호가 40초간 강제 연장돼요. 그리고 동쪽에서 진입하는 탱크로리 구간에는 점멸 신호와 함께 정지 신호가 0.5초 만에 녹색으로 반전되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빗길이에요. 시속 70킬로미터로 달리는 25톤 탱크로리가 0.5초 만에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차체가 180도 회전하면서 잭나이프 현상이 일어나요. 그대로 교차로 한복판을 덮치면서 직진해 오던 광역버스의 허리를 정면으로 들이받게 돼요."
완벽한 살인 각본이었다.
탱크로리 기사의 졸음운전이나 빗길 과속으로 완벽하게 위장될 수 있는, 법적으로 어떤 타살의 흔적도 남지 않는 기하학적 학살극.
"거리, 1.2킬로미터 남았어!"
서연이 클랙슨을 울리며 앞서가던 택시들을 아슬아슬하게 추월했다.
전방 저 멀리, 거대한 빌딩 숲 사이로 뱅뱅사거리의 복잡한 교차로가 흐린 빗줄기 너머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연의 시야에도, 채린의 시야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교차로 상공 수십 미터 허공에 드리워진,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거대한 기하학적 장막.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오직 죽음과 파멸을 집행하기 위해 형성된 '거대한 붉은 세모(△)'의 결계였다.
교차로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참사를 기다리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6. 뱅뱅사거리의 시한폭탄
끼이이익-!
서연은 뱅뱅사거리 모퉁이의 보도블록을 들이받듯 카니발을 급정거시켰다.
차 문을 열고 뛰쳐나온 두 사람의 온몸이 차가운 빗물에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도심의 소음 속에서, 저 멀리 양재 방면에서 거대한 엔진음을 울리며 달려오는 대형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경기 70아 XXXX'.
양재역을 지나 강남역 방면으로 진입하는 심야 광역버스였다.
차창 너머로 피곤에 지쳐 고개를 떨군 채 잠들어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태성C&I 하청 노조위원장, 집단소송을 이끌던 20대 여성, 내부고발자였던 노신사…….
자신들의 머리 위에 닥쳐올 지옥을 꿈에도 모른 채, 그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버스의 상공에는, 마흔두 명의 정수리에서 허공으로 뻗어 올라간 검은 와이어들이 거대한 거미줄처럼 엉켜 교차로 중심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채린아! 제어함은 어디야?"
서연이 빗물을 닦아내며 소리쳤다.
"저기요! 교통섬 중앙, 분전함 뒤편 철제 콘솔이에요!"
채린이 가리킨 곳은 교차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교통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검은 우비를 깊게 눌러쓴 세 명의 사내들이 제어함 주변을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정된 칠흑빛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 직속의 기계화 현장 감시관들이었다.
그들은 서연과 채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품속에서 파란빛을 번뜩이는 인과율 집속 권총을 꺼내 들었다.
"오염 노드 한서연, 그리고 이탈 개체 Subject-03 확인."
감시관의 입에서 감정 없는 기계적 음성이 흘러나왔다.
"참사 집행 구역 접근 금지. 즉각 사살 프로토콜 가동."
탕!
탕!
푸른빛의 인과율 광탄이 빗줄기를 증발시키며 아스팔트를 꿰뚫었다.
서연과 채린은 가로등 뒤로 몸을 숨기며 비명을 질렀다.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제어함의 외벽은 군용 방탄 합금으로 굳게 닫혀 있었고, 세 명의 감시관이 빈틈없는 화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잔인하게 깜빡였다.
[23:57:42]
남은 시간은 고작 2분 18초.
동쪽 언덕길 너머에서, 거대한 25톤 LPG 탱크로리가 시커먼 차체를 번뜩이며 교차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내려오고 있었다.
탱크로리의 헤드라이트가 빗길을 하얗게 가르며 교차로를 집어삼킬 듯 다가왔다.
운전석의 기사는 이미 뇌혈관 압박으로 의식을 잃어가며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뜬 칠흑빛 세모(△)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핏빛 잔상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 돼……!"
서연이 절규했다.
"우진 씨…… 제발……!"
그 절망의 비명이 빗소리에 묻혀 흩어지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7. 찢겨진 궤적
쿠우웅-!
교차로 북쪽의 도로변 변전소 옥상에서, 천둥 같은 폭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빗속을 뚫고 수직으로 낙하했다.
빗물을 폭포수처럼 튀기며 교통섬 한복판에 착지한 사내.
온몸의 옷자락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두 눈만큼은 벼락처럼 푸른 안광을 뿜어내고 있는 강우진이었다.
"K-07……!"
감시관들이 경악하며 총구를 돌리려던 찰나, 우진의 신형이 잔상처럼 흩어졌다.
2단계 '변화 감지'의 극한.
우진은 감시관들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0.4초 전, 그들의 근육 움직임과 탄도를 완벽하게 앞질러 쇄도했다.
콰직!
첫 번째 감시관의 턱을 팔꿈치로 가격해 두개골을 흔들어 놓은 우진은, 회전하는 관성을 이용해 두 번째 감시관의 무릎 관절을 짓밟아 꺾어버렸다.
두 사내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초.
마지막 세 번째 감시관이 총구를 겨누었지만, 우진은 이미 그의 총열을 충격 바톤으로 후려쳐 허공으로 날려버린 뒤였다.
"시스템의 대사를 읊는 것은, 거기까지다."
우진의 바톤 끝에서 뿜어져 나온 백신 코드가 감시관의 가슴을 관통했다.
지지직-!
감시관의 머리 위 검은 네모가 산산조각 나며 빗물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제어함 앞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에서는 붉은 피가 줄기차게 흘러내려 턱 끝을 적시고 있었다.
공방에서 두 명의 피실험자 병기를 무력화하고 테헤란로를 맨몸으로 질주해 온 대가였다.
신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23:59:10]
남은 시간, 50초.
광역버스가 교차로 진입로에 도달했고, 탱크로리는 빗길에 미끄러지며 제어력을 상실한 채 굉음을 울리며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교차로 신호등이 깜빡이며 최악의 참사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채린 씨!"
우진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오버라이더를 이 제어함에 직결해요! 내가 백신 코드로 방화벽을 찢겠습니다!"
채린과 서연이 빗속을 뚫고 교통섬으로 달려왔다.
채린이 떨리는 손으로 오버라이더의 단자를 제어함 콘솔에 꽂아 넣자, 우진이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합금 패널 위에 강하게 짓눌렀다.
치지지지직-!
우진의 뇌간에서 뿜어져 나온 방화벽 백신 코드가 제어함의 메인 프로세서로 거센 폭포수처럼 역류해 들어갔다.
시스템의 사각 격자 암호와 우진의 자유의지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스파크가 교차로를 대낮처럼 밝혔다.
"부서져라……!"
우진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단순한 기계 파괴가 아니었다.
도시 전체의 궤도를 쥐고 흔드는 넥스트 큐브의 거대한 폭력에 맞선, 단 한 인간의 처절한 포효였다.
콰아아앙-!
제어함의 두꺼운 방탄 덮개가 내부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며, 안쪽의 메인 회로판이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동시에 교차로 상공을 비추던 모든 신호등의 불빛이 찰나의 순간 일제히 꺼져 버렸다.
그리고 자정 12시 정각.
모든 신호가 꺼진 암흑 속에서, 탱크로리의 거대한 차체가 비명을 지르며 교차로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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