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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32화

독립 미디어의 결단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젖은 아스팔트 위의 추격

 

와이퍼가 유리창을 거칠게 긁어내렸지만, 굵어지는 빗줄기는 윈드실드 너머의 시야를 사정없이 뭉개버렸다.

 

테헤란로의 빌딩 숲이 뿜어내는 네온사인이 물웅덩이에 반사되어 핏빛과 푸른빛의 기괴한 얼룩으로 번져 나갔다.

 

우진은 젖은 아스팔트를 움켜쥐듯 미끄러지는 카니발의 스티어링 휠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상공은 평온한 밤의 풍경이 아니었다.

 

시야를 2단계 심층 분석으로 좁히지 않아도 망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무수한 격자선들이 검은 장막처럼 서울의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가 펄펄 끓는 인두로 지지는 것처럼 박동했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인과율의 거대한 파동이, 거세된 살상 병기들의 차가운 신호가 도시의 골목들을 훑으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는 육체적 경고였다.

 

조수석에 앉은 서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빗물과 식은땀이 뒤섞여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손안에 쥐어진 외장 하드디스크는 케이스가 찌그러지고 기판이 부서져 이미 죽은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방송국 주조정실에서 오태식 국장이 보안 요원들을 부르며 짓밟았던 그 잔해였다.

 

"오태식 국장……."

 

서연의 입술에서 짓이겨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정의로운 언론인이 되라고,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지 말라고 가르쳐준 사람이었어. 그런데 그 사람 정수리에…… 그런 끔찍한 검은 사각형이 박혀 있을 줄은 몰랐어. 그건 사람이 아니었어. 눈빛도, 목소리도, 내 기사를 쓰레기통에 처넣던 손짓까지 전부 프로그램된 기계 같았다고."

 

서연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자신이 10년 넘게 몸담았던 조직 전체가, 믿고 따랐던 스승과 선배들이 이미 거대한 시스템의 신경망에 잠식당해 자아를 잃어버렸다는 뼈아픈 환멸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한 기자가 알던 선배가 아닙니다."

 

우진이 전방의 교차로를 날카롭게 훑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러 큐브의 알고리즘에 영혼을 넘긴 이들이든, 뇌간에 직접 신호를 수신하는 단말이든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이미 자신의 궤도를 잃어버린 채 시스템이 배정한 사각의 틀 안에서 정해진 대사만 읊는 부품일 뿐입니다. 서연 씨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공중파 정규 방송은 끝났어."

 

서연이 부서진 하드디스크를 무릎 위에 떨어뜨리며 주먹을 쥐었다.

 

"K-Alert 비상 재난망 우회 포트까지 상임이사회의 레벨-4 보안 락으로 잠겼어. 방송국 메인 서버는 물론이고 제휴된 모든 일간지와 통신사 데스크가 시스템의 검열망 아래에 묶여 있다고. 우리가 가진 증거가 아무리 확실해도, 세상 밖으로 내보낼 확성기가 없어. 이대로라면…… 정유진 씨가 목숨 걸고 뽑아낸 제어 반지의 진실도, 강지훈 씨의 각성도 전부 묻혀버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그저 방송국을 습격한 흉악한 테러범으로 뉴스 특보에 도배될 뿐이야."

 

뒷좌석에 웅크리고 앉아 태블릿 화면을 두드리던 채린이 고개를 들었다.

 

채린의 창백한 얼굴 위로 태블릿 액정의 푸른빛이 서늘하게 일렁였다.

 

"아직 안 끝났어요, 언니."

 

채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결기는 단단했다.

 

"지상파 송출망이 막혔다면,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망을 쓰면 돼요. 하지만 그전에…… 문제가 생겼어요."

 

채린이 태블릿 화면을 앞좌석 쪽으로 들이밀었다.

 

화면에는 서울 강남 일대의 지도 위에 붉은색 점 두 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하는 궤적이 실시간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드 오버라이더로 방송국 주변의 신호를 흩뿌려 놨지만, 놈들의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요. 한남대교를 건너던 다섯 명 중 두 명…… Subject-02와 05로 추정되는 생체 신호가 방향을 틀었어요. 지금 테헤란로 남단에서 우리 이동 동선을 협공하듯 좁혀오고 있어요. 거리, 1.8킬로미터. 이 속도라면 3분 안에 시야 내에 포착돼요."

 

우진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룸미러를 통해 비친 채린의 머리 위에는 은빛 동그라미(○)가 아련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외곽은 검은 추격자들의 살기에 짓눌려 미세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15년 전 연구소에서 함께 고통받았던 아이들.

 

자아를 거세당하고 살상 알고리즘만을 주입받아 동면에서 깨어난 기계화 인간 병기들이, 기어이 같은 처지의 동포를 찢어발기기 위해 어둠 속에서 짓쳐오고 있었다.

 

2. 어둠 속의 은신처

 

"도진우는 우리가 피실험자들과 도심 한복판에서 피를 흘리며 자멸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진이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카니발의 엔진이 거친 비명을 지르며 젖은 도로를 박차고 나갔다.

 

"그 녀석들과 여기서 부딪치면 승패와 상관없이 인과율 결손 폭풍이 터져요. 도진우는 그걸 빌미로 계엄령에 준하는 시스템 강제 봉쇄를 발동할 겁니다. 그놈들이 파놓은 싸움판에 응해줄 이유는 없어요."

 

"그럼 어디로 가려는 거야?"

 

서연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일산의 폐온실은 이미 노출됐어. 경찰 수배망까지 깔린 마당에 강남 일대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가옥이 남아 있기는 해?"

 

"있습니다."

 

우진의 시선이 테헤란로 이면도로의 낡은 상가 골목으로 향했다.

 

"가장 밝은 전등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죠. 태성C&I와 넥스트 큐브 본사가 내려다보이는 바로 그 코앞, 시스템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아날로그의 사각지대로 들어갑니다."

 

우진은 능숙하게 핸들을 꺾어 역삼동 먹자골목 뒤편의 가파른 언덕길로 차를 몰았다.

 

화려한 테헤란로의 대로변에서 불과 두 블록 벗어났을 뿐인데, 빗물에 젖은 붉은 벽돌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풍경이 펼쳐졌다.

 

우진이 차를 멈춰 세운 곳은 재개발 지정이 취소된 채 방치된 4층짜리 노후 상가 건물 앞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는 녹슨 셔터가 반쯤 내려져 있었고, 낡은 간판에는 '심야 소리 공방'이라는 흐릿한 글자만 남아 있었다.

 

"여긴……?"

 

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며 물었다.

 

"제가 태성C&I 기획2팀에 처음 입사했을 때, 퇴근길에 우연히 발견했던 곳입니다."

 

우진이 차에서 내려 주변의 격자망을 훑었다.

 

놀랍게도 이 허름한 골목길 일대에는 머리 위를 짓누르던 검은색 통제선들이 거의 닿지 않고 있었다.

 

인근에 고압선 변전 설비와 노후된 지하 배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30년 된 아날로그 음향 기기들이 뿜어내는 자성이 미세한 차폐벽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업한 지 5년이 넘은 LP 레코드 리마스터링 작업실입니다. 지하 2층 전체가 30센티미터 두께의 방음 콘크리트와 구리 차음재로 둘러싸여 있어요. 물리적인 방음벽이지만, 시스템의 사각 격자 스캔을 굴절시키는 데는 웬만한 군용 벙커보다 낫습니다."

 

채린이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잔여 배터리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여기라면 제 동그라미의 척력 파동을 조금만 덧씌워도 외부 탐지 신호를 완전히 튕겨낼 수 있어요. 추격자들의 락온 센서가 이 근처에 오면 길을 잃을 거예요."

 

세 사람은 서둘러 녹슨 셔터를 들어 올리고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던 철문은 우진이 변화 감지로 경첩의 취약부를 짚어 가볍게 비틀자 맥없이 뜯겨 나갔다.

 

철문이 닫히고 묵직한 빗장이 걸리는 순간, 지상의 빗소리와 도시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지하의 공기는 차갑고 퀴퀴한 먼지 냄새, 그리고 오래된 진공관 앰프의 기름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우진이 벽면의 아날로그 차단기를 올리자,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 몇 개가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빛을 깜빡이며 공간을 밝혔다.

 

벽면을 가득 채운 LP 판들과 먼지 쌓인 릴 테이프 레코더, 거대한 목재 스피커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네…… 강남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남아 있었다니."

 

서연이 숨을 고르며 마른 세면대 옆에 걸린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채린은 작업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즉각 휴대용 단말기와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케이블로 연결했다.

 

단말기 화면에 녹색 동심원이 퍼져 나가며 지하 공방 전체를 감싸는 비간섭 척력 막이 형성되었다.

 

"차폐막 전개 완료됐어요. 외부 추격 신호…… 끊겼습니다. 적들이 이 블록을 수색하더라도 최소 2시간 동안은 우리 위치를 특정하지 못할 거예요."

 

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세 사람의 얼굴에는 안도의 기색이 오래 머물지 못했다.

 

피신에는 성공했지만,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3. 닫힌 문과 열린 틈

 

서연이 작업대 위에 찌그러진 외장 하드디스크를 올려놓으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K-Alert가 막힌 이상, 기존의 방송망이나 포털을 통한 폭로는 불가능해. 내가 알고 있는 주요 언론사 간부들은…… 전부 오태식 국장과 다르지 않을 거야. 우리가 자료를 넘기는 즉시 넥스트 큐브의 통제감사실로 보고서가 올라가겠지."

 

"기존 미디어가 사각의 격자에 갇혀 있다면, 규격화되지 않은 독립 미디어를 써야 합니다."

 

우진이 작업대 옆에 놓인 구형 컴퓨터 모니터를 켜며 말했다.

 

"지상파나 대형 포털은 시스템이 중앙에서 주파수와 데이터 트래픽을 통제하기 쉽지만, 개인들이 운영하는 분산형 인터넷 스트리밍 플랫폼이나 독립 팟캐스트 서버는 달라요. 그들은 광대역 검열망의 사각지대에서 작동합니다."

 

"독립 미디어……."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파급력이 문제야. 공중파 9시 뉴스나 포털 메인에 걸리지 않으면, 대중은 조작된 지명수배 뉴스만 믿을 거야. 우리가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소수의 음모론으로 치부되고 묻혀버릴 위험이 커."

 

"그렇지 않습니다."

 

채린이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며 반박했다.

 

"지금 여론은 이미 요동치고 있어요. 태성C&I 면접장에서 이진혁 씨가 일으킨 소동, 옥상에서 벌어졌던 네오바이오젠 공매도 사태…… 여의도 증권가와 취업 준비생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시스템의 균열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요. 사람들은 이미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요. 그들에게 결정적인 도화선만 던져주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거예요."

 

서연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손이 품속 깊은 곳으로 향하더니, 낡고 손때가 묻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모서리가 닳아 헤어진 그 수첩은 서연이 사회부 수습기자 시절부터 가장 중요한 취재원들의 연락처를 기록해 두던 아날로그 노트였다.

 

"독립 탐사보도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선배가 하나 있어."

 

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미디어 고발'. 공중파 방송국에서 권력형 비리를 파헤치다 해고당한 해직 언론인들이 모여 만든 독립 언론이야. 독자적인 해외 분산 서버를 쓰고 있고, 암호화된 P2P 네트워크로 라이브를 송출하지. 넥스트 큐브의 레벨-4 보안 락이라도 해외에 분산된 독립 노드까지 한꺼번에 셧다운시키기는 불가능해."

 

우진의 눈이 빛났다.

 

"그 플랫폼을 통해 라이브 폭로 방송을 켤 수 있습니까?"

 

"선배에게 연락이 닿는다면 가능해. 그 사람이라면 내 말을 믿어줄 거야.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마이크를 잡을 유일한 사람이지."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로 수많은 이름과 번호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은 서연의 옆으로 다가서며 그녀의 머리 위를 무심코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은은한 백색 네모(□)가 떠 있었지만, 주조정실에서 겪었던 충격과 배신감 탓인지 모서리 부근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시스템의 억압 속에서도 진실을 향해 뻗어 나가려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

 

그것이 저 연약한 백색의 사각형을 지탱하고 있었다.

 

서연의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에 멈춰 섰다.

 

'미디어 고발 - 최진석 대표'라는 이름과 함께 해외 보안 메신저 아이디, 그리고 일회용 위성 통신 주파수가 적혀 있었다.

 

"이 번호야. 공중파 전산망과 완전히 분리된 위성 백도어 채널이야. 이쪽으로 접속 신호를 보내면 그쪽 관제 서버로 직접 데이터 패킷을 쏠 수 있어."

 

"좋습니다."

 

채린이 즉각 자신의 단말기 포트를 구형 컴퓨터의 랜선과 연결했다.

 

"제가 프록시를 12단계로 우회해서 넥스트 큐브의 추적망을 교란하는 보안 터널을 뚫을게요. 언니, 접속 승인 코드를 불러줘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첩에 적힌 보안 코드를 읽어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바람 한 점 없는 지하 공방 안에서, 낡은 수첩의 책장이 스르륵 하고 다음 장으로 저절로 넘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4. 수첩 속의 망령

 

우진의 시선이 그 넘어간 페이지의 모퉁이에 멎었다.

 

그 순간, 우진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쿵!

 

심장이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 뇌간을 강타했다.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그 종이 위에 적힌 잉크의 궤적에서, 우진의 신경계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코드가 미친 듯이 공명하며 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서연 씨, 잠깐만요."

 

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으며 떨렸다.

 

서연이 놀란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 씨? 왜 그래요? 얼굴이……."

 

우진은 대답 대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서연의 수첩을 가리켰다.

 

넘어간 페이지의 상단, 붉은색 펜으로 거칠게 그어진 밑줄 아래에 낯익으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필적이 적혀 있었다.

 

[Node-0 / K.J.H / 비상 접선 프로토콜 : 010-XXXX-7942 / 백업 주파수 : 144.820MHz]

 

그리고 그 전화번호 바로 옆에는 작고 정교한 기하학 기호 세 개가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

 

그 도형들의 배열 방식, 획의 꺾임, 종이를 짓누른 압력의 깊이까지.

 

15년 전 실종되었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의 친필 바인더에 적혀 있던 그 필적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건……."

 

우진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 필적은…… 제 아버지의 글씨입니다."

 

서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번개처럼 뜨였다.

 

그녀는 멍하니 수첩에 적힌 번호를 내려다보더니, 15년 전의 기억을 더듬듯 말을 더듬었다.

 

"강정호…… 박사님?"

 

서연의 손가락이 떨려왔다.

 

"맞아…… 기억났어. 15년 전, 테헤란로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화재 사건을 처음 취재하기 시작했을 때였어. 연구소가 불타기 불과 일주일 전, 내 메일함으로 정체불명의 제보가 들어왔었어. ‘세상의 궤도가 왜곡되고 있다, 누군가 인간의 삶을 규격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지. 당시에는 황당한 소리라고 생각해서 지나치려 했는데, 제보자가 직접 내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어."

 

서연의 눈동자에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자신을 연구원 강정호라고 소개한 그분은…… 목소리가 몹시 지쳐 있었지만 필사적이었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 번호로 연락을 취하라고, 이 주파수로 신호를 보내면 진실을 아는 자들이 응답할 거라고 했어. 하지만 그 통화가 끝나고 사흘 뒤에 연구소에 대형 화재가 났고…… 박사님은 실종됐지. 사건을 추적하려 했지만 데스크의 외압으로 기사는 엎어졌고, 나는 그 번호가 연구소 전소와 함께 영원히 결번이 된 줄로만 알고 잊고 있었어."

 

서연의 목소리에 깊은 비통함이 배어 나왔다.

 

"그분이…… 우진 씨의 아버지였던 거야?"

 

우진은 수첩 위에 적힌 번호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종이의 질감 너머로, 15년 전 아버지가 느꼈을 고독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역삼역 지하 7층 중앙 코어의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15년간 도시의 궤도를 홀로 떠받치다 숨을 거둔 아버지.

 

아버지는 자신이 시스템에 의해 코어에 감금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언젠가 진실을 쫓는 자가 나타나 이 궤적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며 세상의 한구석에 작은 비상구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결번이 아닙니다."

 

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시스템의 핵심 연산 핵인 Node-0이셨어요. 아버지가 남긴 통신 프로토콜이라면, 단순한 상용 이동통신망이 아니라 네모 프로젝트의 감시망조차 닿지 않는 극초단파 백도어 회선일 겁니다."

 

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144.820MHz…… 이건 아마추어 무선(HAM)용 비상 조난 주파수 대역이에요! 이 주파수는 인터넷 통신망이나 기지국을 거치지 않아요. 전파를 직접 공중에 쏘아 올리는 순수 아날로그 단파 통신이라고요. 넥스트 큐브가 아무리 도시 전산망을 장악하고 있어도,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에서 핑을 때리는 무선 신호까지 완벽하게 도청하거나 차단하지는 못해요!"

 

"그렇다면……."

 

서연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우리가 이 주파수로 신호를 보내면, 박사님이 남겨둔 누군가가…… 응답할 수도 있다는 거야?"

 

"응답할 겁니다."

 

우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결코 헛된 수를 두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오메가-루프를 연구소 깊은 곳에 봉인해 두셨던 것처럼, 지상에도 반드시 시스템의 사각을 찌를 조력자나 백업 거점을 남겨두셨을 겁니다. 최진석 대표의 독립 팟캐스트 서버와 아버지의 이 비상 주파수를 결합해야 합니다."

 

5. 독립 미디어의 결단

 

결단이 내려지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서연은 낡은 다이얼 전화기 대신 채린이 구축한 암호화 단말기를 통해 '미디어 고발'의 최진석 대표에게 접속을 시도했다.

 

치익, 치지직거리는 잡음 끝에 스피커 너머로 거칠고 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서연?

 

너 지금 제정신이야?

 

온 뉴스에 네 얼굴이 테헤란로 기업 기밀 유출 및 사옥 습격 용의자로 대문짝만하게 깔렸어!

 

보도국 놈들은 네가 정신질환으로 망상증에 빠져 취재 자료를 조작했다고 떠들어대고 있다고!]

 

"선배, 내 말 잘 들어요."

 

서연은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10분만 내 말에 귀 기울여줘요. 내가 지금부터 보내는 패킷은 단순한 기업 비리가 아니에요. 대한민국의 공채 면접, 주식 시장, 그리고 상류층의 정략결혼까지…… 인간의 인생 전체를 사전에 조작해 온 거대 배후 세력의 원본 소스코드와 피해자들의 증언 데이터예요."

 

[뭐……?

 

소스코드?]

 

"태성C&I 면접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오바이오젠 주가가 왜 30분 만에 롤러코스터를 탔는지 그 내막이 전부 들어 있어요. 오태식 국장이 왜 내 기사를 킬하고 경찰을 불렀는지도요. 선배, 공중파는 이미 끝났어요. 그들의 머리 위에는…… 시스템의 목줄이 채워져 있어요. 진실을 보도할 수 있는 곳은 이제 선배의 채널뿐이에요."

 

]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침묵이 흘렀다.

 

거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듯한 숨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결의에 찬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렸다.

 

[……오태식 그 작자, 예전부터 윗선 눈치만 보던 쓰레기였지.

 

좋아, 한서연.

 

네가 거짓말할 애가 아니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 서버도 지금 방통위와 경찰 사이버수사대의 집중 공격을 받고 있어.

 

국내 회선으로는 라이브를 켜자마자 디도스(DDoS) 공격과 트래픽 차단으로 5분도 못 버티고 뻗어버릴 거다.]

 

"그건 저희가 해결합니다."

 

이번에는 우진이 마이크를 당겨 잡고 나섰다.

 

"트래픽을 지상의 광케이블망으로 쏘지 않을 겁니다. 넥스트 큐브가 장악한 도시 격자망을 우회해, 144.820MHz 아날로그 비상 주파수와 해외 독립 위성 P2P 프록시를 결합할 겁니다. 그들이 차단할 수 없는 다중 분산 회선으로 당신들의 메인 서버에 직접 스트리밍 데이터를 밀어 넣겠습니다."

 

]

[……당신은 누구지?]

 

"시스템의 각본을 깨부수려는 사람입니다."

 

우진의 서늘한 답변에 최진석 대표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하,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좋다.

 

독립 미디어의 존재 이유가 바로 이런 날을 위한 거지.

 

우리 팀의 전 엔지니어를 비상 소집하겠다.

 

해외 분산 노드 16개를 전부 개방하고, 어떤 외압이 들어와도 서버 전원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데이터를 보내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로 방송을 준비할 테니까!]

 

통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채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질주했다.

 

공방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진공관 앰프와 단파 송수신기가 우진의 손에 의해 해체되고 재조립되었다.

 

구리 코일과 진공관이 붉게 달아오르며 특유의 타는 듯한 냄새가 번져 나갔다.

 

우진은 아버지의 수첩에 적힌 회로 결선도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단파 송수신기의 안테나 선을 공방 벽면의 아날로그 접지 단자에 직접 물렸다.

 

"채린 씨, 데이터 변환 준비는?"

 

"완료됐어요!"

 

채린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외쳤다.

 

"정유진 씨의 녹취록, 차민혁 단말기에서 추출한 H-스퀘어 알고리즘 로드맵, 태성C&I 면접 조작 데이터, 그리고 오태식 국장의 결탁 정황까지…… 전부 아날로그 음성 신호와 고밀도 텍스트 패킷으로 변환했어요. 위성 단파 신호에 실어 최 대표 측 서버로 쏘아 올릴 준비 끝났습니다!"

 

"좋아."

 

서연이 작업대 위에 놓인 소형 웹캠과 마이크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기자의 서슬 퍼런 투지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라이브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채린이 스위치에 손을 얹었다.

 

"3…… 2…… 1…… 송출 시작!"

 

6. 어둠을 찢는 마이크

 

치이익-!

 

진공관 앰프의 바늘이 붉은색 한계치(Peak)를 향해 거칠게 치솟았다.

 

지하 공방의 전구들이 일제히 깜빡이며 강력한 전자파가 공기를 갈랐다.

 

동시에 인터넷 독립 방송 '미디어 고발'의 웹사이트 메인 화면에 붉은색 글씨로 긴급 라이브 배너가 강제로 팝업되었다.

 

[단독 긴급 라이브 : 대한민국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손 - 넥스트 큐브와 조작된 인생 궤도의 실체]

 

화면이 전환되며, 낡은 아날로그 공방의 백열전구를 배경으로 한 한서연 기자의 얼굴이 수만 명의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안녕하십니까, 탐사보도 기자 한서연입니다."

 

서연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묵직하게 허공을 갈랐다.

 

"저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대한민국 공영 방송의 보도국 소속 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국가 기관과 대기업, 그리고 언론의 수뇌부를 장악한 정체불명의 거대 통제 세력에 의해 흉악한 테러범으로 수배되어 있습니다. 왜 그들이 저를 침묵시키려 하는지, 왜 공중파 9시 뉴스가 방영 직전 전면 중단되었는지…… 지금부터 그 모든 증거를 국민 여러분 앞에 가감 없이 공개하겠습니다."

 

서연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화면 한쪽에 정유진의 생생한 증언 녹취록과 H-스퀘어의 내부 세뇌 대본이 실시간으로 스크롤되었다.

 

대선 주자 가문의 결속, 청년들의 채용 면접 사전 탈락 각본, 여의도 주가 폭락을 유도해 수천 명을 빚더미로 몰아넣은 금융 조작의 알고리즘 수식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접속자 수가 폭발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1만 명, 5만 명, 10만 명…….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주요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가 통제되고 관련 글들이 광속으로 삭제되었지만, 해외 분산 P2P망을 타고 흘러가는 라이브 방송의 링크는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쥔 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일상이라 믿었던 것, 노력의 대가라 여겼던 성공과 실패가 사실은 누군가의 정교한 사각 격자 안에서 계산된 결과값에 불과했다는 진실 앞에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하 공방의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고주파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삐이이이익-!

 

동시에 채린의 단말기 화면에 새빨간 경고 창이 연쇄적으로 점멸했다.

 

"언니! 신호 역추적이 들어왔어요!"

 

채린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넥스트 큐브 본사에서 우리 아날로그 주파수를 감지했어요! 도시 상공의 전산 격자망을 강제로 과부하 시켜서 우리 단파 신호를 역추적하고 있어요! 추격자들…… 놈들이 이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우진이 벌떡 일어섰다.

 

관자놀이의 수술 흉터가 찢어질 듯한 격통과 함께 욱신거렸다.

 

시야를 좁히자, 낡은 지하 공방의 두꺼운 콘크리트 천장 너머로 서늘한 살기를 머금은 두 개의 거대한 기하학체가 똑똑히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머리 위에 회전도 떨림도 없는 칠흑빛 원환을 띄운 존재들.

 

'검은 동그라미(●)'.

 

동면에서 깨어난 최상위 인간 병기, Subject-02와 Subject-05였다.

 

놈들이 마침내 이 노후 상가 건물의 옥상과 정문에 도달한 것이었다.

 

7. 교차로의 망령

 

"서연 씨, 방송을 끊지 마세요."

 

우진이 재킷을 걸치며 허리춤의 충격 바톤을 움켜쥐었다.

 

우진의 눈동자 속에서 2단계 심층 분석과 4단계 과거 추적의 자수정빛 안광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끝까지 진실을 송출하세요. 놈들은 제가 막습니다."

 

"우진 씨! 혼자서는 무리야!"

 

서연이 마이크를 붙잡은 채 절박하게 소리쳤다.

 

"저들은 민도현 씨와 같은…… 감정이 없는 살상 병기들이라고 했잖아!"

 

"알고 있습니다."

 

우진이 철문으로 걸어가며 차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들은 제 아버지가 구하려 했던 아이들이고, 채린 씨의 동포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이 세상에 완전히 뿌리내릴 때까지 이 마이크를 꺼뜨릴 수는 없습니다."

 

우진이 빗장을 풀고 철문을 열어젖히려는 찰나였다.

 

탁, 치이익.

 

작업대 한구석에 놓여 있던 구형 단파 수신기의 다이얼에서 기괴한 주파수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서연의 수첩에 적혀 있던 바로 그 번호, 144.820MHz 주파수 채널이었다.

 

치익…… 치지직…….

 

모두의 시선이 얼어붙듯 단파 수신기로 쏠렸다.

 

단파 방송 송출용으로만 켜두었던 그 회선에서, 믿을 수 없게도 외부로부터의 '수신 신호'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치익…… [……여기는…… 거점 7번…….]

 

노이즈 섞인 금속성 음성이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왔다.

 

기계음이 섞인 늙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Node-0의 비상 코드가 확인되었다.

 

K-07…… 강우진인가?]

 

공방 안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우진의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으로 쿵쾅거렸다.

 

15년 전 실종된 아버지가 남겨둔 연락처.

 

영원히 죽어 있을 줄 알았던 그 주파수 너머에서, 누군가 우진의 프로토타입 식별 코드를 정확하게 부르고 있었다.

 

[네놈들이 테헤란로에서 뿜어낸 인과율 결손 파동을 포착했다.

 

시스템이 지금 도심 전체의 항상성을 강제 복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청소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당신은 누구지?"

 

우진이 굳은 목소리로 무전기 마이크를 향해 다가섰다.

 

스피커 너머의 노인이 거칠게 기침을 뱉어내며 말을 이었다.

 

[정체를 따질 시간이 없다.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이 라이브 방송의 파문을 덮기 위해, 대규모 인과율 희생 구역을 즉각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도심 내 특정 교차로…… 시스템이 오랫동안 사고 다발 구역으로 위장해 둔 인위적 '궤도 청소 구역'이다.

 

지금 당장 그 교차로의 신호기가 조작되고 있어.

 

30분 뒤, 대형 탱크로리와 만원 버스가 정면충돌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갈 대참사가 예정되어 있다.

 

그 참사의 파멸 에너지로 네놈들이 터뜨린 결손치를 한 번에 메우려는 속셈이다!]

 

"뭐라고……?"

 

서연과 채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자신들의 폭로로 시스템에 가해진 타격을 메우기 위해, 시스템이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의 목숨을 강제로 도륙하는 대체 참사를 기획했다는 잔혹한 진실.

 

쿵-!

 

그 순간, 지상 1층의 셔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계단을 타고 서늘한 살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천장의 백열전구가 파지직 스파크를 튀기며 일제히 깨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살상 병기들의 센서 안광이 계단 참을 물들이고 있었다.

 

우진의 귓가로 무전기 너머 노인의 다급한 일갈이 마지막으로 내리꽂혔다.

 

[살아남아라, K-07!

 

그 교차로를 막지 못하면…… 서울은 오늘 밤 피바다가 된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