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위된 연구소
1. 칠흑의 도살자들
바닥으로 뛰어내리자마자 차가운 오수와 썩어가는 기름 찌꺼기가 장화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지하 3층 배수로는 15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탓에 폐수가 고여 부패한 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머리 위 방폭문 바깥에서 벼락같은 충격파와 함께 둔탁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철판이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파편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우진아, 괜찮아?"
한서연이 비틀거리며 우진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동자는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호흡만은 필사적으로 고르고 있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응, 하지만 저들이 벌써 문을 뚫고 들어왔어."
천장에 뚫린 배수구 맨홀 틈새로 섬광탄의 백색 연기와 매캐한 최루 가스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군화 발소리가 아니었다.
바닥을 짓밟는 무거운 고무 밑창의 소리, 그리고 규칙적으로 딸깍거리는 금속 장비의 기계음이었다.
그 소리는 단 하나의 잡음도 섞이지 않은 채 완벽한 박자로 좁혀져 왔다.
우진은 관자놀이를 강하게 짓누르는 통증을 느끼며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다.
1단계의 시야로도 배수구 틈새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이질적인 궤도들이 선명하게 잡혔다.
평범한 인간의 머리 위에 뜨는 평면의 네모나 세모가 아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완벽한 입체 형상을 갖춘 칠흑의 정육면체, 검은 큐브(Black Cube)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육면체의 여섯 표면에는 녹색과 백색의 이진수 코드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육면체의 꼭짓점마다 허공을 뚫고 상공으로 직결된 굵고 검은 데이터 케이블이 꼭두각시 줄처럼 매달려 있었다.
감시관들이었다.
그것도 골목길이나 매장에서 마주쳤던 단독 개체가 아니었다.
맨홀 위 콘크리트 바닥을 둘러싼 것만 최소 넷, 아니 대여섯은 족히 넘는 거대한 집행 부대였다.
"이탈 노드 K-07 및 오염 노드 추적 신호 감지. 수평 격자망 차단 확인."
맨홀 바로 위에서 변조된 음성이 울렸다.
사람의 성대가 아닌 금속 진동판을 통해 억지로 뱉어내는 듯한 메마르고 서늘한 기계음이었다.
"목표는 하부 수로망을 경유해 도주 시도 중. 전파 차단 반경 50미터 전개 완료. 즉각 진입하여 오메가-루프를 회수하고 두 노드를 영구 소거한다."
한서연이 숨을 들이켜며 주머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안테나 표시 대신 붉은색의 사각형 경고 아이콘만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통신망 불능(Grid Jitter). 신호 감쇄 100%.'
상용 통신망의 기지국 신호는 물론, 비상 주파수까지 완벽하게 진공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배후 세력의 광대역 재밍 기술이었다.
"전화가 완전히 먹통이야. 긴급 구조 신호도 안 잡혀."
"단순한 전파 방해가 아니야. 저놈들은 이 구역의 물리적 통신망뿐만 아니라, 시스템 격자 자체를 밀봉해 버린 거야."
우진이 서연의 어깨를 감싸 쥐며 낮게 속삭였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해. 지도로 봤던 지하철 환기구까지는 최소 삼백 미터는 가야 해."
2. 어둠 속의 추적
좁고 축축한 암거 내부는 한 사람이 겨우 허리를 굽히고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비좁았다.
벽면에는 과거 연구소에서 흘려보냈던 냉각수 찌꺼기가 화학적 침전물로 굳어 희끄무레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좁은 통로를 타고 울려 퍼질 때마다 등 뒤에서 살을 에는 듯한 오한이 번졌다.
쾅!
등 뒤에서 맨홀 뚜껑이 뜯겨 나가며 바닥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거센 수압을 이겨내고 육중한 신체가 수로 바닥으로 착지하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하나, 둘, 셋.
내려앉는 발소리는 인간의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노드 K-07의 생체 신호 잔류치 84%. 남서쪽 2호선 환기 덕트 방향으로 이동 중."
어둠 속에서 푸른빛의 레이저 조준선 두 줄기가 굽이진 수로 벽면을 훑으며 맹렬하게 뻗어 나왔다.
고성능 야간 투시장비와 열화상 센서의 광학 렌즈가 어둠을 찢고 있었다.
"뛰어!"
우진은 서연의 손을 잡아끌며 속도를 높였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오수가 발목을 잡아당겼지만 멈출 수 없었다.
품 안에 품은 강정호 박사의 묵직한 납 차폐 스토리지, [오메가-루프]가 심장 박동과 함께 차갑게 고동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15년 동안 목숨을 바쳐 연구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단 하나의 희망.
'우진아, 네가 이걸 본다면 내 실험은 실패한 거다.'
귓가에 맴도는 아버지의 메마른 음성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 도형의 세계를 보지 않고 평범한 백색 네모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스템은 결국 자신을 찾아냈고, 박민재의 누명을 시작으로 주변의 모든 일상을 붕괴시켰다.
실패했다면, 바로잡아야 했다.
도망치기 위해 뛰는 것이 아니었다.
저들이 지배하는 지하 7층 중앙 코어의 심장부에 도달하기 위해 달리는 것이었다.
타앙!
귓전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수로 벽면의 콘크리트가 깨져 나가며 파편이 우진의 뺨을 스쳤다.
소음기가 장착된 특수화기의 둔탁한 반동음이었다.
총탄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전자기 스파크가 튀었다.
단순한 납 탄환이 아니었다.
피탄 부위에 고압 전류를 방출해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특수 펄스 탄환이었다.
"서연아, 엎드려!"
우진은 통로가 꺾이는 굴절부 모퉁이로 서연을 밀어 넣으며 벽에 밀착했다.
두 번째 탄환이 그들이 서 있던 수면을 강타하며 푸른 전류의 파문이 수면 위로 거칠게 번져나갔다.
찌릿한 전류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우진의 몸 안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코어가 신경계에 닿은 전하를 순식간에 분산시켰다.
하지만 서연은 달랐다.
바닥에 주저앉은 서연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무릎을 부여잡았다.
감전의 여파로 다리 근육이 일시적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진아…… 나 때문에…… 먼저 가. 저들이 노리는 건 그 드라이브잖아."
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우진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우진은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맑은 백색 네모(□)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서초동 골목에서 목숨을 걸고 시스템의 파멸 에너지를 흡수해가며 되돌려놓은 궤도였다.
"여기서 너를 버리면, 내가 너의 세모를 지워낸 이유가 사라져."
우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서늘하고 단호했다.
"너는 평범한 네모로 살아가야 해. 그게 내가 증명해야 할 세상이야."
우진은 허리춤에서 폐수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굵은 부식 철관 하나를 주워 들었다.
녹이 슬어 거칠었지만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기에는 충분한 무게였다.
3. 궤도 예측의 한계
수로의 모퉁이 너머로 검은 방탄복과 전술 헬멧을 착용한 세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은 헬멧에 부착된 광학 렌즈 뒤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가슴팍에는 푸른색 육면체 로고, 즉 '넥스트 큐브'의 인장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각각 한 변이 20센티미터에 달하는 칠흑빛 검은 육면체가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육면체가 내뿜는 냉기는 수로의 썩은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들 만큼 기괴했다.
'심층 구조 분석.'
우진은 시선을 집중하며 2단계 능력을 끌어올렸다.
욱신!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맹렬한 통증을 일으켰다.
시신경이 터져나갈 것 같은 안압과 함께 시야의 색채가 흑백으로 반전되었다.
선두에 선 조직원의 검은 육면체로부터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꼭두각시 줄이 보였다.
줄기는 수로 천장의 콘크리트를 뚫고 테헤란로 상공, 아니 역삼역 지하 7층 코어의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줄기를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시스템의 집행 명령이 붉은색 궤적의 잔상으로 우진의 눈에 맺혔다.
궤적이 보였다.
선두의 조직원이 오른팔을 들어 올릴 각도, 방아쇠를 당길 검지의 압력, 그리고 탄환이 수로 벽면을 튕겨 우진의 오른쪽 어깨로 쇄도할 0.3초 후의 물리적 궤적이 붉은 선으로 허공에 그어졌다.
저벅.
선두의 조직원이 코너를 도는 순간 우진이 먼저 움직였다.
붉은 궤적이 가리키는 사선을 피해 몸을 왼쪽으로 비틀며 앞으로 쇄도했다.
탕!
허공을 가른 펄스 탄환이 우진의 뺨을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비켜나 뒤편의 수면을 갈랐다.
우진은 파고드는 탄도를 정확히 회피하며 쥐고 있던 쇠파이프를 조직원의 헬멧 측면으로 내리꽂았다.
깡!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헬멧의 안면 바이저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중심을 잃은 조직원이 비틀거리자 우진은 그의 방아쇠를 쥔 손목을 꺾어 총구를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크윽……!"
조직원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우진의 머리통 안쪽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두 번째, 세 번째 조직원이 망설임 없이 우진과 쓰러진 동료를 향해 동시에 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아군에 대한 배려나 오인 사격에 대한 망설임 따위는 그들의 연산식에 존재하지 않았다.
탕!
탕!
우진은 쓰러진 조직원의 어깨를 방패 삼아 몸을 움츠렸다.
전도성 펄스 탄환 두 발이 방탄 조끼에 명중하며 불꽃을 튀겼다.
방패로 삼은 조직원의 몸이 맹렬하게 경련하며 축 늘어졌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육면체가 순간적으로 형태를 잃고 일그러지더니, 표면의 이진수 코드가 붉은색 에러 메시지로 뒤바뀌었다.
'집행체 손상. 폐기 프로토콜 전환.'
뒤에 선 조직원들은 동료의 죽음이나 부상에 전혀 개의치 않고 차가운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소총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전술 나이프와 전자기 방전봉을 뽑아 들었다.
근접 제압을 통해 생포하거나 코어를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우진아, 뒤쪽 환기구 덮개가 열려!"
모퉁이 너머에서 서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서연이 벽면에 설치되어 있던 녹슨 배수용 점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 철제 그레이팅 환기구를 밀어 올린 것이었다.
환기구 틈새로 서늘한 지하철 본선의 바람과 함께 2호선 전동차가 지나가는 둔탁한 굉음이 밀려 들어왔다.
"먼저 올라가!"
우진은 손에 든 쇠파이프를 남은 두 명의 조직원을 향해 힘껏 투척했다.
쇠파이프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자 조직원 중 하나가 방전봉으로 그것을 쳐냈다.
찰나의 빈틈이었다.
우진은 수면을 박차고 뒤로 도약해 서연이 매달려 있는 사다리로 몸을 던졌다.
4. 지하철 2호선의 어둠 속으로
덜컹거리는 쇠사다리를 딛고 올라서자마자 우진은 환기구의 두꺼운 철망을 아래로 내리닫고 걸쇠를 찔러 넣었다.
쾅!
밑에서 조직원의 방전봉이 철망을 강타하며 푸른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철망 너머로 조직원의 무표정한 헬멧과 그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은 육면체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하철 2호선 본선 선로 무단 침입 확인. 차단막 가동 및 현장 봉쇄 요청."
기계적인 무전 음성이 차단벽 너머로 아득하게 멀어졌다.
우진과 서연이 빠져나온 곳은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를 잇는 2호선 본선 터널의 측면 환기 통로였다.
거대한 환풍 팬이 웅웅거리며 메마른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고, 십여 미터 아래로는 은색의 레일 두 줄기가 어둠 속으로 끝없이 뻗어 있었다.
치이익.
터널 천장에 매달린 비상 전원용 주황색 나트륨등이 불길하게 깜빡거렸다.
심야 시간대라 정규 열차의 운행은 중단되어 있었지만, 선로 위에는 정적 대신 기괴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여기가…… 지하철 터널이야?"
서연이 그을음으로 얼룩진 터널 벽면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 깔린 자갈과 침목에서는 특유의 쇠 냄새와 기름 냄새가 짙게 풍겼다.
"맞아. 역삼역 방면 본선이야."
우진은 품속에서 하드디스크를 꺼내 상태를 점검했다.
두터운 납 차폐 외장 케이스에 충격 방지용 완충재가 감겨 있어 총격전의 충격에도 데이터 포트는 온전했다.
'오메가-루프.'
표면에 새겨진 그리스 문자 'Ω'와 뫼비우스의 띠 모양 심볼이 주황색 조명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15년 전 아버지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지켜낸 유일한 열쇠였다.
"역삼역 지하 7층이라고 했지?"
서연이 어두운 선로 끝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하철 역사는 지하 2층이나 3층이 고작이잖아. 어떻게 7층까지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거야?"
"일반 승객들이 이용하는 통로가 아니야."
우진이 선로 벽면에 부착된 낡은 배전반과 고압 케이블 다발을 가리켰다.
케이블들은 통상적인 지하철 전력선 규격보다 세 배는 굵었으며, 모두 일정한 주기를 두고 역삼역 방향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15년 전 화재 사건 자료에서 봤던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전용 지하 전력 인입선이야. 지상에서는 연구소가 전소되어 사라진 것처럼 위장했지만, 그 핵심 설비와 코어는 역삼역 하부의 단단한 기반암층을 파내고 지하 7층에 안치시킨 거야. 역삼역 변전실 뒤편에 코어로 내려가는 비상 수직 피트가 존재해."
우진의 설명에 서연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박민재 팀장도, 그 편의점 아저씨도…… 이 거대한 거미줄 바로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거구나."
"그래. 테헤란로의 모든 빌딩과 사람들은 저 아래에서 뻗어 나오는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에 묶여 있었던 거야."
우진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지잉—!
터널 내부의 모든 비상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리고 1초 후, 터널 양쪽 벽면에 설치된 고압 전류 방전관들이 붉은색 비상등으로 전환되며 핏빛 조명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고막을 찌르는 듯한 전자 경보음이 선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시스템 비상 프로토콜 '적색 격자(Red Grid)'의 발령이었다.
5. 침묵의 포위망
어둠 속에서 터널의 곡선 구간 너머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삼역 방면에서 다가오는 무리였다.
그들은 조금 전 배수구에서 마주쳤던 전술 요원들과는 다른 차림새였다.
검은색 맞춤 정장을 입고 귀에는 투명한 인이어를 꽂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 대신 태블릿과 소형 주파수 방출기가 들려 있었지만, 풍기는 압박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그 무리의 중심에 선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창백한 안색에 얇은 금테 안경을 쓴 40대 중반의 사내였다.
단정한 연구원 가운 대신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그의 옷깃에는 넥스트 큐브를 상징하는 서늘한 육면체 배지가 음각되어 있었다.
남자의 정수리 위에는 여태껏 우진이 보아온 그 어떤 도형보다 기괴하고 거대한 칠흑빛 검은 육면체가 떠 있었다.
육면체 표면을 타고 흐르는 핏빛 제어 코드는 주변 공간 자체를 짓누르며 맹렬한 척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우진아. 아니, 프로토타입 K-07이라고 불러야겠지."
남자가 핏빛 조명 아래에서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메마르고 기계적인 서늘함이 섞인 음성이 차가운 터널 암벽에 부딪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우진의 심장이 요동쳤다.
서연이 건네주었던 15년 전 옛 연구소 잔류 문서, 그 개발진 명단 속에서 보았던 이름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아버지 강정호의 밑에서 알고리즘 설계를 보조했던 연구원.
"윤절영…… 당신이 왜 넥스트 큐브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거지?"
우진의 입술 사이로 경악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절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앞잡이라니, 난 선배의 연구를 완성하는데 일조한 공신이야 그런 섭섭한 말을 하는거지! 15년 전 적출된 결함체에 불과한 네가 아직도 정해진 궤도를 어지럽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비록 네 머릿속 해마가 손상되어 과거의 기억은 지워졌을지라도, 시스템이 부여한 규격만큼은 뇌리에 각인되어 있을 텐데 말이야."
"너희들이…… 아버지를 코어에 팔아넘긴 건가?"
서연이 우진의 곁에서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윤절영은 시선을 서연에게로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소거해야 할 불량 데이터나 찌꺼기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염 노드 한서연. 자네 부친 역시 미련한 언론인이었지. 시스템의 기사를 예정보다 3분 먼저 송고하는 배포망의 완벽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진실을 파헤치려다 궤도 밖으로 추락했어."
"닥쳐!"
서연이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서려 하자 우진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미친 듯이 박동하고 있었다.
윤절영의 뒤편으로 펼쳐진 수십 명의 요원들, 그리고 터널 천장을 가득 메운 검은 데이터 회선들이 마치 살아 숨 쉬는 거대한 괴물의 내장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진아, 네 아버지는 실패했다."
윤절영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사회를 붕괴시키는 악성 바이러스에 불과해. 스스로 선택하게 두면 탐욕으로 서로를 물어뜯고, 결국 도시 전체를 무질서와 파멸의 엔트로피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지. 네가 보았던 그 수많은 세모들이 바로 그 증거다. 인간의 결함이 빚어낸 궤도의 충돌, 그 끔찍한 비극을 막기 위해 우리는 완벽한 사각의 구명선을 구축한 거다."
"질서라고?"
우진이 차갑게 반문했다.
품속의 하드디스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고한 사람의 인생을 사기 계약으로 파멸시키고, 아이의 생명을 대가로 타인의 아버지를 크레인 밑에 깔아뭉개는 게 너희들이 말하는 구명선인가?"
"그것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소한 보정 오차에 불과해."
윤절영의 어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나의 노드가 궤도를 이탈하면 전체 격자가 무너진다. 거대한 시계탑이 완벽하게 돌아가기 위해 마모된 작은 톱니바퀴 하나를 교체하는 것이 어찌 악이란 말이냐? 강정호 수석은 그 숭고한 섭리를 거부하고 시스템을 파괴하려 했어.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 Node-0의 자리에 안치시켜 영원히 이 도시의 연산 핵으로 기능하게 만든 것이다."
우진의 뼛속까지 서늘한 살의가 뻗쳐올랐다.
아버지를 죽인 것도 모자라, 그 영혼과 두뇌를 코어의 연산 부품으로 갈아 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오메가-루프를 넘겨라."
윤절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15년 전 불탄 잔해 속 오류일 뿐이다. 그걸 코어에 꽂는 순간, 도시를 지탱하던 모든 격자망이 붕괴하고 수백만 시민의 궤도가 한꺼번에 세모로 뒤틀려 아비규환이 벌어질 거다. 너는 네 손으로 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 셈이냐?"
우진은 대답 대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세상이 부여한 사각형의 틀을 부숴라.
완벽한 원이 되어라.'
"너희들의 가짜 평화는 여기서 끝이다."
우진의 두 눈에 깃든 백색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관자놀이의 흉터를 짓누르던 통증이 사라지며, 몸 안의 방화벽 백신 코어가 맹렬하게 기동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싼 검은 정장의 요원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무기를 꺼내 들며 우진과 서연을 향해 좁혀 들어왔다.
퇴로는 없었다.
오직 전방의 포위망을 뚫고 역삼역 지하 7층으로 질주하는 것뿐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