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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4화

봉인된 연구소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빗속의 질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장대비가 아스팔트 바닥을 맹렬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도심의 네온사인 불빛들은 번진 수채화처럼 희미하게 뭉개졌다.

 

웅웅거리는 저주파 이명이 귓전을 때렸다.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을, 오직 인과율의 격자망을 감지하는 자의 신경계에만 전해지는 시스템 이상 경보음이었다.

 

강우진은 낡은 방수 재킷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서연의 어깨를 감싸 쥐고 서초동 재개발 구역의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왔다.

 

"우진아, 차는 대로변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

 

서연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시스템이 도심 전산망을 장악하고 있다면, 방범 CCTV나 차량 번호판 인식 장비에 우리 동선이 즉각 걸릴 거야."

 

"알고 있어."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골목 한구석, 철거 예정 건물 옆에 세워진 빛바랜 구형 아반떼를 바라보았다.

 

서연이 취재용 대포차로 구해 골목에 숨겨두었던 10년 넘은 수동 변속기 차량이었다.

 

GPS 모듈도, 스마트 통신 칩도 내장되지 않은 구형 아날로그 자동차.

 

"차량 번호판 스캐너를 피하려면 고가도로 밑 골목과 방배동 배수로 이면도로를 타야 해."

 

우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서연을 밀어 넣고, 자신 역시 운전석으로 몸을 날렸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털털거리는 엔진 소음이 세찬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퍼져 나갔다.

 

서연의 정수리 위를 흘끗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목을 조르는 듯한 검은 세모(△)와 팽팽한 꼭두각시 줄이 드리워져 있었던 그녀의 머리 위.

 

지금은 잔잔하고 투명한 순백의 '백색 네모(□)'가 10cm 허공에 고요히 떠 있었다.

 

인과율의 궤도가 일상의 영역으로 정상 복원된 증거였다.

 

그러나 우진의 가슴 안쪽은 여전히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서연에게 쏟아져 내리던 파멸 에너지를 백신 코어로 흡수해 상쇄하는 과정에서 입었던 내상 때문이었다.

 

기침을 참으며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1단으로 밀어 넣었다.

 

와이퍼가 거칠게 앞유리의 빗물을 쓸어냈지만, 쏟아지는 비는 시야를 단 10미터도 허용하지 않았다.

 

차는 미끄러운 빗길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우진아, 괜찮아? 얼굴이 너무 창백해."

 

조수석에서 지도를 펴던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진을 살폈다.

 

"괜찮아. 내 신경망에 각인된 백신 코드가 충격을 흡수했어."

 

우진은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4cm의 수술 흉터가 미세하게 욱신거리고 있었지만, 고통의 성질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뇌를 갈기갈기 찢는 듯했던 이질적인 편두통이 아니라, 잠들어 있던 회로가 전류를 흘려보내며 깨어나는 듯한 생생한 감각이었다.

 

방화벽 백신 코어.

 

15년 전 아버지가 자신의 머릿속에 심어두고, 칩을 뽑아내면서까지 남겨주었던 유일한 대항 무기.

 

"서연아, 당시 연구소 도면은 확실히 머릿속에 있는 거지?"

 

"응, 15년 전 화재 기사를 추적하면서 구청 건축과 캐드 도면과 국립소방연구원의 현장 감식 보고서를 수백 번도 넘게 뜯어봤어."

 

서연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며 가방에서 접혀 있던 두꺼운 도면 사본을 펼쳤다.

 

형광펜으로 붉게 칠해진 테헤란로 일대의 옛 지적도였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은 겉으로는 국책 통신망 개발 연구소였지만, 실제로는 지상 4층, 지하 4층 규모의 특수 폐쇄 시설이었어."

 

서연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화재 이후 지상 건물은 완전히 철거됐고, 그 자리에 지금 너희 회사인 태성C&I 본사 빌딩이 올라갔지. 하지만 지하는 달라."

 

"지하 3층과 4층은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묻혔다고 했지."

 

"맞아. 당시 소방 기록에는 지하 2층까지만 잔해 철거 및 매립 승인이 났어. 지하 3층 서버룸과 4층 코어 전력실은 콘크리트로 타설해 영구 밀폐했다고 서류상으로만 보고됐지."

 

서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그건 은폐를 위한 구실이었어. 놈들은 연구소의 핵심 시설을 완전히 파괴한 게 아니라, 지상의 눈을 피해 통째로 봉인해 둔 거야."

 

2. 통제망의 사각지대

 

차는 테헤란로 남쪽의 낡은 다세대 주택가 이면도로를 기어가듯 빠져나갔다.

 

번화가로 연결되는 대형 교차로마다 푸른 경광등을 켠 경찰 순찰차와 도로교통공단 차량들이 도로 한복판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회 요망: 전기 선로 누전 복구 작업 중.'

 

전광판에 깜빡이는 붉은 안내 문구를 보며 우진은 냉소를 머금었다.

 

누전 복구는 명분일 뿐이었다.

 

오염 노드 한서연의 신호가 통제망에서 영구 소실되고, 현장 집행관인 감시관이 연산 오류를 일으키자 시스템이 테헤란로 일대를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진은 운전대를 꺾어 공사 중인 지하철 환기구 옆 좁은 샛길로 차를 틀었다.

 

차체 바닥이 덜컹거리며 자갈과 물웅덩이를 짓이겼다.

 

"우진아, 저 앞이야."

 

서연이 가리킨 곳은 태성C&I 사옥 북쪽 후면, 지상 화물 하역장으로 이어지는 지하 진입 램프였다.

 

30층 높이의 통유리 마천루인 태성C&I 사옥은 심야의 폭우 속에서 거대한 검은 비석처럼 솟아 있었다.

 

평소라면 야근하는 직원들의 불빛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창문들이 8층부터 20층까지 기괴하게 암전되어 있었다.

 

건물 정문 로비에는 사설 보안업체 차량 세 대가 비상등을 켠 채 버티고 서 있었고, 검은 우비를 입은 경비 인력들이 플래시를 비추며 오가는 차량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정문 쪽으로는 절대 못 들어가. 화물 램프도 차단기가 내려가 있을 텐데?"

 

"화물 램프 옆에 폐기물 반출용 지하 경사로가 있어."

 

우진은 전조등을 완전히 끄고 미등만 켠 채 서서히 차를 전진시켰다.

 

6년 동안 이 빌딩으로 출퇴근했던 우진이었다.

 

기획 2팀에서 사내 자산 실사와 물류 보안 감사를 담당했던 우진은 건물의 구석구석, 심지어 시설관리팀조차 잘 드나들지 않는 사각지대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폐기물 처리장 옆 변전 설비 반입로는 센서가 고장 나서 야간에 수동 개폐로 전환돼. 빗물받이 배수로를 따라가면 지하 4층 기계실 환기창으로 통하는 점검 통로가 나와."

 

우진은 폐가구와 철골 자재가 어지럽게 쌓인 철거 공터 구석에 차를 바짝 붙여 세웠다.

 

시동을 끄자 차 안에는 오직 지붕을 두드리는 거센 빗소리만이 남았다.

 

우진은 뒷좌석에서 챙겨 온 소형 공구 가방과 랜턴을 챙겼다.

 

그리고 재킷 안쪽에서 서연이 건네주었던 특수 보안 카드를 꺼내 쥐었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 지하 시설 마스터 키].

 

푸른빛이 도는 낡은 플라스틱 카드 표면에는 홀로그램으로 새겨진 네모(□) 문양이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15년 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열쇠였다.

 

"나가자. 놈들이 포위망을 좁히기 전에 들어가야 해."

 

두 사람은 차 문을 열고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빗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적셨지만, 두 사람은 몸을 웅크린 채 건물 뒤편의 옹벽을 따라 은밀하게 이동했다.

 

옹벽 끝자락, 거대한 녹슨 환풍구 철망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철망 잠금장치는 빗물에 삭아 비틀려 있었고, 우진이 노루발못뽑이(크로우바)를 틈새에 찔러 넣어 힘을 주자 끼이익 하는 비명과 함께 볼트가 뜯겨 나갔다.

 

사람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환기 덕트 입구가 드러났다.

 

"내가 먼저 들어갈게. 발밑 조심해."

 

우진이 먼저 덕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서연이 그 뒤를 따랐다.

 

철망을 안쪽에서 대충 걸쳐 닫자, 바깥의 거센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3. 지하 6층의 균열

 

환기 덕트 내부는 15년 동안 쌓인 먼지와 기름때로 끈적거렸다.

 

우진은 무릎과 팔꿈치로 기어가며 펜라이트의 불빛으로 전방을 비추었다.

 

좁은 관을 타고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서늘해졌고, 특유의 건조한 기계실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쿵- 쿵- 쿵-.

 

머리 위 어디선가 태성C&I 빌딩의 중앙 공조 시스템과 대형 엘리베이터 권상기가 돌아가는 진동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약 20미터를 기어 내려갔을 때, 녹슨 철제 그레이팅 덮개가 앞을 가로막았다.

 

우진은 손바닥으로 그레이팅을 밀어 올렸다.

 

삐걱거리며 열린 틈 사이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우진이 먼저 바닥으로 뛰어내려 주변을 경계한 뒤, 위쪽의 서연을 받아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텅 빈 지하 공간이었다.

 

태성C&I 사옥 지하 6층, 일반 직원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비상 발전기실 및 중앙 정수 처리 구역이었다.

 

거대한 원통형 발전기 세 대가 육중한 철골 베이스 위에 얹혀 있었고, 천장에는 수십 가닥의 굵은 고압 케이블 트레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형광등 불빛 하나 없이 오직 비상 유도등의 푸르스름한 녹색 불빛만이 바닥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서연이 젖은 옷을 털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지하 6층 기계실이구나."

 

"그래. 사옥 건축 당시 지하 5층까지만 주차장으로 파고, 이 6층은 기반 암반층을 깎아 비상 발전기실로 만들었다고 공시됐어."

 

우진이 펜라이트를 비추며 발전기실 가장 안쪽, 거대한 콘크리트 내력벽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실제로는 옛 연구소의 상부 덮개 콘크리트 바로 위에 이 발전기들을 얹어놓은 거야. 아래에서 올라오는 전자기 신호나 이상 진동을 발전기 소음으로 위장하려고."

 

서연이 도면을 들고 우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도면에 따르면…… 3번 비상 발전기 뒤편, 냉각수 배관 밸브실 안쪽에 옛 연구소 연결 통로가 있어야 해."

 

두 사람은 육중한 3번 디젤 발전기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비좁은 틈새를 지나자, 두꺼운 철판으로 용접된 방화문이 나타났다.

 

문 표면에는 '고전압 위험 / 시설관리자 외 출입금지'라는 경고 표지판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우진이 문의 손잡이를 잡고 비틀었으나 굳게 잠겨 있었다.

 

그러나 문의 규격과 잠금장치를 살펴보던 우진의 눈에 이질적인 장치가 들어왔다.

 

일반적인 태성C&I의 사원증 인식기가 아니었다.

 

페인트로 덧칠해져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지만, 두꺼운 황동 케이스 안쪽에 낡은 광학식 카드 리더기가 매립되어 있었다.

 

15년 전의 규격.

 

서연이 숨을 죽이며 품 안에서 마스터키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우진은 카드를 받아 들고 리더기 슬롯에 밀어 넣었다.

 

치익-.

 

15년 동안 전류가 끊겨 있던 장치에 내부 보조 전력이 공급되듯, 리더기 상단의 조그만 다이오드에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삐-빅.

 

묵직한 솔레노이드 밸브가 풀리는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방화문의 빗장이 풀렸다.

 

우진이 문을 당기자, 15년 동안 갇혀 있던 서늘하고 퀴퀴한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타는 냄새.

 

아주 오래전 무언가가 맹렬한 열기에 타버린 뒤 남겨진, 지독하게 마른 잿더미와 전자기 방전 특유의 오존 냄새가 섞인 공기였다.

 

"열렸어."

 

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방화문 너머에는 태성C&I 사옥의 매끄러운 바닥재가 아닌, 거칠게 깨지고 그을린 낡은 콘크리트 계단이 아래를 향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2011년 전소된 옛 연구소의 봉인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였다.

 

4. 그을린 잿더미와 큐브의 낙인

 

계단을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와 유리 파편이 서걱거리며 밟혔다.

 

우진은 펜라이트의 각도를 넓혀 통로의 벽면을 비추었다.

 

순간, 서연의 입에서 나지막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이것 봐…… 우진아."

 

서연이 가리킨 계단실 외벽 전체가 칠흑 같은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단순한 화재의 흔적이 아니었다.

 

콘크리트 표면이 비정상적인 고열에 노출되어 유리질처럼 녹아내렸다가 굳은 '유리화(Vitrification)' 현상이 벽면 곳곳에 고드름처럼 맺혀 있었다.

 

섭씨 수천 도에 달하는 전자기 방전 플라스마가 통로를 휩쓸고 지나갔음을 증명하는 참혹한 흔적이었다.

 

"15년 전 소방서 공식 발표는 전기 누전에 의한 단순 화재였어."

 

서연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벽면의 그을음을 쓸어내렸다.

 

검은 재가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하지만 누전으로 콘크리트 벽이 이렇게 녹아내릴 수는 없어. 이건…… 인위적인 고온 방전이야. 증거를 모조리 소각하고 전산 디스크를 물리적으로 녹여버리기 위해 군용 테르밋이나 전자기 펄스 무기를 터뜨린 흔적이야."

 

"그리고 연구원들의 입을 영구히 막아버리기 위해서였겠지."

 

우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계단참 벽면, 불에 타다 만 철제 방화 격벽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도색 자국이 펜라이트 불빛에 드러났다.

 

푸른색 육면체 로고.

 

정육면체의 모서리 세 개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기하학적 심볼마크였다.

 

그 아래에는 절반쯤 불에 그을려 벗겨진 영문 알파벳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NEXT CUBE Inc.

 

- Advanced Cognitive Network Lab].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넥스트 큐브……?"

 

"기억나? 편의점 김 씨 사장님을 파멸로 몰고 갔던 페이퍼 컴퍼니 로고."

 

"큐브 네트웍스!"

 

"그래. 푸른색 육면체. 이름만 조금씩 바꾸어가며 껍데기를 갈아치웠을 뿐, 뿌리는 동일해."

 

우진이 굳은 표정으로 불탄 로고를 응시했다.

 

"15년 전 아버지가 연구 책임자로 일했던 곳은 국가 기관의 외피를 썼지만, 실질적인 자금줄과 통제권은 민간 기업을 위장한 '넥스트 큐브'…… 즉 네모 프로젝트의 배후 세력이 쥐고 있었던 거야."

 

놈들은 인간의 궤도를 예측하고 통제하는 알고리즘을 손에 넣기 위해 강정호 박사를 끌어들였고, 연구가 완성 단계에 이르자 시설을 통째로 불태워 흔적을 지웠다.

 

그리고 살아남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오늘날 도시 전체를 사각 격자망으로 조종하는 거대한 감옥을 구축한 것이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육중한 강철 밀폐문이 버티고 서 있었다.

 

문 상단에는 붉은색 아크릴 표지판이 녹아내린 채 매달려 있었다.

 

[지하 3층 : 메인 프레임 및 생체 신경망 데이터 센터].

 

문 중앙에는 손바닥만 한 원형 잠금 휠과 디지털 키패드가 달려 있었다.

 

화재 당시의 고열 때문인지 키패드의 플라스틱 커버는 녹아 눌어붙어 있었으나, 중앙의 비상 수동 릴리스 레버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진이 레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관자놀이의 4cm 흉터가 다시 한번 날카롭게 고동쳤다.

 

쿵, 쿵, 쿵.

 

마치 문 너머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우진의 백신 신경망에 공명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연아, 물러서 있어."

 

우진이 온몸의 체중을 실어 수동 레버를 아래로 내리눌렀다.

 

끼기기긱- 쾅!

 

15년 동안 굳어 있던 묵직한 유압 실린더가 굉음을 내며 풀려나갔다.

 

두께 30cm에 달하는 특수 방폭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 열렸다.

 

5. 잠들어 있던 심장부

 

푸슈욱-.

 

차압 밸브가 열리며 수십 년간 갇혀 있던 질소 가스와 메마른 냉기가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우진과 서연은 옷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채 방폭문 너머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펜라이트의 불빛이 거대한 어둠의 심연을 갈랐다.

 

축구장 절반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홀.

 

그곳은 바깥의 계단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벽면 전체가 3중 차폐 알루미늄 패널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은 정전기 방지용 타일이 깔려 있었다.

 

화재 당시 연구소 상층부를 집어삼켰던 화마조차 이 지하 3층의 독립 방폭 차폐 구역만큼은 뚫지 못했던 것이다.

 

홀 중앙에는 수십 대의 서버 랙이 거대한 모놀리스(Monolith)처럼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서버 랙마다 두꺼운 광케이블 다발이 천장의 금속 트레이를 통해 중앙의 거대한 원형 콘솔로 집중되어 있었다.

 

"세상에……."

 

서연이 경악에 찬 탄성을 내뱉었다.

 

"여긴…… 화재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어."

 

"아버지가 독립 폐쇄망으로 설계했다고 했잖아."

 

우진이 천천히 중앙 콘솔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깔린 먼지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15년 동안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완벽한 진공의 성역.

 

중앙 콘솔 테이블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대형 브라운관 모니터 세 대와 수동 토글스위치 패널들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콘솔 한가운데, 붉은색 플라스틱 덮개로 보호된 비상 전원 레버가 눈에 들어왔다.

 

[독립 비상 축전지 가동 스위치 (Emergency Battery Bank)].

 

"전력이 남아 있을까? 15년이나 지났는데……."

 

서연이 불안한 듯 물었다.

 

"아버지는 치밀한 사람이었어."

 

우진의 시선이 콘솔 옆, 삼중 밀폐된 군용 리튬-황 비상 배터리 팩으로 향했다.

 

배터리 인디케이터에 미세한 녹색 불빛 하나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외부 전력망과 완전히 단절된 채,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보존되어 온 독립 예비 전력이었다.

 

우진은 주저 없이 붉은색 안전 커버를 젖히고 비상 전원 레버를 위로 힘껏 밀어 올렸다.

 

철컥!

 

정적이 감돌던 지하 홀 전체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웅- 하는 묵직한 변압기 기동음이 바닥을 진동시켰다.

 

천장의 비상 보조등이 하나둘씩 주황색 불빛을 깜빡이며 켜지기 시작했다.

 

치지직- 틱!

 

중앙 콘솔의 메인 모니터가 파란색 주사선을 뿜어내며 부팅 시퀀스를 시작했다.

 

도트 매트릭스 폰트로 쓰인 영문 텍스트들이 화면을 빠르게 채워 내려갔다.

 

[SYSTEM REBOOT INITIALIZED]

 

[NODE-0 CORE ARCHIVE LOADING…… 100%]

 

[SECURITY LEVEL: RESTRICTED]

 

모니터 화면 한가운데에 커다란 직사각형 입력 창이 깜빡였다.

 

[ENTER AUTHORIZATION CODE]

 

서연이 숨을 들이켰다.

 

"인증 코드……? 우진아, 비밀번호 알아?"

 

우진은 키보드 앞에 섰다.

 

낡은 기계식 키보드의 키캡들이 손끝에 닿았다.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연구 논문 첫 페이지에 적혀 있던 글귀와, 방금 전 지하실에서 읽었던 마지막 고백록의 문장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이 부여한 사각형의 틀을 부숴라.'

 

'그것은 언젠가 도래할 거대한 감옥의 문을 부수기 위해 내가 네게 남겨둔 유일한 열쇠다.'

 

우진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타각, 타각, 타각.

 

[Node-1 : K-07]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모니터가 거칠게 번쩍이며 화면 전체가 새하얗게 반전되었다.

 

삑-!

 

맑은 전자음과 함께 화면에 굵은 시스템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ACCESS GRANTED : WELCOME, K-07]

 

그리고 스피커에서 거친 화이트 노이즈와 함께 지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화면이 전환되며, 저화질 흑백 비디오 영상 파일 하나가 로딩되기 시작했다.

 

2011년 9월 16일 23시 42분.

 

연구소가 전소되기 불과 몇 시간 전의 타임스탬프가 찍힌 영상이었다.

 

우진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마침내, 15년간 봉인되어 있던 아버지 강정호의 마지막 진실이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