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걸으며
1. 제천으로 향하는 길
새벽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상도동 골목길은 푸르스름한 어둠에 젖어 있었다.
작업실 마당 한쪽에 정성껏 샌딩을 마치고 천연 오일을 먹여둔 느티나무 상판은 은은한 광택을 내뿜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갈라진 틈새를 묵직하게 결속한 흑단 나비장은 밤새 굳어진 채 한 치의 뒤틀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강우진(姜宇鎭)은 작업복 대신 편안한 면바지에 남방을 걸쳐 입고 마당 문을 닫아걸었다.
어제저녁, 서연과 함께 첫 주문 가구의 1차 공정을 마친 뒤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제천의 폐교 분교 사택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
‘우진아, 주말에 시간 괜찮으면 한번 내려오련. 뒷산 솔숲에 참나무들이 이맘때 아주 좋은 잎을 틔운단다. 너와 천천히 걷고 싶구나.’
특별한 용건이나 다급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15년 동안 차가운 지하 코어의 유리 챔버 속에 갇혀 생체 프로세서로 착취당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먼저 산책을 청해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의 기적이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울림이었다.
우진은 낡은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과거 태성C&I에 다니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느긋한 이동이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의 최적화 알고리즘이 1분 단위로 환승 동선을 계산해 주었고, 0.1초라도 지체되면 검은 세모의 경고가 뇌리를 찌르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는 그 어떤 사각 격자선도, 다음 행동을 지시하는 텍스트도 뜨지 않았다.
기차가 남한강을 끼고 굽이치는 철로를 달릴 때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강바람이 우진의 뺨을 간지럽혔다.
덜컹거리는 기차의 규칙적인 진동 속에서, 우진은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과거 바늘로 쑤시는 듯한 편두통과 안압 상승을 안겨주었던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
신경 궤도 절제술의 흔적이자 세상의 꼭두각시 줄을 끊어낸 상처는, 이제 따스한 살결의 일부로 단단히 아물어 있었다.
두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제천역 앞은 한산했다.
우진은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지나 폐교 사택이 있는 마을 어귀에 닿았다.
2. 사택의 평화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자, 짙은 흙냄새와 함께 구수한 된장 찌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옛 폐교의 분교 건물을 개조한 단층 목조 가옥의 마당에는 어머니가 정성스레 일군 둥근 화단이 알록달록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다.
채송화, 패랭이꽃, 금잔화가 자연석 틈새에서 자유롭게 피어나 바람에 흔들렸다.
“어머니.”
우진이 나지막이 부르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툇마루에서 쪽파를 다듬던 어머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얼굴 가득 번지는 주름살 사이로 눈부신 환희가 차올랐다.
“우진아! 벌써 온 거니? 아침도 못 먹고 기차 탄 거 아니야?”
어머니는 손에 묻은 흙을 앞치마에 닦아내며 단숨에 마당으로 내려섰다.
우진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마른 품에서는 볕에 잘 말린 무명옷 냄새와 쑥 향기가 났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15년의 도망과 감시의 세월에 짓눌려 잿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던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어머니의 눈동자는 한 점의 불안도 없이 티 없이 맑았다.
“아침 대충 챙겨 먹고 왔어요. 어머니는 허리 아프시다면서 또 마당일을 하셨어요?”
“아프긴 뭐가 아파. 흙 만지고 꽃 자라는 거 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하나도 안 힘들다. 네 아버지는 진작부터 뒷마당 그늘 밑에서 책을 펴놓고 널 기다리고 계셔. 얼른 가봐라. 오늘 너 온다고 아침부터 휠체어 바퀴 기름칠까지 직접 하셨단다.”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안채를 돌아 뒤뜰로 향했다.
뒤뜰은 오래된 소나무 숲의 초입과 완만한 경사로 이어져 있었다.
커다란 산벚나무 그늘 아래,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姜正浩) 박사가 무릎 위에 낡은 노트를 얹어둔 채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구형 아날로그 라디오가 조용히 클래식 선율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디지털 전파도, 인공지능 통제망도 닿지 않는 순수한 음파의 울림이었다.
“아버지.”
우진이 다가가자, 강정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로 드러난 아버지의 깊고 온화한 눈매가 아들을 향해 활짝 열렸다.
“왔느냐, 우진아.”
휠체어 바퀴를 손수 굴리며 다가오는 아버지의 손등에는 15년 전 잔혹한 고문과 화학 챔버의 전극이 남긴 흉터들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하반신 마비로 걷지는 못했지만, 휠체어를 밀어내는 그의 팔에는 인간적인 생명력이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서울 일은 어떠냐. 서연이와 함께 만든다던 그 상징 쉼터는 잘 진행되고 있고?”
“네, 포천에서 벼락 맞은 참나무 거목을 마당에 들여두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공방에 첫 손님이 찾아와 세상에 하나뿐인 비정형 느티나무 식탁을 주문하고 가셨어요.”
우진의 대답에 강정호는 흐뭇한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정형이라…… 그래, 규격이 없는 가구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없지. 자, 밥 먹기 전에 잠시 숲길을 돌지 않겠니? 네가 뒤에서 휠체어를 좀 밀어주렴. 오늘은 너와 숲의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구나.”
3. 흙길 위의 바퀴 자국
우진은 아버지의 휠체어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숲길 초입은 마을 청년들과 한민우 부소장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완만하게 다져놓은 비포장 흙길이었다.
아스팔트나 보도블록처럼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았다.
흙길 위에는 굵은 소나무 뿌리가 울퉁불퉁 솟아 있었고, 지난밤 떨어진 젖은 솔잎과 빗물에 씻겨 내려온 작은 자갈들이 불규칙하게 널려 있었다.
덜컹, 덜컹.
휠체어의 고무바퀴가 자갈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손잡이를 통해 둔탁하면서도 생생한 진동이 전해졌다.
예전 같았다면 우진의 시야에는 바퀴가 굴러가야 할 최적의 궤적선이 푸른 격자망으로 투사되었을 것이다.
0.3초 뒤에 피해야 할 돌부리와 충격을 최소화할 각도가 자동으로 계산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우진의 시야는 완벽하게 비어 있었다.
오직 제 발바닥으로 흙의 탄력을 느끼고,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무게중심의 쏠림을 감지하며 스스로 바퀴의 방향을 틀었다.
“바퀴가 덜컹거려 불편하지 않으세요?”
우진이 묻자, 강정호는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불편하긴. 오히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단다. 우진아, 넥스트 큐브의 차가운 챔버 속에 갇혀 있을 때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게 무엇인지 아느냐?”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 불규칙한 흔들림이었단다. 그 지하 벙커의 유리 챔버는 완벽했지. 온도는 섭씨 21.5도로 단 0.1도의 오차도 없이 유지되었고, 산소 농도와 영양액의 유량은 초 단위로 정밀하게 제어되었다. 바닥은 먼지 한 톨 없는 매끄러운 텅스텐 합금이었고, 어떤 충격도 진동도 없었지. 하지만 그 완벽한 수평 속에서 내 뇌세포는 매일 죽어가고 있었다. 오차와 흔들림이 없는 곳은 살아있는 생명의 터전이 아니라, 박제된 표본실에 불과하니까.”
강정호는 손을 들어 길가에 비스듬히 뻗은 소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소나무는 곧게 위로 뻗지 않고, 바위와 맞닿은 자리를 피해 기괴할 정도로 세 번이나 꺾이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고 있었다.
“보아라. 저 소나무가 수직의 반듯한 직선을 그렸다면, 진작에 바위에 부딪혀 부러졌을 게다. 흙 속의 바위를 피하고, 옆 나무의 그늘을 피해 햇빛을 찾아 돌아가느라 저토록 굽이치는 곡선이 된 것이지. 자연은 결코 최단거리를 고집하지 않는다. 돌아가고, 꺾이고, 흔들리는 모든 궤적이 모여 가장 단단한 삶의 균형을 완성하는 법이란다.”
바람이 불어와 솔가지들을 흔들었다.
솔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이 부자의 어깨 위로 금빛 비늘처럼 쏟아져 내렸다.
4. 확률과 인연
숲길 중턱에 이르자 작은 공터와 함께 통나무로 깎아 만든 쉼터 벤치가 나타났다.
우진은 휠체어를 멈춰 세우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강정호는 품 안에서 낡은 노란색 격자 노트를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그 노트에는 과거 오르비스의 잔인한 통제 알고리즘 대신, 지난 몇 달간 아버지가 제천의 바람과 새들의 날갯짓, 빗방울의 낙하 주기를 기록한 순수한 통계 수치들이 흑연 연필로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우진아, 15년 전 내가 왜 통계학에 미쳐 있었는지 아느냐?”
강정호가 먼 산자락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상의 불행을 미리 막고 싶어서였지. 어릴 적 네가 아플 때마다, 혹은 세상에서 누군가 억울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통계를 통해 그 비극의 시간표를 미리 지워주고 싶었다. 수식을 만들고, 확률을 계산해 위험을 0%로 만들면 세상에 눈물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던 게야.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는지는…… 서지훈 그 괴물 같은 아이가 내 공식을 손에 쥐고 오르비스를 만들었을 때 비로소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진은 벤치에 걸터앉아 아버지의 거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시작하셨던 거잖아요.”
“동기는 선했을지 몰라도, 전제가 틀렸던 게지. 확률이란 미래를 통제하기 위한 족쇄가 아니라, 인간이 겸허하게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돋보기여야 했다. 내일 비가 올 확률이 70%라는 건, 비를 강제로 오지 못하게 막으라는 뜻이 아니다. 비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그 30%의 우연을 가슴에 품고, 우산을 챙기든 비를 맞을 각오를 하든 인간 스스로 선택하라는 뜻이란다.”
강정호는 연필을 쥐고 노트의 빈 여백에 굽이치는 물결선을 하나 그렸다.
“서지훈은 오르비스를 통해 모든 인간을 100%의 확실성에 가두려 했다. 언제 입사하고,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언제 병에 걸려 죽을지까지 초 단위로 오차 없이 강제했지. 그는 그것을 불행 없는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실상은 우연과 선택이 거세된 거대한 무덤이었다.”
강정호가 고개를 돌려 우진을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우진아, 너와 서연이가 어제 한강 변에서 마음을 나누었다고 들었다. 그 아이가 쓴 원고 에필로그를 복덕방 노인 편으로 전해 들었지.”
우진의 뺨에 엷은 홍조가 번졌다.
“네…… 서로의 궤도를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고, 나란히 흐르는 강물처럼 걷기로 했습니다.”
강정호의 입가에 깊은 주름을 따라 눈부신 미소가 차올랐다.
“그래, 바로 그거다. 과거 H-스퀘어 같은 조작 플랫폼이 맺어주던 인연을 보아라. 성향과 유전자 데이터가 99.9% 일치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짝지어진 사람들은, 조그마한 갈등이나 오차조차 견디지 못하고 파멸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기계적인 부품의 결합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인간의 인연은 결코 확률로 계산되지 않는단다. 서로 다른 속도로 걷고, 서로 다른 상처를 품은 두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쳐 손을 잡는 것. 서로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감싸 안으며 함께 길을 잃어줄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신에게서 부여받은 가장 거룩한 자유란다.”
5. 맞춰가는 공식, 살아내는 과정
숲의 바람이 한층 깊어지며 나뭇잎들이 사르르 부딪히는 소리가 쉼터를 채웠다.
우진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지난 수년간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의문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아버지, 능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가끔 두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두려움 말이냐?”
“예전에는 머리 위의 도형을 보면 상대가 위험한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 대가로 끔찍한 편두통과 고립감에 시달렸지만, 적어도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 제 공방에 손님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제가 만든 가구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서연 씨와의 앞날조차 그 어떤 것도 약속된 것이 없지요. 완전한 백지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진의 고백은 시스템과 싸워 세상을 구원했던 영웅의 말이 아니었다.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거대한 현실 앞에 첫 발을 내디딘, 나약하고 평범한 서른두 살 인간의 솔직한 고뇌였다.
강정호는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굳은살이 박인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깊은 온기가 흘러들었다.
“우진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솔숲의 깊은 메아리처럼 우진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인생은 맞춰가는 공식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이란다.”
우진은 숨을 멈추고 아버지를 응시했다.
“수학 시험지는 정답이 정해져 있고, 공식을 대입해 빈칸을 채우면 그만이지. 하지만 살아 숨 쉬는 인생에는 애초에 정답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이 없기에 틀릴 수도 없고, 공식이 없기에 실패 또한 궤도의 파멸이 아니라 삶의 한 페이지일 뿐이란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내일을 기대하며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이유란다.”
강정호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멈춰버린 두 다리를 툭툭 쳤다.
“보아라. 나는 평생을 바친 연구실을 잃었고, 15년의 세월을 챔버 속에 빼앗겼으며, 내 두 다리는 영영 이 흙을 딛지 못하게 되었다. 수학적인 방정식으로만 본다면 내 인생은 참혹한 결손이자 완전한 실패의 연속이었지. 하지만 우진아,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 평화롭고 행복하단다. 왜인지 아느냐?”
아버지는 숲 저편, 햇살이 부서지는 마당 쪽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휠체어에 앉아 있지만, 나는 지금 네 어머니의 된장찌개 냄새를 맡고 있고, 내 손으로 숲의 바람을 기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렇게 살아서 내 아들의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고 있으니까. 상처투성이의 삶이라도, 매 순간 제 호흡으로 살아내는 이 시간들이야말로 그 어떤 완벽한 공식보다 찬란한 진실이란다.”
우진의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지난 15년 동안 자신을 옥죄었던 ‘K-07’이라는 번호표, 오르비스의 수학적 특이점이라는 낙인, 인과율의 족쇄…….
그 모든 차가운 활자들이 아버지의 한마디에 의해 봄눈 녹듯 부드럽게 지워져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삶은 풀려야 할 방정식이 아니었다.
흙먼지를 마시며 대패질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콩국수를 나누어 먹고, 넘어지면 털고 일어나 흙을 털어내는…… 오직 온몸으로 살아내야 할 축복의 시간이었다.
6. 솔바람이 남긴 선물
쉼터에서 한참 동안 바람을 맞던 두 사람은 다시 천천히 숲길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우진의 손끝에는 더 이상 어떤 망설임이나 긴장도 묻어나지 않았다.
바퀴가 흙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구르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만들었다.
사택 마당으로 돌아오자, 툇마루에는 어머니가 갓 지어낸 점심 밥상이 소담하게 차려져 있었다.
마당 텃밭에서 갓 뜯어온 아삭한 상추와 풋고추, 노릇하게 구워낸 두부 부침, 그리고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구수한 달래 된장찌개.
수치화된 영양소나 칼로리 계산 따위는 없는, 오직 가족을 향한 어머니의 투박하고 깊은 사랑만이 가득 담긴 밥상이었다.
“얼른 손 씻고 오너라. 찌개 식는다!”
어머니의 타박 아닌 타박에 우진과 아버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세 가족이 툇마루에 둘러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찌개를 한 입 떠 넣자, 짭조름하면서도 깊은 콩의 맛과 달래의 알싸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지? 네 아버지가 아침부터 저기 숲 초입에서 캐온 달래란다.”
어머니가 두부 한 점을 우진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어머니.”
우진은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 비워냈다.
식사를 마친 뒤, 강정호는 툇마루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오동나무 상자 하나를 우진에게 건넸다.
상자 겉면에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윤이 흐르고 있었다.
“열어보렴.”
우진이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가죽 만년필 한 자루와 손바닥만 한 두툼한 양장 수첩이 들어 있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누렇게 바랜, 하지만 단 한 줄의 글씨도 적혀 있지 않은 순백의 빈 수첩이었다.
“이건…….”
“내가 서른 살 되던 해, 통계학 연구를 처음 시작하며 어머니에게 선물 받았던 수첩이란다. 당시에는 여기에 온갖 세상의 수식과 미래 예측 공식을 가득 채우려 했지. 하지만 결국 단 한 자도 적지 못하고 십오 년 동안 묵혀두었단다. 이제 이 수첩은 네 것이다, 우진아.”
강정호가 만년필을 집어 우진의 손바닥 위에 쥐여주었다.
묵직한 금속의 차가움 뒤로 아버지의 체온이 은은하게 전해졌다.
“너만의 이야기를 적어가거라. 도형도, 알고리즘도 없는…… 매일매일 네 손으로 직접 선택하고 살아낸 순수한 인간의 하루를 기록하렴. 틀려도 좋고, 지워도 좋다. 그 모든 게 너의 고유한 결이 될 테니까.”
우진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고동이 차올랐다.
7. 숲의 경고
오후 햇살이 완만하게 기울 무렵, 우진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사택 문을 나섰다.
어머니는 배웅하며 직접 말린 둥굴레와 볶은 참깨를 한 보따리 안겨주었고, 아버지는 마당 돌담 곁에서 휠체어를 탄 채 손을 흔들어주었다.
“조심해서 가거라, 우진아. 서연이에게도 안부 전하고, 그 비정형 테이블 멋지게 완성하길 바란다.”
“네, 아버지. 어머니도 건강 잘 챙기세요. 다음 주에 또 내려오겠습니다.”
우진은 부모님의 따스한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마을 어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가방 안에는 아버지가 건네준 순백의 수첩과 만년필, 그리고 어머니의 보따리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을 길가에 핀 하얀 개망초꽃들이 초여름의 풋풋한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을 불과 백여 미터 앞둔 삼거리 숲길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였다.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우진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자연의 바람과는 결이 다른, 어딘가 미세하게 기압이 꺾여나가는 듯한 서늘한 감각.
우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이능은 완전히 소멸했고, 관자놀이의 통증도 없었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온몸의 세포에 각인되었던 인간 본연의 육감(Sixth Sense)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스슥.
길가 우거진 찔레꽃 덤불 너머,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일었다.
낙엽을 밟는 바스락거림이 아니었다.
공간의 무게를 누르듯, 묵직하고 조심스럽게 숨을 죽인 발소리였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늘진 숲 안쪽을 응시했다.
짙은 나무 그늘 속, 낡은 흑갈색 점퍼를 걸친 장신의 사내 하나가 멈춰 서 있었다.
깊게 눌러쓴 벙거지 모자 아래로 드러난 파리한 턱선.
그리고 그 목덜미 부근에 선명하게 새겨진 붉은 수술 흉터 자국.
‘백도현……?’
아니었다.
백도현은 지금 광화문 사건 이후 검찰 특수본의 보호 관찰 아래 국립 병원에서 신경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사내는 누구인가.
15년 전 넥스트 큐브 지하 7층 독립 차폐벽에 화학적 동면 상태로 봉인되었다가, 오르비스의 소각과 함께 세상 밖으로 깨어났던 1세대 피실험자들 중 또 다른 생존자.
사내는 우진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돌려 깊은 솔숲 안쪽으로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나뭇가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잎사귀 몇 장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우진의 심장이 낮고 묵직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과거의 그림자였다.
세상은 자유를 되찾았지만, 15년 동안 억압당했던 결손 엔트로피의 상처를 품은 자들은 여전히 이 사회의 그늘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빛에는 과거와 같은 공포나 도망치고 싶은 나약함은 없었다.
그는 가방끈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외면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을 것이다.
마당에 누워 있는 백 년 참나무의 벼락 맞은 상처를 대패로 다듬어내듯, 숲길에서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가르침대로 부딪히고 감싸 안으며 제 호흡으로 살아낼 뿐이었다.
8. 서울의 노을을 향해
덜컹거리는 시골 버스에 올라타 창가 자리에 앉았을 때, 제천의 산자락 위로 붉은 노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굽이치는 국도를 따라 미끄러지듯 달렸다.
우진은 가방에서 아버지가 건네준 순백의 양장 수첩을 꺼냈다.
가죽 표지를 넘기자, 거친 펄프의 질감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아무런 선도, 네모도, 세모도 그어지지 않은 완전한 빈 도화지.
우진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사각, 사각.
버스 엔진의 둔탁한 울림 속에서, 만년필 촉이 첫 장의 하얀 종이 위에 조용히 잉크를 묻혀 나갔다.
‘인생은 맞춰가는 공식이 아니라, 살아내는 과정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활자가 되어 종이 위에 또렷이 박혔다.
우진은 잉크가 마르는 것을 지켜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을빛에 물든 산맥 너머로 저 멀리 서울의 하늘이 아스라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도동 147번지 목공소의 마당,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백 년 참나무와 느티나무 식탁.
그리고 톱밥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함께 웃어줄 한서연의 맑은 눈동자.
내일 어떤 날씨가 찾아올지, 어떤 우연과 마주하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비가 내릴 확률이 50%라 해도 상관없었다.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처마를 깎고, 해가 뜨면 햇살 아래서 대패질을 하면 그만이었다.
우진은 만년필 뚜껑을 닫아 수첩과 함께 가슴 안주머니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심장 부근에서 전해지는 묵직한 온기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따스하게 퍼져나갔다.
불확실하기에 눈부시고, 정해지지 않았기에 찬란한 내일.
그 내일을 향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청년 목수는 다시 자신만의 소박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