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그림자
1. 모닝커피와 TV 뉴스
동작구 상도동 147번지 언덕길의 아침은 유독 평온하고 조용했다.
작업실 문을 밀어 열자, 밤새 갇혀 있던 말간 나무 냄새와 솔기름 향이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강우진은 린넨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작업대 위에 어제 홍대에서 가져온 호두나무 비대칭 식탁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길거리 무명 청년의 열정적인 노래와 수많은 박수 소리가 여전히 테이블 상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딸랑.
작업실 출입문에 달아둔 황동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우진 씨! 좋은 아침이에요!"
손에 갓 구운 바게트 봉투를 든 한서연이 활기찬 목소리로 들어섰다.
그녀의 손목에는 상도역 인근 헌책방 모퉁이 서재에서 방금 내려받은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서연 씨."
"잠이 도무지 안 와서요. 어제 최 차장님 전화 받고 나서 밤새 가슴이 쿵쾅거려서 혼났어요."
서연이 종이컵 하나를 우진의 손에 쥐여주며 작업실 벽면에 걸린 소형 벽걸이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 아침 9시 정규 뉴스에서 서울시와 검찰 특수본의 공식 합동 브리핑이 있다고 했거든요. 시간이 딱 됐어요."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졌다.
아침 뉴스 앵커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작업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 다음은 서울 도심 한복판의 대규모 재건 소식입니다.
지난 수개월간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이른바 '넥스트 큐브 게이트'와 테헤란로 지하 복합 시설 붕괴 참사의 현장이 마침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서울시청 브리핑 룸의 연단이 비쳤다.
수많은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 속에서 단상에 오른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 최현석 차장검사와 서울시 도시재생총괄본부장이 나란히 마이크 앞에 섰다.
- 서울시와 검찰 특수본은 테헤란로 역삼역 인근, 구 넥스트 큐브 사옥 매몰지 부지 2만 4천 평에 대한 정화 및 철거 작업을 최종 승인하고, 해당 부지를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으로 영구 탈바꿈시키는 착공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앵커의 설명과 함께 화면 하단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렌더링 된 조감도가 떠올랐다.
차가운 콘크리트 빌딩과 칠흑빛 유리 외벽이 마천루를 이루었던 공간.
지하 100미터 암반층까지 인간의 뇌파와 일상을 규격화하려던 거대한 감옥의 진원지가, 울창한 느티나무와 자작나무가 우거진 푸른 숲길로 변모해 있었다.
- 이번 사업은 불법적인 감시와 독점의 폐허 위에 생명과 자유의 쉼터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특히 공원 중앙에는 희생자들을 위령하고 일상의 주체적인 선택권을 상징하는 대규모 원목 쉼터가 자리 잡을 예정입니다.
서연이 커피를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였어요…… 우진 씨. 정말로 그 시커먼 빌딩 자리가 숲이 되는 거예요."
우진은 묵묵히 화면 속 렌더링 이미지를 응시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푸른빛의 살인적인 인과율 광탄이 빗발치고, 3차원 입체 사각 격자가 하늘을 뒤덮었던 곳이었다.
인간을 단지 엔트로피를 상쇄하는 부품으로 규정하고 거대한 수식 속에 가두려 했던 자들의 바벨탑.
그 흉물스러운 지하 매몰지의 상흔 위에,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흙길이 놓인다는 사실이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적셔왔다.
2. 콘크리트 잔해의 침묵
"직접 한번 가보지 않으실래요?"
서연이 텔레비전을 끄며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우진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테헤란로 현장 말입니까?"
"네. 오늘 정오부터 일반 시민 통제선이 일부 해제된다고 들었어요. 쉼터 설계를 맡으려면 대지가 어떤 상처를 품고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하잖아요."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우진은 앞치마를 벗어 개어두고 굵은 줄자와 스케치북, 그리고 주머니에 항상 넣어 다니는 낡은 흑연 연필을 챙겼다.
두 사람은 상도동을 빠져나와 지하철 2호선에 올랐다.
과거 우진이 매일 아침 사람들의 머리 위에 뜬 백색 네모(□)와 붉은 세모(△)를 보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공포를 견뎌야 했던 바로 그 전동차였다.
하지만 지금 열차 안의 풍경은 눈부시게 투명했다.
선반 아래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는 직장인의 머리 위에도,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며 킥킥대는 여학생의 정수리 위에도 아무런 기하학적 도형은 없었다.
시스템의 최적화 시간표에 맞춰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던 승객들의 표정은, 피곤함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유로운 감정과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다.
역삼역 8번 출구로 빠져나오자, 테헤란로 특유의 빌딩풍이 두 사람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진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8번 출구 앞, 과거 45층 규모로 위압적인 자태를 뽐내던 넥스트 큐브의 칠흑빛 마천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하 6층과 양자 코어룸이 연쇄 함몰되며 무너져 내렸던 거대한 싱크홀은 임시 흙과 잡석으로 메워져 광활한 공터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둘레를 따라 높다란 공사용 흰색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었고, 가림막 위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 조성 부지 - 시민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가림막 입구 앞에는 작업복을 입은 서울시 현장 관리관들과 안전모를 쓴 경비 인력들이 서 있었다.
서연이 다가가 기자증과 검찰 특수본에서 발급받은 특별 출입증을 제시했다.
관리관이 서류를 꼼꼼히 대조하더니 우진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흠칫 놀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 강우진 목수님이시군요. 최 차장검사님께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쉼터 현장 실측을 오셨다고요."
"네. 현장 지형과 지반 상태를 잠시 확인하러 왔습니다."
"안전모 착용하시고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직 바닥 정리가 덜 된 곳이 많으니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철제 쪽문이 덜컹거리며 열렸다.
공사장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도심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발밑에서 흙과 잘게 부서진 콘크리트 자갈이 사각거리며 밟혔다.
우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하 100미터 깊이의 암반까지 뚫고 내려갔던 수직 통로가 있던 자리는 단단한 모래와 쇄석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풍겨 나오는 서늘한 기운만큼은 여전히 대지 위에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수천 도의 고온 방전과 플라스마 화염에 녹아내렸던 콘크리트의 탄내, 그리고 15년 동안 억압당했던 수많은 영혼의 한숨이었다.
3. 흉터 위에 뿌리내린 풀꽃
서연은 말없이 우진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 지하 3층 배수로를 기어 나와 목숨을 걸고 마스터 백업본을 품에 안고 달렸던 기억, 계엄군의 총구를 마주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우진 씨, 여기가…… 메인 로비가 있던 자리 맞죠?"
서연이 공터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나지막이 물었다.
"네. 바로 이 아래가 지하 4층 중앙 통제 홀, 오르비스가 회전하던 곳이었습니다."
우진이 멈추어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5,100만 명의 생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언제 죽고 실패할지 그 파멸의 순번을 자의적으로 배정하던 전 인류의 거대한 시뮬레이터.
서지훈이 절대적인 신을 자처하며 서 있던 그 거만한 단상이 있던 자리였다.
우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거칠게 다져진 흙바닥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흙은 차가웠지만, 죽어 있는 흙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검게 그을린 깨진 콘크리트 블록 틈새로 연초록빛의 작은 풀잎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이름 모를 들풀의 씨앗이, 수천 도의 열기로 유리화되었던 메마른 폐허의 균열 속에서 기어이 싹을 틔워낸 것이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두 장의 떡잎.
우진의 입가에 형언할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생명은 참 끈질기네요."
서연이 다가와 쪼그려 앉으며 속삭였다.
"어떤 계산식으로도, 어떤 완벽한 격자망으로도 이 작은 풀잎 하나가 어디서 날아와 싹을 틔울지는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서지훈과 네모 프로젝트의 설계자들은 세상의 모든 우연과 불확실성을 '오차'이자 '버그'로 규정했다.
그 오차를 없애기 위해 인간을 사각형 틀에 가두고, 상처받지 않는 온실 속의 가축으로 사육하려 했다.
하지만 상처가 없는 세상에는 생명도 존재할 수 없었다.
비바람을 맞고 흙이 깨져 틈이 생겨야만, 씨앗이 그 틈에 안착하여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우진은 품에서 줄자를 꺼냈다.
풀잎이 돋아난 균열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테헤란로의 높은 빌딩들 사이로 햇살이 가장 길게 비쳐 드는 각도, 그리고 오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모여들 동선.
그의 머릿속에서 설계도의 윤곽이 서서히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평평하게 깎아 만든 반듯한 석조 기념비가 아니었다.
이 부지가 겪어낸 15년의 비극과 참사의 흉터를 그대로 품어 안고, 그 상처 위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투박한 나무 쉼터였다.
4. 거목의 나이테를 찾아서
테헤란로 현장 실측을 마친 우진과 서연은 곧장 경기도 포천의 대형 특수 목재 집하장으로 향했다.
공원의 중심이 될 대형 쉼터와 벤치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도심의 공해와 거센 비바람을 수십 년간 견뎌낼 수 있는 거대한 원목이 필요했다.
흙먼지가 자욱한 야적장에 들어서자, 전국 각지의 산판에서 베어 넘겨진 아름드리 통나무들이 거대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목재만을 다뤄온 백발의 집하장 사장이 목장갑을 털며 다가왔다.
"강 목수 오랜만이네. 뉴스 보니까 서울 한복판에 아주 큰 공원이 들어선다더니, 거기 들어갈 나무를 보러 온 건가?"
"네, 사장님. 비바람을 오래 견디고, 가운데 상처나 옹이가 깊게 박혀 있어도 결이 단단한 대형 참나무나 느티나무를 찾고 있습니다."
사장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관공서나 공원에 납품하는 업자들은 결이 매끈하고 곧게 뻗은 규격품 1등급만 찾는데…… 자네는 여전히 이상한 것만 고르는구먼."
"곧게 자란 나무는 어디서든 대접받지만, 상처를 품고 굽어 자란 나무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립니다. 그 대지가 지나온 시간과 닮았으니까요."
우진의 진중한 목소리에 사장은 허허 웃으며 야적장 가장 깊숙한 구석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렇다면 자네 마음에 쏙 들 녀석이 딱 하나 있지. 지난달 강원도 인제 산간 도로 확장 공사 때 베어낸 백 년 묵은 참나무 통나무일세."
잡풀이 우거진 그늘 아래, 성인 남자 서너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참나무 원목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길이만 6미터를 훌쩍 넘는 거목이었다.
나무의 표면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오랜 세월 번개를 맞았던 흔적인지 한쪽 옆구리가 검게 탄 채 깊게 패어 있었고, 그 패인 상처를 감싸며 굳어진 거대한 옹이가 주먹만 한 크기로 수십 개나 박혀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가구재로 쓸 수 없는, 제재소에서조차 꺼리는 파목(破木)에 불과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우진은 그 거목을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거친 껍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나무가 살아온 백 년의 시간이 손끝의 신경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벼락을 맞아 살점이 뜯겨 나가면서도, 엄동설한의 칼바람을 견디며 스스로 진액을 뿜어 상처를 아물렸던 거목의 의지.
그 상처의 흔적인 옹이는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오히려 강철보다 더 단단한 밀도로 굳어져 나무의 중심축을 지탱하고 있었다.
"어때요, 우진 씨?"
서연이 숨을 죽인 채 우진의 표정을 살폈다.
우진이 뒤를 돌아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완벽합니다. 이 나무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강 목수, 이걸 대형 벤치와 쉼터로 깎아내려면 손이 열 배는 더 갈 텐데? 옹이가 너무 단단해서 기계 톱날도 쉽게 나갈 텐데 괜찮겠나?"
사장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우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많이 갈수록 나무는 더 따뜻한 온기를 품습니다. 기계로 밀어내지 않고, 결을 따라 천천히 손으로 다듬겠습니다."
우진은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마치고, 참나무 원목을 상도동 작업실 앞마당으로 운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진의 스케치북 위로 연필 선들이 거침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번개 맞은 상처는 시민들이 등을 기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등받이 곡선으로 살려내고, 단단하게 굳은 옹이들은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 기둥의 주춧돌로 삼는 설계였다.
상처를 감추거나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상처 그 자체를 삶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전환하는 작업.
그것이 바로 우진이 세상에 건네고 싶은 마지막 위로였다.
5. 모퉁이 서재의 저녁 모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두 사람은 상도동으로 돌아왔다.
작업실에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골목길 건너편 모퉁이 서재의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강 목수님! 한 기자님! 어서들 와요!"
북카페 사장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손짓을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구수한 멸치 육수 냄새와 함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카페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에는 갓 삶아낸 칼국수와 아삭한 겉절이 김치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 주위로 낯익은 얼굴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지난번 우진이 의자를 고쳐주었던 등산복 차림의 노인,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들른 여대생, 그리고 맞은편 복덕방 할머니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이고, 우리 동네 명물들이 이제야 오네! TV 뉴스 보니까 테헤란로에 큰 공원이 생긴다면서? 강 목수가 거기 큰일을 맡았다며!"
복덕방 할머니가 숟가락을 챙겨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할머니는 벌써 소식을 들으셨어요?"
우진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듣다마다! 아까 점심때 복덕방 TV 보는데 뉴스 자막에 쉼터 설계자로 '상도동 목공소 강우진'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나오더구먼! 내가 옆집 세탁소 김 씨한테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몰라!"
할머니의 너스레에 테이블에 둘러앉은 이웃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등산복 노인이 막걸리 잔을 채우며 거들었다.
"잘됐어, 아주 잘됐어. 거기가 어떤 데였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땅이 꺼지고 빌딩이 무너져서 온 나라가 뒤숭숭했던 흉지(凶地) 아니었나. 그런 곳에 우리 강 목수처럼 심성 바른 청년이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는다니, 땅도 이제야 숨을 쉬겠지."
"맞아요. 저도 취업 준비하면서 그쪽 지나다닐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었거든요. 빌딩들만 빽빽하고 다들 앞만 보고 뛰어다니니까요. 숲이 생기면 저도 꼭 가볼 거예요."
여대생이 눈을 반짝이며 칼국수를 그릇에 덜었다.
북카페 사장이 우진에게 따뜻한 국물을 건네며 다정한 눈빛을 건넸다.
"지난번에 공모전 떨어졌다고 속상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네. 이렇게 더 크고 귀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만약 그때 규격에 맞춰 합격했더라면, 오늘 이 나무를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우진이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누구도 우진이 과거 국가 기간망을 뒤흔들던 괴물과 싸웠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우진은 그저 골목길의 삐걱거리는 의자를 단단하게 고쳐주고, 이웃들의 짐을 잠시 받아주는 서글서글한 목수 청년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진에게는 그 무지와 평범함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훈장보다 소중한 평화였다.
계산된 궤도 없이, 정해진 각본 없이, 그저 저녁이면 모여 따뜻한 국수를 나누어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소박한 일상.
그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수많은 동료가 15년의 세월을 던졌던 것이다.
6. 제천에서 걸려온 전화
식사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계 침이 밤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서연은 내일 출판사 미팅 자료를 정리해야 한다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귀가했고, 작업실 안에는 다시 은은한 나무 향과 적막만이 감돌았다.
우진이 작업대 앞 의자에 앉아 오늘 스케치한 쉼터 도면을 정리하려던 찰나였다.
책상 모퉁이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이 반짝이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화면에 뜬 이름은 '아버지'였다.
우진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가져다 대었다.
"네, 아버지. 저 우진입니다."
- 우진아, 저녁은 챙겨 먹었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정호의 목소리는 제천 소나무 숲의 맑은 바람처럼 청량하고 차분했다.
"네, 조금 전에 동네 분들과 칼국수 든든하게 먹었습니다. 아버지는요? 어머니는 진지 드셨습니까?"
- 그래.
네 어머니가 텃밭에서 따온 호박으로 전을 부쳐줘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강정호가 낮게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 아까 저녁 뉴스 보았다.
테헤란로 부지에 공원이 들어선다는 소식.
우진은 숨을 가만히 골랐다.
테헤란로.
그 이름 석 자는 아버지에게 있어 지난 15년간 자신의 척수가 바스러지고, 지하 7층 차폐실 속에서 생체 프로세서로 착취당했던 지옥의 다른 이름이었다.
- 최 차장한테 낮에 연락을 받았다.
네가 그 공원 중심에 들어설 쉼터를 설계하기로 했다더구나.
"네, 아버지. 오늘 낮에 서연 씨와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포천에 가서 백 년 된 참나무 원목도 하나 골라두었고요."
우진의 대답에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풀벌레 소리만이 가늘게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이윽고 강정호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왔다.
- 고맙구나, 우진아.
"아버지께서 제게 고마워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 아니다.
내가 지은 죄와 어리석은 방정식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오만으로 사람들을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두려 했던 내 끔찍한 과오가 묻혀 있는 무덤이지.
그 무덤 위에…… 내 아들이 생명과 휴식의 나무를 얹어준다니, 이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 있겠느냐.
강정호의 떨리는 음성에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하게 울려왔다.
"아버지의 과오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그 차가운 어둠 속에서 온몸으로 엔트로피를 받아내며 세상을 지켜내셨습니다. 이제 그 상처는 부끄러운 흉터가 아니라, 새싹을 틔우는 거름이 될 겁니다."
- 그래…… 네 말이 맞다.
오늘 저녁에 연구실 창밖으로 부는 바람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바람은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고, 오직 빈 들판을 향해서만 분다는 것을.
강정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웃었다.
- 네가 만들 쉼터가 참으로 기대되는구나.
옹이가 박힌 거친 나무로, 사람들의 지친 등을 편안하게 받쳐주렴.
"네, 아버지. 정성껏 깎겠습니다. 완공되면 어머니 모시고 꼭 서울로 올라오세요. 제가 제일 먼저 아버지를 그 벤치에 모실 테니까요."
- 그래, 꼭 그러마.
밤이 깊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라.
전화가 끊어지고, 우진은 한참 동안 수화기를 손에 쥔 채 먹먹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15년간 얼어붙어 있던 부자의 시간.
그 길고 어두웠던 상처의 터널이, 마침내 하나의 온전한 매듭을 짓고 새로운 계절로 나아가고 있었다.
7. 밤바람과 평상의 온기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덧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초여름의 시원한 밤바람이 밀려들어와 작업실 안의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흩어졌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 아래, 낮에 스케치했던 평상형 원목 벤치의 자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내일 아침이면 포천에서 백 년 된 참나무 거목이 트럭에 실려 도착할 것이고, 쉼터 작업과 함께 이웃들을 위한 평상 제작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그는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하드커버 노트를 펼쳤다.
아버지가 15년 전 남겼던, 그리고 얼마 전 특수본에서 돌려받은 강정호의 친필 연구 노트였다.
수많은 기하학적 수식과 엔트로피 방정식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노트의 마지막 빈 페이지.
우진은 흑연 연필을 쥐고 그 백지 위에 조용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통제는 완벽을 꿈꾸지만,
생명은 오직 틈새에서 피어난다.
상처는 지워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나무가 비바람을 견뎌내며 완성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늬다.'
연필 끝이 사각거리며 흑연 가루를 종이 위에 흩뿌렸다.
그것은 넥스트 큐브의 차가운 알고리즘에 맞서 온몸으로 증명해낸 삶의 기록이자, 앞으로 그가 나무를 깎으며 살아갈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우진은 연필을 내려놓고 가슴 포켓에 손을 넣었다.
어머니의 짐 상자에서 찾아내 참나무 옹이 액자에 끼워 제천 연구실 책상에 올려두었던, 일곱 살 시절의 가족사진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앞니가 빠진 채 해맑게 웃던 자신과, 두 다리로 꼿꼿이 서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젊은 날의 아버지.
그 따스한 웃음의 궤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15년의 세월이 그들을 찢어발기고 휠체어와 흉터를 남겼을지라도, 그 고통을 감싸 안은 사랑의 결은 참나무의 옹이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오늘의 평화를 지탱하고 있었다.
8. 스케치북 위에 내려앉은 별빛
작업실 형광등을 끄자,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푸르스름한 달빛이 작업대 위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스케치북 위에 펼쳐진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의 조감도.
거대한 원목 쉼터의 지붕 사이로 부서져 내릴 햇살의 각도와, 벼락 맞은 상처를 그대로 살려낸 벤치의 곡선이 달빛 아래서 마치 살아 숨 쉬듯 꿈틀거렸다.
우진은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거 시야를 옥죄며 사람들의 운명을 감시하던 칠흑빛 전산 격자망은 허공 어디에도 없었다.
그 텅 빈 하늘 위로 무수한 별빛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유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별은 밝게 빛났고, 어떤 별은 희미하게 깜빡였으며, 어떤 별은 예기치 못한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졌다.
정해진 각본도, 강제된 목적지도 없는 우주의 숨결.
그 불확실하고도 광활한 도화지 아래서, 인간은 매일매일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일어서며 자신만의 선을 그어가고 있었다.
지나간 어둠의 그림자는 길었지만, 그림자가 짙었던 만큼 새로 떠오를 아침 햇살은 더욱 눈부실 것이었다.
우진은 창틀을 짚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차오르는 시원한 밤공기.
내일은 새로운 나무를 만나 톱을 쥐고 대패질을 시작할 것이다.
거친 옹이를 어루만지고, 상처의 결을 따라 칼날을 밀어 넣으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쉼터를 조각해 나갈 것이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내일이, 그 찬란한 백지의 시간이 다시금 그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