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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6화

바람 부는 언덕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새벽의 온기

 

응급실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 형광등 불빛을 뒤로하고 상도동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동쪽 하늘은 이미 맑은 비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왼쪽 어깨에 감긴 붕대 아래로 둔탁한 박동이 전해져 왔지만,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새벽 공기는 놀라울 정도로 달콤했다.

 

"우진 씨, 정말 걸을 만해요? 의사 선생님이 최소 사흘은 절대 안정 취하라고 신신당부했잖아요."

 

한서연이 우진의 오른팔을 꼭 붙든 채 몇 번이고 발걸음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 밑에는 밤을 꼬박 새운 피로와 눈물 자국이 옅게 번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괜찮아요.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살이 조금 찢어진 것뿐인데요."

 

우진이 붕대를 감지 않은 오른손으로 가볍게 웃어 보였다.

 

상도동 147번지 삼거리 슈퍼 앞 평상에는 낯익은 옥청색 나일론 부채가 놓여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슈퍼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평상 한쪽 작은 함석쟁반 위에 랩으로 얌전히 덮인 유리 대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접 겉면에는 송골송골 맺힌 이슬방울이 투명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랩 위에는 삐뚤빼뚤한 매직 글씨가 적힌 노란 메모지가 얹혀 있었다.

 

[총각 온다길래 얼음 띄워 뒀어.

 

늦게 오면 냉장고에 넣으려다 마당에 내놨으니 꼭 마시고 자.]

 

얼음이 반쯤 녹아 둥둥 떠 있는 시원한 오이냉국이었다.

 

송송 썬 오이채와 통깨, 그리고 알싸한 식초 냄새가 랩 틈새로 풍겨 나왔다.

 

우진과 서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가 밤새 기다리셨나 봐요."

 

서연이 조심스레 랩을 벗겨내며 대접을 들어 올렸다.

 

우진은 대접을 받아 들고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시큼하고 짭조름한 냉국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밤새 지하 40미터의 매캐한 오존과 화약 냄새에 찌들어 있던 내장이 씻은 듯이 맑아졌다.

 

"맛있네요, 정말."

 

우진이 대접을 서연에게 건넸다.

 

서연도 두 손으로 대접을 쥐고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어떠한 알고리즘도 계산해 내지 않은 온기.

 

통제 플랫폼 미러 큐브의 푸시 알림도, 상류층 매칭 플랫폼의 인위적 도파민도 아닌, 그저 이웃이 이웃에게 건네는 투박하고 소박한 마음이었다.

 

대접을 비운 우진은 메모지 옆에 '정말 잘 먹었습니다. 조금 자고 낮에 인사드릴게요'라고 연필로 꾹꾹 눌러 적어 두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참나무와 물푸레나무의 은은한 피톤치드 향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우진이 지우개로 모든 도형을 지워버렸던 커다란 백색 켄트지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

 

사각의 억압도, 세모의 상처도, 동그라미의 경계도 지워진 완전한 빈 종이.

 

아침 햇살이 창살을 넘어 백지 위로 쏟아져 내리자, 종이는 마치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듯 눈부시게 하얗게 빛났다.

 

서연이 그 백지 앞에 멈추어 서서 나직하게 감탄했다.

 

"우진 씨가 말했던 게 이거였군요."

 

"네. 아무것도 그리지 않아도 괜찮은 종이예요."

 

우진은 외투를 벗어 걸어 두고, 작업실 안쪽 낡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긴장이 풀리자 전신을 짓누르는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연이 얇은 담요를 가져와 우진의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한숨 푹 자요.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요."

 

"서연 씨도요..."

 

우진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15년간 그를 옭아맸던 관자놀이의 통증도, 미래를 예단하려던 시신의 잔상도 없었다.

 

그가 맞이한 것은 기절 같은 암전이 아니라, 파도 소리 없는 깊고 안락한 인간 본연의 휴식이었다.

 

2. 오래된 메모리

 

우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한 오렌지빛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고, 작업실 안에는 구수한 보리차 끓는 냄새가 감돌았다.

 

서연은 작업대 한쪽 간이 의자에 앉아 노트북으로 기사 초고를 다듬고 있었다.

 

타닥, 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리드미컬한 소리가 정적을 부드럽게 채웠다.

 

우진이 몸을 일으키자 서연이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일어났어요? 몸은 좀 어때요?"

 

"아주 개운해요. 몇 년 만에 이렇게 깊게 잔 건지 모르겠네요."

 

우진이 붕대가 감긴 어깨를 가볍게 돌려 보았다.

 

상처 부위가 조금 당기긴 했지만, 열감은 말끔히 가라앉아 있었다.

 

서연이 보리차를 머그잔에 따라 건네며 말했다.

 

"방금 대검 특수본에서 공식 브리핑이 끝났대요. 백도현 씨와 유진아 씨는 단순 테러범이 아니라 15년 전 불법 생체 실험 피해자로서의 신분이 인정되어, 특수 격리 병동에서 심리 치료와 신경 치료를 우선 받기로 했어요. 여론도 그들을 괴물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사기업 카르텔에 희생당한 피해자로 받아들이고 있고요."

 

"다행이네요."

 

우진은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백도현이 마지막 순간 가슴에 품고 오열하던 낡은 티타늄 밸브 파편이 떠올랐다.

 

그것은 더 이상 복수의 흉기가 아니었다.

 

살아남아 상처를 증명하고 마침내 인간으로 돌아온 자의 훈장이었다.

 

서연이 노트북 화면을 덮으며 가방에서 조그마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까 제천에서 태호 씨 편으로 서류가 하나 올라왔어요. 강정호 박사님이 우진 씨에게 꼭 전해 달라고 하셨대요."

 

봉투를 열자 빛바랜 두 장의 종이가 나왔다.

 

한 장은 2000년대 초반 서울 외곽 지도가 인쇄된 누런 지적도였고, 다른 한 장은 아버지 강정호의 단정한 만년필 글씨가 적힌 엽서였다.

 

[우진아.

 

네가 광화문의 어둠을 걷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15년 전 시스템의 첫 매듭을 잘못 묶었던 그 죄책감의 바닥을, 네가 지우개 하나로 닦아내 주었더구나.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장소가 있다.

 

넥스트 큐브가 테헤란로에 그 거대한 바벨탑을 올리기 전, 내가 세상의 궤도를 처음으로 관측하겠다며 통계 모델링 안테나를 세웠던 옛 관악산 줄기 언덕배기란다.

 

거기 서면 서울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지.

 

그 시절 나는 그 풍경을 보며 모든 사람의 길을 완벽하게 계산해 낼 수 있다고 오만하게 믿었단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맞는 것이라는 걸.

 

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 그곳에 가보렴.

 

바람이 참 좋은 곳이란다.]

 

지적도 귀퉁이에는 붉은 볼펜으로 둥글게 표시된 지점이 있었다.

 

관악산 북쪽 자락, 서울대 공학관 뒤편 능선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헬기장 터였다.

 

우진은 아버지의 편지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종이 표면에 배어 있는 오래된 흑연과 잉크 냄새 속에서, 평생을 회한 속에 갇혀 살았던 늙은 학자의 참회와 비로소 찾아온 평안이 고스란히 만져졌다.

 

"서연 씨,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요?"

 

우진이 지적도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마감은 방금 다 끝냈어요. 어디로 갈까요?"

 

"바람 맞으러 가요. 아버지가 계셨던 곳으로요."

 

3.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두 사람은 낡은 배낭에 물병 두 개와 얇은 겉옷을 챙겨 작업실을 나섰다.

 

상도동 골목을 빠져나와 관악구 방면으로 향하는 초록색 지선버스를 탔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늦은 오후였지만, 버스 안은 한산했다.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뺨 위로 부드러운 저녁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덜컹거리는 버스의 진동 속에서 우진은 무심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정류장마다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성, 교복 셔츠 단추를 풀고 친구와 낄낄거리는 남학생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손에 든 붕어빵 봉지를 보며 미소 짓는 퇴근길 직장인.

 

우진의 시야는 맑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망막을 어지럽히던 백색의 네모(□)들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의 머리 위에서 파멸을 예고하며 핏빛으로 회전하던 세모(△)도, 시스템의 격자를 밀어내며 위태롭게 떨리던 은빛 동그라미(○)도 없었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에는 오직 푸른 하늘과 흩날리는 머리칼뿐이었다.

 

"신기해요."

 

서연이 창밖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뭐가요?"

 

"미러 큐브가 사라지고, 국가 라이프 플래너가 폐기됐을 때만 해도 세상이 멈출 줄 알았잖아요. 사람들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스스로 다시 족쇄를 원하며 시위까지 벌였는데... 보세요. 사람들은 여전히 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장을 보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있어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복원력은 시스템의 연산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불확실하다는 건 위험한 게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버스가 관악산 자락의 한적한 종점에 멈추어 섰다.

 

엔진이 꺼지자 도심의 매연과 소음 대신, 숲이 뿜어내는 서늘한 그늘과 뻐꾸기 울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인적이 드문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초여름의 녹음이 짙게 우거진 오솔길 바닥에는 마른 솔잎과 잔돌들이 깔려 있었다.

 

우진이 앞장서며 나뭇가지를 젖혀 주었고, 서연은 그의 조심스러운 배려를 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흙냄새가 짙어질수록 도심의 번잡함은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멀어져 갔다.

 

4. 언덕 위의 유적

 

완만한 능선을 따라 30분 남짓 걸어 올라가자, 시야가 갑자기 사방으로 시원하게 트였다.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오래된 콘크리트 헬기장 공터였다.

 

바닥 곳곳에는 금이 가고 잡초가 솟아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는 1990년대 초반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통신 안테나 철탑의 기단부가 붉게 녹슨 채 남아 있었다.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이 테헤란로로 이전하기 전, 강정호 박사가 처음으로 인간 행동 양식의 통계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세웠던 간이 기상 및 주파수 관측소의 흔적이었다.

 

철탑 기단부 콘크리트 모퉁이에 희미하게 음각된 글씨가 보였다.

 

[1998.

 

K.J.H - 이해(理解)를 위한 기록]

'통제(統制)'가 아닌 '이해(理解)'.

 

우진은 그 글귀를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매만졌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통제의 괴물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세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이, 서지훈의 왜곡된 복수심과 결탁하고 넥스트 큐브의 자본과 뒤엉키며 괴물 같은 '네모 프로젝트'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끔찍한 괴물을 부수기 위해 자신의 15년과 척수를 내던졌고, 아들은 그 괴물의 잔해 속에서 마지막 증오의 획을 지워냈다.

 

우진이 천천히 돌아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와..."

 

등 뒤에서 서연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로 장대했다.

 

발아래로 관악구와 동작구의 나지막한 주택가가 물결치듯 굽이쳤고,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의 은빛 줄기가 저녁 햇살을 받아 붉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한강 너머, 여의도의 마천루들과 저 멀리 테헤란로의 고층 빌딩 숲이 노을빛에 젖어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거대한 도시 상공에는 보이지 않는 칠흑빛 입체 사각 격자망(GRID)이 촘촘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5,100만 명의 일거수일투족을 0과 1로 환원하고, 희생 노드를 골라내며, 파멸의 각도를 강제하던 거대한 디지털 감옥.

 

하지만 지금, 서울의 하늘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붉게 타오르다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저녁노을과, 빌딩 숲 사이로 점점이 켜지기 시작하는 따스한 백열등 불빛들만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5. 바람의 감촉

 

쏴아아아-.

 

골짜기 아래에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올라왔다.

 

초여름의 더위를 단숨에 씻어내는, 소나무 향기를 듬뿍 머금은 거센 산바람이었다.

 

서연의 긴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가볍게 흩날렸다.

 

그녀는 두 팔을 벌린 채 눈을 감고 바람의 숨결을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정말 시원해요. 가슴속에 얹혀 있던 묵은 돌덩이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아요."

 

서연이 눈을 뜨며 우진을 돌아보았다.

 

노을빛을 받은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투명한 호박석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우진 역시 난간 없는 언덕 끝자락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왼쪽 어깨의 붕대가 바람에 펄럭였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에는 형태가 없었다.

 

네모나 세모처럼 모나지도 않았고, 동그라미처럼 닫힌 경계를 만들지도 않았다.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지만, 닿는 모든 것들의 열기를 식혀주고 자유롭게 지나가는 무형(無形)의 숨결.

 

"우진 씨, 그거 알아요?"

 

서연이 우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뭐가요?"

 

"내가 우진 씨를 처음 봤을 때... 역삼역 그 혼잡한 지하철 플랫폼에서요. 우진 씨 눈빛이 너무 무서웠어요. 마치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세상 뒤편에 있는 어떤 끔찍한 심연을 혼자만 보고 있는 사람 같았거든요. 항상 관자놀이를 짚으며 괴로워하고, 언제나 누군가의 머리 위를 불안하게 쳐다보며 경계하던 그 눈빛이요."

 

서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지금 우진 씨 눈을 보면요... 그냥 참 따뜻해요. 아무것도 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람을 진짜 온전하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우진은 서연의 말을 조용히 음미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과거의 그는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머리 위에 뜬 도형을 보았고, 그 도형이 뿜어내는 색상과 꼭두각시 줄선의 각도만을 계산했다.

 

이 사람이 언제 파멸할지, 이 사람이 시스템의 희생양인지 아닌지, 그 인과율의 데이터만을 강박적으로 스캔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감옥의 창살을 세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도형이 사라지고 나니까, 비로소 사람 얼굴이 보이더군요."

 

우진이 나직하게 털어놓았다.

 

"상도동 골목길 복덕방 할머니의 주름진 미소도,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아이들의 땀방울도, 그리고..."

 

우진의 시선이 서연의 얼굴에 멎었다.

 

"언제나 나를 믿고 곁을 지켜주던 서연 씨의 그 단단한 눈빛도요."

 

서연의 뺨이 노을빛보다 조금 더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6. 마주 잡은 손

 

"우진 씨."

 

서연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맑게 울렸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것은 불안의 질문이 아니었다.

 

정해진 각본이 사라진 세상에서, 내일을 맞이하는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설렘과 기대의 물음이었다.

 

"넥스트 큐브도 무너졌고, 오르비스도 불탔고, 백도현 씨의 테러도 끝났어요. 이제 내일부터는 기삿거리도 평범한 일상의 사건들로 돌아갈 테고, 우진 씨도 다시 상도동에서 나무를 깎겠죠. 하지만... 1년 뒤에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5년 뒤에 세상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이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잖아요."

 

우진은 말없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무를 깎고 대패질을 하느라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

 

과거에는 이 손으로 척력 펄스를 던지고, 총을 쥐고, 슈퍼컴퓨터의 메인 콘솔에 백신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손에 쥐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진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바람에 살짝 차가워진 서연의 고운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움찔, 서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이내 그녀는 손가락을 얽어 우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따스한 체온이 혈관을 타고 가슴 깊은 곳으로 번져 나갔다.

 

"알 수 없어서 좋은 겁니다, 서연 씨."

 

우진의 목소리가 저녁노을처럼 따스하게 대지를 감쌌다.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리 안다면,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내일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우리가 또 어떤 서툰 실수를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이 순간 손을 맞잡는 온기가 이토록 소중한 거겠죠."

 

서연이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로 언덕의 바람이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그렇네요."

 

서연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가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모르니까... 그래서 더 곁에 있고 싶고, 그래서 더 서로를 지켜주고 싶은 거였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저물어가는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계획도, 절대적인 안전도 없는 세상.

 

누군가는 여전히 실패하고, 누군가는 사랑에 아파하며, 누군가는 뜻밖의 행운에 눈물 흘릴 불확실한 내일.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이 신에게서 빼앗아 온 가장 위대한 선물, '자유의지'의 본질이었다.

 

우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형언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다.

 

15년간의 긴 악몽이, 테헤란로의 지하 암반에서 시작해 광화문의 지하 공동구를 거쳐, 마침내 이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완전히 매듭지어지고 있었다.

 

7. 내일이라는 이름의 스케치

 

하늘의 붉은 기운이 완전히 스러지고, 짙푸른 밤의 장막이 서울을 덮었다.

 

도시는 수백만 개의 인공 불빛으로 가득 차, 마치 지상에 내려앉은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일렁였다.

 

저 수많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가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다.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온 꼭두각시 줄선에 매달려 춤추는 인형은 없었다.

 

서툰 발걸음으로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 서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

 

"우진 씨, 배고프지 않아요?"

 

서연이 문득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이냉국 한 사발 마신 게 전부네요."

 

"그럼 내려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상도동 시장 골목에 파전 기가 막히게 부치는 집이 있거든요. 어제 고생했으니까 내가 풀코스로 쏠게요."

 

"기대하겠습니다. 서연 씨 지갑 거덜 날 때까지 먹을 테니까 각오하세요."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언덕 너머로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우진과 서연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숲길이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었고, 발밑의 흙은 단단하게 그들의 걸음을 받쳐주고 있었다.

 

우진은 내려가는 길에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초여름의 첫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반짝이고 있었다.

 

선도 없고, 규격도 없고, 테두리도 없는 무한한 밤하늘.

 

그것은 거대한 백지였다.

 

'내일은 어떤 가구를 만들까.'

 

우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모 반듯한 규격품 책상이 아니라, 나무가 자라온 옹이와 비틀림을 있는 그대로 품어 안은 편안한 원목 식탁을 짜고 싶었다.

 

사람들이 둘러앉아 실패를 이야기하고, 슬픔을 나누며, 서로의 온기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가구.

 

비록 공모전에 나가 떨어지더라도, 남들이 서툴다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자유롭게 실패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자신이 목숨을 바쳐 지켜낸 가장 소중한 일상이었으니까.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가볍게 밀어주었다.

 

불확실해서 눈부시고, 정해지지 않아서 가슴 뛰는 내일을 향해, 두 사람의 발걸음이 경쾌하게 밤길을 수놓아 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