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1화

백지 위의 스케치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백지 앞의 침묵

 

작업실 안으로 길게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다.

 

대패질을 거듭해 윤기 나는 결을 드러낸 널찍한 참나무 작업대 위에는 은은한 나무 진액과 톱밥 냄새가 포근하게 깔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작업실 앞 원목 벤치에서 노란 바람개비를 돌리며 재잘거리던 꼬마 준우의 청아한 목소리가 골목길 모퉁이 너머로 멀어져 갔다.

 

저 멀리 비탈길에서 덜컹거리며 내려가던 짐 실은 자전거의 체인 소리와, 슈퍼 평상에서 들려오던 노파들의 도란도란한 말소리마저 차츰 잦아들었다.

 

골목의 분주한 활기가 한 템포 물러서자, 작업실 안에는 완벽에 가까운 고요와 정적만이 묵직하게 고여 들었다.

 

강우진은 작업대 모서리에 거친 손바닥을 얹은 채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서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물푸레나무와 참나무의 서늘하면서도 단단한 감촉이 손끝의 신경을 타고 가슴 깊은 곳까지 잔잔하게 전해져 왔다.

 

지난 수년간, 아니 어쩌면 태어난 이래 평생토록 그의 뇌간과 관자놀이를 바늘로 헤집듯 쥐어짜던 그 지독한 편두통은 이제 거짓말처럼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시야 구석구석을 붉고 푸른 기괴한 빛으로 어지럽히던 인과율의 궤적선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 십 센티미터 허공을 짓누르며 위압적으로 회전하던 무거운 사각형의 테두리도,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도 이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맑고 깨끗한 공기만이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오래된 미닫이창의 격자 살을 통과해 바닥 위에 길게 누운 따스한 오후의 햇살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작업대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꺼운 원목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스치며 내는 낮고 둔탁한 마찰음이 텅 빈 실내의 벽면을 부드럽게 울렸다.

 

그는 책상 아래 첫 번째 서랍을 천천히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서랍 안쪽에는, 며칠 전 상도역 근처 낡은 문구점에서 사두었던 두툼한 백색 켄트지 한 묶음과 흑연 심이 단단하게 박힌 4B 연필 한 자루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우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도톰한 종이의 표면은 티끌 하나 없이 희고 매끄러웠다.

 

그것은 시스템이 정해둔 시간표도,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앉은 알고리즘의 보정도 전혀 닿지 않은, 그 자체로 완전한 무(無)의 공간이었다.

 

그는 그 새하얀 백지를 참나무 작업대 정중앙에 단정하게 펼쳐 놓았다.

 

창틈으로 살랑이며 스며든 초여름의 미풍에 종이 오른쪽 귀퉁이가 파르르 떨려 올라왔다.

 

우진은 작업대 한쪽에 놓여 있던 묵직한 무쇠 손대패를 들어 종이 우측 상단에 문진처럼 가만히 얹어 눌렀다.

 

쇳덩이의 서늘한 무게를 받아낸 백지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평평하게 제 자리를 지켰다.

 

'백지라.'

 

우진은 나직하게 혼잣말을 읊조리며 오른손으로 연필을 집어 들었다.

 

커터칼로 비스듬하게 깎아낸 흑연 끝이 날카롭고 단단하게 각을 세우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감겨오는 나무 자루의 질감이 낯설면서도 기묘한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이 날카로운 흑연을 종이 위에 내리누르는 순간, 지워지지 않는 첫 궤적이 시작될 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에게 궤적이자 운명이란 언제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폭력에 불과했다.

 

스스로 원해서 긋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를 덮고 있던 거대한 사각 격자망 위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정해진 좌표를 따라 강제로 끌려가던 꼭두각시의 경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에 들린 흑연 연필은 오직 자신의 손가락 근육과 신경, 그리고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움직일 것이었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가슴 가득 공기를 채웠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메마른 톱밥 먼지와 서늘한 종이의 냄새가, 오랜 세월 마비되어 있던 인간 본연의 감각을 선명하게 일깨웠다.

 

2. 사각의 궤적

 

우진은 연필 끝을 백지의 왼쪽 상단, 아무런 표식도 없는 허공의 좌표에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흑연의 날카로운 끝이 종이의 살결에 닿는 순간, 바스락거리는 지극히 건조하고 정직한 마찰음이 작업실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팔목을 움직여 첫 번째 선을 긋기 시작했다.

 

흑연이 종이의 거친 섬유질을 파고들며 짙은 회색의 직선을 길게 뻗어냈다.

 

흔들림 없이 수평으로 나아간 선은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단정하고 반듯했다.

 

수평선이 일정한 길이에 도달해 멈추어 섰을 때, 연필 끝은 아주 잠깐의 호흡을 고른 뒤 정확하게 아래를 향해 90도로 꺾였다.

 

수직선이 매끄럽게 하방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꺾여 나가는 수평의 밑변.

 

마지막으로 처음의 출발점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가는 마감선.

 

네 개의 꼭짓점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단단히 닫히는 순간, 새하얀 켄트지 위에는 완벽한 균형을 이룬 하나의 정사각형(□)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이 닫히며 튕겨 나간 미세한 흑연 가루가 종이 표면에 엷은 안개처럼 흩날렸다.

 

우진은 연필을 쥔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자신이 그어 넣은 사각의 형태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네모.

 

그것은 그가 이 땅에 태어나 지난 32년 동안 갇혀 살았던 세상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테두리.

 

안정이라는 이름의 족쇄.

 

반복이라는 이름의 마취제.

 

그리고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규격에 의해 철저하게 재단된 삶의 모식도였다.

 

도형을 응시하는 우진의 맑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미 아득하게 지나쳐 온 시간의 파편들이 하나둘 형체를 갖추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의 가장 밑바닥, 초등학교 시절 교실 뒷벽에 걸려 있던 시간표는 완벽한 격자무늬 바둑판이었다.

 

1교시 국어, 2교시 수학, 3교시 사회, 4교시 자연.

 

단 일 분의 어긋남도, 단 한 칸의 일탈도 허용되지 않던 그 네모난 칸막이 속에서 어린 시절의 우진은 단 한 번도 그 선 밖으로 발을 뻗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고, 정해진 종소리에 맞추어 줄을 서고, 정해진 규격의 시험지 네모 칸 안에 어른들이 원하는 정답만을 골라 채워 넣어야 했다.

 

정답 칸의 네모를 삐져나간 생각은 곧 '오답'으로 낙인찍혔고, 그 선을 지키지 못하는 행동은 '탈선'이라는 이름으로 훈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절 어린 우진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저 크고 작은 사각형들의 무수한 집합체에 불과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주하는 회색빛 아파트의 무거운 사각 철문.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아 세상을 보여주던 사각 텔레비전.

 

그리고 불을 켜고 들어간 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놓여 있던 네모난 책상과 서랍장.

 

그 무수한 사각의 모서리들이 매일같이 소년을 향해 나직하고 서늘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선 안에만 머물러라.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선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뿐이다.'

 

우진의 메마른 입술 끝에 자조적인 실소가 엷게 스쳐 지나갔다.

 

안전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감옥.

 

그것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안락해서, 자신이 그 좁은 사각의 상자 안에 갇혀 영혼이 박제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달콤한 독약이었다.

 

3. 32년의 박제

 

대학이라는 더 넓은 문을 통과하고, 마침내 서울 테헤란로의 한복판에 우뚝 솟은 거대한 유리 빌딩, 태성C&I에 공채로 입사했을 때도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각형의 벽은 이전보다 훨씬 더 높고, 차갑고, 정교해져 있었다.

 

매일 아침 가슴팍에 걸어야 했던 직사각형의 푸른색 플라스틱 사원증.

 

지하철 2호선 역삼역 개찰구에 카드를 찍을 때마다 기계적인 비프음과 함께 딸깍거리며 열리던 사각형의 스크린도어.

 

아침 8시 40분이면 어김없이 수십 명의 무표정한 직장인들과 함께 몸을 구겨 넣던 엘리베이터의 좁은 사각 공간.

 

그리고 14층 복도를 지나 도착한 기획2팀 사무실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적힌 명패 아래 웅크리고 앉던 파티션 안쪽의 자리.

 

가로 120센티미터, 세로 80센티미터.

 

그것이 대한민국 표준 직장인, 대리 강우진이라는 인간에게 허락된 세계의 전부였다.

 

온종일 마주하고 있어야 했던 모니터 속 엑셀 화면에는 수천 개, 수만 개의 작은 사각 셀들이 바둑판처럼 끝없이 도열해 있었다.

 

우진은 그 좁은 사각 칸 하나하나마다 타인의 돈과 물류 수치를 오차 없이 채워 넣었다.

 

전월 대비 증감률을 맞추고, 그래프의 기울기를 정돈하고, 종이 하단에 인쇄된 결재란의 네모 칸 안에 상사의 결재 도장이 반듯하게 찍히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절의 그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살아가는 것.

 

남들이 정해준 가이드라인에 정확히 발을 맞추어 한 치의 삐져나옴도 없이 걸어가는 것.

 

적당한 연차에 대리로 승진하고, 매달 꼬박꼬박 적금을 붓고, 서울 변두리 아파트의 청약 가점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정답이며, 사회가 허락한 유일무이하고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게 평화인 줄 알았지.'

 

우진은 연필을 쥔 손가락 끝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흑연 심이 단단한 종이 표면을 짓누르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토해냈다.

 

자신의 정수리 위에 어떤 색의 도형이 떠 있는지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남들과 똑같은 무기력한 백색 네모를 띄우고 잿빛 아스팔트 위를 유령처럼 부유하던 6년의 회사 생활.

 

매일 아침 테헤란로 횡단보도 앞에 줄지어 서서 신호등의 파란불이 켜지기만을 멍하니 기다리던 수천, 수만 직장인들의 피로에 찌든 얼굴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생기를 잃은 채 흐릿했고, 어깨는 보이지 않는 짐에 짓눌려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의 머리 위에 무거운 사각의 틀을 이고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왜 이 길을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거대한 시스템이 닦아놓은 보이지 않는 아스팔트 레일 위를 기차처럼 달릴 뿐이었다.

 

그 레일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발을 헛디디는 순간, 패배자라는 낙인과 함께 사회적 파멸이라는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원초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진 역시 그 무리 속에서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부품이었다.

 

만약 15년 전의 봉인이 풀려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날 아침 지하철 2호선 역삼역 승강장에서, 죽음을 앞두고 붉게 회전하던 대기업 임원의 그 섬뜩한 세모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도 태성C&I 14층 구석의 파티션 칸막이에 처박힌 채, 부서장의 눈치를 살피며 엑셀 테두리의 굵기를 조절하고 있었을 것이 뻔했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 영혼의 질식이었는지를, 마침내 사각의 틀을 깨부수고 바깥으로 걸어 나온 지금에야 비로소 온몸의 감각으로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4. 아버지의 흉터

 

우진은 쥐고 있던 연필을 잠시 멈추고, 왼손을 천천히 들어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더듬었다.

 

성긴 머리카락 사이로 만져지는 살갗 아래, 약 4센티미터 길이로 가느다랗게 패어 있는 굳은살 같은 수술 흉터가 손끝에 걸렸다.

 

그것은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네모 프로젝트와 넥스트 큐브라는 거대 시스템의 충실한 꼭두각시이자 생체 단말로 기획되었음을 증명하는 잔인한 낙인이었다.

 

K-07.

 

미등록 프로토타입.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우진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뇌간과 시신경에 강제로 이식된 생체 제어 칩에 지배당한 채, 자아와 감정을 모두 거세당하고 시스템의 명령만을 수행하는 기계화 감시관이나 암살 병기로 자라났을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끔찍한 운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수석연구원이라는 찬란한 지위도,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인생 궤도 시뮬레이션의 영광도 모두 내던진 채,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머리에 직접 외과 메스를 들이댔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그 참혹한 고통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관자놀이를 가르고 뇌간에 깊숙이 박혀 있던 잔인한 칩을 제 손으로 뜯어냈다.

 

신경 궤도 절제술.

 

그 가혹한 대가로 우진은 일곱 살 이전의 모든 유년기 기억을 인화지가 타버린 것처럼 하얗게 잃어버려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1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역삼역 지하 7층 어둠 속에 파묻힌 차가운 유리 챔버 속에 갇혀 뇌간과 척수에서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를 연산하는 생체 배터리로 착취당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날 이 좁은 네모 안에 가두지 않으려고, 그 지옥 같은 어둠을 홀로 견뎠던 거야.'

 

우진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게 달아올랐다.

 

충북 제천의 깊은 산자락, 소나무 숲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목조 가옥에서 마주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전자기기도, 컴퓨터도 없는 그 소박한 연구실에서,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노란 격자 노트 위에 흑연 연필로 떨리는 손을 놀리며 통계 숫자를 채워 넣던 아버지 강정호의 굽은 등.

 

어깨에 총상을 입고 15년 만에 아들의 손을 맞잡았던 아버지는,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우진에게 참회의 말을 건넸었다.

 

"우진아, 내가 어리석었다. 통계라는 학문은 인간을 통제하고 규격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어. 세상의 수많은 오차와 실패, 그리고 인간의 나약하고 불완전한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따뜻하게 보듬기 위한 것이었단다."

 

그 눈물은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 같은 통제 시스템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었고, 정해진 답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숭고한 헌사였다.

 

그런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가며 사각의 감옥에서 꺼내준 자신이었건만, 우진은 서른두 살의 성인이 될 때까지 스스로 또 다른 사각의 벽을 쌓아 올린 채 그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다.

 

회사라는 견고한 틀, 직급이라는 편리한 핑계,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이라는 숫자의 굴레.

 

그 사각의 안락함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둔 채,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되찾아준 소중한 자유를 무의미하게 방치해 왔던 것이다.

 

백지 위에 그려진 사각형의 테두리가 우진을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네 개의 모서리는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닫혀 있었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거부하고, 낯선 가능성의 침입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고립의 기하학.

 

그것이 바로 지난 32년 동안 강우진이라는 인간을 규정해 왔던 궤적의 적나라한 민낯이었다.

 

5. 파열의 전조

 

스르륵.

 

작업실 창가에 걸려 있던 얇은 광목 커튼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흔들리며 마른 소리를 냈다.

 

평온하고 따스하던 실내의 공기 중에, 아주 미세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기압의 떨림이 번져나갔다.

 

종이 위에 머물러 있던 우진의 손끝이 일순 굳어졌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도형 관찰 능력도, 0.3초 뒤의 미래를 내다보던 푸른 잔상의 변화 감지도 오리진 코어의 붕괴와 함께 완전히 소멸했건만,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뼛속까지 각인된 인간 본연의 육감은 여전히 서늘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기계적인 센서나 칩의 반응이 아니었다.

 

피부의 솜털과 모공, 그리고 척추를 타고 흐르는 원초적인 직관이 감지해 내는 위험의 냄새였다.

 

당산철교 하부 변전 시설.

 

15만 볼트의 초고압 순환선 전력을 흡수한 채 서울 도심의 어둠 속으로 숨어든 1세대 피실험체들.

 

백도현, 그리고 유진아.

 

그들은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시절, 뇌세포가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규격 부적합 결손체'라는 낙인이 찍힌 채 화학적 동면 챔버에 산 채로 매몰되었던 비극의 희생자들이었다.

 

오르비스 코어가 파괴되고 세상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자유를 되찾아 환호할 때, 15년 만에 차가운 유리관을 깨고 나온 그들이 마주한 것은 축복이 아니었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청춘 15년을 통째로 도둑맞았다는 형언할 수 없는 박탈감과, 세상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뿐이었다.

 

'혼자만 자유를 누리는 대가는 잔혹할 것이다.'

 

상도동 작업실의 강화유리창을 인과율 압축 충격파로 산산조각 내며 남겨두었던 백도현의 서늘한 경고 문구.

 

그리고 작업실 계단 바닥에 뒹굴며 차가운 살기를 뿜어내던 동면 챔버의 티타늄 밸브 파편.

 

그들은 시스템이 붕괴하고 남겨진 테헤란로 지하 6층의 매몰지 잔해 속에서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을 기어이 건져 올렸다.

 

중앙 코어가 소각될 당시 흡수했던 15년 치의 왜곡된 결손 엔트로피와 파멸의 찌꺼기들.

 

그 가공할 에너지를 15만 볼트의 초고압으로 완충한 채, 그들은 지금 서울 도심 한복판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놈들은 어디를 노리고 있는가.'

 

우진은 백지 위에 그려진 사각형을 묵묵히 응시하며 서늘하게 가라앉은 이성으로 생각을 굴렸다.

 

단순한 도로나 변전소, 혹은 무차별적인 인명 살상이 그들의 최종 목적일 리 없었다.

 

백도현이 남긴 모든 단서와 서명 [PROJECT NEMO : EXCLUSION 01]은 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들을 가두었던 시스템의 상징적인 장소.

 

그리고 시스템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의 위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교차하는 공간.

 

그들의 최종 목표는 분명했다.

 

테헤란로의 폐허, 혹은 수많은 인간이 일상의 궤도를 맹목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서울 중심부의 거대한 다중 밀집 시설.

 

'너희는 아직도 그 15년 전의 차가운 챔버 속에 갇혀 있구나.'

 

우진은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백도현 일행 역시 시스템이 낳은 가장 불행한 피해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시스템의 족쇄를 끊어낸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옭아매었던 사각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파편을 손에 쥐고, 그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무고한 세상을 향해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그저 증오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사각 감옥에 스스로를 영원히 가두어버린 비극적인 광기에 불과했다.

 

그들이 뿜어내는 서늘하고 파괴적인 복수의 기운이, 저 멀리 한강 너머 강북의 빌딩 숲 사이에서 먹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6. 손끝에 남은 무게

 

우진은 연필을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흑연 심을 쥐고 있던 손에 단단히 힘을 주며, 백지 위에 새겨진 사각형의 중심부를 똑바로 응시했다.

 

종이의 거칠고 질긴 촉감이 연필 자루를 타고 손목과 팔꿈치, 그리고 그의 가슴 안쪽으로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비록 기적과도 같았던 초인적인 능력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그 빈자리에는 결코 부서지지 않을 새로운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작업실 바닥에 뒹구는 참나무 토막을 깎아 자신의 땀으로 완성해 낸 첫 번째 원목 의자.

 

골목길 건너편 슈퍼 평상에서 갓 쪄낸 시루떡을 건네며 환하게 웃어주던 복덕방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

 

비탈길에서 넘어질 뻔한 자전거의 핸들을 스스로 꽉 움켜쥐며 씩씩하게 일어서던 소년 민호의 활기.

 

조금 전 작업실 앞 벤치를 만지작거리며

"아저씨는 커서 뭐가 됐어요?"

 

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던 꼬마 준우의 반짝이던 눈망울.

 

그리고 시스템의 각본이 사라진 불확실한 세상을 두려워하기보다 당당하게 끌어안으며 르포 《선택할 권리》를 펴낸 한서연 기자의 단단한 눈빛.

 

그 모든 소박하고 인간적인 순간들이, 우진의 내면에 그 어떤 알고리즘보다 견고한 삶의 기둥을 세워주고 있었다.

 

그것은 슈퍼컴퓨터의 차가운 0과 1의 연산식이 만들어낼 수 없는 기적이었다.

 

불완전한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부딪히고,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끝내 손을 내밀어 맞잡을 때 피어나는 생명의 온기였다.

 

우진은 흑연 연필을 들어 백지 위의 사각형 테두리를 한 번 더 강하게 덧칠했다.

 

서걱,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짙은 흑연의 광택이 네모난 윤곽선 위로 덧씌워지며 선명한 어둠을 드리웠다.

 

'이것이 나의 시작이었다.'

 

부정할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는 자신의 32년 세월이었다.

 

그 닫힌 네모 안에서 숨죽이며 고통받아 보았기에, 그 껍질을 깨고 터져 나오는 파동의 아픔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각의 벽 안에서 32년을 견뎌내었기에, 마침내 그 벽이 무너져 내렸을 때 마주한 불확실성의 허공이 얼마나 눈부시고 광활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긍정할 수 있었다.

 

우진은 호흡을 깊게 들이쉬며 연필 끝을 사각형의 오른쪽 빈 여백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아직 이 백지 위에는 채워 넣어야 할 수많은 궤적들이 남아 있었다.

 

평온하고 닫혀 있던 일상의 네모를 사정없이 깨부수며 솟구쳐 올랐던 날카로운 위기와 갈등의 기억들.

 

삶의 방향을 급격하게 꺾어놓으며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사회적 파멸을 몰고 왔던 검붉은 세모의 파동들.

 

그리고 그 잔인한 인과율의 족쇄마저 끝내 밀어내며 마침내 열어젖혔던 무한한 가능성의 원환까지.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모든 도형을 온전히 마주하고 종이 위에 새겨 넣지 않고서는, 저 도심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백도현의 일그러진 증오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그들을 구원하고, 이 도시가 간신히 되찾은 불완전한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우진은 자신이 걸어온 모든 궤적을 이 하얀 켄트지 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해 나가야 했다.

 

창밖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작업실의 낡은 나무 덧문을 덜컹거리며 흔들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이 한 뼘 더 길게 늘어나 우진의 단단한 발치를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강우진은 연필을 쥔 손가락에 다시 한번 깊숙이 힘을 주었다.

 

날카롭게 각이 선 흑연의 끝이, 백지의 텅 빈 공간을 향해 서서히 다음 궤적을 그릴 각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