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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00화

아이의 질문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톱밥과 대패의 결

 

대패날이 참나무 판자의 표면을 밀고 나갈 때마다 얇고 투명한 나무 칼깃이 사각거리며 말려 올라왔다.

 

비단결처럼 곱게 깎인 목재의 단면 위로 오후의 맑은 햇살이 내려앉으며 은은한 황갈색 결을 드러냈다.

 

강우진은 대패를 쥔 양손의 힘을 서서히 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나무의 서늘하고 정직한 감촉이 손바닥의 굳은살을 차분하게 어루만졌다.

 

공기 중에 흩날리는 쌉싸름한 톱밥 냄새와 기름 먹인 물푸레나무의 향내가 코끝을 가득 채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토록 깊게 숨을 들이쉬는 순간조차 사방을 메우던 검은 실선들과 회전하는 도형들의 잔상 때문에 관자놀이가 찢어질 듯 욱신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신경을 찌르던 날카로운 안압도, 뇌간을 바늘로 쑤시듯 갉아먹던 4센티미터 수술 흉터의 발열도 거짓말처럼 씻겨 나간 상태였다.

 

우진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어 보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피부의 흉터 자국은 그저 어릴 적 지나간 오래된 수술의 흔적일 뿐, 더 이상 시스템의 역위상 패킷을 수신하거나 결손 엔트로피의 파동에 반응해 떨리지 않았다.

 

"나무라는 건 참 정직해."

 

우진은 혼잣말을 낮게 읊조리며 대패를 작업대 구석의 펠트천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인위적으로 궤도를 계산해 각도를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결을 따라 칼을 대면 나무는 자신이 자라온 세월만큼 솔직한 형태를 내어주었다.

 

어떤 부분은 비바람을 견디느라 옹이가 박혀 단단했고, 어떤 부분은 햇빛을 듬뿍 받아 유연하게 휘어졌다.

 

옹이가 있다고 해서 결함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거칠고 불규칙한 흔적들이 모여 다른 어떤 가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무늬를 완성하고 있었다.

 

우진은 대패밥을 손으로 쓸어내며 작업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상도동 147번지 낡은 2층 주택의 1층.

 

과거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던 오래된 참기름집이었던 자리는 이제 크고 작은 대패와 끌, 정반과 손톱들이 질서정연하게 걸린 소박한 목공 작업실로 탈바꿈해 있었다.

 

바깥 유리창 너머로는 초여름의 푸른 나뭇잎들이 완만한 바람을 타고 사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새로 맞춘 두꺼운 방범 유리는 며칠 전 백도현이 남기고 간 인과율 충격파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채 맑고 투명한 햇살만을 투과시켰다.

 

작업실 문지방을 넘어서자,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야외 원목 벤치가 길가 한쪽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진은 벤치 모서리를 가볍게 쓸어본 뒤 그 위에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기대자 잘 건조된 참나무가 체중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골목길 건너편 삼거리 슈퍼 평상에서는 복덕방 할머니가 커다란 양은 대야를 앞에 두고 콩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그 옆 세탁소에서는 증기 다리미의 하얀 김이 칙칙 소리를 내며 골목길로 뿜어져 나왔다.

 

어느 누구의 머리 위에도 더 이상 10센티미터 상공을 맴돌던 기하학적 도형은 존재하지 않았다.

 

매일 똑같은 궤도를 반복하던 백색 네모도, 삶의 균열과 파멸을 예고하며 붉게 요동치던 세모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뻗어 나가던 검은 꼭두각시 줄선도 없었다.

 

하늘은 그저 맑고 투명한 파란색이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리듬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2. 골목길의 바람과 궤적 없는 세상

 

"우진 총각! 벌써 점심때 다 됐어. 대충 털고 밥 챙겨 먹어!"

 

슈퍼 평상에서 콩나물 꼬리를 뚝뚝 떼어내던 복덕방 할머니가 고개를 들며 우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주름진 눈가에 번지는 웃음은 어떠한 알고리즘의 보정도 거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온기였다.

 

"네, 할머니. 이것만 조금 더 다듬고 먹으려고요."

 

우진이 소리 내어 답하자, 할머니는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혀를 찼다.

 

"젊은 사람이 밥을 제때 챙겨 먹어야 힘을 쓰지. 어제 쪄둔 감자 남은 거 있으니까 좀 이따 건너와. 설탕 푹 찍어 먹으면 꿀맛이야."

 

"감사합니다. 이따 꼭 들를게요."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태성C&I의 만년 대리로 근무하던 시절, 그의 점심시간은 사내 메신저의 호출과 최적화된 경로 추천 앱의 알림에 쫓겨 허겁지겁 지나가곤 했다.

 

몇 번 게이트를 통과해야 30초를 아끼는지, 구내식당의 배식 줄이 몇 분에 가장 짧아지는지조차 스마트폰 화면 속 사각 격자가 친절하게 지시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우진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숟가락을 들었고, 나무를 더 깎고 싶으면 땀을 닦으며 대패를 잡았다.

 

누군가 말을 건네오면 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었으며, 이웃이 건네는 감자 한 알의 온기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것은 효율이라는 이름의 감옥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불완전함의 축복이었다.

 

골목길 언덕배기에서 따르릉하는 자전거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가다 배수구 뚜껑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중학생 민호가 친구와 나란히 페달을 밟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야, 내가 먼저 슈퍼 도착하면 아이스크림 네가 쏘는 거다!"

 

"어림도 없지! 내가 지난주에 체육대회 계주 1등 한 거 잊었냐?"

 

아이들의 목소리가 맑은 공기를 가르며 메아리쳤다.

 

우진은 페달을 밟는 소년들의 모습을 유심히 응시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세모의 각도와 푸른 미래 잔상을 읽어내느라 시신경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저 자전거의 바퀴가 몇 도 각도로 꺾일지, 0.3초 뒤에 돌부리에 걸릴지 아닐지를 강박적으로 계산하려 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우진의 눈에는 그저 땀을 흘리며 웃고 있는 두 아이의 생생한 표정만이 보였다.

 

민호는 코너를 돌며 살짝 비틀거렸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핸들을 꽉 쥐고 중심을 잡으며 부드럽게 감속했다.

 

배수구 뚜껑을 능숙하게 피해 나간 자전거는 슈퍼 앞 평상 옆에 안전하게 멈춰 섰다.

 

"할머니! 쭈쭈바 두 개 주세요! 포도 맛으로요!"

 

"아이고, 녀석들. 땀범벅이 돼서 왔네. 조심해서 타라니까."

 

할머니가 구수한 목소리로 타박하며 아이스크림 냉동고 문을 열어젖혔다.

 

실패를 경험하고, 그 실패의 기억을 온몸으로 기억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시스템의 완벽한 사전 예방 프로토콜이 빼앗아 갔던 인간의 가장 위대한 본능이었다.

 

그때, 헐렁한 반팔 셔츠에 낡은 모자를 푹 눌러쓴 꼬마 아이 하나가 골목길 어귀에서 멈칫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대여섯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였다.

 

아이의 손에는 유치원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노란색 종이 바람개비가 들려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멈춰 있는 바람개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는, 작업실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천천히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

 

3. 맑은 눈동자의 방문자

 

아이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작은 운동화 코끝에 묻은 흙먼지와 무릎에 붙은 네모난 캐릭터 밴드가 아이의 분주했던 하루를 짐작하게 했다.

 

우진은 벤치에서 몸을 살짝 숙이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의 정수리 위를 무의식적으로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도, 차가운 백색의 윤곽도, 허공으로 치솟은 조종 줄도 존재하지 않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가늘고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만이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그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풍경이 우진의 가슴속 깊은 곳을 묵직하게 울렸다.

 

15년 전, 자신이 일곱 살이던 시절.

 

아버지가 관자놀이에 메스를 대고 칩을 도려내기 전까지, 자신의 머리 위에도 저 아이처럼 맑은 하늘만이 머물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안도감이 교차하며 입술 끝에 희미한 온기가 맴돌았다.

 

"안녕?"

 

우진이 먼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가 허공의 먼지처럼 가라앉자, 아이는 손에 쥔 바람개비를 등 뒤로 슬그머니 감추더니 벤치 앞 1미터 거리에 우뚝 섰다.

 

"아저씨."

 

아이의 발음은 아직 혀가 덜 풀린 듯 약간 뭉개졌지만 또렷했다.

 

"응?"

 

"아저씨는 여기서 뭐 해요?"

 

아이는 작업실 문 너머로 보이는 톱밥 더미와 벽에 걸린 커다란 톱들을 가리켰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낯설고 신기한 물건들투성이인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나무를 깎고 있어. 의자도 만들고, 책상도 만들고,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만들고."

 

우진이 자신이 앉아 있는 벤치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벤치 모서리로 다가왔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뻗어 참나무의 매끄러운 단면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나무가 엄청 보들보들해요. 우리 집 식탁은 쇠 냄새 나는데."

 

"그건 쇠로 만든 거라 그렇고, 이건 숲에서 자란 나무로 만든 거라서 그래. 손으로 오래 만져주면 따뜻해진단다."

 

우진의 설명에 아이는 신기한 듯 손바닥 전체로 벤치를 쓱쓱 문질렀다.

 

아이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는 어떠한 계산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며칠 전 여의도 대검찰청으로 향하며 차분한 결의를 다지던 한서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우진 씨, 우리가 되찾은 건 완벽한 세상이 아니에요. 그저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하루들이죠.'

 

서연의 말이 옳았다.

 

오르비스 양자 코어를 부수고 5,100만 명의 머리 위에서 꼭두각시 줄을 끊어낸 대가로 도래한 세상은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었다.

 

백도현을 비롯한 1세대 피실험자들은 여전히 15년 전의 증오를 품은 채 도심 어딘가에서 완충된 축전 유닛을 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언제 어느 교차로에서 또 다른 위기가 터져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아이는, 그리고 이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정해진 각본에 따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처럼 살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의 미래는 넥스트 큐브의 슈퍼컴퓨터가 지정한 'Class-D 희생 노드' 따위로 낙인찍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이능을 불태우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온 선택은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는 한참 동안 벤치를 만지작거리더니, 무언가 골똘히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우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아주 천진난만하고도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응?"

 

"아저씨는 커서 뭐가 됐어요?"

 

4. 아이의 질문, 어른의 대답

 

아주 단순하고도 티 없는 질문이었다.

 

어린 시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실에서 누구나 한 번쯤 받아보았을 법한, 장래 희망을 묻는 흔하디흔한 물음.

 

그러나 그 한마디가 우진의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파문을 일으켰다.

 

'커서 뭐가 됐냐고.'

 

우진은 대답 대신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친 대패질로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나무 가시가 박혔다 빠져나간 자잘한 흉터들, 그리고 손톱 밑에 낀 거무스름한 톱밥 가루.

 

지난 수년간 그는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대기업 계열사인 태성C&I에 입사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성공한 회사원'이 되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테헤란로의 높은 빌딩 숲을 오가며 매달 정해진 날짜에 입금되는 월급을 확인할 때, 그는 자신이 안전한 네모(□)의 규격 속에 안착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강우진의 삶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이 짜놓은 거대한 사회적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정해진 시간에 부품처럼 굴러가던 기계의 생존 방식에 불과했다.

 

그 후 이능을 각성하고 머리 위의 도형들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파멸을 피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도망자'가 되었고,

배후 세력의 실체를 파헤치며 마침내 오리진 코어를 소각하던 순간에는 세상을 구원해야만 하는 가혹한 '특이점'이자 '아웃라이어'로 살아야 했다.

 

대기업 팀장 자리도 거절했고, 정부가 제안한 특별한 직함도 사양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우진은 과연 무엇이 된 것인가.

 

목수인가?

 

아니면 평범한 동네 주민인가?

 

아이는 우진이 말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는요, 어른이 되면 다 뭔가가 정해진대요. 우리 아빠는 회사원이고요, 우리 삼촌은 경찰관이래요. 유치원 선생님은 저보고 커서 멋진 의사가 되라고 했어요. 아저씨는 멋진 나무 의사예요?"

 

아이의 순진무구한 비유에 우진의 입가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비죽 터져 나왔다.

 

"나무 의사?"

 

"네. 아까 벤치 만져주면서 따뜻하게 고쳐줬잖아요."

 

우진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아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완전히 수평을 이루었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는 오후의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 어떤 수식도, 기하학적 족쇄도 없는 온전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네? 아저씨는 어른인데 아직도 몰라요?"

 

아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어른이란 모름지기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이미 무언가로 완성되어 있는 존재라고 믿는 아이 특유의 순수한 충격이었다.

 

우진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작은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모든 게 딱 정해지는 건 아니거든. 어제는 대패로 나무를 깎는 목수였고, 오늘은 너한테 벤치를 소개해 주는 동네 삼촌이고, 내일은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어. 나도 내가 나중에 진짜 뭐가 될지는 아직 잘 몰라."

 

"그럼 불안하지 않아요? 정해진 게 없으면 무섭잖아요."

 

아이의 입에서 나온 '정해진 게 없으면 무섭다'는 말에 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오르비스 코어가 파괴되었을 때, 광화문과 테헤란로 거리로 뛰쳐나와 '안전한 네모를 돌려달라'고 절규하던 군중들이 내뱉었던 공포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닿아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정해지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한다.

 

누군가 가야 할 길을 지도처럼 그려주고, 언제 돌부리가 나타날지 미리 경고해 주기를 바란다.

 

서지훈은 바로 그 나약함을 파고들어 도시 전체를 거대한 사각 사육장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었다.

 

우진은 아이의 손에 들린 종이 바람개비를 가리켰다.

 

"그 바람개비, 지금은 안 돌지?"

 

아이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 바람이 안 불어서요."

 

"하지만 네가 앞으로 힘껏 달리면 어떻게 될까?"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눈을 반짝였다.

 

"돌아요! 제가 빨리 뛰면 엄청 쌩쌩 돌아요!"

 

"그래. 정해진 바람을 기다리지 않고 네가 직접 달리면 바람개비는 돌기 시작해. 인생도 똑같아. 정해진 답이 없다고 해서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우진은 햇살을 듬뿍 머금은 작업실 안쪽의 원목 판자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매일매일 내가 직접 만들고 있거든."

 

5. 백지 위의 가능성

 

"매일매일 만든다고요?"

 

아이는 '만든다'는 단어에 흥미를 느낀 듯 바람개비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응. 아침에 눈을 떠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어떤 사람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나무를 어떻게 깎을지 매일매일 내가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직접 만들고 있어. 어제 실수했다고 해서 오늘 망치는 것도 아니고, 오늘 넘어진다고 해서 내일 못 달리는 것도 아니야."

 

우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깊고 단단했다.

 

그것은 15년 동안 자신을 얽어맸던 기하학의 감옥을 부수고 걸어 나온 자만이 전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이었다.

 

인간은 완성된 조각상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네모나 세모로 규격화된 채 정해진 궤도를 따라 굴러가는 부품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과 의지로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조각해 나가는 존재였다.

 

아이는 우진의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 눈치였지만, 우진의 표정에 담긴 따뜻한 확신만큼은 오롯이 전해받은 듯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도 매일매일 만들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너는 오늘 집에 가서 뭘 만들고 싶은데?"

 

"음…… 공룡이요! 크레파스로 엄청 커다란 티라노사우루스를 그릴 거예요!"

 

"멋지네. 도화지 밖으로 삐져나갈 만큼 아주 크게 그려봐."

 

"네!"

 

아이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발을 굴렀다.

 

그때, 골목길 저편에서 한 아이 엄마의 다급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우야! 어디 갔나 했더니 거기서 뭐 해? 얼른 손 씻고 밥 먹어야지!"

 

복덕방 앞을 지나 뛰어오던 젊은 엄마가 벤치 앞에 멈춰 서며 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더니, 벤치 앞에 꿇어앉아 있던 우진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머, 죄송합니다. 애가 귀찮게 해드렸죠? 혼자 밖으로 뛰어나와서 한참 찾았어요."

 

우진은 무릎을 털고 천천히 일어서며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주 씩씩하고 멋진 친구던데요. 바람개비 이야기 재미있게 나눴습니다."

 

우진의 단정한 대답에 엄마는 안도한 듯 환하게 웃었다.

 

엄마의 머리 위에도, 아이의 머리 위에도 어떠한 인위적인 통제선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식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평범한 인간의 마음만이 맑은 공기 속에 온전히 피어나고 있었다.

 

"자, 준우야. 아저씨한테 인사드려야지."

 

엄마가 아이의 등을 토닥이자, 아이는 배꼽에 손을 얹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벤치 고쳐줘서 고맙습니다!"

 

"그래, 준우야. 조심해서 가고, 공룡 멋지게 그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통통 발을 구르며 골목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에 쥔 노란색 종이 바람개비가 아이가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경쾌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파르르거리며 회전하는 바람개비의 날개가 초여름 햇살을 받아 노란 잔상을 허공에 흩뿌렸다.

 

그것은 시스템이 강제로 돌리던 붉은 세모의 살인적인 회전이 아니었다.

 

아이가 스스로 딛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도 생명력 넘치는 회전이었다.

 

우진은 두 모자의 뒷모습이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배웅했다.

 

바람이 살랑 불어와 우진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관자놀이에 남은 흉터 자국이 시원한 바람에 기분 좋게 식어갔다.

 

'나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매일매일 내가 만들고 있거든.'

 

자신이 아이에게 건넸던 대답이 가슴속에서 잔잔하게 되울렸다.

 

그것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었다.

 

정해진 운명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가장 정직한 선언이었다.

 

우진은 돌아서서 작업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불태워버린 관찰 수첩 대신, 방금 전 서랍에서 꺼내둔 새하얀 스케치북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격자선도, 눈금도 그어져 있지 않은 텅 빈 백지였다.

 

6. 숲의 기억과 테이블 위의 전화

 

작업대 앞 나무 의자에 앉은 우진은 흑연 연필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잡히는 연필의 단단한 감촉이 묘하게 손에 감겼다.

 

과거의 그는 이 손으로 수많은 궤도와 좌표, 인과율 결손 수치와 엔트로피 보존 법칙을 적어 내려갔었다.

 

지하철 2호선 승객들의 머리 위에 뜨던 도형의 각도를 기록했고, 넥스트 큐브의 꼭두각시 줄을 끊어내기 위한 역위상 패킷을 계산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계산식은 잿더미가 되어 주철 난로 속에서 사라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뿐이었다.

 

무엇을 그려야 할까.

 

우진은 연필 끝을 백지 위에 가볍게 대었다.

 

선 하나를 긋는 것조차 온전한 자신의 의지여야 했다.

 

누군가 지시하지도, 시스템이 유도하지도 않는 순수한 선택.

 

그 순간, 작업대 구석에 놓여 있던 구형 아날로그 무선 전화기가 요란한 벨 소리를 울리며 진동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정적을 깨뜨리는 기계음이었지만, 그것은 전파 차폐망이나 비상 주파수를 타고 흐르던 암호화된 신호가 아니었다.

 

일반 유선 전화망을 통해 걸려 온 지극히 일상적인 통화였다.

 

우진은 흑연 연필을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상도동 작업실입니다."

 

- 우진 씨, 나예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피로 속에서도 날카로운 생기를 잃지 않은 한서연 기자였다.

 

배경으로 취재 데스크의 타자기 소리와 기자들의 분주한 대화가 섞여 들려왔다.

 

"서연 씨. 목소리가 많이 바빠 보이네요."

 

- 대검찰청 특수본에서 방금 1차 브리핑을 마쳤거든요.

 

민경택 전 차장이 관리하던 비밀 금고에서 추가 차명 계좌가 서른 개 넘게 발견됐어요.

 

여야를 막론하고 연루된 정관계 인사들이 줄줄이 소환될 예정이에요.

 

신문사 1면 전체를 다시 갈아엎느라 정신이 없네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거대한 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가는 저널리스트 특유의 묵직한 사명감이 배어 있었다.

 

우진은 창밖의 푸른 잎사귀를 바라보며 조용히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고생 많으시네요. 몸은 좀 괜찮아요?"

 

- 네, 잠을 좀 못 자서 눈이 뻑뻑하긴 한데…… 이상하게 머리는 예전보다 훨씬 맑아요.

 

참, 아침에 당산철교 변전소 조사 결과가 나왔어요.

 

서연의 톤이 한층 낮고 진중해졌다.

 

골목길의 평화로운 정적 위로, 여전히 잔존해 있는 현실의 서늘한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 특수본 감식반이 현장에서 수거한 고압 방전 슬러지를 분석했는데, 우진 씨 예상대로였어요.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 6층에서 도난당했던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의 내부 냉매 성분과 정확히 일치해요.

 

15만 볼트 전력을 거의 98%까지 흡수해서 충전한 상태로 빠져나갔대요.

 

"15년 치의 결손 엔트로피가 완충된 상태군요."

 

- 맞아요.

 

전파 측정반이 잔류 고주파 펄스를 추적하고 있긴 한데, 놈들이 이동 경로에 구형 차폐 도료를 뿌리면서 이동하고 있어서 신호가 자꾸 끊겨요.

 

하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잡혔어요.

 

강북 쪽…… 다중 밀집 시설이 밀집된 도심 중심부로 향하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로 종이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말을 이었다.

 

- 백도현이라는 자, 15년 동안 화학적 동면 챔버에 갇혀 있으면서 세상에 대한 극단적인 피해의식과 복수심만 키워온 모양이에요.

 

어제 당산 변전실 벽에 남겼던 서명, [PROJECT NEMO : EXCLUSION 01]…… 기억하죠?

 

"잊을 리가 없죠. 시스템의 궤도 밖으로 배제되었던 자들의 원망이니까요."

 

- 네.

 

놈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15년의 고통을, 자유를 되찾았다고 기뻐하는 도심 한복판에 그대로 쏟아붓겠다는 생각이에요.

 

축전 유닛을 일시에 기폭시키면 인근 수 킬로미터 반경의 전력망이 연쇄 쇼트를 일으키고, 고밀도 인과율 충격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정신적 공황에 빠질 수 있어요.

 

우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초능력이 사라진 지금, 그는 더 이상 날아오는 충격파를 척력으로 밀어내거나 0.3초 뒤의 미래 궤적을 눈으로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15년간 시스템의 본질과 싸워오며 축적한 이해와 직관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의지로 지켜내기로 결심한 소중한 사람들과 이 평범한 일상이 있었다.

 

"서연 씨. 특수본과 전파 측정반에 전해주세요. 놈들은 단순히 전력망을 마비시키려는 게 아닐 겁니다."

 

-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도현은 상도동 작업실 문앞에 티타늄 밸브 파편과 쪽지를 남기고 갔어요.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라고요. 놈이 원하는 건 단순한 정전이나 혼란이 아닙니다. 자신이 시스템에 의해 부정당했던 것처럼, 세상을 가장 극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를 노릴 겁니다."

 

- 상징적인 장소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과거 시스템의 통제가 가장 깊게 뿌리내렸던 곳. 그리고 지금은 자유의 상징이 된 장소겠죠."

 

서연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 설마…….

 

"추적선이 잡히면 바로 연락 주세요.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 우진 씨,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마요.

 

이제 당신 머리 위에는 아무런 방패도 없잖아요.

 

다치면…… 되돌릴 수 없어요.

 

서연의 목소리에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우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엷게 미소 지었다.

 

"알고 있어요. 나 혼자 싸우지 않아요. 서연 씨도 있고, 태호도 있고, 특수본도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 ……네.

 

취재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작업실로 갈게요.

 

통화가 끊어지고, 수화기 너머에서 뚜- 뚜- 하는 단조로운 신호음이 흘렀다.

 

우진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작업실 안에는 다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창틀을 흔들며 은은한 톱밥 향기를 실어 날랐다.

 

위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이 정해둔 불가피한 파멸의 각본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들이 연대하여 극복해 나가야 할 불확실한 삶의 과제였다.

 

우진은 다시 작업대 위의 새하얀 스케치북을 내려다보았다.

 

백지 위에 연필을 쥐었다.

 

아이의 질문이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아저씨는 커서 뭐가 됐어요?'

 

'매일매일 내가 만들고 있거든.'

 

우진의 입가에 단단한 결의가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새하얀 종이 위에 아주 오랜만에, 그러나 가장 정직한 손길로 첫 번째 선을 긋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