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세모의 경고
1. 잠들지 못한 밤과 잔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우진은 눈이 번뜩 뜨였다.
낡은 빌라의 거친 벽지와 천장 모서리에 드리운 잿빛 여명이 시야를 서늘하게 채웠다.
밤새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베갯잇 때문에 뒷목이 끈적거리고 척추가 오들오들 떨렸다.
눈을 감아도, 떠도 완벽한 휴식은 없었다.
눈꺼풀을 내리는 순간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수십 개의 사각형과, 그 차가운 기하학의 군집 속에서 유독 핏빛을 뿜으며 날카롭게 회전하던 삼각형의 잔상이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사고 발생 시각: 12시 01분경 추정.’
그리고 그 죽음의 속보가 스마트폰 화면에 푸시 알림으로 전송된 시각은 오후 11시 58분.
실제 참사가 벌어지기 3분 전에 언론사의 서버에 기사가 먼저 등록되었다는 그 3분의 시간 오차는, 지워지지 않는 뜨거운 낙인처럼 우진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후벼 파고 있었다.
단순한 기자의 입력 실수였을까?
아니면 거대 통신망 전산 시스템의 일시적인 동기화 오류였을까?
우진의 이성적인 뇌는 끝없이 현실적인 핑계를 찾아내려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영혼의 직관은 그 모든 비겁한 변명을 차갑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지하철을 빠져나가던 순간 머리 위에서 찢어지듯 울리던 기괴한 주파수 파열음, 그리고 그와 동시에 꼭짓점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미쳐 돌아가던 세모.
그것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다가올 죽음을 오차 없이 미리 가리키는 정확하고도 무자비한 좌표였다.
우진은 침대 매트리스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욕실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낡은 거울 속에는 붉게 핏발이 선 충혈된 눈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핼쑥하게 푹 가라앉은 뺨을 한 서른두 살의 무채색 직장인이 서 있었다.
세면대 수전을 거칠게 틀고 차가운 수돗물을 연거푸 얼굴에 끼얹었다.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메마른 피부를 찔러대자, 겨우 흐릿하던 의식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우진은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내 정수리 위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왜… 나한테는 보이지 않는 거지?"
남들의 머리 위에는 저마다의 운명을 예고하듯 찬란하거나 불길한 형태가 떠다니는데, 왜 유독 자신의 머리 위는 이토록 텅 비어 있는 것일까.
우진은 관자놀이 부근을 불안한 손길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촘촘한 머리카락 속에 깊숙이 숨겨진, 어린 시절의 희미한 흉터 자국이 손끝에 닿았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홀연히 증발해 버리던 그 겨울밤에 생겼다고 어머니가 눈물로 말해주었던 기억의 조각이었다.
손가락 끝이 그 흉터를 살짝 누르는 순간, 뇌간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바늘 수십 개로 안쪽을 후벼 파는 듯한 묵직하고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다시금 발작처럼 꿈틀거렸다.
"큭……."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흉터에서 손가락을 황급히 떼어냈다.
"출근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거울 속의 창백한 자신을 향해 쉰 목소리로 읊조렸다.
무슨 지옥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 사회적 시스템의 톱니바퀴는 굴러가야 했다.
그것이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강우진이라는 인간이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겨우겨우 숨을 쉬며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줄이었으니까.
2. 출근길의 군중과 백색의 행렬
낡은 현관문을 열고 나선 순간, 뺨을 스치는 가을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날카롭게 밀려들었다.
빌라 앞 좁은 골목길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우진은 차마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발끝만 내려다보며, 어젯밤의 그 기괴한 일들이 오롯이 피로와 환각이 빚어낸 단 하룻밤의 광기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 개찰구에 교통카드를 찍는 순간, 그 헛된 희망은 철저하게 산산조각 났다.
삐빅— 정상 처리되었습니다.
개찰구를 통과하는 그 찰나, 시야가 유리알처럼 미세하게 굴절하더니, 플랫폼 인파의 머리 위로 형형색색의 백색 입자들이 순식간에 응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러난 수백 개의 형상들.
□, □, □, □…….
출근길 지옥철을 기다리는 승강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정수리 위에는 예외 없이 반투명한 '네모(□)'가 떠 있었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표정하게 스마트폰을 스크롤하는 대학생의 머리 위에도, 프랜차이즈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피곤한 직장인의 머리 위에도, 아침 신문을 넘기는 노인의 머리 위에도 정확히 똑같은 형태가 머물러 있었다.
그것들은 완벽한 물리적 균형을 이룬 정육면체의 상자처럼, 객차의 흔들림에도 미동도 하지 않고 고요하게 떠 있었다.
마치 세상이라는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나란히 올려진 규격품들처럼, 그 어떤 일탈이나 예외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질서정연하고 차가운 백색의 행렬이었다.
'다들… 저 단단한 네모의 상자 안에 영혼이 갇혀 있어.'
우진은 플랫폼의 차가운 철제 난간을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하얗게 힘을 주었다.
어젯밤 지하철에서 보았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 저 백색 네모를 띄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사고도, 예기치 못한 비극도 겪지 않고 무사히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다면 저 백색 네모는 '안전'을 뜻하는 것인가?
거대한 변화나 돌발적인 위협 없이, 어제와 정확히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을 맞이하는 평범한 '고정된 일상'의 기호란 말인가.
끼이익— 쾅쾅!
굉음을 내며 열차가 진입하자 플랫폼 안으로 퀴퀴한 쇠 냄새와 강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우진은 밀려드는 아침 인파에 속절없이 휩쓸려 전동차 내부로 몸을 욱여넣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승객들 사이에서 수많은 백색 네모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히지도 않은 채 허공에서 묵묵히 겹쳐지고 있었다.
우진은 문가에 끼어 서서, 바로 앞에 선 한 중년 여성의 머리 위에 뜬 네모를 무심히 관찰했다.
도형의 투명한 내부 구조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시선을 바짝 집중하는 그 순간이었다.
지끈—!
오른쪽 관자놀이를 쇠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맹렬한 두통에 우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 뇌수를 가차 없이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도형을 단순히 넓은 시야에 담는 것과, 그 형태의 본질을 분석하려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시선을 깊게 던질수록 두개골 안쪽의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이 몰려왔다.
우진은 황급히 시선을 바닥의 타일로 내팽개치듯 떨궜다.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이마와 목덜미를 적신 차가운 식은땀이 소름으로 변해 돋아났다.
'함부로 들여다봐서는 안 돼…… 위험하다. 내 뇌가 버티지 못해.'
열차는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향해 어두운 지하 터널을 굉음과 함께 질주하고 있었다.
3. 익숙한 지옥, 기획 2팀
테헤란로 한복판에 거대한 위압감으로 솟아 있는 30층짜리 통유리 빌딩.
우진이 매일같이 영혼을 갈아 넣으며 몸담고 있는 대기업 계열사 '태성C&I'의 본사 사옥이었다.
14층 기획조정실의 무거운 방음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복합기의 덜컹거리는 소음과 피로에 찌든 직원들의 분주한 타자 소리가 귓전을 거칠게 때렸다.
"강 대리, 어제도 야근하더니 얼굴이 아주 말이 아니네. 좋은 아침이야."
옆자리에 앉은 김 주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텀블러를 들고 씩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머리 위에도 맑고 투명한 백색 네모가 둥실 떠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김 주임님도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커피 드셨어요?"
"방금 탕비실 다녀오는 길이지. 오늘 오전부터 본부장 실적 보고 건이 잡혀 있어서 사무실 전체가 아주 살얼판이야. 숨도 제대로 못 쉬겠어."
"그러게요. 준비 잘하셔야겠어요."
평범한 대화, 평범하기 그지없는 출근길의 풍경.
우진은 제 자리에 지친 듯 주저앉아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사내 메신저의 알림음과 함께 오늘 처리해야 할 수십 건의 지독한 결재 문서와 엑셀 시트들이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모든 것이 어제와 단 1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투명한 네모들만 제외한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한 정상의 궤도 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우진은 서류철을 정리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환상이라면,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모른 척 버티는 거야.'
그 순간이었다.
사무실 복도 쪽의 두꺼운 유리 자동문이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기획 2팀의 총괄 팀장, 박민재(朴民宰)였다.
마흔둘의 젊은 나이에 이 계열사 최연소 팀장 타이틀을 거머쥐며 초고속 승진을 달리고 있는 인물.
칼같이 다려진 은회색 스트라이프 정장과 날카로운 무테안경, 항상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장착하고 다니던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핏기가 하나도 없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박 팀장이 사무실 중앙 복도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순간, 우진의 시선이 홀린 듯 그의 정수리에 멎었다.
쿵—!
우진의 심장이 흉곽을 부수고 나올 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박 팀장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팀원들의 평온하고 맑은 백색 네모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각을 세운 삼각뿔의 형태, 완벽한 '세모(△)'였다.
4. 칠흑 같은 어둠의 도형
하지만 어젯밤 지하철에서 보았던 대기업 임원의 그 세모와는 결코 결이 달랐다.
어젯밤 남자의 세모는 백색 테두리 안에 옅은 회색빛이 음산하게 섞인 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형태였다.
그러나 지금, 박민재 팀장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세모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칠흑(漆黑)' 그 자체였다.
단순히 빛을 반사하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주변의 밝은 형광등 불빛마저 주변 공간째로 빨아들이듯, 깊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먹물 같은 절대적인 암흑이었다.
그 검은 세모의 표면에는 마치 끈적거리는 타르나 시커먼 원유처럼 불길하고 탁한 기운이 꿈틀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색……? 저건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우진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박 팀장의 머리 위를 멍하게 응시했다.
대체 저 기괴한 색깔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다른 사람들의 도형은 하얗고 투명한데, 박 팀장의 세모만 저토록 짙고 썩은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일까.
형태의 의미를 더 명확히 파악하려 의식을 집중하는 순간, 어김없이 우진의 관자놀이를 두 개로 쪼개는 듯한 극심하고 잔인한 두통이 뇌를 강타했다.
큭……!
우진은 책상 모서리를 두 손으로 꽉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듯 흐려지며, 검은 세모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는 시커먼 실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환각이 보였다.
그 실선들은 박 팀장의 머리통에서부터 시작되어 허공으로 뻗어 나가, 사무실 천장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연결된 꼭두각시의 조종 줄처럼 팽팽하게 매달려 있었다.
"강 대리."
사무실의 공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드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꽂혔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박 팀장이 어느새 우진의 파티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와 그를 매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테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그의 눈빛에는 평소의 거만한 여유 대신, 사지에 몰린 짐승 같은 초조함과 차가운 살의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네, 팀장님."
우진은 터질 것 같은 두통을 이빨로 짓누르며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박 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가죽 서류철로 우진의 책상 상판을 탁,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어제 내가 지시한 차세대 물류 데이터 통합 분석 보고서, 완벽하게 끝났나?"
"네. 새벽까지 최종 검토 마치고 출력본이랑 원본 파일까지 전부 정리해 뒀습니다."
"지금 당장 그 출력본 들고 팀장실로 들어와."
박 팀장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쾅— 소리를 내며 팀장실의 방음문이 무겁게 닫히는 그 찰나,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세모가 끈적한 어둠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 기괴한 잔상을 남겼다.
5. 조여오는 올가미와 검은 세모의 진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최종 보고서 출력본을 챙겨 들고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서자, 묵직하고 어두운 암막 블라인드가 빈틈없이 내려져 있어 대낮임에도 실내는 밤처럼 침침했다.
박 팀장은 책상 가죽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독하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사내 금연 빌딩이라는 규정 따위는 그의 안중에오 없다는 오만한 태도였다.
재떨이에 처박혀 비벼 끈 담배꽁초가 이미 재떨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진은 서류철을 그의 책상 위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요청하신 물류 데이터 분석 1차 최종 보고서입니다."
박 팀장은 서류를 펼쳐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독이 든 사냥개처럼 우진을 쏘아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의 공기를 무자비하게 짓눌렀다.
그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검은 세모는 이제 아까보다 훨씬 더 짙고 탁한 어둠을 사방으로 뿜어내며,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꼭짓점으로 박 팀장의 정수리를 꿰뚫을 듯 아슬아슬하게 하강하고 있었다.
"강 대리."
"네, 팀장님."
"자네, 우리 회사 입사한 지 올해로 정확히 몇 년 차였더라?"
"……6년 차입니다."
"6년 차…… 그렇지. 자네는 참 항상 조용했어. 일도 눈에 띄게 큰 사고 치는 법 없이 중간만 딱딱 맞추고. 튀는 짓은 절대 안 하고 숨어 지냈지."
박 팀장이 책상 서랍을 덜컥 열더니, 작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어 책상 위에 탁 소리 나게 던졌다.
시커먼 색상의 평범한 USB 메모리 하나였다.
"그런데 말이야, 강 대리. 직장 생활에서 사람이 너무 눈에 띄지 않게 조용하면, 그 속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팀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박 팀장이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
상체를 앞으로 쑥 숙이며 다가왔다.
그의 머리 위 검은 세모에서 피어오른 끈적한 타르 같은 입자들이 우진의 시야를 탁하게 어지럽혔다.
"오늘 아침 출근하자마자 본사 감사팀에서 사내망 서버 로그 기록과 외부 IP 접속 내역을 전부 압류해 갔어. 네가 어젯밤 야근하는 척하면서 회사 핵심 소스코드를 외부로 유출한 내부 스파이로 지목되었거든."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다!"
"그 유출 경로를 기술팀에서 추적해 보니까, 어젯밤 11시 20분경 기획 2팀 내부의 지정 IP에서 정확히 전송된 걸로 확인됐어."
박 팀장의 손가락이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USB를 가리켰다.
"그리고 어젯밤 이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이 누구였지? 강우진 대리, 바로 자네잖아."
완벽한 덫이었다.
누가 봐도 거부할 수 없는 철저하게 짜인 올가미가 우진의 목덜미를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우진은 어젯밤 자신이 사내망에서 작성하던 파일의 타임스탬프와, 최 과장이 사무실을 빠져나가던 시간을 머릿속으로 급박하게 대조했다.
11시 20분은 자신이 한창 스프레드시트 데이터 정리를 하느라 자리를 단 1초도 비우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애초에 소스코드 같은 기술 보안 문서에 접근할 권한조차 없는 만년 대리에게 이런 거창한 산업 스파이 혐의를 덮어씌우기에는 너무나 조잡하고 엉성한 모함이었다.
그러나, 비대하고 차가운 대기업 조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이런 누명은 진실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한 인간을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하기에 차고 넘쳤다.
'박 팀장이… 자기가 저지른 비리와 유출 책임을 전부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다.'
우진의 동공이 극도로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박 팀장의 머리 위에서 미치도록 요동치던 검은 세모가 팽팽한 한계점에 도달한 듯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이잉— 하는 사람의 고막을 긁는 기괴하고 높은 주파수 소리가 우진의 귓전을 때렸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폭발하듯 밀려왔지만, 우진은 악물고 필사적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칠흑 같은 세모의 중심부 표면에 미세한 실금 같은 균열이 가더니, 그 틈새로 핏빛도, 백색도 아닌 차가운 청회색의 문양이 일순간 번뜩였다.
그것은 박 팀장 본인의 자유로운 의지로 누군가를 모함하는 악의가 아니었다.
박 팀장의 등 뒤, 그를 비열하게 조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더 거대한 타인의 손길.
누군가 박 팀장의 목줄을 꽉 쥐고 흔들며, 그로 하여금 이 짓을 억지로 저지르도록 강제하고 있다는 명백한 '타의적 조작'의 징후였다.
‘검은색은… 강제된 궤도다.’
우진의 뇌리에 전율과도 같은 진실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하얀 도형이 자신의 통제 아래 흘러가는 삶의 궤도라면, 검은 도형은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잔인하게 조작되고 왜곡된 파멸의 표식이었다.
박 팀장 역시 이 거대한 시스템의 손아귀에서 이미 파멸의 궤도에 강제로 올라탄 한 마리의 불쌍한 장기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사 감사팀에는 내가 이미 일차 보고를 올려뒀어. 자네가 여기서 순식간에 죄를 인정하고 사직서에 도장을 찍으면, 형사 고발까지는 어떻게든 내가 막아주지."
박 팀장이 서랍에서 미리 인쇄해 둔 사직서 양식을 툭 던지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우진은 책상 바닥에 나뒹구는 사직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튀지 않는 것, 그저 조용히 숨죽여 살아남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무채색의 강우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 머리 위에 뜬 검은 세모가 가리키는 결말이 무엇인지, 그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면 자신뿐만 아니라, 이 조작된 궤도에 얽힌 모든 것이 영원히 파멸로 직행할 터였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공포와 체념으로 얼룩졌던 그의 눈동자 속에, 차갑고 서늘한 침착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팀장님, 어젯밤 11시 20분 서버 로그 기록… 정말 제가 접속한 게 맞습니까?"
우진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적막한 팀장실의 공기를 서늘하게 갈랐다.
박 팀장의 날카로운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크게 꿈틀거렸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