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의 세모
1. 잔업의 끝, 차가운 공기
모니터 우측 하단의 시계가 오후 11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빽빽하게 채워진 스프레드시트의 셀들은 이제 의미 있는 숫자나 글자가 아니었다.
시력을 갉아먹는 네모난 격자무늬의 군집, 그저 끝없는 미로처럼 우진의 망막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우진은 마우스를 쥔 검지손가락을 뗐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손가락 끝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둔탁한 감각이었다.
사무실 안은 서늘한 형광등 불빛과 낮게 웅웅거리는 중앙 공조기 소리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른두 살의 대기업 계열사 만년 대리 강우진(姜宇鎭).
그에게 야근이란 일상의 배경음악이자 지우개 같은 것이었다.
하루하루의 체력과 영혼을 조금씩 지워나가며 월급이라는 대가를 바꾸는 무의미한 교환.
"강 대리, 아직 안 들어갔어?"
복도 쪽 파티션 너머로 서류 가방을 챙겨 든 옆 부서의 최 과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하루 분량의 피로가 켜켜이 쌓여 짙은 회색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퇴근하는 직장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패배를 직감한 병사의 얼굴에 가까웠다.
"네, 최 과장님. 이것만 저장하고 바로 일어나려고요."
"적당히 해.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박 팀장이 또 꼬투리 잡을 텐데 뭐하러 목을 매나. 몸 상해, 젊을 때 관리해야 돼."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최 과장의 구두 굽 소리가 텅 빈 복도를 따라 멀어지고, 출입문의 전자 잠금장치가 둔탁한 '딸깍' 소리를 내며 무겁게 닫혔다.
다시 완벽한 정적.
우진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고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지끈.
바늘로 찌르는 듯한 미세한 통증이 오른쪽 뇌간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익숙한 편두통이었다.
그는 서랍에서 알루미늄 포장된 진통제를 꺼내 물도 없이 씁쓸하게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가루의 아린 맛이 현실의 고단함을 실감케 했다.
열일곱 살, 아버지가 홀연히 사라진 그날 이후부터 우진의 삶은 늘 일정하고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만 굴러갔다.
튀지 않을 것.
위험한 선택은 절대 피할 것.
남들이 닦아놓은 궤도 위를 이탈 없이 달릴 것.
그것이 어머니가 평생을 주입한 생존의 규칙이었고, 우진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무채색의 갑옷이었다.
그 갑옷은 단단했지만, 동시에 그의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키고 있었다.
컴퓨터 본체의 전원 버튼을 누르자 파란 불빛이 차갑게 꺼지며 모니터 화면이 검은 암전 속으로 가라앉았다.
가방을 챙겨 든 우진은 무거운 걸음으로 텅 빈 복도를 빠져나왔다.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는 대신, 익숙하게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통로 계단을 밟았다.
초가을의 쌀쌀한 밤공기가 옷깃을 파고들며 피부를 곤두세웠지만, 과열되어 멍해진 머릿속을 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2. 심야의 2호선 승강장
자정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시간이었지만, 2호선 승강장에는 여전히 종착지를 향하는 수많은 사람이 묵묵히 서 있었다.
회식의 쓴 술 냄새를 풍기는 취객들, 스마트폰 화면의 푸석한 백색광에 얼굴을 파묻은 학생들, 그리고 우진처럼 어깨가 툭 늘어진 채 영혼 없는 눈을 한 직장인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스크린도어 너머의 시커먼 터널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그 어둠 속에서 구원의 빛이라도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다들 어쩜 저리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네.'
우진은 차가운 타일 기둥에 등을 기대며 무표정한 군중을 훑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몫의 노동을 팔고, 정해진 시간에 집으로 실려 가는 삶.
그 거대한 사회적 톱니바퀴의 일부로 무리 없이 돌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삐이익—
기다란 마찰음과 함께 스크린도어 상단의 안내 표시등이 적색에서 녹색으로 깜빡이며 열차가 진입하고 있음을 알렸다.
터널 깊은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퀴퀴하고 미지근한 쇠 냄새와 매캐한 바람이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열차가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굉음과 함께 멈춰 서고, 은색 철문이 좌우로 거칠게 갈라졌다.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우진은 열차 내부로 발을 들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객차 안은 지옥철 못지않게 붐볐다.
빈자리는 당연히 없었다.
우진은 문가 바로 옆의 스테인리스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고 고개를 떨구었다.
차륜이 강철 레일을 긁는 덜컹거림이 발바닥을 타고 종아리를 거쳐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 단조롭고 규칙적인 진동이 묘한 최면처럼 우진의 지친 의식을 무겁게 짓눌렀다.
'잠깐… 눈 좀 붙이자.'
무거운 눈꺼풀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우진의 시야 한구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한 이질감이 파고들었다.
무언가 시각적으로 번쩍였다기보다는, 시신경 한가운데에 아주 차갑고 투명한 유리 필름 한 장이 불쑥 덧씌워진 것 같은 기괴한 감각이었다.
우진은 당황하여 눈을 세게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3. 머리 위에 뜬 기하학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우진의 맞은편, 7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의 정수리 바로 위쪽에 반투명한 형태의 무언가가 떠 있었다.
창가 구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년 남성의 머리 위에는 완벽한 정사각형 모양의 형상이 은은한 백색 빛을 내며 정지해 있었다.
그 옆에서 영어 단어장을 미친 듯이 외우고 있는 여학생의 머리 위에도, 무언가 불안한 표정으로 스마트폰 화면을 스크롤하는 20대 청년의 머리 위에도 정확히 똑같은 형태가 떠 있었다.
투명한 얼음이나 가공된 유리로 빚어낸 듯한 네모난 상자.
그것은 완벽한 침묵 속에서 '네모(□)'의 형상을 유지한 채 허공에 떠 있었다.
'내가… 미쳤나 봐. 드디어 과로로 헛것이 보이네.'
우진은 손을 들어 거칠게 눈두덩이를 꾹꾹 문질렀다.
눈물까지 찔끔 맺힐 정도로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손을 내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그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잔상이 아니었다.
열차가 좌우로 크게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신체 움직임과 완벽하게 연동되어, 머리 위 약 10센티미터 상공에서 미세하게 위아래로 유영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빛의 파편이 아니라, 명확한 경계선과 질감을 지닌 기하학적 형태였다.
우진의 가슴속에서 불길한 심장박동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뇌종양인가?
아니면 극심한 과로로 인한 일시적 시신경 마비?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직후 겪었던 그 지독한 신경쇠약과 환각 증세가, 정확히 15년 만에 다시 도진 것인가 하는 극심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차갑게 흘러내렸다.
바로 그때였다.
차량 중앙 통로 쪽에서 묵직한 가죽 서류 가방을 든 한 남성이 비틀거리며 걸어와 우진의 바로 앞쪽 손잡이를 잡았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구김 없는 고급스러운 감색 맞춤 정장, 손목에 감긴 번쩍이는 명품 시계가 그의 사회적 지위와 성공을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대기업이나 거대 금융권의 고위 임원쯤 되어 보이는 외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양과 달리, 얼굴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잿빛으로 푹 썩어 있었다.
넥타이는 숨이 막히는 듯 답답하게 삐뚤어지게 풀어헤쳐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홀린 듯 자연스럽게 남자의 머리 위로 향했다.
순간, 우진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던 숨이 턱 막혔다.
그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빛나던 네모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꼭짓점을 하늘로 향한 채, 보는 것만으로도 시신경을 베어내는 듯 불길하게 빛나는 완전한 '세모(△)'였다.
4. 붉은빛의 진동과 균열
그 세모는 다른 사람들의 네모처럼 고요하고 안정되게 떠 있지 않았다.
마치 거센 폭풍우 속의 바다에 놓인 부표처럼 불안정하게 좌우로 흔들리며,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미세하고 빠른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모의 테두리는 처음엔 백색이었으나, 그 중심부에서부터 탁한 먹물이 번져 나가듯 흉측한 회색빛과 핏빛 그라데이션이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저건… 대체 뭐야?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남자는 몹시 초조한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신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가 다시 거칠게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그의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덜컹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뚫고 우진의 귓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남자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우진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강하게 짚었다.
두통이 점점 더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변해갔다.
세모의 기하학적 형태를 눈으로 핥듯 응시할수록, 안구 깊은 곳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열감이 치솟았다.
하지만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것처럼 시선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남자의 머리 위 세모는 마치 한계점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혹은 곧 사방으로 산산조각 날 유리알처럼 극도로 위태로워 보였다.
덜컹—!
열차가 선로의 급격한 곡선 구간을 지나며 차체가 심하게 기울었다.
중심을 잃은 남성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질 뻔하다가, 우진의 어깨를 묵직하게 툭 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짧게 사과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우진은 남자의 눈동자를 피할 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극심한 공포, 빠져나갈 구멍 없는 절망, 그리고 무언가를 결단하려다 실패한 자의 혼탁한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우진이 마른목을 겨우 울리며 대답하는 그 찰나의 순간.
남자의 머리 위에서 요동치던 세모가 정점을 찍듯 찌르르—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강렬한 이명을 우진의 뇌리에 내리꽂았다.
동시에, 세모의 예리한 꼭짓점 하나가 핏빛보다 더 붉은빛을 띠며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회전은 너무나 잔인하고 빨라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실제로 베여 피가 흘러내릴 것 같은 극심한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남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스마트폰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열차가 다음 역에 진입하기 위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가방을 미친 듯이 고쳐 쥐고 출입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내레이션 같은 자동 안내 음성이 객차에 울려 퍼졌다.
"역삼역. 이번 역은… 역삼역, 역삼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좌측입니다."
남자는 문이 열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거칠게 플랫폼을 향해 뛰쳐나갔다.
어두운 계단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가는 남자의 정수리 위에서, 사방으로 붉은빛을 사정없이 뿜어내는 그 날카로운 세모가 허공을 잔인하게 가르며 점점 멀어져 갔다.
5. 3분의 오차, 어긋난 시간
열차의 무거운 문이 닫히고, 다시 어두운 터널을 향해 미끄러지듯 출발했을 때도 우진의 심장은 진정되기는커녕 미친 듯이 흉곽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차가운 차창 유리에 비친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내 머리 위에도 저런 게 떠 있는 건가?'
유리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대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자신의 정수리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객차 안에 앉아 있는 타인들의 머리 위에서만 무수한 네모들이 기괴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완전히 미친 거야. 심각한 정신분열이야. 내일 당장 회사고 뭐고 정신과 응급실이라도 가봐야 해.'
손바닥 전체에 축축하게 배어난 차가운 식은땀을 바지춤에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정체 모를 거대한 불길함이 시커먼 덩어리처럼 피어올라 목구멍을 콱 틀어쥐었다.
삐빅—
정적을 깨는 예민한 소리와 함께, 바지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짧고 날카롭게 진동했다.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켰다.
국내 주요 포털 사이트의 긴급 속보를 알리는 푸시 알림 팝업이 화면 상단을 흉물스럽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속보] OO건설 총괄본부장 최 모 씨, 역삼역 인근 교차로에서 덤프트럭 추돌 사고로 현장 사망… 음주 운전 차량 여부 조사 중
송고 시간: 오후 11시 58분
우진의 동공이 극도로 수직으로 수축했다.
"……뭐라고?"
입술 사이로 헛바람 같은 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은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우측 상단의 현재 시각을 다시 확인했다.
오후 11시 59분.
불과 1분 전에 스마트폰 화면에 뜬 속보였다.
우진은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화되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기사 본문 링크를 터치해 열었다.
모자이크 처리된 참혹한 사고 현장 사진 속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고급 외제 세단과 아스팔트 바닥 위에 처참하게 흩뿌려진 서류 가방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 본문 하단에 적힌 사망자의 인적 사항.
감색 맞춤 정장, 고급 명품 시계, 그리고 방금 전 역삼역 플랫폼 계단을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올라가던 그 남자의 인상착의와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했다.
온몸의 피가 발끝까지 단번에 싹 빠져나가는 듯한 극심한 저혈압의 현기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 공포보다 먼저, 우진의 뇌리를 망치로 내리치듯 강타한 것은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지독한 위화감이었다.
우진은 떨리는 시선으로 기사의 세부 정보를 다시 한번 꼼꼼히 훑었다.
[사고 발생 시각: 오후 12시 01분경 추정]
기사 본문 맨 하단에 굵은 글씨로 박혀 있는 문장이었다.
"……말도 안 돼."
우진의 넋 나간 중얼거림에 바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승객이 기분 나하다는 듯 흘겨보았지만, 지금 우진에게는 그런 주변 시선 따위를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기사가 인터넷 서버에 등록되고, 우진의 휴대폰 푸시 알림으로 전송된 시간은 분명 오후 11시 58분이었다.
그런데 기사 본문에는 사고가 앞으로 일어날 시간인 12시 01분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었다.
실제 사고가 이 세상에서 발생하기도 무려 3분 전에, 언론사의 속보 기사가 먼저 작성되고 전 세계에 배포된 것이었다.
정확히 계산된 3분의 시간 오차.
그것은 단순한 기자들의 오보나 시스템의 오류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벤트가 이 세상의 시간축보다 먼저 철저히 스케줄링되어 있었고, 언론이라는 시스템은 그 예정된 시나리오에 정확히 맞춰 기사를 미리 송고하도록 강제된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일탈.
'세모는… 단순한 병적인 환각이나 경고가 아니었어.'
우진의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머리 위의 세모는 한 인간의 삶이 이 세상의 궤도에서 완전히 파괴되고 소멸하는 순간을 미리 가리키는 지독하고도 정확한 죽음의 표식이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죽음의 시계바늘 뒤편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하고 차가운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가 묵묵히 돌아가고 있었다.
15년 전, 눈 내리는 밤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린 아버지가 남긴 낡고 헤진 노트의 맨 마지막 장.
거기에 휘갈겨 쓰여 있던 난해한 문장 하나가, 마치 벼락처럼 우진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후려치고 지나갔다.
『세상은 결코 우연이나 확률로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 이 거대한 궤도의 타임라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지하철이 다음 어두운 역을 향해 끝없는 심해 같은 터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동안, 우진의 시야 속에 가득 찬 승객들의 네모난 도형들이 일제히 차갑고 무자비한 백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