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군대가 움직였다
1. 모스크바의 선고
1945년 8월 8일 오후 5시, 모스크바 크렘린궁(Kremlin 宮) 제1회의실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바깥은 늦여름의 메마른 열기가 맴돌았으나, 두꺼운 참나무 문 안쪽은 얼어붙은 툰드라처럼 시리고 서늘했다.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 철을 만년필 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시계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릴 때마다, 맞은편에 굳은 자세로 앉은 주소련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의 마른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사토는 지난 수주일 동안 도쿄로부터 내려온 절박한 훈령을 쥐고 크렘린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터였다.
‘소련을 통한 화평 중재.’
그것이야말로 파국으로 치닫는 대일본제국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닻이었다.
사토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무릎에 문지르며 몰로토프의 메마른 얼굴을 응시했다.
“인민위원 각하, 지난번 청원했던 고노에 공작의 특사 파견 건에 대해 크렘린의 회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몰로토프는 안경 너머로 사토를 무감정하게 쏘아보았다.
그의 창백하고 네모진 턱은 일말의 온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사토 대사, 당신들의 요청에 대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연방 정부의 공식 회답은 이것이오.”
몰로토프가 묵직한 서류 한 장을 사토의 코앞으로 밀어냈다.
러시아어로 타이핑된 문서의 상단에는 붉은 압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토의 시선이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간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남김없이 증발했다.
“이…… 이것은…….”
“내일, 8월 9일 0시를 기해 소련과 일본 제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하오.”
몰로토프의 목소리는 법관이 사형수의 판결문을 낭독하듯 건조했다.
“소련 정부는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에 공식 참가하며, 극동의 평화를 조속히 회복하기 위해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소.”
사토의 손가락이 종이를 찢을 듯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민위원 각하! 우리 양국 사이에는 유효한 중립 조약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 말이오?”
몰로토프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냉혹한 실소가 번졌다.
“그 조약은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되었소. 당신들이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우리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그 순간부터, 조약은 휴짓조각에 불과했소. 통고는 끝났소. 돌아가시오.”
사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공용차 안에서 사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모스크바에서 도쿄로 이어지는 전신 암호망을 두드리는 그의 손끝에는 제국의 명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묻어나고 있었다.
중재자는 없었다.
남은 것은 북방의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고 내려오는 거대한 붉은 군대의 칼날뿐이었다.
2. 극동의 지축이 흔들리다
8월 9일 0시 정각, 연해주와 자바이칼(Zabaykal), 몽골 고원을 잇는 수천 킬로미터의 전선에서 일제히 묵직한 암호명이 타전되었다.
‘바실레프스키(Vasilevsky), 공격을 개시하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원수의 신호탄이 솟아오르는 순간, 지평선 전체가 대낮처럼 타올랐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 제2극동전선군, 자바이칼 전선군 소속 150만 병력과 5천여 대의 전차, 2만 6천 문의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포성은 대지를 찢고 만주의 늪지대와 산악을 집어삼켰다.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
베를린을 함락시키며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정예 붉은 군대의 궤도가 이제 만주 벌판과 두만강 너머를 향해 무자비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진흙투성이 카튜샤 다연장 로켓포의 비명 같은 굉음이 만주국 국경선을 따라 늘어선 일본 관동군의 요새망을 단숨에 가루로 만들었다.
T-34 전차 군단은 공병대가 미리 개척해 둔 도하 지점을 거침없이 건너며 방어선을 우회하고 배후를 차단했다.
같은 시각, 신징(新京)의 관동군 총사령부 벙커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은 쉴 새 없이 울려대는 흑색 유선 전화기 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사령관 각하! 제3군 관할 동부 전선이 돌파당했습니다! 적의 기갑 부대가 무단장(牡丹江) 방면으로 쐐기를 박고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국경 수비대는 무엇을 하고 있나! 결사항전으로 지연전을 펴라고 하지 않았는가!”
“통신이 전부 두절되었습니다! 포격 개시 30분 만에 제1선 진지가 전멸했습니다! 소련군 기갑 선봉은 이미 국경 요새를 지나 우리 종심으로 파고들고 있습니다!”
야마다의 턱이 잘게 떨렸다.
이른바 ‘황군의 자랑’이라 불리던 70만 관동군의 실상은 허울뿐인 껍데기였다.
정예 사단과 중화기, 탄약은 이미 남방 전선과 본토 결전을 위해 차출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소총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현지 소집병들과 노인, 학도병들뿐이었다.
“각하, 이대로라면 적의 선봉이 며칠 안에 조선 북부 국경에 도달할 것입니다! 라남(羅南)의 제19사단과 함경도 방면의 조선군 사령부에 경보를 울려야 합니다!”
참모장의 다급한 외침에도 야마다는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졌다는 정체불명의 괴폭탄 소식이 전해진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하늘에서는 미국의 불벼락이, 북쪽 땅에서는 소련의 강철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대본영의 지침 따위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의 거대한 방파제는 하룻밤 사이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3. 펜타곤의 밤, 백악관의 시계
워싱턴 D.C.의 8월 8일 늦은 밤, 국방부 펜타곤(Pentagon) 지하 3층 회의실의 형광등은 백색의 독기 어린 빛을 내뿜고 있었다.
탁자 중앙에는 거대한 아시아 대륙의 군사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북쪽에는 붉은색 색연필로 그어진 거대한 화살표들이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작전국 정책과 소속의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대령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잔을 쥐고 지도를 응시했다.
그의 깊게 팬 눈가 아래로 짙은 피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옆자리에서 전황 보고서를 넘기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이 펜을 딱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스탈린이 예상보다 훨씬 빠릅니다, 찰스. 선전포고와 동시에 150만이 넘는 대병력을 만주 전선 전체에 쏟아부었습니다. 이 속도라면 관동군은 열흘도 버티지 못하고 증발할 겁니다.”
본스틸은 안경을 벗어 미간을 꾹 눌렀다.
“관동군이 버티지 못하는 건 기정사실이었네. 문제는 그들이 어디서 멈추느냐지.”
그때 무거운 철문이 거칠게 열리며 전쟁부 차관 존 맥클로이(John McCloy)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백악관에서 막 전달된 최고 등급의 붉은 띠 문서가 쥐어져 있었다.
“신사 여러분, 번즈 국무장관과 트루먼 대통령의 긴급 지침입니다.”
회의실에 있던 장교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맥클로이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지도의 한반도 부근을 손가락으로 쾅 내리찍었다.
“히로시마 이후 소련의 움직임이 극도로 공세적으로 변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태평양 사령부는 오키나와에 묶여 있고, 당장 한반도에 투입할 수 있는 미 육군 병력은 전무합니다. 가장 가까운 제24군단조차 수천 마일 떨어진 바다 위에 떠 있습니다.”
딘 러스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무혈입성으로 점령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맥클로이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탈린의 붉은 군대가 부산과 진해, 인천을 집어삼키는 순간, 극동의 전략적 균형은 완전히 붕괴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도쿄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일본 열도의 목덜미에 붉은 비수가 꽂히는 셈입니다. 대통령은 극동에서 소련의 독식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소련군의 남하를 멈춰 세울 ‘항복 접수 분할선’을 구상해야 합니다.”
본스틸 대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도를 짚었다.
“차관님, 현장에 우리 병력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진격 중인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멈추라고 요구하는 선을 긋는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난센스입니다. 소련이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합니다.”
맥클로이는 단호했다.
“우리에겐 히로시마를 불태운 신형 무기가 있고, 필요하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무기가 바다 건너 대기하고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번즈 장관과 함께 국무·육·해군 3국 조정위원회(SWNCC)에 전권을 위임했습니다. 러스크 중령, 본스틸 대령. 두 사람은 지금부터 모든 정보 자산을 동원해 군사적 경계선의 타당성을 검토하십시오. 서울을 반드시 우리 관할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백악관의 마지노선입니다.”
맥클로이가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무거운 침묵이 다시 두 장교를 짓눌렀다.
본스틸은 손가락 끝으로 지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위도선들을 무심히 더듬었다.
아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그러나 머지않아 한 민족의 운명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보이지 않는 칼날이 워싱턴의 어둠 속에서 서서히 벼려지고 있었다.
4. 명동의 어둠, 지하의 밀담
8월 8일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경성 명동의 뒷골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처마 끝마다 내걸린 방공 전시용 암막 커튼 틈새로 미약한 호롱불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골목 어귀를 순찰하는 본정경찰서(本町警察署) 순사들의 쇠징 박힌 군화 소리가 불길한 박동처럼 골목을 울렸다.
버려진 한약방 건물 뒤편, 썩어가는 멍석과 깨진 항아리들을 들추고 들어가면 나타나는 지하 비밀 인쇄소.
퀴퀴한 곰팡내와 기름 냄새, 그리고 활자의 쇳내가 뒤섞인 지하실 안에서 한도윤은 숨을 죽인 채 수동식 활판 인쇄기의 활자를 고르고 있었다.
철컥, 철컥.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는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계단 쪽에서 삐걱거리는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청년, 김성호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옷자락은 밤이슬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형님! 도윤이 형님!”
성호가 목소리를 억누르며 외쳤다.
“성호야, 숨을 고르거라. 밖의 순사 놈들이 개코처럼 돌아다닌다.”
도윤이 잉크 묻은 천으로 손을 닦으며 다가섰다.
성호는 지하실 구석의 낡은 나무 의자에 주저앉으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지금 종로통과 본정 일대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총독부 체신국 놈들이 파랗게 질려 뛰어다니고 있어요. 소련…… 소련이 움직였습니다!”
도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소련이?”
“예! 모스크바에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답니다! 8월 9일 0시부터 관동군 국경을 넘어 총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만주 벌판이 불바다가 되었답니다!”
성호의 얼굴에는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형님, 왜놈들이 끝났습니다! 히로시마에 그 괴물 같은 폭탄이 떨어져 도시 하나가 날아가더니, 이제 북쪽에서는 불곰 같은 붉은 군대가 밀고 내려온답니다! 이러면 관동군이고 조선 주둔군이고 뼈도 못 추릴 것 아닙니까? 드디어 해방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성호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올라가자, 어둠 속에서 서류 뭉치를 든 여성이 걸어 나왔다.
이정희였다.
총독부 경무국과 체신국 주변의 정보를 은밀히 수집해 온 그녀의 얼굴은 성호와 달리 납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목소리 낮춰, 성호야.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정희는 들고 온 누런 미농지 서류를 인쇄 작업대 위에 펼쳐 놓았다.
총독부 체신국에서 극비리에 송수신된 일본 육군성의 비상 암호 전문을 그녀가 비밀리에 필사해 온 것이었다.
“정희 누님, 왜 그러십니까? 왜놈들이 망한다는데,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다고!”
“성호야, 들어오는 군대가 우리 군대더냐?”
정희의 서늘한 물음에 성호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정희는 도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만주 전선은 이미 붕괴 직전이에요. 소련군 기갑 부대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북청, 나남의 제19사단 수비대로는 두만강을 넘는 소련군을 하루도 막아내지 못해요. 총독부 고관 놈들은 이미 가솔들을 경성으로 철수시키기 시작했고, 용산의 조선군 사령부는 패닉 상태예요.”
도윤은 침묵 속에서 정희가 가져온 필사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종이를 쥔 그의 손마디에 파랗게 힘이 들어갔다.
“만주를 집어삼킨 군대가 두만강과 압록강에서 멈추겠느냐.”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붉은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할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관동군을 토벌하는 것이 아니야. 러일전쟁 때 빼앗겼던 부동항과 극동의 패권을 온전히 되찾으려는 게지.”
5. 배반의 예감
지하실의 공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인쇄기 위에서 마르지 않은 잉크 냄새가 비릿하게 코를 찔렀다.
성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도윤과 정희를 번갈아 보았다.
“형님, 그럼…… 소련군이 이 땅을 해방해 주러 오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왜놈들을 몰아내면, 우리가 우리 나라를 세우는 것 아닙니까?”
도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벽에 걸린 낡은 조선 전도를 바라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한반도의 산맥과 물줄기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반세기 전을 기억하느냐, 성호야.”
“예?”
“갑오년(1894년) 동학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무능한 조정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발을 들이자마자, 톈진 조약을 핑계로 왜놈 군대가 제물포로 상륙했지. 남의 군대를 불러들인 대가가 무엇이었느냐? 이 강토는 청일전쟁의 도륙장이 되었고, 십 년 뒤에는 러일전쟁의 화약고가 되었다.”
도윤은 지도의 북쪽 국경선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지금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고, 남쪽 바다 건너에서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집어삼키고 북진을 노리고 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불벼락으로 일제의 숨통이 끊어지려 하자, 승냥이와 늑대들이 먹잇감을 차지하기 위해 국경으로 달려드는 꼴이다.”
정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오늘 낮, 혼마치(本町)의 조선신탁회사 앞을 지나오는데 수상한 움직임을 보았어요. 총독부 고위 관료들과 거물급 친일파들이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더군요. 어제까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우리 청년들을 징용과 학도병으로 내몰던 자들이, 벌써부터 미군과 선이 닿는 자들을 수소문하거나 한편으로는 은밀히 건국동맹의 여운형 선생 쪽 동향을 살피고 있었어요.”
“기회주의자 놈들!”
성호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제국의 배가 가라앉으니 쥐새끼들이 먼저 살길을 찾는구나!”
“그게 권력의 속성이다.”
도윤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자들은 일본이 망해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줄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는 게야. 미국이 오든, 소련이 오든,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보장해 줄 외세라면 그 발바닥이라도 핥을 놈들이지.”
도윤은 인쇄기 위에 올려진 전단 원지를 매만졌다.
그 위에는 ‘조선 민족이여, 자주의 깃발 아래 궐기하라’는 제목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우리가 지금 찍어내는 이 전단은 단순한 일제 패망의 호외가 아니다. 총독부가 무너진 직후, 이 땅의 백성들이 외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스스로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경고문이어야 해.”
6. 경성의 밤, 그리고 갈라진 지도
도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하실 환기창 너머 골목길에서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계엄이다! 창문을 닫고 불을 꺼라! 모든 민간인의 야간 통행을 일체 금한다!”
본정경찰서의 무장 순사들이 총검을 앞세우고 골목을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철모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군화 소리가 지하실 천장을 쿵쿵 울렸다.
패망을 직감한 일제 경찰의 발악은 더욱 신경질적이고 흉포해져 있었다.
정희가 재빨리 등잔불의 심지를 낮췄다.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늘게 이어졌다.
바깥의 발소리가 저 멀리 종로 방면으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성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님…… 정말로 외세가 이 땅을 갈라놓을까요? 소련이든 미국이든, 우리를 해방하러 오는 정의로운 군대일 수는 없는 겁니까?”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제 정치에 정의란 없다, 성호야. 오직 자국의 이익과 세력권만이 존재할 뿐이지. 만약 소련군이 함경도를 지나 경성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온다면, 미국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자신들의 몫을 챙기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경계선을 그으려 들 것이다. 그 선이 어디가 될지는 신만이 알겠지만…… 그 선이 그어지는 순간, 이 땅은 두 동강이 나는 게야.”
그 시각,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워싱턴 펜타곤의 지하 회의실.
찰스 본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중령은 내셔널지오그래픽사에서 발행한 가로 1미터 남짓의 아시아 지도 위에 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지도 위에 인쇄된 한반도는 너무나도 작았다.
소련군의 급격한 남하를 알리는 붉은 화살표는 이미 두만강을 넘어 웅기(雄基)와 나진(羅津)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찰스, 시간이 없습니다.”
러스크가 시계를 쳐다보며 재촉했다.
“국무부에서 30분 내로 항복 접수선 안을 올리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의견도 조율해야 합니다. 어디로 그어야 합니까?”
본스틸의 손에 쥔 흑연 연필이 지도 위를 방황했다.
인구 분포, 지형, 항만 시설, 철도망……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표기되지 않은 조잡한 잡지 부록 지도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했다.
수도 서울과 인천항을 미군 관할에 넣지 못한다면, 워싱턴 수뇌부는 결코 이 안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었다.
연필 끝이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굵은 위도선 위에 멈춰 섰다.
북위 38도.
그 선이 가져올 반세기의 피비린내와 통곡을,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시 명동의 어두운 지하실.
도윤은 어둠 속에서 인쇄기의 손잡이를 힘차게 쥐었다.
“성호야, 잉크를 부어라. 정희야, 종이를 물려라.”
도윤의 눈빛은 비장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단 한 장이라도 더 세상에 내보내야 한다.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남의 칼날 아래 목을 내맡기게 될 테니까.”
끼이익, 덜컹.
무거운 활판 인쇄기가 다시금 어둠을 찢으며 돌기 시작했다.
해방의 환호 뒤편으로, 거대한 분할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조선 강토를 덮쳐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