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열차, 남겨진 플랫폼
1. 남원역의 이른 아침
안개는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려 남원분지의 붉은 흙바닥을 낮게 적시고 있었다.
늦봄의 새벽공기는 서늘했고, 흙먼지와 디젤 기름 냄새가 뒤섞인 구 남원역 플랫폼 위로는 차가운 이슬이 비늘처럼 내려앉았다.
서울행 통일호 열차가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삼십여 분이 남아 있었다.
역전 광장 한구석, 칠이 벗겨진 공중전화 부스 옆으로 검은색 로얄살롱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
성호석(成浩錫) 전 남원시장의 관용차였다.
조수석 문이 열리며 잿빛 양복을 칼같이 차려입은 비서실장이 내렸다.
그는 주위를 재빠르게 살핀 뒤, 뒷좌석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성재환(成宰桓)의 표정은 박제된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남원고등학교 교복 차림이었지만, 깃 안쪽으로 감춘 목덜미에는 새벽이슬보다 차가운 땀방울이 배어 있었다.
그의 왼쪽 안주머니 속에는 밤새 광한루원에서 지유가 건네준 작은 스케치북 조각이 심장과 맞닿은 채 숨을 쉬고 있었다.
그 곁에는 백부에게서 물려받은 독일제 흑칠 만년필이 묵직한 무게감으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재환의 다른 쪽 주머니 안에는 어젯밤 서재에서 목숨을 걸고 빼내어 적어둔, 부친 성호석과 강태석의 추악한 토지 비리 일지가 접혀 있었다.
"청량리행 열차가 들어오면 바로 탑승하셔야 합니다."
비서실장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장님께서는 이미 한남대교를 넘어 서울 청사로 가셨습니다."
"사저에는 가사도우미와 비서관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으니, 도련님께서는 성북동에 도착하시는 대로 다른 생각 말고 학업에만 전념하시면 됩니다."
재환은 비서실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남원역 대합실 입구 쪽에서 덜컹거리는 자전거 페달 소리가 들려왔다.
낯익은 소리였다.
재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숨을 헐떡이며 자전거를 내팽개치듯 세우는 소년의 실루엣이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민재였다.
2. 사나이들의 마지막 악수
민재의 교복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무릎까지 흙탕물이 튄 바지를 입은 민재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얼굴로 역전 광장을 두리번거리다, 검은 관용차 앞에 서 있는 재환을 발견했다.
"성재환!"
찢어질 듯한 고함이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비서실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막아서려 하자, 재환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물러서세요."
"도련님, 불필요한 마찰은 피하시는 게……."
"물러서라고 했습니다."
낮게 가라앉았지만 칼날 같은 위압감에 비서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열일곱 소년의 눈빛이라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서슬 퍼런 기세였다.
재환은 성큼성큼 걸어가 헐떡이는 민재의 어깨를 꽉 쥐었다.
"민재야."
"야, 이 미친 새끼야…… 진짜 이렇게 가는 거냐?"
민재의 목소리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주먹으로 재환의 가슴팍을 툭 쳤다.
"어제 학교에서 담임한테 들었을 때만 해도 꿈인 줄 알았다."
"아무리 네 아버지가 대단한 양반이라도 그렇지, 친구한테 작별 인사 한마디 할 시간도 안 주고 이렇게 도망치듯 끌고 가냐?"
"미안하다."
재환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깊은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변명은 안 할게."
"하지만 민재야, 난 도망치는 게 아니야."
"알아, 임마."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네가 어떤 놈인데 도망을 치겠냐."
"새벽에 광한루원 갔었다며?"
"지유 만났다며?"
재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민재가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의 손바닥에는 빨간 소독약 냄새가 묻어 있었다.
"지유 걔, 다리 질질 끌면서도 새벽에 너 만나러 간다고 길길이 뛰는 걸 나랑 하은이가 간신히 말리려다 결국 보내줬다."
"그 기집애 고집 센 건 남원 천지가 다 알잖아."
"……지유는, 지금 어디 있어?"
재환이 간신히 참아내던 물음을 던졌다.
민재는 말없이 역전 길목 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안개가 짙게 깔린 요천 둑길 방향이었다.
"오고 있어."
"절대로 안 올 리가 없잖아."
"그 다리로 뛰지도 못하면서, 붕대 감은 무릎으로 한 걸음씩 걸어오고 있다고."
재환의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 욱신거렸다.
새벽녘 오작교 위에서 피가 밴 붕대를 감은 채 파리한 입술로 웃어 보이던 지유의 얼굴이 망막에 번졌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자신의 손으로 적어 건넸던 학생증 증명사진이 지유의 작은 품 안에서 떨고 있을 것이었다.
땡그랑, 땡그랑.
역 구내에 열차 진입을 알리는 경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서실장이 시계를 보며 재촉하듯 다가왔다.
"도련님, 표를 개표구에 넣어야 합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재환은 비서실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민재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두 소년의 손아귀에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강한 힘이 실렸다.
"민재야, 부탁 하나만 하자."
"말해."
"남원에 뼈를 묻겠다고 했지."
"내 오작교가 되어주겠다고 했지."
민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려 있었다.
"그래, 내가 남원 지킨다."
"삼거리 김밥집도, 지유도, 네 자리도 내가 싹 다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너는 서울 가서 그 빌어먹을 법인지 뭔지 싹 다 부수고 와라."
"어설프게 지지 마라, 성재환."
"약속한다."
재환이 짧게 답했다.
그것은 소년의 치기가 아닌, 평생을 건 사내의 맹세였다.
3. 붉은 붕대와 멈춰선 발걸음
개표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육교 계단을 오를 때, 남원역 진입로 저 멀리서 가쁜 숨소리가 안개를 가르고 번져왔다.
윤하은이 지유의 팔을 부축한 채 비틀거리며 역전 광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지유야, 조금만 천천히! 너 그러다 무릎 다 덧나!"
하은의 비명 같은 만류에도 지유는 귀를 막은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아니, 절뚝거리며 뛰고 있었다.
어제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서 짓이겨진 오른쪽 무릎에서는 하얀 붕대 위로 붉은 피가 다시 배어 나오고 있었다.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고, 귓가에는 오직 새벽바람을 가르며 울리던 재환의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반드시 돌아올게.'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돌아와서, 네 손을 잡을게.'
교복 치마 안쪽 주머니에 든 재환의 증명사진이 달릴 때마다 가슴을 두드렸다.
그 서늘하고 단단한 종이 모서리가 지유에게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광장에 들어선 지유의 눈에 역사 안으로 들어가는 재환의 뒷모습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짙은 감색 교복, 곧게 펴진 등, 그리고 그를 호위하듯 둘러싼 양복 차림의 비서관들.
"재환아……!"
목구멍에서 쥐어짠 목소리는 덜컹거리는 디젤 기관차의 거대한 굉음에 묻혀 허공으로 흩어졌다.
치이익- 쿠구구궁.
육중한 쇠바퀴가 녹슨 레일을 짓이기며 승강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고, 역무원의 거친 호각 소리가 대합실을 뒤흔들었다.
"학생! 거긴 표 없으면 못 들어가!"
개표구를 지키던 역무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저씨, 제발요! 제 친구가 저기 타고 있어요!"
하은이 울먹이며 매달렸다.
"인사만 하게 해 주세요, 제발요!"
"안 된다니까! 열차 곧 출발해!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역무원의 완강한 손벽에 막혀 지유는 개표구 나무 난간에 턱 걸려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순간, 민재가 달려와 역무원의 팔을 붙들었다.
"아저씨! 남원고 최민재입니다! 잠깐 십 초만요, 딱 십 초만 승강장 끝에서 손만 흔들게 해 주십쇼!"
민재가 온몸으로 개표구를 밀어붙이자 틈이 벌어졌다.
지유는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바닥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뇌수를 찔렀지만, 눈동자는 플랫폼 한가운데 멈춰 선 통일호 열차의 객차 창문들을 훑고 있었다.
4. 창문 너머의 시선
3호차 17번 좌석.
재환은 창가 쪽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통로 쪽에는 비서실장이 앉아 굳은 얼굴로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객실 안은 새벽부터 서울로 올라가는 보따리 장수들과 출장길에 오른 공무원들의 담배 연기, 삶은 달걀 냄새로 텁텁했다.
하지만 재환의 감각은 객실 내부의 소음에서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얼룩진 기차 유리창 너머, 잿빛 승강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플랫폼에는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짐 보따리를 건네며 우는 노파, 손을 흔드는 군인, 그리고 승강장 끄트머리에 우두커니 선 민재.
민재는 두 팔을 높이 들어 흔들고 있었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도, 입 모양으로는 악을 쓰며 외치고 있었다.
'돌아와라, 성재환! 꼭 돌아와라!'
재환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유리 표면에 소년의 뜨거운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
그리고 그 입김 너머로, 안개를 뚫고 비틀거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지유였다.
헝클어진 단발머리, 흙탕물이 묻은 양말, 그리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뻗어오는 그 걸음.
재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비서실장의 단단한 손이 재환의 어깨를 짓눌렀다.
"도련님, 앉으십시오."
"이거 놔."
재환의 목소리에서 핏빛 살기가 번졌다.
"놓으라고 했다."
"창문을 열거나 밖으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장님의 지시입니다."
"소란을 피우시면 저 여학생과 그 가족들이 남원에서 더 힘들어집니다."
비열하고도 잔인한 협박이었다.
재환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며 교복 바지 위를 쥐어뜯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지유를 지키기 위해 지금은 물러서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이 쇠사슬처럼 그의 온몸을 옭아맸다.
재환은 자리에 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유리창의 성에를 문질러 닦아냈다.
덜컹.
육중한 쇠붙이가 맞물리며 열차가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5. 멀어지는 오작교
삐이이익-!
기관차의 날카로운 기적이 승강장의 공기를 찢었다.
바퀴가 레일을 긁는 굉음과 함께 열차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재환아!"
지유는 플랫폼 바닥을 박차며 달렸다.
오른쪽 다리가 꺾이듯 휘청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통증은 이미 아득한 저편의 감각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창문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환의 두 눈동자만이 보였다.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피가 배어 나오는 주먹을 쥐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년의 얼굴.
지유는 교복 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높이 흔들었다.
그 손수건은 며칠 전 완월정 소나기 속에서 재환의 비를 닦아주었던 바로 그 면 손수건이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손수건 위로 아침 햇살 한 줌이 부서져 내렸다.
"나 기다릴게!"
바람을 뚫고 지유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십 년이 걸려도, 백 년이 걸려도 남원에서 기다릴게!"
"그러니까 꼭 와야 해!"
열차는 무자비하게 가속했다.
지유의 달음박질은 점점 뒤처지기 시작했다.
승강장의 끝자락, 노란색 안전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지유의 발이 헛돌았다.
쿵, 하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이 찧였다.
붕대가 완전히 터져 나가며 붉은 핏물이 바닥으로 번져나갔다.
뒤따라 달려온 하은이 비명을 지르며 지유를 끌어안았고, 민재가 승강장 난간을 붙잡은 채 멀어지는 기차를 향해 피를 토하듯 고함을 질렀다.
"성재환! 잊지 마라! 네가 한 약속 절대 잊지 마라!"
기차는 남원역을 빠져나가 요천 철교를 향해 내달렸다.
덜컹거리는 창틀을 붙잡은 재환의 시야에서 남원역의 붉은 벽돌 지붕이, 플랫폼에 주저앉은 하얀 손수건의 실루엣이, 그리고 자신들의 푸른 봄날이 깃들었던 요천의 물줄기가 점점 점이 되어 멀어져 갔다.
재환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틈으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떨어졌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뼈저린 저주였고, 반드시 힘을 가져야 한다는 지독한 각성이었다.
6. 흑청색 잉크의 맹세
열차가 전라선을 벗어나 북쪽으로 기수를 틀었을 때, 재환은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캡 상단에 금빛으로 새겨진 이름, '成宰桓'.
그리고 그 아래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캡을 돌려 열었다.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사준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는 금빛 닙이 차창 밖으로 비쳐 드는 흐린 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재환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깊고 푸른 잉크로 글자를 짓이기듯 눌러쓰기 시작했다.
'남원군 토지 구획 정리 사업 환지 비리.'
'성호석, 강태석, 그리고 삼거리 토건.'
펜촉이 종이를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객실의 소음을 뚫고 재환의 귓전을 때렸다.
흑청색 글씨는 마치 굳어가는 피처럼 종이의 결을 따라 깊숙이 스며들었다.
비서실장이 옆눈으로 재환의 수첩을 흘겨보려 하자, 재환은 차가운 동작으로 수첩을 덮었다.
"비서실장님."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예, 도련님."
"아버지는 세상을 통제하려면 중앙의 권력을 쥐어야 한다고 하셨죠."
비서실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소년의 옆얼굴에서 풍기는 기운이 평소의 모범생 도련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남원의 힘은 썩었고, 바닥의 정의는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습니다."
재환의 눈동자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고 보세요."
"내가 쥘 법은, 아버지가 말씀하신 그 더러운 통제의 도구가 아닐 겁니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려올 테니까."
비서실장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열차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차창에 비친 소년의 눈빛은 암흑 속에서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7. 텅 빈 벤치와 푸른 바람
열차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남원역 플랫폼에는 짙은 디젤 연기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지유는 하은과 민재의 부축을 받아 승강장 나무 벤치에 겨우 걸터앉았다.
하은이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터진 무릎을 다시 싸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바보야……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굴어."
"다리 다 망가지면 어쩌려고……."
지유는 울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열차가 사라진 북쪽 철길의 아득한 소실점에 머물러 있었다.
손바닥 안에는 재환이 남겨두고 간 학생증 증명사진이 쥐여 있었다.
모서리가 닳아있는 작은 흑백 사진.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열일곱 재환의 맑은 눈빛.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사진 뒷면을 매만졌다.
거칠지만 힘 있는 필체로 적힌 흑청색 글씨.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잉크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것만 같았다.
"지유야."
민재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부르며 지유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재환이 저 자식, 절대로 빈말할 놈 아니다."
"너도 알잖아."
"그놈이 어떤 놈인지."
지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지유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비탄을 넘어선 신념의 미소였다.
"응, 알아."
지유가 조용히 읊조렸다.
"재환이는 반드시 돌아와."
"그때까지 내가 남원을 지킬 거야."
"우리 엄마 김밥집도 지키고, 광한루원 오작교도 지키고…… 이 자리에서 기다릴 거야."
지유는 증명사진을 가슴 깊숙한 안주머니에 다시 넣고 단추를 잠갔다.
플랫폼 위로 요천에서 불어온 늦봄의 바람이 불어왔다.
벚꽃 잎은 이미 다 졌지만, 바람 속에는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소년은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북쪽으로 떠났고, 소녀는 상처 입은 무릎으로 고향의 대지에 뿌리를 내렸다.
두 사람의 찬란하고 잔혹했던 봄날이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훗날 남원을 피로 물들일 거대한 복수와 심판의 서막이, 남겨진 플랫폼의 차가운 침목 사이에서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