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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8화

법정을 나오며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묵직한 문이 닫히고

 

피고인 강태석이 교도관들에게 짓눌린 채 지하 구치감으로 통하는 철문 너머로 끌려 들어갔다.

 

광기 어린 고함과 시멘트 바닥을 긁어대던 구둣발 소리는 무거운 방음문이 덜컥 잠기면서 단번에 차단되었다.

 

법정 안에는 오직 서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길게 토해내는 참관인들의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문성현 부장판사가 법복 자락을 정리하며 법대를 내려가자, 법정 경위가 조용히 목소리를 높여 폐정을 알렸다.

 

공기가 일순간에 팽팽한 긴장을 풀고 흩어졌다.

 

성재환은 검사석 위에 놓인 서류 뭉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백오십 쪽 분량의 공소장 원본과 증거 목록철, 그리고 그 옆에 묵직하게 놓여 있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

 

만년필 캡 상단에 금빛으로 아로새겨진 한자 이름 세 글자와 라틴어 법언이 검사실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성재환은 만년필을 쥐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서늘한 옻칠의 감촉 속에는, 지난 수개월 동안 남원의 어둠을 찢어 발기며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승리의 도취가 아니었다.

 

오히려 뼈를 깎아내는 고통 끝에 비로소 하나의 매듭을 지었다는 지독한 숙연함이었다.

 

재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청석 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어수선한 움직임 한가운데에,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서 있는 것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한지유였다.

 

지유는 가슴팍에 밤색 가계부 일기장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었다.

 

모친 박순례가 투병 중에도 연필을 꾹꾹 눌러쓰며 남겼던, 피와 눈물로 얼룩진 바로 그 장부였다.

 

지유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 눈동자만큼은 티 없이 맑았다.

 

마치 세찬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가을 하늘처럼, 어떤 증오도 독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7년 전, 남원역 승강장에서 매캐한 디젤 연기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삼켰던 그 참혹한 이별의 맹세가 비로소 완성된 순간이었다.

 

재환은 조용히 검사 법복의 단추를 풀었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벨벳 자락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단정한 감청색 정장 차림으로 돌아온 그는 서류 가방을 챙겨 들고 검사석 통로를 빠져나왔다.

 

방청석을 지키고 있던 윤하은과 최민재 기자가 지유의 곁에서 살며시 물러나며 재환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은은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웃어 보였고, 수첩을 손에 쥔 최민재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들은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긴 세월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유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지유야."

 

낮게 가라앉은 재환의 목소리에 지유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지유는 가슴에 품고 있던 어머니의 장부를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재환아."

 

지유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름은 작았지만, 그 어떤 법정의 판결보다 또렷하게 재환의 귓가에 가닿았다.

 

"다 끝났어."

 

재환이 말했다.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지난 7년간 가슴속에 짓눌려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며 터져 나온, 온전한 해방의 눈물이었다.

 

재환은 품 안에서 하얀 면 손수건을 꺼냈다.

 

지유가 7년 전 자신의 만년필을 소중히 싸서 돌려줄 때 건넸던,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던 날 빗물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재환은 조심스럽게 지유의 뺨에 닿은 눈물을 훔쳐냈다.

 

손수건 끝에 묻어나는 지유의 온기가 재환의 손가락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나가자.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재환이 손을 내밀었다.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손을 재환의 단단한 손바닥 위에 얹었다.

 

맞잡은 두 손을 통해 서로의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세상이 녹아내리며,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온기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2. 법원 복도의 침묵

 

대법정의 육중한 문을 밀고 나오자, 차가운 대리석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복도 양옆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법원 경위들과 관내 경찰들이 삼엄하게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지만, 재환과 지유가 나란히 걸어 나오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길을 터주었다.

 

수사팀의 강태훈 수사관과 박철민 계장, 안진우 검사가 복도 모퉁이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재환을 발견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밤을 지새우며 140억 비자금 장부를 추적하고, 지리산 별장 급습과 스위스 비밀 계좌 동결까지 사투를 벌였던 동료들이었다.

 

강태훈 수사관이 다가와 경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주임검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 수사관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며칠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해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강 수사관님과 박 계장님, 안 검사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재환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안진우 검사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지유를 바라보았다.

 

"한지유 씨의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법무법인 세율의 노회한 변호사들이 들이댄 궤변을, 지유 씨가 온몸으로 받아치지 않았다면 재판부의 심증을 이토록 완벽하게 굳히지 못했을 겁니다."

 

지유는 잡고 있던 재환의 손에 힘을 주며 안 검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법이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 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셔서…… 제가 더 감사드립니다."

 

복도 끝자락에서는 남원경찰서 수사과장과 간부들이 사색이 된 얼굴로 벽에 붙어 서 있었다.

 

그들은 30년 동안 강태석의 발밑에서 공권력을 사유화하며 김밥집을 괴롭히고, 요천 제방 비리를 덮는 데 앞장섰던 자들이었다.

 

재환의 서늘한 시선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경찰 간부들은 재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일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의 손목에 아직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을 뿐, 그들 역시 조만간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칼날을 피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재환은 굳이 그들에게 말을 섞지 않았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터였다.

 

그것이 재환이 세운 원칙이었고, 이제 남원에서 그 원칙을 거스를 수 있는 권력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재환아, 잠깐만."

 

복도 중앙 계단에 다다랐을 때, 뒤쪽에서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최민재 기자였다.

 

손에 든 수첩은 이미 빼곡하게 적힌 메모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재환아, 아니 성 검사. 방금 서울 본사에서 연락이 왔어. 대검 중수부에서 스위스 UBS 계좌 동결 결정문과 세율 변호인단 사임 건, 그리고 오늘 선고 결과까지 일괄 보도자료로 배포했대. 방송 3사 정오 뉴스 헤드라인으로 전부 나간단다."

 

민재의 눈빛이 전율로 번뜩였다.

 

"그리고 남원일보 배도식 국장 놈, 사표 내고 도망쳤어. 내가 오늘 자 1면 전면 특종으로 강태석 징역 12년 선고 기사 밀어 넣었다. 제목이 뭔지 알아? '30년 토착 비리의 몰락, 법은 남원 시민의 손을 들었다'야."

 

민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동안 시청의 광고비에 목줄이 잡혀 진실을 침묵해야 했던 지방지의 수습기자가, 마침내 제 손으로 거악의 숨통을 끊는 기사를 써낸 것이었다.

 

재환은 민재의 어깨를 툭 쳤다.

 

"수고했다, 민재야. 네 수첩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 했을 싸움이야."

 

민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지유를 보며 활짝 웃었다.

 

"지유야, 이따 가게로 갈게. 하은이랑 상인회 아저씨들이 벌써 잔치 준비한다고 난리도 아니야. 얼른 나가봐. 문밖에서 난리가 났어."

 

민재의 말대로, 청사 1층 로비 너머 유리문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거대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의 고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며 터져 나오는 환호의 파도였다.

 

재환은 지유를 돌아보았다.

 

"준비됐어?"

 

지유는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일기장을 꼭 쥔 채, 맑은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응. 이제 하나도 안 두려워."

 

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맞추어 법원 본관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3. 쏟아지는 햇살 아래

 

육중한 청사 유리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그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초가을 햇살이 두 사람의 온몸을 정면으로 덮쳐왔다.

 

어둡고 서늘했던 법정의 공기와는 전혀 다른, 맑고 청명한 9월의 바람이 지유의 뺨을 스쳤다.

 

그리고 시야가 트이자마자, 귀가 먹먹할 정도의 거대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법원 앞마당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인파였다.

 

계단 아래부터 정문 바깥 도로변까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남원 시민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며 눈부신 백색 섬광을 뿜어냈다.

 

전국에서 내려온 수십 명의 방송사 및 신문사 기자들이 마이크를 든 채 계단 아래로 쇄도했다.

 

"성재환 검사님! 현직 지자체장에게 징역 12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스위스 비밀 계좌 동결과 변호인단 전원 사임 사태에 대해 검찰 측 입장은 무엇입니까!"

 

"한지유 씨! 삼거리 김밥집에 대한 6년간의 표적 탄압이 유죄로 인정되었습니다! 심경이 어떠십니까!"

 

기자들의 외침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하지만 재환은 마이크를 향해 성급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기자들의 어깨 너머, 계단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평범한 남원의 이웃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땀에 젖은 우체부 모자를 벗어 든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

 

앞치마를 두른 채 퉁퉁 부은 손으로 박수를 치고 있는 하정리 시장의 생선전 배 씨 아주머니.

 

포목점 골목에서 쫓겨날 뻔했던 상인들과, 수해로 터전을 잃고 임시 천막에서 웅크리고 있던 요천 변 이재민들.

 

그리고 삼거리 김밥집 통유리창에 붉은 페인트가 칠해졌을 때, 꽹과리를 들고 용역 깡패들의 굴착기 앞을 막아서 주었던 수많은 구도심의 민초들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30년이었다.

 

강태석이라는 거대한 토착 권력의 그늘 아래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짓밟혀야 했던 세월이었다.

 

억울하게 땅을 빼앗겨도, 시장의 눈 밖에 나 가게가 박살 나도, 제방이 무너져 집이 물에 잠겨도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이라는 거짓말 앞에 무릎 꿇어야 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법은 그 거짓말을 찢어 발겼다.

 

권력자의 편인 줄만 알았던 법이, 가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생선전 배 씨 아주머니가 앞치마로 눈물을 훔치며 목청껏 소리쳤다.

 

"지유야! 순례 언니가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 우리가 이겼다, 지유야!"

 

그 외침 하나가 도화선이 되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며 환호했다.

 

지유의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졌다.

 

지유는 계단 위에 서서, 자신을 지켜봐 준 이웃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가슴에 품은 어머니의 일기장이 햇살을 받아 따스하게 덥혀지고 있었다.

 

'엄마, 들려? 남원 사람들이 엄마를 부르고 있어.'

 

속으로 삼키는 지유의 귓가에 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늘 억울함과 공포 속에서 가슴 졸여야 했던 비명이 아니라, 오랜 어둠을 걷어내고 찾아온 평안의 숨결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곁에서 기자들의 마이크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청년 검사의 얼굴에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플래시 세례 속에서 재환이 입을 열었다.

 

묵직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법원 앞마당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늘의 판결은 특정 개인의 승리가 아닙니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힘없는 사람들의 정직한 땀방울이 불의한 탐욕보다 결코 가볍지 않음을 사법부가 선언한 것입니다."

 

취재진의 셔터 소리가 멎고,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재환의 서슬 퍼런 눈빛이 허공을 갈랐다.

 

"법은 힘 있는 자들의 지배 도구가 아니라, 약한 자들이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사회적 약속이어야 합니다. 30년간 남원을 짓눌러 온 어둠은 오늘로 끝났습니다. 앞으로 검찰은 이 땅에 남은 토착 비리의 잔재를 단 한 점의 성역도 없이 끝까지 파헤쳐 심판대에 올릴 것입니다."

 

말을 마친 재환은 더 이상의 질의응답을 받지 않겠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기자들의 추가 질문이 빗발쳤지만, 대검 수사관들이 능숙하게 앞을 막아서며 길을 열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가자, 지유야."

 

"응, 재환아."

 

두 사람은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4. 맞잡은 두 손

 

돌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상인들은 지유의 옷자락을 스치며 손을 잡아주었고,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재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검사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유야, 장하다. 정말 장해."

 

그 온기 어린 말들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법원 정문 철문을 벗어나자 비로소 인파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남원 시내를 관통하는 도로는 맑은 가을 공기 속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군청과 시청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더 이상 매캐한 최루탄 냄새도, 용역 깡패들이 피워 올리던 거친 담배 연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요천 변 갈대숲에서 풍겨오는 물비린내와 흙냄새만이 완연했다.

 

재환과 지유는 나란히 길을 걸었다.

 

수많은 취재진과 인파를 뒤로하고, 두 사람만의 보폭으로 걷는 길이었다.

 

재환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굳은살이 박이고, 수백 장의 공소장을 쓰며 잉크가 배어든 그 손은, 7년 전 열여덟 소년의 망설이던 손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비바람으로부터 지유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남자의 손이었다.

 

지유의 손 역시 거칠었다.

 

차디찬 수돗물에 배추를 씻고, 뜨거운 밥솥 김을 견디며 김밥을 말고, 붉은 페인트를 석유 묻은 걸레로 문질러 닦아내던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 입은 손들이 맞물리는 순간, 두 사람은 비로소 완전해졌다.

 

"손이 많이 찼네."

 

재환이 지유의 손을 제 코트 주머니 안으로 쑥 집어넣으며 말했다.

 

주머니 안쪽의 따뜻한 온기가 지유의 손가락 끝을 감싸 안았다.

 

지유는 뺨을 붉히며 작게 웃었다.

 

"법정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오고 나니까 다리에 힘이 다 풀려."

 

"그럴 만도 하지. 네가 오늘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알아? 문성현 판사가 판결문 이유를 낭독할 때, 네가 증언했던 내용과 어머니의 일기장 문구를 그대로 인용했어. '영안실을 봉쇄하고 유족을 협박한 것은 공권력의 탈을 쓴 패륜적 범죄'라고."

 

재환의 말에 지유는 품에 안은 가계부 일기장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엄마가 참 좋아하셨을 텐데…… 살아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유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짙은 그리움을 감지한 재환은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남원 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 둑길 초입에 닿아 있었다.

 

푸른 물결 위로 가을 햇살이 은비늘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제방을 따라 늘어선 수양버들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7년 전,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며 미래를 약속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때는 가문의 죄악과 비극적 상처가 두 사람의 발목을 옥죄고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어둠을 법의 이름으로 털어내고 돌아온 자리였다.

 

재환은 지유를 마주 보았다.

 

지유의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났던 흉터,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에서 넘어지며 생겼던 그 아픈 상흔이 긴 바지 속에 가려져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흉터는 이별의 아픔이었지만, 끝까지 남원에서 버텨낸 지유의 결기이기도 했다.

 

"지유야."

 

재환이 조용히 불렀다.

 

"응?"

 

"내일, 어머니 산소에 가자."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환은 주머니 속에서 지유의 손을 더 깊숙이 쥐었다.

 

"정식으로 발부된 판결문 정본을 들고 가자. 그리고 네가 싼 따뜻한 김밥 한 줄 올려드리면서 말씀드리자. 어머니가 지키려 하셨던 가게도, 이 남원의 정의도, 그리고 지유 너도…… 내가 끝까지 지켜냈다고. 그렇게 인사드리자."

 

지유의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가 남원의료원 차가운 침상에서 숨을 거두던 새벽, 홀로 남아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뻔했던 그 끔찍한 고립감.

 

그 모든 세월의 상처를 재환은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 재환아…… 정말 고마워."

 

지유는 재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재환은 한 팔로 지유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지유의 정수리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비누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재환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것은 남원의 냄새였고, 지유의 냄새였으며, 재환이 7년간 서울 신림동 세 평 고시원 단칸방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버텨낼 수 있게 해주었던 유일한 생명의 기억이었다.

 

5. 요천 둑길의 바람

 

둑길을 따라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저 멀리 광한루원의 완월정과 오작교의 윤곽이 가을 나무들 사이로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은 여전히 푸른 잎을 흔들며 요천을 굽어보고 있었다.

 

재환은 문득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이 비워진 채 단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잉크로 쓴 공소장이 거악을 무너뜨렸고, 그 잉크로 쓴 편지가 두 사람의 인연을 지켜냈다.

 

"재환아, 이제 넌 어떻게 되는 거야?"

 

지유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특별수사본부 일은 끝난 거잖아.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해?"

 

지유의 눈동자에 스치는 일말의 불안을 재환은 놓치지 않았다.

 

또다시 예고 없는 이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오랜 상처가 남긴 무의식적인 두려움이었다.

 

재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남원지청에 계속 남아."

 

지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대검에서 부르지 않아? 이번에 큰 사건을 해결했잖아."

 

"정종길 중수부장님께 이미 말씀드렸어. 남원 관내에 얽힌 토착 비리 잔여 사건들, 한양토건이랑 동서개발 잔당들 기소하고 공소유지하는 데 최소 1년은 걸려. 남원지청 204호 검사실을 내가 지킬 거야."

 

재환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집이 여깄잖아. 네가 있는 곳이 내 집이야."

 

지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지유의 머리칼을 재환이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7년 전에는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고백들이, 이제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가문의 죄악도, 부친의 억압도, 권력의 폭압도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동문 우체국 골목 어귀에 다다랐다.

 

골목 입구부터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고, 동네 상인들이 모여 전을 부치고 국을 끓이고 있었다.

 

목공소 윤 씨는 새로 짠 튼튼한 나무 평상을 가게 앞에 내려놓고 있었고, 포목점 아주머니는 오색 천으로 김밥집 처마를 곱게 장식하고 있었다.

 

가게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받아 청아한 소리를 냈다.

 

딸랑, 딸랑.

 

어머니가 살아생전 손수 매달아 두었던 그 풍경 소리였다.

 

"지유 왔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상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성 검사님도 오셨네! 어서 와요! 잔칫상 다 차려놨어!"

 

윤하은이 앞치마를 두른 채 뛰어나와 지유를 와락 껴안았다.

 

골목 가득 번지는 사람들의 온기와 웃음소리가 마치 오랜 겨울을 이겨내고 찾아온 찬란한 봄날 같았다.

 

하지만 그 벅찬 평화의 순간, 재환의 시선이 골목 모퉁이 어귀에 멎었다.

 

전봇대 그늘 뒤편, 낡은 회색 코트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김밥집 앞의 잔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췌하게 야윈 얼굴, 하얗게 센 귀밑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낡은 가죽 서류 가방.

 

성호석이었다.

 

내무부 차관직을 내려놓고 청와대에 사직서를 제출한 뒤, 아들의 취조실에 홀로 출석해 30년 환지 비리를 자백했던 그의 친부.

 

성호석은 차마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지유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유의 아버지 한석규에게 저질렀던 죄악과, 아들 재환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과오에 대한 깊은 참회와 회한이 서려 있었다.

 

재환과 성호석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성호석은 아들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30년 전 남원군수 시절, 자신의 과오로 인해 시작되었던 그 모든 비극을 온전히 끝맺기 위해 준비해 온 마지막 서류철이었다.

 

재환은 맞잡고 있던 지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모든 어둠이 걷힌 줄 알았던 자리, 그러나 두 가문의 30년 묵은 원죄를 완전히 매듭짓기 위한 마지막 대면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놋쇠 풍경을 맑게 울렸다.

 

가을 햇살이 부서지는 골목길 한복판에서, 성재환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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