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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94화

은닉된 스위스 계좌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1호 취조실의 문턱

 

지리산 줄기에서 불어오는 늦여름의 습한 바람이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南原支廳)의 붉은 벽돌 청사 외벽을 무겁게 훑고 지나갔다.

 

법정에서 울려 퍼졌던 최민재와 윤하은의 결연한 증언, 그리고 방청석을 메웠던 시민들의 뜨거운 숨결은 여전히 성재환의 귓가에 뚜렷한 잔향으로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재환의 눈앞에 드리운 것은 환호나 승리의 안도감이 아니었다.

 

지청 본관 지하 1층 복도 맨 끝, 무거운 철문 위에 음각된 '제1호 취조실'이라는 여섯 글자가 서늘한 형광등 불빛 아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 너머에는 대한민국 내무부 차관직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피의자의 신분으로 출석한 그의 친부, 성호석(成浩錫)이 홀로 앉아 있었다.

 

7년 전, 서울행 통일호 기차에 강제로 태워져 남원을 떠나던 소년의 가슴에 새겨졌던 증오와 원망의 원점.

 

그리고 그 원망의 이면에 아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홀로 권력의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침묵해야 했던 한 아버지의 처절한 굴복이 얽혀 있는 공간이었다.

 

재환은 손잡이를 잡기 직전, 코트 안주머니 속에 든 묵직한 만년필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아 지유의 흑청색 잉크를 채워 넣었던 검은 옻칠 만년필.

 

그 차가운 금속 닙의 감촉이 떨려오는 심장에 서릿발 같은 냉철함을 불어넣었다.

 

"주임검사님."

 

등 뒤에서 호송과 신문 절차를 보좌하던 강태훈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숨을 죽이며 서류철을 건넸다.

 

"법무부와 외무부로부터 극비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청(FOJ)과의 국제사법공조 채널이 마침내 열렸습니다. 최민재 기자가 넘긴 페이퍼 컴퍼니 코드와 취리히 은행 계좌의 실소유주 추적 자료가 지금 본청 외사부 팩스로 들어오는 중입니다."

 

재환은 서류철 표지에 찍힌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붉은 직인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강태석이 상고심 전관 변호사들을 매수하고 법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해외로 빼돌린 100억 대의 최후 비자금.

 

그 숨겨진 뇌관을 해체하는 것과, 친부의 원죄를 법정에서 도려내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법적 과업이었다.

 

"알겠습니다. 수사관님은 팩스 전문이 출력되는 즉시 1호 취조실 안으로 직접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 검사님."

 

재환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취조실 손잡이를 아래로 돌렸다.

 

묵직한 방음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취조실 안에는 단 한 개의 백열등 아래, 푸른색 수의도 관용 양복도 아닌 소박한 무명 셔츠 차림의 성호석이 단정하게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었다.

 

정수리부터 귀밑머리까지 하얗게 센 백발,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이 지난 세월 그가 짊어져 온 침묵의 형벌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성호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시선이 백열등 불빛 아래에서 7년 만에, 아니 법조인과 피의자라는 냉혹한 좌표 위에서 허공에 교차했다.

 

2.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피의자

 

성호석의 눈가에 아주 엷은 경련이 일었다.

 

자신을 단죄하기 위해 검사 법복을 단정히 입고 들어서는 아들의 당당한 체구와 서슬 퍼런 눈빛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함께 깊은 안도감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재환은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린 굳은 표정으로 걸어가 맞은편 철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취조실의 적막을 찢었다.

 

철제 책상 위에는 카세트 녹음기와 두툼한 피의자 신문조서 서식, 그리고 지유의 흑청색 잉크병이 정갈하게 놓였다.

 

재환이 녹음기의 붉은색 녹음 버튼을 눌렀다.

 

딸깍 하는 기계음과 함께 마그네틱 테이프가 조용히 돌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5일 오후 4시 20분. 전주지방검찰청 남원지청 1호 취조실에서 피의자 성호석에 대한 제1회 피의자 신문을 개시합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턱관절이 그 이면에 도사린 비장한 고통을 웅변하고 있었다.

 

"피의자는 진술거부권과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고지합니다. 피의자, 변호인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출석한 것이 맞습니까?"

 

성호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오랜 공직 생활의 묵직함 대신, 모든 껍데기를 벗어던진 한 인간의 투명한 낮음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변호인은 필요 없다. 성재환 검사."

 

성호석은 '아들' 대신 '검사'라는 직함을 정확하게 불렀다.

 

그 호칭 속에 담긴 뜻을 재환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공적인 법정에서 사적인 부정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아들에게 건네는 마지막 부정(父情)의 방식이었다.

 

"나는 오늘 죄를 변명하러 온 것이 아니다. 30년 전부터 이 남원 땅에 뿌리내렸던 탐욕의 고리를 끊어내고, 내가 저지른 타협과 묵인의 죄과를 자백하러 왔다."

 

재환은 만년필을 들어 서식 첫머리에 흑청색 잉크로 '피의자 성호석'이라는 다섯 글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잉크가 종이 위로 깊숙이 스며들며 번져나갔다.

 

"피의자 성호석. 1991년 남원군 토지 구획 정리 및 요천 변 환지 처분 당시, 한석규 소유의 과수원 부지를 공공용지로 강제 편입시키고 강태석의 삼거리 토건 측에 단독 환지 특혜를 제공하는 처분 결재 문서에 직인을 날인한 사실이 있습니까?"

 

성호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 내가 날인했다."

 

"그 결재가 강태석과 중앙 정계 실세 김문현의 강요와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최종 행정 책임자로서 불법 환지를 묵인하고 은폐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인정한다."

 

성호석은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한석규 씨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했고, 그 가족들이 수십 년간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고통을 방치했다. 강태석이 아비 없는 그 집안을 짓밟고 협박할 때, 나는 내 외아들의 목숨이 두려워 눈을 감았다. 그 비겁함이 남원을 괴물의 소굴로 만들었다."

 

성호석의 메마른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다.

 

재환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성호석이 품 안에서 꺼내어 책상 위에 내려놓은 것은, 가죽 표지가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진 손바닥만 한 검은색 수첩과 누렇게 바랜 갱지 한 묶음이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남원에 바치는 속죄의 기록이다."

 

3. 30년의 원죄와 마지막 기록

 

책상 위에 놓인 문건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었다.

 

맨 윗장에 적힌 단정한 필체.

 

'1991년 1993년 남원군 관내 토지 환지 조작 실태 및 정치자금 강제 징수 일지'.

 

성호석이 내무부로 쫓겨가듯 영전하기 직전까지, 강태석과 김문현의 협박 속에서도 훗날 사법적 심판이 열릴 날을 대비해 남원군청 지적과 캐비닛과 금고에서 직접 필사하고 날인을 대조해 은밀히 정리해 둔 극비 원본철이었다.

 

재환이 떨리는 손으로 문건을 넘겼다.

 

한석규의 과수원 부지가 어떤 경로로 강제 수용되었는지, 당시 군청 공무원 최인규가 위조한 인감증명서의 일련번호와, 그 대가로 강태석이 김문현에게 전달한 약속어음의 배서 내역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치밀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장에는, 강태석이 성호석을 옭아매기 위해 일방적으로 발행했던 대치동 학원비 및 서울 거처 대납 영수증의 원본 전표가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강태석은 그것으로 나를 영원한 공범으로 묶어두려 했다."

 

성호석이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내가 중앙으로 올라가 입을 닫는 대가로, 내 아들의 서울 생활을 제놈의 돈으로 치렀다는 족쇄를 채운 것이지. 나는 그 돈을 쓰지 않고 전액 별도 계좌에 예치해 두었으나, 서류상으로는 이미 그자의 뇌물을 받은 파렴치한 군수가 되어 있었다. 재환아…… 아니, 성 검사."

 

성호석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너는 내 피를 이어받았으나, 내 죄까지 이어받을 이유는 없다. 나를 공범으로 기소해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이든, 직권남용이든, 법이 허용하는 가장 무거운 죄목으로 나를 법정에 세워라. 그래야만 네가 지유에게, 그리고 남원 시민들에게 약속했던 정의가 완성된다."

 

취조실 안의 공기가 무겁게 멎어 들었다.

 

재환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7년 동안 자신을 옥죄었던 것은 부친을 향한 증오였다.

 

권력의 앞잡이가 되어 남원을 버리고 자신을 서울의 차가운 빌딩 숲으로 내몰았던 냉혈한 아비.

 

그러나 진실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곳에 서 있던 사람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고 평생을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 지낸 한 늙고 나약한 아버지였다.

 

재환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부정을 앞세워 아비를 감싼다면, 그것은 강태석의 카르텔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사법적 타협에 불과했다.

 

진정한 효도는 아비를 숨겨주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 평생 짊어져 온 죄의 족쇄를 법의 칼날로 정당하게 끊어내 주는 것이었다.

 

"피의자 성호석의 자백과 제출된 원본 문건을 증 제44호증으로 채택합니다."

 

재환은 차분하고 명료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검찰은 피의자 성호석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국고손실)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의 공범으로 정식 불구속 기소하여, 피고인 강태석의 병합 사건으로 재판부에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겠습니다."

 

성호석의 눈에서 마침내 참아왔던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메마른 뺨을 적셨다.

 

그것은 파멸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30년의 멍에를 벗고 안식을 찾은 자의 평온한 해탈이었다.

 

"고맙다…… 성 검사. 참으로 고맙다."

 

그 순간, 취조실 문이 급박하게 열렸다.

 

4. 바다를 건너온 팩스

 

숨을 헐떡이며 들어선 강태훈 수사관의 손에는 방금 수신된 수십 장의 영문 팩스 용지가 쥐여져 있었다.

 

상단에는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청(FOJ)의 공식 문장과 취리히 주 검찰청의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주임검사님! 취리히에서 긴급 사법공조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강태훈의 격앙된 외침에 취조실의 공기가 일순간 팽팽하게 팽창했다.

 

재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호석 역시 젖은 눈으로 팩스 용지를 응시했다.

 

"내용을 보고하십시오."

 

강태훈이 팩스 첫 장을 넘기며 보고서를 신속히 읊어 내려갔다.

 

"피고인 강태석이 리히텐슈타인에 설립한 페이퍼 컴퍼니 '알프스 인베스트먼트(Alps Investment Ltd.)' 명의의 스위스 유니온 은행(UBS) 취리히 본점 비밀 계좌 내역입니다. 확인된 은닉 예치금은 미화 1,250만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정확히 102억 4천만 원입니다!"

 

102억 4천만 원.

 

남원시 1년 예산의 상당 부분에 맞먹는 거액이었다.

 

요천 제방의 철근을 빼돌리고, 상인들의 피눈물을 쥐어짜며, 수해 이재민들의 절규 위에서 조성된 피 묻은 검은돈이 알프스 산자락 아래 차가운 은행 금고에 은닉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검사님!"

 

강태훈이 팩스 다섯 번째 페이지를 펼쳐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취리히 계좌의 인감 카드 및 최종 수익자(Ultimate Beneficial Owner) 서명란입니다. 피고인 강태석의 영문 친필 서명과 함께, 이 계좌의 자금 인출 권한을 위임받은 서울의 관리 대리인 명단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재환의 서슬 퍼런 시선이 영문 문서의 서명란으로 내리꽂혔다.

 

거기에는 너무도 익숙하고 추악한 이름들이 또렷이 타자되어 있었다.

 

'대리인: 법무법인 세율(世律) 대표변호사 한중호, 전 대법관 민중기, 전 전주지법원장 배상문.'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자금 집행 목적 조항.

 

'상고심 및 특별 감찰 무마용 성공보수 예치금(Escrow for Legal & Special Lobbying).'

 

"이 파렴치한 자들이……!"

 

재환의 입술에서 차가운 분노가 터져 나왔다.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가 법정에서 공판중심주의를 들먹이고, 성재환과 한지유의 사적 치정 프레임을 씌우며 시간을 끌었던 진짜 이유가 백주 대낮에 발거벗겨진 순간이었다.

 

그들은 1심에서 적당히 시간을 끌며 여론을 희석시킨 뒤, 스위스에 은닉된 100억 원의 비자금을 헐어 대법관 출신 전관 브로커들과 상고심 재판부를 매수하려 했던 것이다.

 

돈으로 법을 사고, 돈으로 징역을 지우며, 끝내 무죄를 받아내어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군림하겠다는 강태석의 최후 탈출로.

 

"스위스 연방 검찰 측의 조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환이 묻자 강태훈이 승리의 미소를 띠며 답했다.

 

"우리 대검 특별수사본부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에 기초한 긴급 동결 요청을 스위스 연방 법원이 전격 수용했습니다! 현지 시각 오늘 오전 9시부로 해당 계좌의 모든 입출금이 전면 동결(Freezing)되었습니다. 단 1달러도 서울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완벽한 봉쇄였다.

 

강태석이 30년간 쌓아 올린 범죄 제국의 마지막 숨구멍이자, 법망을 뚫고 나가려던 최후의 비상구가 스위스 알프스의 만년설 속에서 영원히 얼어붙은 것이다.

 

책상 맞은편에서 그 문서를 지켜보던 성호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태석의 명줄이…… 완전히 끊어졌구나."

 

재환은 팩스 전문을 단단히 쥐어쥐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빳빳하게 구겨졌다.

 

"수사관님. 즉시 이 팩스 전문과 영문 번역본, 그리고 스위스 연방 법원의 동결 결정문을 증 제45호증으로 편철하십시오."

 

"예, 주임검사님!"

 

"지금 즉시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으로 갑니다. 피고인 강태석의 호송 대기실과 재판부에 이 문건을 직접 제출하겠습니다."

 

5. 호송 대기실의 독기

 

남원지원 지하 1층, 전주교도소로의 환소를 앞둔 호송 대기실.

 

철창 사이로 스며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 속에서 피고인 강태석은 벤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카키색 미결수 수의 가슴팍에 선명하게 박힌 '2104'라는 붉은 수번.

 

최민재와 윤하은의 법정 증언으로 백주 대낮에 치부가 까발려졌음에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은 독사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대표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린 채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시장님, 1심은 문성현 저 애송이 판사 놈이 눈이 뒤집혀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징역형이 떨어지더라도 실망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중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입꼬리를 비열하게 끌어올렸다.

 

"취리히 계좌의 1,250만 달러가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민중기 전 대법관님이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출신들을 중심으로 상고심 전담팀을 이미 구성했습니다. 고등법원에서 법리 오해로 파기환송을 이끌어내고,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뒤집으면 그만입니다. 돈 앞에 무너지지 않는 사법부는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강태석이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쉰 목소리로 짓씹었다.

 

"성재환 그 새끼…… 그리고 그 국밥집 년……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가 없어. 100억이 아니라 200억이 들어가도 좋다. 대법원에서 무죄만 받아내라. 내가 나가면 남원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어서라도 그놈들의 피를 볼 테니까."

 

"염려 마십시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바티칸보다 견고합니다. 일개 지방청 평검사 따위가 태평양을 건너 취리히 금고를 들여다볼 재간은 없습니다."

 

한중호가 자신만만하게 서류 가방을 닫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호송 대기실의 육중한 철문이 거칠게 밀려 열렸다.

 

대기실을 지키던 교도관들과 법원 경위들이 흠칫 놀라며 벽 쪽으로 물러섰다.

 

문턱을 넘어선 인물은 검사 법복을 펄럭이며 걸어 들어오는 성재환이었다.

 

그의 손에는 푸른색 표지의 두툼한 국제사법공조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강태석이 벤치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이를 갈았다.

 

"성재환……!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기어들어 와! 판결 선고 전까지는 변호인 접견 시간이다! 썩 꺼져!"

 

한중호 역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성 검사, 절차를 지키시오. 피고인과의 사적 접견을 방해하는 것은 명백한 변호권 침해입니다."

 

재환은 그들의 헛소리를 단칼에 베어버리듯, 서류철을 들어 철창 앞 쇠창살 사이에 꽂힌 탁자 위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탕!

 

대기실 전체를 뒤흔드는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팩스 서류들이 사방으로 날카롭게 흩어졌다.

 

"변호권? 아니, 범죄수익 은닉 공모권이겠지."

 

재환의 음성은 지하 대기실의 한기보다 더 시퍼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6. 얼어붙은 알프스의 금고

 

한중호의 시선이 탁자 위에 흩어진 서류의 첫 장으로 떨어졌다.

 

'Confédération Suisse(스위스 연방)'

'Office fédéral de la justice(연방 법무경찰청)'

불어와 영문으로 병기된 공식 문장과 붉은색 봉인 인주를 확인한 순간, 한중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거짓말처럼 빠져나갔다.

 

그의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이게 대체……!"

 

"읽어봐라, 한중호 변호사."

 

재환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중호의 멱살을 잡을 듯 다가섰다.

 

"네놈이 대법원 상고심 로비 자금으로 관리하기로 계약한 리히텐슈타인 페이퍼 컴퍼니 '알프스 인베스트먼트'. 그리고 취리히 UBS 은행 048-9921호 계좌의 예치금 1,250만 달러의 전면 지급 동결 결정문이다."

 

"뭐, 뭐라고……?!"

 

벤치에 서 있던 강태석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쇠창살에 이마를 짓이기며 서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짓말이야! 사기 치지 마! 스위스 은행이 왜 내 돈을 묶어!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30년 동안 남원에서 피땀 흘려 모은 내 돈이야!"

 

"남원 시민들의 피와 살을 뜯어먹고 요천 제방을 무너뜨려 만든 피 묻은 장물이지."

 

재환이 쇠창살 너머의 강태석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도 되지 않았다.

 

강태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악취와 살기가 재환의 얼굴에 닿았으나, 재환의 눈동자는 바위처럼 미동도 없었다.

 

"스위스 연방 법원이 대한민국 대검찰청의 사법공조 청구를 정식 인용했다. 네놈의 비자금 102억 원은 오늘 아침 9시부로 단 1센트도 움직일 수 없게 동결되었다. 그리고 네놈과 결탁해 로비 자금을 세탁하려던 법무법인 세율의 한중호, 민중기, 배상문 전원에게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및 변호사법 위반 피의자로 긴급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한중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서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며 서류들이 어지럽게 쏟아져 내렸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정점을 거쳤다는 거물 전관의 위선이, 한순간에 파렴치한 국제 금융 범죄의 공범으로 전락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성 검사님! 저는…… 저는 그저 의뢰인의 자산을 위탁 관리하려 했을 뿐……!"

 

"입 닥쳐라, 한중호."

 

재환의 일갈이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들이 법이라는 신성한 칼을 들고 권력자의 똥구멍을 핥으며 장사질을 해온 대가는, 곧 서울중앙지검 취조실에서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재환의 시선이 다시 강태석에게로 향했다.

 

강태석은 쇠창살을 붙잡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 상고심에서 거액을 뿌려 법망을 빠져나가려던 마지막 썩은 동아줄이 완벽하게 끊어져 나간 자의 처절한 광기와 절망만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강태석."

 

재환이 주머니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꺼내 들어 그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검은 옻칠 캡 위로 백열등 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네놈이 숨겨둔 돈도, 네놈을 비호하던 서울의 권력도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네놈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남원 땅의 법정이 내릴 지엄한 단죄뿐이다."

 

강태석의 무릎이 털썩 꺾였다.

 

그 거대하고 오만했던 토착 권력의 거두가, 마침내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목에서 짐승의 울음 같은 비명과 통곡이 짓이겨져 터져 나왔다.

 

"성재환…… 성재환……! 으아아아악!"

 

재환은 더 이상 그 비참한 패배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법복의 자락을 단정히 정리하며 뒤돌아서 대기실 문을 밀고 나갔다.

 

7. 법정에 제출된 최후의 퍼즐

 

쿵, 쿵, 쿵.

 

문성현 부장판사의 법봉 소리가 남원지원 제1호 대법정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법정 안은 다시금 정숙을 되찾았으나, 방청석을 가득 메운 시민들과 취재진의 시선은 온통 검사석으로 쏠려 있었다.

 

피고인석에 앉은 강태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곁에 선 한중호 변호사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재환이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양손에는 스위스에서 날아온 102억 원 비밀 계좌 동결 결정문과, 1호 취조실에서 친부 성호석이 직접 서명하고 날인한 1991년 환지 비리 자백 조서가 들려 있었다.

 

"검찰은 피고인 강태석의 추가 범죄사실 및 증거 인멸 기도를 입증하기 위해, 증 제44호증과 증 제45호증을 법원에 정식 제출합니다."

 

재환의 낭랑한 목소리가 법정의 높은 천장을 때렸다.

 

"증 제44호증은 1991년 당시 남원군수 성호석이 작성한 환지 처분 조작 및 불법 자금 상납 실태 일지 원본과 피의자 자백 조서입니다. 피고인 강태석이 30년 전부터 공권력을 협박하고 조작하여 한석규 씨의 토지를 강탈했음을 입증하는 원천 증거입니다."

 

방청석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유의 손이 가슴께로 올라갔다.

 

어머니의 유품인 일기장을 꼭 쥔 지유의 두 눈에서 맑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30년간 가문을 짓누르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저주스러운 토지 강탈의 진실이, 마침내 가해자였던 전임 군수의 진솔한 자백을 통해 만천하에 공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증 제45호증."

 

재환이 푸른색 표지의 영문 사법공조 문서를 높이 치켜들었다.

 

"스위스 연방 법무경찰청 및 취리히 주 검찰청과의 긴급 국제사법공조를 통해 확보한, 피고인 강태석의 리히텐슈타인 페이퍼 컴퍼니 '알프스 인베스트먼트' 명의 스위스 비밀 계좌 거래 내역 및 102억 4천만 원 전액 자산 동결 결정문입니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가더니, 법정 전체가 거대한 충격으로 뒤흔들렸다.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가 맹렬하게 터져 나갔다.

 

102억 원의 스위스 은닉 자금.

 

남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이 백주 대낮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피고인 강태석은 요천 제방 공사비와 춘향 테마랜드 공사비를 횡령하여 조성한 범죄수익 100억 대를 해외로 은닉한 뒤, 대법원 상고심 로비 자금으로 활용하여 사법 정의를 농락하려 했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재판부를 향해 똑바로 꽂혔다.

 

"그러나 국제사법공조를 통해 피고인의 마지막 경제적 도피로는 완벽하게 차단되었습니다. 이제 피고인에게는 그 어떤 은닉 재산도, 사법부를 매수할 수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검찰은 다음 기일에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최종 변론과 함께, 권력을 사유화하여 무고한 시민의 삶을 파괴한 죄에 상응하는 가장 엄중한 법의 심판을 구형하겠습니다."

 

문성현 부장판사가 안경을 벗고 피고인석을 무겁게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의 관용이나 일말의 참작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찰이 제출한 증 제44호증과 제45호증을 모두 정식 증거로 채택합니다. 피고인 측 변호인, 반대신문이나 이의 있습니까?"

 

문 판사의 서늘한 질문에, 한중호는 창백해진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없습니다."

 

법정 안에서 참아왔던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완벽한 패배.

 

악인의 마지막 보루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8. 요천의 저녁노을

 

재판이 끝난 남원지원 청사 밖은 붉게 물든 저녁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청사 계단 앞에는 수많은 남원 시민들이 모여 법정을 나서는 성재환 검사를 향해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집배원 박 씨, 목공소 윤 씨, 생선전 배 씨, 그리고 요천 제방 수해로 집을 잃었던 이재민들까지.

 

그들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숨죽이던 나약한 민초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불의에 맞서 싸워 이겨낸 당당한 역사의 증인들이었다.

 

재환은 시민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인파를 벗어나 요천 둑길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둑길 저편, 수양버들 나무 아래에 지유가 홀로 서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하얀 원피스, 그리고 그녀의 자전거 핸들에 걸린 작은 바구니.

 

7년 전, 열여덟의 봄날 자전거를 타고 노을 속을 함께 달리던 그 길목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마주 섰다.

 

재환이 다가가 멈춰 섰다.

 

지유가 붉어진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들었어. 취조실에서…… 아버님을 직접 기소했다고."

 

재환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응. 아버지가 원하셨던 일이야. 그리고…… 내가 너와 남원에 갚아야 할 마지막 빚이었고."

 

지유가 천천히 손을 뻗어, 하루 종일 격전을 치르느라 차갑게 식어 있던 재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번져나갔다.

 

"고마워, 재환아. 내 아버지의 억울함도, 우리 어머니의 피눈물도…… 네가 다 씻어줬어. 그리고 네 아버지의 영혼도…… 네가 비로소 구해낸 거야."

 

지유의 목소리에 담긴 깊은 이해와 용서가, 재환의 가슴속에 7년간 응어리져 있던 마지막 죄책감의 파편을 눈 녹듯 녹여내렸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요천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았다.

 

강태석의 100억 비자금은 얼어붙었고, 가문의 원죄는 사법의 제단 위에 떳떳하게 올려졌다.

 

이제 다음 주면 이 기나긴 싸움의 마지막 마침표, 성재환 검사의 최종 구형이 법정에 울려 퍼질 것이다.

 

요천 변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저녁노을빛 속으로 길게 하나로 겹쳐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