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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8화

마지막 밤의 맹세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어둠 속의 탈출

 

남원 시장 관사 2층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쇳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굳게 닫힌 목재 창문 틈새로 초여름의 밤바람 대신 눅눅한 흙내와 비 갠 뒤의 비릿한 풀잎 냄새가 스며들었다.

 

책상 위에는 백부에게 물려받은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과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사준 흑청색 유리 잉크병이 놓여 있었다.

 

성재환(成宰桓)은 불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책상 모서리를 짚은 채 숨을 죽였다.

 

아래층 거실에서는 괘종시계 추가 둔탁하게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간헐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부친 성호석은 내무부 기획조정실장 겸 정무비서관실 차출을 명분으로 이미 서울행 짐을 꾸려 관용차 트렁크에 실어 둔 상태였다.

 

날이 밝으면, 아니 새벽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재환은 검은 관용차 뒷좌석에 실려 서울로 압송될 운명이었다.

 

"도련님 방 창문 밑에도 사람 하나 붙여 둬 내무부 감사관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고, 도청 기자 놈들도 냄새를 맡고 기웃거린다 아침 출발 전까지 쥐새끼 한 마리 얼씬 못 하게 해."

 

아래층 현관문 부근에서 울려 퍼지는 비서실장의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지시가 복도를 타고 올라왔다.

 

1층 현관문 앞에는 덩치 큰 비서실 직원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지키고 서 있었고, 정문 철문 밖에는 청원경찰이 순찰봉을 돌리고 있었다.

 

재환은 교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유가 선물한 흑청색 잉크를 듬뿍 머금은 각인 만년필의 서늘한 금속 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차가운 법언 위에, 방금 전 갱지에 빽빽하게 눌러쓴 부친 성호석과 삼거리 토건 강태석의 1991년 토지 강탈 비리 일지가 교복 안쪽에 접혀 숨겨져 있었다.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다.'

 

낮에 지유가 관사 앞까지 달려오다 아스팔트에 무릎이 찢겨 붉은 피를 뚝뚝 흘렸다는 이야기를, 관사 뒷마당을 드나들던 조경 일꾼의 혼잣말을 통해 엿들었다.

 

피투성이가 된 무릎으로 관용차를 쫓아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까지 울부짖으며 달렸다는 그 가련한 아이를, 이렇게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재환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남원고등학교 학생증이 손에 잡혔다.

 

빳빳한 코팅 필름 안쪽에 단정한 교복 차림의 증명사진이 박혀 있었다.

 

재환은 커터 칼을 꺼내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턱을 악물며 학생증 오른쪽 하단의 반명함판 증명사진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오려냈다.

 

그리고 만년필 뚜껑을 돌려 열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금빛 닙에 지유의 흑청색 잉크를 묻혀, 사진 뒷면의 백색 면에 정갈하고 힘 있는 필치로 한 글자씩 깊게 새겨 넣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입김을 조심스레 불어 말린 재환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교복 왼쪽 주머니, 심장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넣었다.

 

방 창문을 소리 없이 열었다.

 

관사 2층 뒤편에는 수령 수십 년 된 아름드리 배롱나무와 모과나무가 처마 밑까지 가지를 뻗고 있었다.

 

1층 정문과 현관 쪽은 감시가 삼엄했으나, 우거진 정원수와 담장 사이의 좁은 사각지대는 밤비가 내린 뒤라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재환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창틀을 딛고 일어섰다.

 

젖은 나뭇가지가 재환의 몸무게를 받치며 낮게 삐걱거렸으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에 묻혀 나갔다.

 

미끄러운 가지를 타고 내려와 흙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재환은 숨을 몰아쉬며 관사 뒷담의 붉은 벽돌 틈을 딛고 단숨에 담벼락을 넘었다.

 

관사의 높은 그림자가 등 뒤로 멀어지고, 고요한 남원의 야경 속으로 재환의 발걸음이 바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2. 달빛 아래 광한루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남원 시내는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동문 우체국을 지나 좁은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가로등 불빛이 물웅덩이에 부서져 차가운 파편을 흩뿌렸다.

 

재환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광한루원(廣寒樓苑)을 향했다.

 

낮에 민재와 하은이 지유를 데리고 팽나무 고목 아래로 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재환의 심장은 오직 그곳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춘향관 뒤란으로 이어지는 돌담 모퉁이에는 낮에 축제 부스 준비를 하느라 열어두었던 비상 쪽문이 삐걱거리며 빗장을 반쯤 푼 채 남아 있었다.

 

쪽문을 밀고 들어서자 익숙한 흙내음과 함께 요천에서 불어오는 습윤한 물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달빛이 구름을 뚫고 쏟아져 내리며 완월정 지붕의 처마 곡선을 푸르스름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를 가로지르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오작교(烏竹橋) 위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밤안개가 얇게 피어오르는 연못 수면 위로 달빛이 부서지고, 그 다리 한가운데에 단정한 단발머리의 소녀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유였다.

 

헐렁한 감색 카디건을 걸치고, 붕대로 두껍게 동여맨 무릎 때문에 온전치 못한 자세로 다리 난간을 짚고 서 있는 모습통에 재환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요동쳤다.

 

딛고 선 다리가 아픈지 지유는 한쪽 발에 무게를 실은 채, 남원역 방향의 북쪽 하늘만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는 밤공기를 가르며 가늘게 떨려 나왔다.

 

정적 속에 잠겨 있던 다리 위에서 지유의 어깨가 크게 굳어졌다.

 

천천히, 마치 환청을 들은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는 지유의 눈동자에 달빛이 가득 들어찼다.

 

그 눈가에는 이미 마르지 못한 눈물 자국이 허옇게 말라붙어 있었고, 젖은 속눈썹 아래 맑은 눈동자가 재환을 마주한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재환아……?"

 

지유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지유는 절뚝이는 다리로 재환을 향해 다가오려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재환은 반사적으로 뛰어가 지유의 여윈 어깨와 팔을 붙잡아 가슴 안으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밤이슬에 젖은 지유의 뺨이 재환의 교복 깃에 닿았다.

 

"너…… 왜 여기 있어? 서울로…… 낮에 벌써 떠났다고 들었는데…… 관사 차가 고속도로를 탔다고……."

 

지유의 떨리는 손이 재환의 옷소매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혹시 손을 놓으면 눈앞의 소년이 봄날의 꽃잎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까 두려워하는 손짓이었다.

 

"널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었어 무릎은…… 무릎은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재환은 떨리는 손으로 지유의 무릎 쪽을 내려다보았다.

 

두껍게 감긴 흰 붕대 사이로 붉은 핏물이 배어 나와 거칠게 굳어 있었다.

 

낮에 흙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바닥을 달리며 지유가 흘렸을 피와 눈물이 고스란히 느껴져, 재환은 목구멍이 뜨겁게 메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그냥…… 네가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린 줄 알고…… 다신 못 보는 줄 알고……."

 

지유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재환의 손등을 적셨다.

 

밤바람이 수양버들 가지를 흔들며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를 냈고, 두 소년 소녀는 오작교 한가운데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3. 팽나무 아래의 고백

 

오작교를 건너 춘향관 뒤란으로 들어서자,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온 거대한 팽나무 고목이 두 사람을 포근하게 품어주었다.

 

며칠 전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묻고 만년필을 주고받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팽나무 밑 평평한 너럭바위에 지유를 조심스레 앉힌 재환은 무릎을 꿇고 지유의 다친 다리를 가만히 살폈다.

 

흙먼지가 묻은 신발 코와 피 묻은 붕대가 밤안개 속에서 처연하게 드러났다.

 

"바보같이 왜 뛰었어 차를 어떻게 따라잡는다고."

 

재환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자책과 분노는 지유를 향한 것이 아니라, 제 손으로 아무것도 막지 못한 무력한 자신을 향한 칼날이었다.

 

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젖은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잡으려고 뛴 게 아니야 그냥…… 네 뒷모습이라도 보려고 했어 네가 남원을 떠나기 전에, 내가 네 등 뒤에 서 있었다는 걸…… 그것만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지유의 맑고 깊은 음성이 재환의 심장을 후벼 팠다.

 

부친 성호석이 서재에서 뱉었던 냉혹한 말들이 귓전을 때렸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

 

바닥의 정의에 매달리는 놈들은 개미처럼 짓밟힐 뿐이다.'

 

그 거대한 폭력과 기만의 카르텔이 지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이제는 그 딸인 지유의 무릎마저 피투성이로 짓밟아 놓은 것이었다.

 

자신이 바로 그 가해자의 핏줄이라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지금 이 순간 지유에게 그 추악한 진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학생의 고백은 지유에게 또 다른 절망의 독이 될 뿐이었다.

 

재환은 주머니에서 정갈하게 접힌 흰 손수건을 꺼냈다.

 

며칠 전 지유가 비 내리는 삼거리 김밥집 처마 밑에서 자신의 젖은 얼굴을 닦아주며 건넸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재환은 그 손수건으로 지유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과 턱 끝에 맺힌 이슬을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서울로 가 아버지가 내무부로 가시면서 날 서울로 전학시키기로 결정하셨어 내일 새벽…… 첫차가 다니기도 전에 관용차를 타고 떠나야 해."

 

지유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더 이상 눈물을 쏟아내지는 않았다.

 

지유는 이미 민재를 통해 대강의 소식을 들었기에, 재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시장님 뜻을 네가 거역할 수 없다는 거 서울은…… 아주 넓고 먼 곳이지?"

 

"멀지만, 영원히 가지는 않아."

 

재환은 지유의 작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밤공기는 얼음장 같았지만, 두 사람의 맞닿은 손바닥 사이로는 뜨거운 혈류가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남원을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야, 지유야 난 지금 쫓겨가는 거지만…… 반드시 힘을 길러서 돌아올 거야."

 

재환의 목소리에 전에 없던 서늘하고 단단한 결의가 깃들었다.

 

"서울에 가서 대학에 들어가고, 법을 공부할 거야 가문이나 아버지가 휘두르는 썩은 권력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거짓된 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진짜 법을 배울 거야 사법시험을 패스해서, 온전한 검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올 거야 그때는 아무도 날 막을 수 없고, 아무도 널 함부로 짓밟을 수 없게 만들 거야."

 

지유는 재환의 결연한 눈빛 속에서 단순한 첫사랑의 치기를 넘어선, 삶 전체를 건 거대한 맹세를 보았다.

 

비록 재환이 품고 있는 죄책감의 깊은 뿌리까지는 다 알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이 땅의 상처를 위해 영혼을 바치려 한다는 진심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응, 믿어 넌 꼭 그렇게 할 사람이야 완월정 처마 밑에서도 그랬잖아 어떤 비가 내려도 내 처마가 되어주겠다고 난 그 말 한마디면 평생도 기다릴 수 있어."

 

지유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처럼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무릎을 안고 있으면서도 지유는 오히려 재환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숨결을 건네고 있었다.

 

4. 사진 뒷면의 서약

 

밤바람이 거세지며 팽나무 우듬지가 깊은 울음소리를 냈다.

 

새벽 2시를 가리키는 먼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남원 시내를 흔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관사에서 자신이 사라진 것을 비서실장이 알아차린다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풀려 온 시내를 뒤질 터였다.

 

재환은 교복 왼쪽 주머니에서 낮에 소중하게 오려낸 반명함판 증명사진을 꺼냈다.

 

"이거 받아."

 

재환은 지유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작은 종이 조각을 올려놓았다.

 

달빛 아래 비친 사진 속에는 단정한 남원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재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지유가 놀란 눈으로 사진을 바라보자, 재환은 조심스럽게 그 사진을 뒤집어 보였다.

 

하얀 인화지 뒷면에 지유가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로 꾹꾹 눌러쓴 단정한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네가 사준 잉크로 썼어 네가 준 잉크로 쓴 첫 번째 약속이야."

 

재환의 손끝이 지유의 손가락을 덮었다.

 

"이 사진…… 네가 가지고 있어 줘 서울에서 버티는 동안 난 매일 밤 이 약속을 생각할 거야 그리고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당당하게 돌아오는 그날……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네 손으로 이 사진을 나에게 다시 돌려줘."

 

지유의 눈에서 다시 맑은 이슬이 차올랐다.

 

작은 종이 조각 하나였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청춘과 미래,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랑을 봉인한 천금 같은 증표였다.

 

지유는 두 손으로 증명사진을 소중하게 감싸 쥐며 가슴 한가운데에 꼭 품었다.

 

"기억할게 네가 돌아오는 날까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난 이 남원에 남아 있을 거야 엄마 김밥집을 돕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하면서…… 매일 이 다리를 건너며 널 기다릴게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난 아무 데도 안 가."

 

지유는 카디건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작은 스케치북 조각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재환의 뒷모습과 광한루원 팽나무를 연필로 정성스럽게 스케치한 작은 그림이었다.

 

"나도 이거 줄게 네가 없는 남원을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서울에서 너무 외롭거나 힘들 때마다 남원의 하늘을 잊지 마."

 

재환은 지유가 건넨 스케치를 받아 교복 안주머니, 만년필 바로 옆에 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에 가장 순수하고 견고한 닻을 내린 셈이었다.

 

재환은 천천히 몸을 숙여, 눈물로 젖은 지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서늘한 바람 속에서 맞닿은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온기는 세상의 어떤 권력과 폭력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혼의 맹세였다.

 

"약속해, 지유야 어떤 어둠이 닥쳐도 널 잊지 않아."

 

"응…… 약속해."

 

5. 새벽 안개와 엔진 소리

 

춘향관 뒤란 담벼락 너머로 날카로운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비쳐 들었다.

 

덜컹거리는 지프 엔진 소리와 함께 거친 발자국 소리가 광한루원 정문과 담장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쪽문이 열려 있다!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비서실장의 날 선 목소리가 새벽의 적막을 찢었다.

 

관사에서 재환의 탈출을 알아차린 수행원들이 시내를 샅샅이 뒤지다 마침내 광한루원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지유의 몸이 공포로 굳어졌으나,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괜찮아 두려워하지 마 이제 가야 해."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유의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여며주었다.

 

"민재에게 연락해 뒀어 조금 있으면 민재가 하은이랑 같이 널 데리러 올 거야 오늘은 병원에 가서 무릎 치료부터 제대로 받아야 해, 알겠지?"

 

"재환아……."

 

지유는 일어서려는 재환의 소매를 차마 놓지 못했다.

 

그러나 쪽문 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서실 직원들이 팽나무 뒤란으로 들이닥친다면 지유 모녀에게 또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알 수 없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마지막으로 지유의 눈을 깊게 응시했다.

 

"오작교에서 다시 만나자 내 약속, 잊지 마."

 

재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손전등 불빛을 향해 걸어 나갔다.

 

팽나무 숲 그늘에서 벗어나 완월정 앞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강렬한 불빛 세 개가 재환의 얼굴을 정면으로 내리비췄다.

 

"도련님!"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비서실장이 안도와 경악이 뒤섞인 표정으로 재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뒤로 건장한 수행원 둘이 바짝 따라붙었다.

 

"이 새벽에 대체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시장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당장 차로 가셔야 합니다! 서울 출발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비서실장이 재환의 팔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찰나의 순간, 재환은 비서실장의 손을 차갑게 쳐내며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고작 열일곱 살 소년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슬 퍼런 살기와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비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라."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완월정 마당의 새벽바람을 압도할 만큼 무거웠다.

 

"내가 간다 서울이든, 지옥이든…… 내 발로 갈 테니 앞장서."

 

비서실장은 재환의 서늘한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허리를 숙이며 길을 텄다.

 

정문 밖에는 검은색 로얄 살롱 관용차가 시동을 켠 채 매캐한 배기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직전, 재환은 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어둠에 잠긴 광한루원 오작교 쪽을 돌아보았다.

 

짙은 밤안개 너머로, 팽나무 아래 홀로 서서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한 소녀의 그림자가 아련하게 어른거렸다.

 

재환은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쾅, 하고 닫힌 육중한 차 문은 남원에서의 소년 시절을 영원히 가로막는 단두대의 칼날 같았다.

 

6. 호남고속도로의 맹세

 

육중한 관용차는 새벽 안개를 뚫고 질주했다.

 

차창 밖으로 요천 제방길의 수양버들과 벚나무 가로수가 흑백 필름처럼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조수석에 앉은 비서실장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재환을 끊임없이 힐끔거렸다.

 

새벽에 몰래 빠져나가 흙투성이가 된 신발을 신고도, 미동조차 없이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 소년의 자태에서 묘한 섬뜩함을 느낀 탓이었다.

 

남원 톨게이트를 통과하자 차는 호남고속도로 상행선으로 접어들었다.

 

끝없이 뻗은 아스팔트 도로 위로 푸르스름한 새벽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재환은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교복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만년필과 지유의 스케치가 심장 고동에 맞춰 미세하게 떨렸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고 하셨습니까, 아버지.'

 

재환의 뇌리 속에 부친 성호석의 일그러진 야망과, 강태석이 내밀던 그 추악한 이면 합의서의 문구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권력을 위해 친구를 배신하고,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그것을 발판 삼아 중앙의 더 큰 권력을 향해 기어오르는 자들의 세상

재환은 그 추악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서기 위해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친처럼 괴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괴물들의 목을 벨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공정한 칼을 손에 쥐기 위해서였다.

 

'서울대 법대로 간다.

 

그리고 사법시험을 부수고 검사가 될 것이다.'

 

재환은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흑청색 잉크의 서늘한 무게감이 손바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지유가 간직한 증명사진 뒷면의 맹세는 단순한 사랑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 숨 쉬는 한 반드시 완수해야 할 숙명이자,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정의의 출사표였다.

 

같은 시각, 광한루원 오작교 위

새벽안개가 걷히며 붉은 아침 햇살이 요천 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피 묻은 무릎을 감싼 채 오작교 난간에 기댄 지유의 손에는,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이 눈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뒤편에서 헐떡이며 달려오는 민재와 하은의 발소리가 들려왔지만, 지유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북쪽으로 아득히 뻗어 나간 고속도로를 향해, 지유는 사진을 심장에 깊이 묻으며 소리 없는 다짐을 삼켰다.

 

"기다릴게, 재환아 네가 올 때까지…… 난 절대 여기서 흔들리지 않아."

 

소년은 칼을 갈기 위해 어둠 속으로 떠났고, 소녀는 그 칼날이 돌아올 자리를 지키기 위해 폐허 속에 홀로 뿌리를 내렸다.

 

두 사람의 길고 처절한 기다림과 투쟁의 역사가, 바로 이 마지막 밤의 맹세 위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