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창에 갇힌 시장
1. 붉은 낙인의 집행
남원경찰서 지하 1층 유치장 복도는 곰팡이 슨 눅눅한 시멘트 냄새와 녹슨 쇠창살의 비릿한 쇠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장 구석에서 위태롭게 떨리는 노란 백열등 불빛 아래로, 묵직하고 서늘한 군화 굽 소리가 낮게 메아리쳤다.
탁, 탁, 탁.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의 붉은 결재 직인이 선명히 찍힌 구속영장 원본을 손에 쥔 대검 특별수사본부 강태훈 수사관이 걸음을 멈춘 곳은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1호 독방 앞이었다.
철창 너머 차가운 바닥에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있던 사내의 어깨가 도둑맞은 짐승처럼 파르르 들썩였다.
카키색 미결수 수의, 가슴 주머니 부근에 거친 붉은 실로 꿰매진 수번 2104.
불과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남원의 모든 인허가와 관급 공사, 음지의 이권과 폭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제왕처럼 군림하던 민선 1기 남원시장 강태석이었다.
그의 낯빛은 이미 흙빛으로 까맣게 썩어 들어가 있었고, 충혈된 눈동자는 유치장 쇠창살 사이로 드리우는 수사관들의 그림자를 초점 없이 올려다보았다.
"강태석."
강태훈 수사관의 음성이 지하 복도의 서늘한 침묵을 칼날처럼 갈랐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 명의로 청구된 사전 구속영장이 정식 발부되었습니다."
강태석의 메마른 입술이 경련하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침이 바싹 말라붙은 목구멍에서 쉰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 거짓말…… 민중기 대법관님이 손을 썼다고 했어. 배상문 원장님이 문 판사 그 코흘리개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단 말이다……! 전주 예수병원 의사 놈이 진단서를 팩스로 넣었을 텐데, 영장이 나온다고? 말이 안 돼!"
"허위 진단서 발급을 사주한 전주 예수병원 사무처장과 담당 의사는 오늘 새벽 뇌물수수 및 허위진단서작성 혐의로 전주지검에 이미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강태훈이 쇠창살 틈으로 붉은 인주가 번진 영장 정본을 바짝 들이밀었다.
주문란에 박힌 굵고 단호한 한글 여섯 글자.
'피의자를 구속한다.'
그 여섯 글자를 마주한 순간, 강태석의 목구멍에서 꺽꺽거리는 바람 빠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난 남원시장이야! 시민들이 70프로 넘게 표를 몰아준 남원의 군주라고! 이깟 종이 쪼가리 하나로 나를 가둘 수 있을 것 같아? 성재환 그 어린놈의 자식이 감히 내 등에 비수를 꽂아?"
"철문 열어."
강태훈의 단호한 명령에 유치장 간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황동 열쇠 뭉치를 자물쇠에 꽂아 넣었다.
철컹, 쾅!
육중한 철제 문이 열리는 굉음은 흡사 30년간 닫혀 있던 지옥의 빗장이 깨어지는 파열음 같았다.
건장한 수사관 둘이 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가 강태석의 양팔을 뒤로 꺾어 올렸다.
"이거 놔! 이거 놓지 못해! 내가 누군 줄 알고 천한 손을 대! 조동식 지청장 불러와! 남원경찰서장 어디 갔어!"
강태석이 발버둥 치며 침을 튀겼으나, 굵은 마포 포승줄이 그의 목덜미와 양 어깨, 가슴팍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수갑이 채워진 두 손목 위로 밧줄의 매듭이 사정없이 옥죄어지자, 우두둑거리며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등 뒤로 단단히 결박당한 강태석의 굵은 상체가 수치스럽게 앞으로 꺾여 내려갔다.
권력이라는 번지르르한 비단옷을 벗겨낸 자리에 남은 것은, 그저 추악한 탐욕에 눈이 멀어 제 발로 덫에 걸린 늙은 폭력배 한 명뿐이었다.
"수감 번호 2104번, 전주교도소 남원 분소 특별 구치 감방으로 호송한다."
강태훈이 차갑게 선언하며 밧줄 끝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질질 끌려 나오는 강태석의 고무신 끄는 소리가 곰팡내 나는 시멘트 바닥을 처량하게 긁어댔다.
2. 백주 대낮의 호송차
남원경찰서 지하 계단을 벗어나 지상 현관으로 올라서는 순간, 눈이 멀 것 같은 늦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호송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햇살보다 더 뜨겁고 거대한 인파의 분노가, 마치 둑 터진 강물처럼 경찰서 앞마당을 집어삼켰다.
"나온다! 저 살인자 놈 나온다!"
"강태석을 당장 찢어 죽여라! 능지처참을 해도 시원찮을 놈!"
경찰서 마당을 가로막은 철제 바리케이드 너머로 수백 명, 아니 천 명에 가까운 남원 시민들이 빈틈없이 운집해 있었다.
동문 우체국의 집배원들, 하정리 시장의 생선 장수들과 채소 장수들, 포목점 아주머니들, 그리고 요천 제방 붕괴로 집과 논밭을 잃고 흙탕물 속에서 피눈물을 삼켰던 수해 이재민들이었다.
포승줄에 온몸이 칭칭 묶인 채 고개를 떨구고 끌려 나오는 강태석의 초라한 모습이 드러나자, 성난 군중의 함성은 흡사 지리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거대한 천둥으로 번져갔다.
퍼억!
공중을 가르고 날아온 썩은 토마토 하나가 강태석의 카키색 수의 깃에 정통으로 맞아 터졌다.
물크러진 붉은 과즙이 마치 피처럼 강태석의 목덜미와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계란과 진흙 덩어리, 짓밟힌 배춧잎과 시장 바닥의 오물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내 아들 살려내라, 이 파렴치한 도둑놈아! 관급 공사비 140억을 빼돌려 저질 모래를 채워 넣더니 우리 집을 통째로 쓸어가? 그러고도 네놈이 사람의 탈을 쓰고 시장 소리를 들어!"
"삼거리 김밥집 어린애한테 조폭을 풀어서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가게에 불을 지르려 한 놈이다! 뼈를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살인마 놈!"
머리칼이 오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강태석은 포승줄에 결박된 채 사방에서 날아드는 오물 세례를 맞으며 비틀거렸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원시 상징 봉황 깃발이 펄럭이던 검은색 로얄 살롱의 푹신한 뒷좌석에서, 거리를 오가는 백성들을 향해 근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바로 그 남원 한복판이었다.
자신이 짓밟고 개미처럼 하찮게 여겼던 바로 그 남원의 민초들이, 이제는 활활 타오르는 업화가 되어 그의 온몸을 옥죄고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남원일보 최민재 기자가 머리에 피 묻은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뼈마디가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도 잊고 카메라 셔터를 맹렬하게 눌러댔다.
눈물과 침, 썩은 과일 즙과 계란 노른자로 범벅이 된 채 비참하게 끌려가는 독재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렌즈 속에 낱낱이 박제되었다.
"똑똑히 봐라, 강태석!"
최민재가 카메라를 내리며 핏발 선 눈으로 포효했다.
"네놈이 30년간 썩은 돈으로 가리고 쇠파이프로 틀어막았던 진실의 대가가 바로 이거다! 내일 아침 남원일보 1면에 네놈 포승줄 묶인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박아서 남원 구석구석에 뿌려주마!"
오물을 뒤집어쓴 강태석은 치욕감에 이를 바득바득 갈며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발악했다.
경찰 호송 버스의 쇠창살 문 안으로 수사관들의 손에 밀려 처박히는 그 찰나, 그는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도열해 있는 수사팀의 한가운데, 미동조차 없이 서 있는 한 사내를 노려보았다.
성재환 검사였다.
늦여름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단정한 검은 양복 차림.
가슴 안주머니에는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꽂은 채, 흙먼지와 오물 속에서도 홀로 청명하게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청년 검사의 눈빛.
강태석의 목구멍에서 피를 토해내듯 악에 받친 비명이 찢겨 나왔다.
"성재환……! 네놈이 이긴 것 같으냐? 내가 이대로 얌전히 썩을 것 같아? 1심, 2심, 대법원까지 갈 거다! 서울의 거물들이 다 내 편이야! 내 돈을 처먹은 중앙 정계와 법조계 인사들이 수백 명인데 네깟 애송이 놈이 감히 나를 가둬? 징역 몇 달 살고 보석으로 나오면, 네놈과 그 김밥집 계집년 껍데기부터 내 손으로 발라버릴 것이다! 내 손으로!"
재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쇠창살 너머로 갇히는 강태석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얼음처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추악한 오만을 법정까지 고스란히 쥐고 가십시오."
재환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닫히는 차 문 틈새를 뚫고 서슬 퍼렇게 꽂혔다.
"피고인 강태석. 법이 당신에게 내릴 죗값은 보석 따위로 빠져나갈 수 있는 가벼운 웅덩이가 아닙니다. 당신이 짓밟고 빼앗은 사람들의 피눈물과 목숨의 무게만큼, 남은 생 전체를 차가운 감옥 독방 바닥에서 썩어가게 만들 테니까."
쾅!
호송 버스의 철제 문이 육중한 굉음을 내며 닫혔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30년간 남원을 짓누르던 거대한 암흑 권력을 실은 호송차가 시민들의 거센 야유와 분노의 함성을 뒤로하고 교도소를 향해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3. 요천 둑길의 바람
호송차가 남원 시내를 빠져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경찰서 앞을 가득 메웠던 분노의 함성은 점차 웅성거림으로, 그리고 가슴 벅찬 안도와 환희로 번져나갔다.
오후의 맑은 햇살이 남원 시내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요천 물결 위로 눈부신 금빛 비늘처럼 부서져 내렸다.
재환은 넥타이를 살짝 늦추며 청사 앞 화단 턱에 잠시 멈추어 섰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이어진 긴급 체포와 밤재 터널의 추격전, 204호 취조실의 치열한 혈투, 지청장과의 목숨을 건 심리전, 그리고 영장실질심사의 격돌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의 끈이 느슨해지자, 전신의 뼈마디마다 묵직한 탈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는 7년 전 서울행 통일호 기차에 강제로 태워져 떠나던 열여덟의 소년 성재환이 흘렸던 피눈물을 깨끗이 씻어내는 청량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탁.
어깨 위로 묵직하고 따뜻한 손길이 얹혔다.
대검 중수부 파견 안진우 검사였다.
그의 얼굴에도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운 피로가 짙게 묻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벅찬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성 검사님."
안진우가 들고 있던 묵직한 서류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으며 요천 둑길을 바라보았다.
"남원지원 문성현 부장판사, 참으로 서슬 퍼런 법관입니다. 배상문 전 법원장이 법정 복도에서 사색이 되어 도망치듯 차에 오르더군요. 서울에서 내려온 세율의 민중기 전 대법관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수행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황급히 서울로 떠났습니다."
"법관이 법을 지켰을 뿐입니다."
재환이 나직이 답했다.
"하지만 그 지극히 당연한 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남원의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오랜 세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검사님이 그 피눈물을 법정에서 결코 헛되지 않게 만드셨습니다."
안진우가 품 안에서 수첩을 꺼내 가볍게 두드렸다.
"방금 서울 정종길 중수부장님께 영장 집행 완료 보고를 올렸습니다. 부장님이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전하시더군요. 국회에서 김문현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데 이어, 남원에서 강태석 구속영장이 완벽히 발부되자마자 법무부 기획조정실과 대검 감찰1과가 완전히 얼어붙었답니다. 성 검사님을 표적 감찰하려던 정태섭 부장검사에 대한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 정식 입건 통보도 대검에 정식 접수되었습니다."
남원의 작은 법정에서 시작된 정의의 불길이, 서울의 거대한 부패 정경유착 카르텔의 심장부를 차례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성 검사님, 이제 지청으로 들어가서 눈 좀 붙이시지요. 강태석의 신병은 남원 분소 독방에 완벽히 격리 입감되었고, 1층에 몰려왔던 토착 유지들 자수 조서는 수사관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철저히 정리할 겁니다."
재환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동문 우체국 방향 낡은 기와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
안진우가 무릎을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원의료원이지요? 어서 가보십시오. 오늘만큼은 그분 곁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재환은 안 검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주차장에 세워둔 관용 세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차창을 활짝 열고 요천 둑길을 따라 달리는 차 안으로, 지리산 능선을 타고 내려온 서늘하고 달콤한 풀내음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4. 햇살 비치는 병상에서
남원의료원 3층 308호 격리 병실 문 앞.
재환은 차가운 황동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양복 옷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다듬었다.
피비린내 나는 취조실과 법정의 서슬 퍼런 살기를 지우고, 오직 지유에게 온전한 평온과 위로만을 건네고 싶었다.
스르륵.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병실 안을 가득 채운 은은하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그를 맞이했다.
침대 머리맡에 비스듬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지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에 감았던 두꺼운 압박 붕대는 얇고 정갈한 거즈로 바뀌어 있었고, 창백했던 뺨에는 창밖의 햇살을 머금은 듯 은은한 핏기가 감돌고 있었다.
지유의 무릎 위에는 낡고 모서리가 찌그러진 양철 과자 상자가 소중하게 얹혀 있었다.
지난 7년 동안 부치지 못한 채 삼거리 김밥집 단칸방에서 홀로 써 내려갔던 백여 통의 편지들이 담긴 상자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재환은 천천히 걸어가 침대 곁의 작은 나무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지유가 엷은 미소를 띠며 먼저 입을 열었다.
"민재 오빠한테 전화 왔었어."
지유의 맑고 고운 음성이 적막한 병실 안에 옥구슬처럼 굴렀다.
"법원에서…… 영장 나왔다고."
"응."
재환이 지유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칼에 베이고 굳은살이 박인 손, 붉은 페인트를 지워내느라 손톱 밑이 짓물렀던 그 작고 따뜻한 손.
재환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지유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구속영장이 집행됐어. 포승줄에 묶여서 교도소 독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너를 협박하지 못해. 김밥집 앞에 포클레인을 끌고 오지도 못하고, 붉은 페인트를 칠하지도 못해. 네 어머니의 가게도, 네 삶도, 이제 안전해."
지유의 커다란 눈망울에 맑고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끝내 참지 못한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려 재환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뜨겁고 순결한 눈물이었다.
"재환아."
"응, 지유야."
"우리 엄마……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시던 날 아침에, 나한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뭔지 알아?"
지유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파르르 떨렸다.
재환은 말없이 지유의 젖은 뺨을 다른 한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가게를 절대 뺏기지 말라고…… 그 사람들이 와서 아무리 무섭게 협박해도, 우리가 여기서 무릎 꿇고 도망치면 아빠의 억울한 죽음도, 우리가 버텨온 세월도 다 거짓말이 되는 거라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라고 하셨어."
지유가 가슴을 들썩이며 7년간 삼켜왔던 설움을 토해냈다.
"나 정말 무서웠거든. 밤마다 가게 셔터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나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붉은 페인트로 벽이 뒤덮였을 때는, 정말 이 세상에 나 혼자만 버려진 것 같아서 숨조차 쉴 수가 없었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너를 홀로 싸우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재환의 눈시울도 붉게 타올랐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죄책감이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지유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재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너는 단 한 번도 약속을 잊은 적이 없잖아."
지유가 환자복 안주머니에서 반명함판 증명사진을 꺼내 재환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모서리가 비뚤게 잘려 나가고, 납치되던 밤 깨진 유리 파편에 긁혀 붉은 피가 묻어 굳어버린 사진.
뒷면에는 지유가 선물했던 깊은 흑청색 잉크로 적힌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는 글씨가 여전히 생생하게 숨 쉬고 있었다.
"너는 약속을 지키려고 피를 토하며 공부해 법복을 입었고, 나는 약속을 지키려고 남원에 남아 견뎌냈어."
지유가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지난 7년간 겪었던 모든 능욕과 고통의 어둠을 단숨에 걷어내는 눈부신 여명이었다.
"우리가 이긴 거야, 재환아. 네가 법으로, 남원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이겨준 거야."
재환은 지유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유의 이마가 재환의 어깨에 닿았고,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은 자리에서 오랜 세월 서로를 지탱해 온 영혼의 고동이 하나로 포개어졌다.
병실 창밖으로, 맑게 갠 남원의 푸른 하늘 위로 수천 마리의 참새 떼가 요천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5. 폭풍 뒤의 침묵, 그리고 남겨진 것들
어스름한 땅거미가 내려앉자 남원 시내는 축제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 공터에는 동네 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온 나무 평상이 길게 펼쳐졌고, 구수한 막걸리 냄새와 기름진 부침개 익는 소리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남원시청은 강태석 시장의 구속 통보가 정식 접수되자마자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부시장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했고, 시의회는 여야 만장일치로 '요천 제방 참사 진상조사 특위 구성 및 강태석 시장 사퇴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어제까지 강태석의 눈치를 보며 꼬리를 흔들던 관변 단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필귀정(事必歸正)' 현수막을 내걸며 발을 빼기 바빴다.
하지만 남원지청 204호 특별수사전담 검사실의 밤은 다시금 차분하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강태석의 구속영장 집행 원부와, 전주교도소 남원 분소 수감 보고서가 정갈하게 포개져 있었다.
재환은 창가에 서서 어둠 속에서 하나둘 켜지는 시내의 불빛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똑똑.
문이 열리며 최민재가 깁스를 한 팔을 붕대로 받친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막 윤전기에서 찍혀 나온 따끈따끈한 남원일보 1면 호외가 쥐여 있었다.
"성 검사님."
민재가 신문을 책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1면 톱기사 제목이 지면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활자로 박혀 있었다.
[거악의 몰락! 강태석 남원시장 전격 구속 수감…… 140억 횡령 및 살인교사 혐의]
포승줄에 온몸이 묶여 호송 버스로 끌려 들어가는 강태석의 일그러진 얼굴 사진이 1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배도식 국장이 사표를 던지고 서울로 도망쳤습니다."
민재가 후련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원일보 기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서 편집국을 정상화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시청 관변 홍보지가 아니라, 진짜 남원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는 살아 있는 신문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행이군요."
재환이 돌아서며 신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최 기자가 목숨 걸고 완월정 팽나무 밑에서 꺼내온 부실 콘크리트 시편과 비밀 취재 수첩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호외는 없었을 겁니다."
"에이, 검사님이 법정에서 전직 대법관이랑 법원장 턱주가리를 법리로 날려버린 게 결정적이었죠."
민재가 호탕하게 웃더니,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며 코트 깊숙한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그가 꺼내놓은 것은 낡고 두툼한 갈색 서류 봉투 하나였다.
"이게 뭡니까?"
"강태석 관사 비서실 비밀 금고를 시청 감사과가 봉인하기 직전에, 양심 있는 하위직 직원이 저한테 은밀히 넘겨준 겁니다."
민재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강태석이 개인적으로 보관하던 극비 문서철인데…… 겉표지에 '성호석'이라는 이름 석 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더군요."
재환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는 손을 뻗어 서류 봉투의 봉인 실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누렇게 바랜 거친 갱지 뭉치.
그 첫 장에는 1993년 가을, 성호석 남원시장이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강제 영전되던 바로 그 전야에 작성된 '남원 구도심 토지 구획 정리 단독 환지 이행 확약서' 원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의 맨 밑바닥.
성호석의 친필 서명 옆에 선명하게 찍힌 관인, 그리고 그 뒤편에 첨부된 빛바랜 영수증 한 장.
'상기 환지 처분의 대가로 성재환의 서울 명문고 전학 및 대치동 거처 마련 비용 일체를 삼거리 토건이 전액 대납함.'
재환의 숨이 턱 막혀왔다.
만년필을 쥔 그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김문현의 협박을 당해 남원에서 쫓겨난 비극적인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아들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아들의 미래를 볼모로 삼아 강태석의 피 묻은 손을 잡고 타협했던 또 다른 가해자의 흔적.
가문의 원죄는 아직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다.
강태석이라는 지방의 괴물은 철창에 가두었지만, 그 괴물과 결탁하여 서울의 높은 곳으로 올라간 부친 성호석과의 마지막 사법적 대면이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님……."
민재가 조심스럽게 재환의 굳어버린 안색을 살폈다.
재환은 천천히 서류를 덮어 품 안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서, 꺼지지 않는 정의의 불꽃이 다시금 차갑고 비장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검사님."
재환이 문가에 서 있던 안진우 검사를 불렀다.
"예, 성 검사님."
"내일부터 피의자 강태석에 대한 기소 공소장 작성을 시작합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그리고 공소장 작성이 끝나는 즉시…… 서울 대검 중수부에 출석하여, 내무부 차관 성호석에 대한 피의자 신문 조서 작성을 제가 직접 주임검사로서 맡겠다고 보고하십시오."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아비의 죄악까지 제 손으로 직접 단죄하겠다는 젊은 검사의 결연한 맹세.
남원의 길고 긴 비극을 끝내기 위한 최후의 전쟁은, 이제 거대한 권력의 심장부인 서울을 향해 장엄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